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높이 날아라
어린이날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분이 있다. 나는 젊은 날 밀양 얼음골 아래에서 초등교사로 출발했다. 그 시절 인연이 닿아 짧은 시간 교류를 가진 사람 가운데 잊혀 지지 않는 얼굴이다. 그분이 바로 ‘아빠 힘내세요’라는 동요를 작곡한 한수성씨다. 이 노래는 그분이 부산의 사립 초등학교로 옮겨 발표한 동요다. 그 당시 IMF로 집안이 어려워진 가장에게 처진 어깨를 펴게 한 동요였다.
그분은 내가 나온 교육대학과 다른 지역 출신으로 내보다 연상이었다. 음악을 워낙 좋아해 그 당시 MBC 대학가요제 참가하려고 초등교사로 재직하면서 방송통신대학을 다니거나 내 모교의 4년제 심화과정도 마친 것으로 안다. 이런 학적 보유는 학구열도 있었겠지만 대학생 신분을 유지하면서 대학 가요제에 참가하려는 뜻도 있었다. 그분은 지역 예선을 거쳐 본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분은 몇 차례 도전했던 대학 가요제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자 창작 동요제로 방향을 틀었다. 그분의 음악에 대한 성취동기가 강하였다. 내가 그분을 알게 되었을 때 내보다 교육 경력이 앞섰고 가정을 꾸린 상태였다. 장발에다 짙은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기타를 메고 다니며 즉흥적으로 떠올린 악상을 악보로 남기는 재능이 남달랐다. 음악에 문외한인 나에게 그분 일상이 무척 부러웠다.
그분과는 같은 학교에 근무하진 않아도 같은 지역 안에 있어 서로 얼굴을 트고 지낸 사이였다. 방학이면 예비군교육장에서도 만나게 되었다. 어떤 기회에 그분은 나의 손을 맞잡고 좋은 가사를 넘겨주면 멋진 선율로 답하겠노라고 했다. 이후 나는 중등으로 옮겨오고 그분은 부산의 사립학교로 떠나면서 연락이 끊겼다. 그분에겐 음악적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적절한 선택이라 여겨졌다.
내가 먼발치에서 바라본 그분의 음악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다. 아마 교직이 아닌 방송이나 연예 분야에 종사했다면 그분의 자질은 더 빛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대학 가요제와 창작 동요제가 폐지되었는데 그 당시는 가수 지망생이나 초등 교사들에게 작곡에 대한 등용문이었다. 채널이 다양하지 않던 공중파 방송국에서 지역 예선을 거쳐 전국 대회를 열었던 유일무이한 행사였다.
그분은 대학가요제 열병을 앓고 난 뒤 동요 작곡에 심혈을 기울였다. 부산의 사립학교로 옮겨가기 전부터 창작 동요제 본선에 몇 차례 올랐다. 그분은 어느 해 마침내 창작 동요제 결선에서 ‘연날리기로’로 대상을 받았다. 동요제 입상으로 그분은 시골의 초등학교 교사에서 일약 전국적 명사가 되었다. 그분은 이후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고 후원을 해 줄만한 사립학교로 스카우트되어갔다.
그 뒤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모르고 살아갔다. 중간에 IMF가 닥쳤을 때 그 유명한 ‘아빠 힘내세요’로 그분 소식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IMF 나락의 수렁에서 힘들어 할 때 이 노래는 한 줄기 빛이 되어주었다. 나는 음악의 선율은 잘 모르지만 가사가 심금을 울렸다. 작곡가 개인에게도 이 노래는 분명 기념비적인 성취요 보람이었을 것이다. 전 국민의 사랑을 받지 않았는가.
세월이 한참 흘렀다. 지난해 이맘때 그분 소식을 한 줄 접했다. ‘아빠 힘내세요’ 가사가 표절 시비에 휘말려 재판 끝에 이겼다는 기사였다. 뒤에 알고 보니 그 노랫말은 그분의 아내가 지었단다. 두 분 내외는 중년에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고 재결합한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얘기는 나중 들었다. 세상 살다 보면 유명 인사는 이런저런 구설에도 오르고 평탄하지 않은 길을 가는 모양이다.
문득 그분이 생각난다. 근황이 궁금해도 어디 알아 볼 길이 없다. 어쩌면 일찍 명예 퇴직했는지 모를 일이다. 자유분방한 기질에다 평소 성품을 미루어 보아 학교법인 관계자들에게 고분고분할 사람이 아닌지라 승진은 물 건너갔지 싶다. 지금도 이 하늘 아래, 이 땅 위에서 자신이 하고 싶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식히지 않고 있는지. 어디서든 초심을 잃지 않고 동심을 지켜주었으면 한다. 15.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