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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대로 축복하신다
□ 본문 : 창세기 49장 28절
야곱은 죽기 전에 자신의 12아들에게 유언합니다. 야곱의 유언은 이스라엘 12지파를 향한 예언입니다. 오늘 본문은 12아들을 향한 야곱의 유언의 결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1.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축복입니다.
야곱의 유언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들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축복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야곱의 유언의 내용이 축복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야곱은 르우벤에게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49:4)라고 유언합니다. 르우벤이 장자의 축복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의 사명은 유다에게 가고, 아버지의 두 배의 몫을 받는 장자권은 요셉에게 갑니다. 르우벤은 이제 더 이상 형제들의 리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르우벤을 낮추셨습니다. 장자의 축복도 잃어버리고 낮아졌는데 어떻게 이것이 축복입니까?
그래야 교만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르우벤이 아버지 야곱의 침상에 올랐던 것은 그가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만한 르우벤을 낮추시지 않으면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구원의 축복까지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장자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낮아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침상에 올라가는 말도 안 되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머물 수가 있었습니다. 르우벤지파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을 향한 유언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7) 라고 유언합니다. 저주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축복입니까? 시므온과 레위는 흩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더 이상 함께 악한 일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함께 모이기만하면 악한 일을 계획하고, 계획에서 끝나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사는 유일한 길은 흩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함께 모여서 악한 일을 행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함께 모이도록 놔두면 또 다시 어떤 악을 행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악을 일삼다가 결국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축복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므온과 레위가 흩어지는 것은 저주이지만, 결국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축복입니다. 그것이 징계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 말씀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징계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매 맞으며 웃을 수는 없습니다. 아프니까요. 그러나 그것도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것만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시고, 성공하게 하시고, 건강하게 하시고, 부자가 되게 하시는 것만 축복이 아닙니다.
교만할 때는 낮추시는 것이 축복입니다. 르우벤처럼 말입니다. 교만한데 계속 높이지면 한 순간에 망합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악한 일을 행할 때는 막으시는 것이 축복입니다. 시므온과 레위처럼 말입니다. 악한 일을 행하는데 계속 성공하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그러다 지옥백성이 됩니다. 세상 쾌락을 따라 살 때는 병드는 것이 축복입니다. 건강한 몸으로 죄만 짓는데 가만히 놔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완전히 죄의 종, 마귀의 종이 됩니다. 그럴 때는 아프고 약하게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돈을 의지하고 돈을 자랑하고 살 때는 가난이 축복입니다. 그런 사람의 재물이 계속 늘어난다면 결국은 돈을 하나님처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망하는 길을 가면 가만히 놔두시지 않습니다. 징계하십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저주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사망의 길로 가는데, 지옥을 향해 가는데 가만히 놔두시는 것입니다. 교만한데 더욱 높아지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행하는데 계속 성공하는 것입니다. 쾌락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데 몸이 너무 건강한 것입니다. 돈을 의지하고 자랑하는데 계속 재물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는 절대로 그대로 놔두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그것이 징계라 할지라도 축복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징계를 받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아픕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러나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 정태기 목사님이 초등학교 때 자신의 운명을 바꾼 선생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해보면 욕이 대화였다고, 대화 자체가 욕이었다고 합니다. 섬 마을이니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다니던 학교에 새로 부임하신 선생님이 욕을 일삼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욕을 하지 않을까 고심하다가, 아이들에게 딱지 몇 장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욕을 하는 아이를 발견하면 딱지를 한 장 빼앗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딱지를 가장 많이 가진 아이에게는 상을 주고, 딱지가 없는 아이는 회초리를 맞는 것이었습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습니다. 상도 상이지만, 딱지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귀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한 기간이 되어서 아이들이 가진 딱지를 조사하고 딱지가 없는 아이는 회초리를 맞는데, 그 중의 한 아이가 정태기 목사님이었습니다. 앞에 나와서 선생님의 회초리를 맞는데 선생님이 너무 아프게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아프다고 말하려고 자신을 때리는 선생님을 바라보는 순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만큼은 믿었는데, 내가 너만큼은 믿었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선생님의 눈물을 보는 순간 회초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고 합니다. 회초리를 다 맞고 자리에 돌아와서는 책상에 엎드려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선생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울면서 굳게 결심했습니다. 다시는 욕을 하지 않을 거야. 다시는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초등학교 아이도 선생님의 아픈 회초리가 자신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인생이 변화됩니다. 하물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징계의 회초리로 아파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혹시 징계의 회초리를 맞으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 하나님께서 이제는 나를 사랑하시지 않나?’ 낙심하는 분이 있다면, 이 시간을 눈을 들어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를 징계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데 … 내가 너만큼은 믿었는데 … 그래도 나는 너를 절대로 포기 못한다. 반드시 너를 이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그리고 이 징계를 통해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것은 축복입니다. 이 믿음으로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징계를 잘 받고, 의와 평강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2. 분량대로 축복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어로는 ‘그들 각인의 축복에 따라 축복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지난주에 나눈 것처럼 축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대언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12아들을 축복하시는데, 그 축복의 내용과 크기가 다릅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징계로서 축복하십니다. 반면 유다와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큰 축복을 받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축복이 왜 아들들마다 다릅니까? 각 사람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12아들을 모두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12아들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아들들이 받은 축복이 똑같지 않은 것이 분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분량이라는 단어에는 한정되어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각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의 크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축복하시지만 그릇의 크기만큼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도 그렇습니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함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예배의 자리에 나왔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온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억지로 교회에 나온 분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 나가지 않으면 아내가 구박하고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그래서 아내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온 분이 있습니까?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남자의 자존심이 있는데 아내가 아무리 무서워도 싫은 것은 싫습니다. 아내의 명을 거역해서 밥도 못 얻어먹고 심지어는 집에서 쫓겨난다 할지라도 남자에게는 죽으면 죽으리라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아내가 무섭다고 해도 아내 때문에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여러분 코를 꿰서 교회로 이끈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 인을 치소서 (찬28,3)
하나님께서 은혜의 사슬로 여러분을 묶어서 이 자리로 인도한 것입니다.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자리에 나온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어도 예배시간에 받는 은혜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함이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의 크기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은혜를 담는 그릇의 크기는 무엇으로 결정됩니까? 사모함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사모하는 만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사모함으로, 시냇물을 찾지 못하면 목마름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그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풍성한 은혜를 받습니다. 축복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다함이 없이 축복하시는데 분량만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량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량입니까?
1)믿음의 분량입니다.
행위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행위로 축복을 받는 것이라면 자신이 받은 축복을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축복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축복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믿음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유다와 요셉이 가장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으로 인하여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기근 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야곱과 그 가족만이 아니지요. 애굽과 그 주변 나라들이 기근 중에서 죽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믿음의 아들이 요셉입니다. 또한 요셉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데 쓰임 받은 아들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 나라에서(애굽이지요) 객이 되어 사백 년 동안 그들을 섬기다가, 후에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입니다.(창15:13-16)
요셉은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요셉의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히11:22)
요셉이 임종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땅 고센에서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후에 요셉이 알지 못하는 왕조가 일어날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이 반드시 애굽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돌아갈 것을 믿었습니다. 요셉은 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 믿음으로 고난도 이겨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요셉은 이 믿음으로 형제들을 용서했습니다. 사랑으로 품고 섬겼습니다.
사람은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요셉의 행위를 봅니다. 그래서 요셉이 이런 행위로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셉이 이렇게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 안에 있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요셉으로 하여금 어떤 고난도 이겨내고, 자신들 해하려고 했던 형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게 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믿음의 분량이 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에게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가장 큰 축복을 받았을까요? 창세기 44장을 보면 요셉이 자신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고 형제들을 테스트합니다. 형제들이 진정으로 회개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애굽에 내려올 준비가 된 것입니다. 회개해야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고, 요셉은 베냐민만 자신의 종이 되고 나머지 형제들은 평안히 가나안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44:17)
이때 유다가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44:33) 유다는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대신하여’의 원어가 ‘타하트’입니다.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베냐민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총리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베냐민이 풀려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누군가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베냐민이 받아야 할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베냐민을 대신하여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하트입니다. 이 때 유다가 자신이 타하트가 되겠다고 나섭니다. 유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타하트가 되면 베냐민도 살리고, 아버지 야곱도 살리고, 그리고 온 가족이 기근 중에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이 타하트가 되면 죄로 인하여 깨어진 가족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유다는 베냐민의 타하트가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타하트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타하트가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유다는 베냐민의 타하트가 되고, 그래서 타하트 이신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요셉도 유다도 믿음의 분량대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지금의 믿음에 만족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자라납니다. 성장합니다. 그래서 약한 믿음이 강한 믿음이 되기도 하고, 작은 믿음이 큰 믿음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강한 믿음 큰 믿음이, 약한 믿음 작은 믿음으로 퇴보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커질 수 있습니까? 요셉과 유다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요셉 당시에는 기록된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꿈으로 환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분량이 크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헤어지면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말합니다.(행20:32) 바울 자신은 떠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믿음이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결단한다고 크고 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입니다. 오직 말씀이 우리의 믿음을 자라나게 하고, 오직 말씀이 우리를 크고 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 30분 읽고, 3시간은 유튜브 보고 사람 만나서 세상 이야기하는 사람이 어떻게 믿음이 자라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 때문에 문제 때문에 날마다 흔들리고 방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의 믿음의 분량의 커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날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늘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어떻게 베냐민의 타하트가 될 수 있었습니까? 유다는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제안했던 사람입니다. 만약 유다가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르우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아버지 야곱에게 돌려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로 보면 요셉을 노예로 판 주동자는 유다였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유다는 형제들을 떠났습니다. 신앙공동체를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두 아들이 죽고 나중에는 며느리 다말과 동침하는 부끄러운 자리까지 떨어집니다. 그 후에 유다는 다시 형제들에게 돌아옵니다. 신앙공동체로 돌아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유다는 자신이 얼마나 타락한 죄인인지를 알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자신을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이 받아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보면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유다를 용서하셨습니다. 늘 이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했기에 유다는 타하트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지금까지 지키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께서 이 어려움 또한 지나가게 하실 것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고 연약한 인생이지만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고 사랑의 손으로 붙잡아 주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 태산처럼 보였던 문제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의 문제를 통해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 믿어집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묵상할 때 믿음의 분량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왜 내 믿음은 이것밖에 되지 않을까 낙심하지 마시고, 요셉처럼 말씀을 붙잡고 유다처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명의 분량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의 분량대로 축복하십니다. 축복이 사명이라는 말씀을 계속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명이 크면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축복도 큰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종들을 불러서 자신의 소유를 맡기는데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깁니다. 그럼 주인은 어떤 기준으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을까요? 종들의 재능입니다.(25:15) 종들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 재능도 능력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만약 재능과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가 얼마만큼 받았느냐가 우리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 재능도 능력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만큼 달란트를 맡기십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남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두 달란트 남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한 달란트 남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8)
유다에게는 여자의 후손이 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유다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요셉에게는 가지가 담을 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지파들을 섬겨야 할 요셉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자꾸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래서 왜 저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나에게는 두 달란트밖에 주지 않았느냐고 불평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을 향해서는 자신의 두 달란트를 자랑합니다. 축복이 사명이라는 것을, 사명 따라 축복하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신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 저는 큰 교회나 유명한 목사님들이 별로 부럽지 않습니다. 저도 모르는 숨은 욕심과 교만이 있기 때문에 100%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어느 때는 제가 유명한 목사가 될까 두렵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여러분까지 ‘맞아요, 목사님. 목사님은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이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합니다. 행여 제가 유명해져서 교만해질까,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버림받을까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치바영광교회를 맡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때때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 힘들어서 내가 내 분량보다 큰 교회를 섬겨서 이렇게 힘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이렇게 사역하는 것 자체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와 비교할 수 없이 충성된 목사님들이 섬기는 교회가 힘든 것을 보면 조금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치바영광교회를 맡겨주신 주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에게 맡겨주신 치바영광교회라는 사명에 감사하고 충성할 뿐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충성하면 주님께서 많은 것으로 내게 맡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달란트 남긴 종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25:23) 예수님은 적은 일에 충성한 종에게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통해 일본 땅에 100개의 교회를 세우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왜 나에게 이것 밖에 주시지 않았냐고 불평하고, 나보다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을 보며 시기 질투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명의 분량이 커집니다. 말씀을 붙잡을 때,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할 때 믿음의 분량이 커지는 것처럼, 주님이 맡기신 사명에 충성할 때 사명의 분량이 커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방까지도 유업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2:8)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미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최고의 복을 받았습니다. 무슨 복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축복입니다. 징계도 고난도 축복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회개하며 오직 예수님만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징계를 통해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분량만큼 축복해 주십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에 감사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 하나하나에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어느새 믿음의 분량이 커집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하십시오. 내게 맡기신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직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충성하십시오. 먼 곳에 나가서 전하지 못해도 우리를 부르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십시오. 무명이어도 화려하지 않아도, 사명을 맡기신 것 하나만으로 감사이고 축복입니다. 그렇게 충성하면 사명의 분량이 커집니다. 많은 것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충성하면 열방을 유업으로 주십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