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제출할 내용은 아니라서 그냥 되는대로 막 쓴 글인데 기왕 길게 썼으니 여기서도 한번쯤 보실 분들이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재미없고 긴 글이라서 많이 읽으시진 않겠지만 이런 생각도 있다는 것 쯤으로 알아주시면 될것 같네요.
지난번 XXX님 발표 정말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중간고사 이전 수업을 전부 빠지는 바람에 여러 가지로 힘든 2학기 생활인데, XXX님 발표가 없었다면 이 강의에서 가장 의미있는 수확을 놓칠 번 했군요.
현재 서점에서 잘나가는 비즈니스, 처세 관련 책 제목을 한번 살펴볼까요? ‘이기는 심리의 기술 트릭’ ‘연봉 10배 올리는 공부법’ ‘결혼은 안해도 집은 사라’ 등등의 재밌는 제목이 많습니다.
원래 저는 ‘성공’ ‘제테크’ ‘처세술’ 등의 제목이 들어간 책을 읽지 않습니다. 읽지 않는 것 뿐 아니라 굉장히 혐오하는 측에 속합니다. 마치 저한테 인성과 도덕심을 깔아뭉개고 그 댓가로 경쟁적 위치에서의 우위를 점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말이죠. 이런 책들은 온갖 미사여구와 공포, 조바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솜씨를 동원해서 독자에게 좀 더 간악하고 좀 더 매마른 사람이 되길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왜나하면 한국 사회는 절대적 능력보다 상대적 능력이 극도로 우선시되는 형태를 갖추고 있거든요.
100점짜리 사람이 자기를 포함해서 5명이 있는 사회보다 자기 혼자 50점이고 나머지 사람들이 그 이하인 사회를 바랍니다. 이건 수능시험 준비하는 고교생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죠. 남들이 자기보다 밑에 있다면 자기 자신 역시 바보라도 된다는 겁니다.
이미 남들보다 우월한 곳에서 더 높은 이상을 위해 노력하는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어줍잖은 우위에 선 사람들은 그 위의 고된 길을 선택하기 보다는 자기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을 억제하고 깔아뭉개는데 더 힘을 쏟곤 하죠. 그게 자신의 우월성을 지키는데 더 편리한 방법이니까요. 도덕과 윤리는 신경 쓸 겨를도 없습니다.
이러한 풍토를 부채질 하는 것이 성격 윤리를 앞세운 위의 처세술 관련 서적들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이번 수업에서도 ‘성공하는~’ 책 역시 읽을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XXX님의 발표 첫 단락에 ‘이 책은 성격 윤리가 아닌 성품 윤리를 중요시 하는 책’ 이라는 글이 마음에 딱 와닿아서 제 생각이 섣부른 판단이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 책을 모르고 지나갔더라면 얼마나 아쉬웠을까요.
나이가 들수록 홍수처럼 쏟아지는 서적 중에서 정말 자신과 코드가 맞는 책을 고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모르고 지나가는 양서들 역시 셀 수도 없구요. 그런 면에서 수업은 사실상 제가 이 책을 접하게 도와 주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한학기 만큼의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봅니다.
제가 성품 윤리를 중요시한다는 것은 위에서 알아차리셨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발표도 여러분들이 들으시기엔 구태하고 지루한 도덕성 예찬론이 될 것 같네요. 하지만 제가 이 책을 소개 받으면서 느꼈던 것처럼 여러분도 제 발표 내용에서 자신에게 도움될 만한 요소를 조금이라도 찾아가신다면 이번 강의가 좀 더 의미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공하는~’에서도 강조했듯이 패러다임은 인생의 원칙에 가까워야 한다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 인생의 원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필요한 도덕적 신념과 책임의식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격 윤리는 이러한 도덕적 신념이 기반이 되지 않으면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도덕적 신념이란 요소가 개인에 따라 그 인식 범위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이를 아예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고 있더라도 개인적 이익 추구를 위해 이를 무시하는 경우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요즘 굵직굵직하게 터져나오는 각종 비리 사건들이 이런 케이스겠죠.
하지만 제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합니다. 개개인은 태어나면서도부터 이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 어쩌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자기 자신이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많이 들어 보신 도덕론이라 식상하신 것 다 압니다.
그런데 이 도덕론이 식상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미 자기 자신은 그 도덕론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라서 다른 사람의 비도덕성을 걱정하고 계시는 걸까요? 항상 TV를 보면서 ‘저런 놈 때문에 이놈의 세상이 쯧쯧’ 하면서 본인도 속해 있는 그놈의 세상이 참 어떻게 돌아가는지 개탄스러워 하시는 걸까요?
제가 소개해 드리는 사실과 제가 품고 있는 마음 속 생각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제 생각을 여러분들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이렇게 살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여러분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단지 어떤 형태로든 제가 그 길을 걸어가려 하는 이유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가진 도덕론의 형태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저는 제에게 ‘성공하는~’ 책이 그러했던 것처럼 제 인색의 비전이 여러분들에게 조그만 기폭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일단 일의 발단으로 돌아가자면, 저는 심한 평편발과 그에 따른 운동 부족으로 군대 신검에서 4급 보충역 판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저는 100kg 육박하고 있었고, 고혈압과 미세한 당뇨증상마저 보이고 있었습니다. 평편발은 30분 정도만 서 있어도 발바닥 중간을 면도칼로 베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낍니다. 자연히 밖에 돌아다니길 꺼려하겠죠. 딱히 군대에 가고싶은 생각도 없던 터라 4급 판정을 받고 오히려 기분은 편했습니다.
그렇게 공익근무요원 소집을 앞두고 있던 어느 일요일 아침에 저는 TV에서 사하라 사막 마라톤에 참가한 어느 한국 여성 텔런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저는 운동 경험이 풍부할 리가 없는 그 텔런트가 과연 어디까지 버티는지 관심있게 바라보았고, 제 예상대로 그 사람은 온갖 통증을 호소하며 중도 탈락해 버렸습니다.
그럼 그렇지 하고 안도하는 도중에 저는 한 미국인 여성 소방관이 120kg 에 가까운 거구를 이끌고 완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뭔가 시기와 질투와 비슷한 감정이 샘솟더군요. 저런 뚱땡이 여자도 완주하는걸 보니 나도 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서 ‘나 사하라 사막 마라톤 갈 거에요’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어머니께서는 ‘살이나 빼라’고 비웃으셨습니다.
저는 상당히 느긋한 성격입니다만 그만큼 우직하기도 합니다. 남들이 보기엔 뭔가 대단한 결심같아 보이는 것도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생각하고 바로 결정해 버리는 터라 처음엔 주변 사람들이 잘 맏질 않습니다. 이번 사하라 이야기도 아마 그냥 헛소리 한번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냥 덤덤하게 공익근무요원 배치를 취소하고 대신 회사에 취직하기로 했습니다. 2년동안 사하라 마라톤을 위한 준비 자금을 벌려면 공익근무요원의 월급으로는 무리였으니까요. 그리고 하루 한끼 식사와 2시간 조깅으로 100kg 였던 몸무게를 70kg 까지 줄였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21m 하프마라톤을 뛰어 보았고 그 다음에는 42km 풀코스 마라톤을 뛰었습니다. 그쯤 되니 주위에서도 슬슬 제가 진심이라는걸 이해해 주시더군요.
사하라사막 마라톤은 6박 7일동안 230km의 거리를 뛰는 서바이벌 레이스입니다. 선수들은 각자 1주일간의 레이스 도중 필요한 침낭과 구급약, 식사와 음료를 배낭에 짊어지고 뛰어야 합니다. 최소 하루 2000kcal 의 식사량을 준비해야 하며 병원에서 인증하는 기초 체력 검사서를 동봉해야 합닌다. 평균적으로 배낭의 무게는 12kg 정도 됩니다.
급하게 운동을 했다고 해도 일반인 수준의 체력만큼도 되지 못하는 저라서 마라톤 도중에는 고생 많이 했습니다. 한낮엔 50도 가까이 올라가는 사하라 사막에서 12kg 짜리 배낭을 매고 걷고 있으면 내가 미쳤다고 이런 짓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죠. 평편발이라 발바닥은 물집이 몇 번씩 터지길 반복하고 양쪽 새끼발가락은 발톱이 전부 빠져나가서 걸음을 내딛으면 전신에 전기 충격같은 지릿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발걸음만 계속 옮기면 결국엔 도착하는 곳이 골인지점이라 어떻게 어떻게 완주는 성공했습니다. 제 나이대에는 좀처럼 하기 힘든 좋은 추억거리도 생겼고 상당한 분량의 이야기거리를 만들어서 자주 써먹을 수 있었죠.
하지만 여전에 제 기억속에 남아있는 건 온갖 장비를 짊어지고 사막을 달리는 저희 선수들을 웃으면서 바라보는 모로코의 원주민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애들은 조금만 방심하면 선수들의 물품을 훔쳐갑니다. 1.5L 짜리 플라스틱 생수병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갖고 싶은 최고의 선물이죠. 먼 타국에서 수백만원에 이르는 비용을 지불하고 사막 한가운데를 헉헉거리며 달리는 우리들을 그 애들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그네들은 매일 맨발로 그 사막의 모래를 마음껏 뛰어다닙니다.
마라톤이 끝난 후 6개월 정도 지나고 서서히 그 때의 기억이 추억으로 변해갈 때쯤 문득 생각이 들어 아프리카의 아이들에 대한 책을 몇권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 결코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닌 사실들이 그때는 그렇게도 제 마음이 직접적으로 와 닿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TV에서 툭하면 보던 기아들의 모습도 단지 저녁 먹으면서 ‘참 불쌍하네’ 한마디 하고 넘어갈 뿐이었는데, 사하라에서 그들의 모습을 직접 보고 난 이후로는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프리카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하루에 1만 5천명의 어린아이가 굶어죽고 있다는 사실은 신문이나 사설에서 보고 아시는 분도 있겠죠. 알고 있어도 실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제껏 제가 그래왔기 때문에 너무나 잘 느끼고 있습니다. 1만 5천명이라는 숫자는 현실감이 없으니까요. 한국의 초등학교 평균 정원이 1500명 정도입니다. 하루에 초등학교 10개교 정도의 아이들이 굶어죽는다고 대입해 본다면 아마 조금은 더 현실감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생명력이 강합니다. 8세 이하의 어린이가 굶어죽으려면 최소 2주일 이상 물 이외의 어떤 음식물도 섭취하지 않아야 합니다. 갈비뼈는 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깊게 파이지만 배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오릅니다. 아사 직전의 아이들은 눈꺼풀이 말라들어서 눈을 감을수가 없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하루에 1만 5천명의 아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눈 앞에서 직접 본다면 아마 제가 이런 기분나쁜 발표를 하지 않아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겠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했던 것처럼 지구상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생활하는 20~30대 학생들은 저런 아프리카의 참상에 대해 어째서 자신들이 책임과 의무를 가져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까지의 교육은 이런 현상에 대해서 책임 의식을 가르친 적이 없거든요.
한국이 흑인 노예를 끌어와서 쓴 것도 아닌데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일제 강점기를 겪어본 적도 없는 20~30대 학생들이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죄책감의 유통기한이 있다면 그것은 고작해야 50~70년 정도일까요? 임진왜란은 도대체 유통기한이 몇 년이나 되는 걸까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도 전 1500년 경 유럽은 이미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데려와 부리고 있었습니다. 교황청은 노예를 사냥해오는 무역선단을 신의 이름으로 축복했습니다. 15세기 이후 유럽의 폭발적인 경제, 기술 발전과 미국으로까지 이어지는 현대 문명의 기초 건설에 아프리카에서의 착취가 어느 정도의 기반이 되었는지는 방금 전 말씀드렸던 1만 5천명의 기아 어린이들보다 더 실감이 안가실 겁니다.
지금 소위 전 세계 선진국의 발전은 아프리카의 비인륜적 만행의 토대 위에 세워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한국 역시 직접적인 착취가 없었으니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자신들의 도덕성이 그만큼 흐물흐물하고 얇아빠졌다고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노예가 사라진 지금은 아프리카에서의 착취가 끝났을까요? 이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너무나 방대한 조사 자료가 각종 서적, 영화를 통해서 나와있기 때문에 제가 하나하나 거론하진 않겠습니만, 다이아몬드에 대해서만 한 마디 하자면 역사상 광석의 제련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최하급의 광물인 다이아몬드가 보석의 결정체로 떠오른 것은 유럽 귀족들의 허영심을 위해서였습니다.
현제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회사인 드비어스는 30g 의 다이아몬드를 캐는데 1000톤의 흙이 재생 불가능한 수준으로 오염된다는 사실을 숨기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12시간당 700원의 임금을 주고 다이아몬드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이 제 마음 깊이 와닿기 전까지는 평범하게 생활해 왔고, 거기에 대해서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현실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아프리카가 처한 현실을 정말로 알게 되고 나서부터는 지금같은 생활을 하면서 제가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부분에 대해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 자체에서 죄책감을 느낍니다. 이는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 이제 막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아프리카의 기아를 해결하는데 과연 저같은 사람 한 명이 무슨 힘이 될까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어왔던 것이 ‘알고는 있지만 내가 도와준다고 그 상황이 변하진 않는다. 어쩔수가 없다’ 였습니다. 한국 돈으로 1만원이면 10명의 아프리카 아이들이 1주일동안 먹을 식량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봅니다.
수천만, 수억을 들여서도 한 사람의 생명을 살려내기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단순히 한달에 맛있는 음식 한두 끼만 안먹고 아껴도 10명의 생명을 1주일 더 연장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힘인지 실감하실 수 없을까요? 손목에서 거미줄을 뽑아내는 사람 정도 되어야 자신의 힘에 따른 책임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도와주지 않는 이유로 ‘여유가 없다, 돈이 없다’ 라고 하는 말하는 것은 분명히 거짓말이겠죠. 정확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돈이 아깝다’ 라고 하는게 오히려 솔직한 대답일 겁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제가 말씀드린 인류애적 책임과 의무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교를 졸업하면 국경없는 의사회(MSF)에서 파견 활동을 나갈 예정입니다. 국경없는 의사회는 프랑스에 본부를 둔 세계 최대의 NGO 단체로서, 연간 예산이 2천5백억이 넘습니다. 제가 이 단체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그 엄청난 예산의 75% 가 순수한 일반 후원모금으로 충당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MSF는 특정 단체나 국가에게 전체 예산의 15% 이상을 후훤받지 않습니다. 조직의 투명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75% 의 일반 모금중 40%를 프랑스 국민들이 충당합니다. 이는 1년에 750억원이라는 금액을 프랑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후원하고 있다는 뜻이죠. 한국 구세군의 1년 모금액은 30억입니다. 저는 국민 소득의 차이보다 이런 금액의 차이가 선진국을 규정짓는 중요한 잣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경상북도 합천 시골구석에 조그만한 초가집을 하나 갖고 있습니다. 예전에 소설 나부랭이를 몇권 써서 번 돈 700만원으로 구입했죠. 산꼭대기에 있는 마당포함 40평 정도 되는 조그만 집이지만 저한테는 풍요롭기 그지없는 재산입니다. 한국엔 MSF 지부가 없어서 일본쪽으로 소속되어 활동할 계획인데, 보통 1~2년 기간의 해외 파견근무를 나가면 100만원 정도의 월급이 지급됩니다. 파견근무 도중엔 현지의 숙식비가 따로 지원되기 때문에 2년간 활동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 2천만원 정도의 여유자금이 생깁니다. 결혼할 생각이 없는 저로서는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기에는 충분합니다.
MSF 봉사자들의 절반 이상이 첫 활동 후 스트레스로 정신과를 찾을 정도로 비참한 현실을 마주할 수 밖에 없습니다만, 중요한 점은 그 현실에서 고개를 돌린다고 해서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겠죠. 저는 그들에 대해서 알게 된 이상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들을 모른 척 한다면 위에서 제가 싫어했던 ‘성격 윤리’에 집착하는 부류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저에게 있어서 이것은 억지로 고통을 참고 해야 하는 희생이 아니라 제 자존심과 신념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행복한 삶을 위한 초석입니다.
물론 이러한 책임의식은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분야에서 어떤 직책을 맡든 개인의 책임의식은 그 안에서 극대화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에 대해서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마음 속의 자신이 어떤 변명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돌아볼 여유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변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면 그 변명이 부정하고 있었던 무언가가 자기 도덕성의 근본일 것입니다.
이번 수업을 통해서 이런 제 생각이 조금이나마 의미를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전달이 되었다면 좋겠군요. 교양 수업이란 이렇게 슬쩍 지나쳐 갈 수 있는 것들한테서 의미를 찾는데 큰 의의를 둘 수 있으니까요.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케이 번역이 게을러지던 차에, 좀 따끔하군요. 부디 그런 마음들 널리널리 퍼져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