루터의 가장 큰 조력자 중 한 사람은 바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1463~1525)를 꼽을 수 있다.
그의 본명은 토르가후이며 부친인 에른스트 선제후의 뒤를 이어 1486년에 즉위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한을 축소하고 귀족의 권한을 강화하는 제국개혁안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는 황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이를 거절하고 1519년, 조카인 칼 5세를 황제로 선출한다.
1521년, 파문당한 루터를 바르트부르크로 초청하여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게 하였으며 알프레히트 뒤러,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 등 위대한 예술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으며 게오르크 슈팔라틴의 조력가이자 멜랑히톤을 역사속에 등장시켰으며 1502년에는 비텐베르크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활동으로 종교개혁에 이름을 알렸다.
그는 이런 많은 일들을 해내는 가운데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며 동생 요한이 그의 사후 선제후를 계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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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1463년~1525년)는 작센의 선제후(재위 1486년~1525년)였다. 현명하기로 이름이 나서 ''현공(Wise)''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교양이 풍부하고 음악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루터가 재직했던 비텐베르크 대학을 세웠고 비텐베르크를 예술 활동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그는 열렬한 구교도였지만 마르틴 루터를 보호하고 그를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겨 주고 종교 개혁을 도왔다. 그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진전된 셈이다.
그를 말할 때 항상 선제후란 말이 붙는다. 무슨 뜻인가?
선제후(라틴어: Princeps Elector 프린켑스 엘렉토르)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정하는 역할을 했던 신성로마제국의 ‘선거인단’이다. 다시 말해 신성로마제국의 작위제도에서 으뜸가는 지위였다. 전통적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황제선거를 개최하여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황제를 선출할 선거권을 가진 신성로마제국 내의 영주들을 가리킨다. 위계상 신성로마제국의 봉건 제후들 가운데 왕 또는 황제 다음으로 높은 지위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가 반포한 금인칙서에 따라 7선제후 제도와 다수결제가 법적으로 확정되었다. 그 7인 선제후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작센의 프리드리히 3세였고 그는 보름스 제국회의 후에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루터를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겨주었다. 그리고 루터는 거기서 라틴어 신양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