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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1일째)
부산 출발, 쿤밍으로!
나를 중심으로 부산지리연구회 교사 6명, 같은 학교동료교사 4명, 이렇게 10명이 팀을 이루어 윈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평소 가족들과 자유 여행을 하다 처음으로 많은 사람과 팀을 이루어, 거기다 두 집단이 한 팀이 되어 긴 여행을 떠나게 되니 여행의 중심에 있는 사람으로 부담도 컸지만 평소 워낙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들이라 그분들의 인성을 믿고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20년 넘게 자유여행을 해온 베테랑 여행가인 정화 샘으로부터 해외 여행이라고는 신혼 여행 밖에 안가 본 문주 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출국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속 속 도착했는데, 모두 기대에 찬 얼굴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출국 수속을 밟았다. 우리 팀 외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정선생님을 비롯한 초등학교 교사 4분과 개인적으로 오신 두 남자 분들까지 도합 16명이 상해 행 동방항공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상해에서 쿤밍으로 가는 비행기를 가까스로 탄 우리는 생소한 공항에 내려 또 환승을 하고는, 무려 세 번의 비행기를 탄 후에야 목적지인 쿤밍에 도착한 후 빵차를 나누어 타고 쿤밍의 한팅 호텔에 짐을 풀었다.
쿤밍은 윈난의 성도로 즐비한 고층건물로 내 눈을 휘둥그레 하게 만들었는데 중국의 발달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다 깨끗하고 현대적인 숙소는 내가 예상했던 중국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저녁으로 인솔자 케이씨님을 따라 노상 꼬지집에 가서 시원한 맥주와 함께 다양한 꼬지를 먹으며 이번 여행의 일행 28명이 서로 첫 인사를 나누었다.
혼자 오시거나 많아야 4명이 팀을 이루어 온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우리같이 10명이 떼거리로 몰려 온 팀은 없어 다른 팀과 조화를 이루어 즐거운 여행 분위기를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 하루는 윈난으로 오는 하늘 위에서 내 생애 통틀어 본 구름 보다 더 많은 구름의 장관을 본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날이다.
순규 샘은 계속 카메라로 쉬지 않고 구름을 찍으셨는데 덕분에 좋은 구름 사진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7월 26일(2일째)
윈난 스린과 주상 동굴 돌아보기
아침 일찍 일어나 택시를 나누어 타고 윈난 스린 행 터미널로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되어 로비에서 기다려도 문주샘과 주영샘이 나타나지 않는다. 걱정이 되어 주영샘에게 전화를 하니 자다가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알람을 맞춰놓고 잤는데 알람이 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듬직한 베테랑 여행가 정화샘을 믿고 나머지 일곱명이 먼저 터미널로 향했다.
근데 늦잠 잔 두 여인네가 얼마나 빨리 준비를 했는지 얼마 후에 바로 윈난스린 행 버스터미널에 도착을 하여 우리는 간단한 죽과 삶은 계란, 만두 등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참을 간 후에 도착한 윈난 스린.
터키의 카파도키아와 같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숲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대표적인 카르스트 지형이 윈난 스린이다.
그 유명세 덕분인지 얼마나 사람들이 많던지, 우리는 사진을 찍고 바위를 보고 하다가 그만 일행을 놓쳐 다섯 명이 따로 떨어지게 되었다.
사람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가서 그날 그분이 오신 대엽샘이 이끄는 대로 발길을 옮기다 보니 상상하지도 못한 풍광을 만나게 되었다.
신기한 암석과 숲과 아름다운 꽃, 그리고 운남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구름이 조화를 이루며 만든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에 우리 일행은 충만한 기쁨과 힐링의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해 우리가 윈난 스린을 전세 내어 독차지 한 기분이었다. 한참 만에 여수에서 오신 장선생님 내외분를 만났는데 그 분들은 윈난 스린의 보석같은 곳을 이미 감상하고 오시는 길이었다. 일행과 만날 시각이 되어 아쉽게 발길을 돌려 나머지 일행을 윈난 스린의 입구에서 만나 주상 동굴 행 버스를 탔다.
주상 동굴은 울창한 삼림 숲에 자리 잡은 석회암 동굴지대로 높이 55M의 엘리베이트를 타고 내려가야 동굴 내부로 내려갈 수 있다.
배를 타고 동굴 입구의 경치를 즐기고 난 후 1999년 세계 최초로 동굴 음악회가 열렸다는 거대하고도 볼거리가 많은 동굴 속 탐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동굴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어마어마하게 큰 동굴을 정신없이 구경하다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 하려 했는데 케이블카 타는 곳을 물으니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이가 없다.
그래서 순애 샘이 어여쁜 동굴 가이드 아가씨에게 길을 물으니 자기를 따라 오라 한다.
방학 때 마다 가족 자유 여행을 다니며 언어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었는데 중국에 와서 그만 벙어리가 되고 말았는데(중국은 도대체 영어가 통하지 않고 도도한 대국답게 거의 중국어로만 소통할 수 있다.)영어를 하는 가이드 아가씨를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 아가씨는 소수 민족인 이족 아가씨로 쿤밍의 대학 4학년 학생인데, 꿈이 여행 가이드이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방학 중 아르바이트로 동굴 가이드를 하는데, 외국인은 거의 만나지 못해 배운 영어를 써 볼 기회가 거의 없다가 오늘 나를 만나 영어 회화 공부 한 것을 실습하게 되었다며 무척이나 좋아했다.
집은 동굴에서 4킬로 정도 떨어져 있어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닌다고 했다. 사촌 동생이 호주 유학 중이라 외국에도 관심이 무척 많다는데 가이드의 꿈을 이루어 다른 세상으로도 나가길 기원해 주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케이블카 승강장에 가니, 오 마이 갓! 케이블카가 고장이란다. 우린 30위안에 케이블카 티켓을 끊었는데 10위안 밖에 안 돌려준다. 억울하고 짜증이 났지만 비도 오고 버스 시간도 촉박하여 10위안만 돌려 받고 걸어서 하산한다.
어여쁜 가이드 아가씨와 헤어지며 과일을 사서 그녀에게 고마움의 답례를 하니 무척이나 감사해한다.(우리 한국인들은 원래 이렇게 정이 많은 사람들 ㅋㅋ)
중국인의 세치기에 질린 우리는 버스를 타기 위해 대기장의 편안한 의자를 포기하고 버스 승강장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근데 출발 시각인 다섯시 반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일행 중 중국어에 능통하신 수원에서 오신 중국어 선생님이 이유를 물으니 차에 문제가 생겨 여덟시쯤 올거란다.
으악! 그럼 두시간 넘게 기다리라는 것인데 우리 저녁은???
케이씨님에게 전화하여 사정을 설명하고 자리를 사수하며 길에 앉아 과자와 음료수로 불쌍한 저녁을 먹었다.
짜증나는 상황인데도 음악을 듣고 기다리며 함께 이 암울한 순간을 견디는 동료들이 있어 위로가 되었다.
케이블카 사건에다 버스가 연착되었는데도 안내 방송 하나 없는 중국의 시스템에 짜증이 왕창 나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버스가 들어왔다.
우리 한국 아줌마들, 중국인들에게 새치기 당하지 않으려 거의 필사적으로 버스를 탔는데 온 몸으로 새치기 중국인을 막은 부산 정신영 선생님의 필사적인 노고로 전원 버스에 앉을 수 있었다.
근데 우째 이런 일이!!!
우리 팀이 10명이다 보니 한꺼번에 티케팅을 했는데 인원이 많아 다음 버스로 예약이 되어 있어 우린 그 난리를 피운 노력을 물거품으로 돌리고 하차하게 되었다.
내려 보니 그 북새통에 내가 던지다 시피 버려 둔 음료수 병을 문주샘이 들고 타다 엎질러 엉망이 되어 있었고, 주영샘은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바닥의 쓰레기를 주워 담고 왔으니 부산 교사의 훌륭한 에티켓에 경의를.ㅋㅋ
사회 교사인 심선생은 너희들이 이렇게 짜증나는 상황을 만들었으니 쓰레기는 너희들이 치우라는 아주 사회적인 발상으로 먹다 남은 음료수 병을 두고 탔는데, 도덕 교사인 김선생은 미친 듯 버스 타느라 심선생이 깜빡하고 음료수 병을 두고 탔는가 싶어 얼른 주워 들었다가, 몇 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린 우리를 밀치고 타려는 중국인들에 밀리고 밀리는 북새통에 음료수를 흘려 난감한 사태를 만들었으니,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서로를 보며 허탈감에 허허로운 웃음을 날릴 수 밖에 없었다.
먼저 떠난 우리 아파트 이웃주민, 초등교사팀 정선생님이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따뜻한 문자를 보내와 큰 위로가 되었다.(이분은 예쁜 사람이 마음도 예쁘다.)
다행히 10분 후 바로 차가 와 탈 수 있었는데 오늘 고생 역시도 지나면 추억이 되리라.
도착하여 굶주린 배를 안고 대충 씻고는 침대에 쓰러졌다.
7월 27일(3일째)
정겨운 따리 고성과 우리들의 운치 있는 게스트 하우스
아침 일찍 따리로 출발하였다.
아침 식사는 터미널에서 삶은 계란 등으로 간단히 해결하였다.
창밖으로 펼쳐진 경치를 보다, 졸다를 반복하다 보니 따리에 도착했다.
택시를 나누어 타고 따리 MCA 게스트 하우스에 집을 풀었다.
정말로 마음에 드는 숙소였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 멋진 정원, 그리고 파격적인 그림까지 어우러져 여행자의 낭만을 자극하는 멋진 숙소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3인실을 두 팀이 써야 한다기에 인원이 많은 우리 팀이 쓰기로 했다.
이틀 동안 향긋한 모닝 커피를 제공해준 룸메이트 대엽샘과 굿바이하고 금숙, 현정샘과 셋이서 한방을 쓰게 되었다.
둘이서 한방을 쓰다 셋이서 쓰니 화장실 사용이 좀 불편했지만 공간이 널찍하여 시원한 느낌이 들어 나름 괜찮았다.
케이씨님이 저녁을 맛있게 먹기 위해 점심을 간단하게 먹으라고 했지만 그 전날 아침부터 극도의 간단 식사로 허기에 지친 우리는 맛있어 보이는 음식점에 앉아 제대로 된 요리를 시켰는데, 특히 송이 버섯 요리가 얼마나 맛있던지 우리는 정신없이 얼굴을 접시에 박고 요리를 싹쓸이 했다.
숙소가 따리 고성 주변이라 우리는 편안하게 고성 구경을 할 수 있었는데 전망대에서 본 따리 풍경이 참으로 운치 있었다.
따리 고성은 송나라 때 대리국의 도읍지였을 때 축성되었던 성으로 아름다운 바이족의 발전된 문화를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고성을 둘러 보고 한참을 걸어 숭성사 삼탑으로 갔지만 4시 30분에 문을 닫아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래도 가면서 본 창산의 그림 같은 모습이 큰 위로가 되었다.
멋진 외국인 거리의 한 카페에서 맛있는 윈난 커피를 마신 후 길을 나섰는데 서울에서 오신 유선생님 내외분을 만나게 되었다.
친절하신 유선생님의 안내로 우리는 따리의 전통 건물로 지어진 멋진 성당에 가 볼 수 있었다.
유 선생님은 이번 여행에서 교사들이 너무 많이 와(28명 중 교사가 18명)참 재미 없는 여행이겠다고 말씀하신 분으로 너무 솔직한 발언에 은근히 걱정이 되는 인물이었는데, 이렇게 예상외의 친절을 받고 보니 어려운 상대에서 급호감인 상대로 변하고 있었다.
너무 늦게 가서 성당 문이 닫혀 있었는데, 인연이 있었던지 우여곡절 끝에 문이 열리고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수녀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성당을 운영하는 한국인 수녀님은 비자 문제로 잠시 한국에 들어가셨다는데, 대구에서 10년을 보내셨다는 중국인 수녀님을 만나니 마치 동포를 만난 듯 반가웠다.(나중에 알고 보니 이 수녀님은 조선족 출신으로 할머니가 밀양분이라니 이렇게 피는 서로 끌리나 보다.)
우리 일행 다섯명과 유선생님 내외분, 이렇게 일곱명을 보시고는 따리에서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한국인을 본 건 처음이라는 수녀님과 내일 나머지 일행과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7월 28일(4일째)
창산 트래킹과 시저우 고성
아침에 일어 나 보니 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다.
비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전망 좋은 테이블에서 라면을 먹는다.
커피까지 마시니 참 행복하다.
창산 트래킹에 나섰다.
얼하이 호수를 포기하고 창산 트래킹을 선택했는데 촉촉하게 내리는 비와 몽환적인 구름 사이로 보이는 산의 모습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했다.
중국인은 등산을 거의 하지 않아 좋다는 산은 대부분 케이블카를 설치해두었는데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 본 경치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케이블카에 내려 잠시 계단을 만나 헉헉 거리는 분들도 있었으나 그 다음부터는 도저히 산길이라 말 할 수 없는 잘 닦여진 포장길을 걸으니 마치 산보를 나온 기분이었다.
오른쪽으로는 얼하이 호수를 내려다 보는 시원하고 멋진 풍광이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바위틈에 어여쁘게 핀 꽃들과 여린 나무들의 기특한 생명력에 감탄을 하다 보니 도대체 어디에 눈길을 둬야 할지 알 수 가 없었다.
그리고 바위에 멋지게 펼쳐진 이끼는 세상 어느 예술가가 그렇게 만들 수 있겠는가?
작고 여리나 어여쁜 존재들의 생명력에 외경심이 생기는 시간이었다.
멋지게 펼쳐진 풍경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어 대다 보니 어느새 점심을 먹을 소박한 식당에 도착했다.
맛있는 볶음밥과 옥수수 등으로 배를 채운 후 다시 산행을 했다.
나에게 소중한 인삼 물과 커피를 나누어 주신 정신영님이 참 고마웠다.
하산 한 후 일행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주영샘과 내가 나서 시저우 성으로 갈 빵차 기사와 협상을 했다.
6~7명 탈 빵차를 10명이 탄다니 기사가 일행이 뚱뚱한지 날씬한지를 묻는다.
내가 내 몸매를 살짝 쓰다듬으며 가리키니 웃으며 그럼 10명 다 타란다.(내가 좀 날씬하다.ㅍㅎㅎ)
10명이 타니 차가 빵빵하다.
그래서 빵차인가 보다. ㅋㅋ
시저우 성은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 성이다.(내 기준이니 오해 마시길)
그래도 바이족의 화려한 복식과 잘 지어진 집들을 구경할 수 있어 좋았다.
오랜 시간 남조국과 대리국의 수도였던 곳인 만큼 찬란한 문화 유산을 지닌 곳이다.
민속 공연을 보았는데 학교 학예회 수준의 공연이었지만 맛있고 향긋한 차를 계속 주어 창산 트래킹으로 나른해진 몸을 쉬어 갈 수 있어 좋았다.
우리를 기다리는 빵차 기사에게 몸 게그를 펼친 끝에 20위안을 깎아 다시 따리 고성으로 돌아 왔다. 시저우 갈 때는 현정샘이 순규샘 딸이 되었는데 돌아갈 때는 문주샘이 심선생의 딸이 되어 무릎에 앉아 가게 되었다.ㅋ
약속한 대로 일행 10명이 성당에 찾아 가니 수녀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한때 따리에는 천주교 신자가 많았는데 지금은 50여명 밖에 없어 가난한 성당이라고 하셨다. 카톨릭 신자인 순규샘, 순애샘, 정화샘이 마음을 다해 헌금을 하셨다.
헤어질 때 계속 손을 흔드는 해맑은 수녀님의 얼굴이 잔잔하게 가슴에 여운으로 남는다.
저녁은 외국인 거리의 멋진 레스토랑에서 29명이 시원한 맥주와 함께 다양한 요리를 맛보았는데 분위기 때문인지, 여행자의 낭만에 취해 처음 만난 다른 팀 박선생님, 진주 조선생님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을 먹으로 가다 복잡한 인파에 일행 두 사람을 놓쳐 찾으러 나섰는데 고맙게도 유선생님이 우리 일행을 찾기 위해 서 계셨다. 정말 고마운 분이다.
유선생님은 퇴직 후 10여년을 부부가 함께 세상 여행을 하시는데, 여행이 준 여유로움과 평화로움이 두 분에게서 느껴진다. 유선생님은 여행 내내 길 잃고 헤맬 사람들을 위해 그 큰 키로 가던 길을 멈추고 이정표마냥 서 계셨는데, 사모님이 손수 떠 주신 하얀 뜨게 모자를 쓰신 모습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분이다.
발 마사지를 받기 위해 골목을 나섰다가 일행은 먼저 가고 현정샘과 나만 발 마사지를 받게 되었는데 태국이나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받던 수준과 형편없이 떨어져 아쉬운 시간이 되고 말았다.(우리가 간 마사지 샵만 그럴 수 있으니 중국의 마사지를 이것으로 평할 수 없을 것이다.)
7월 29일(5일째)
리장 고성과 완고루,그리고 목부
아침을 숙소 근처 식당에서 맛있는 녹두죽으로 간단히 해결한 후 리장 갈 준비를 하였다.
시간이 남아 정원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면서 여행의 한가로움을 즐기니 기분이 좋다.
버스를 타고 리장에 도착하여 숙소를 향해 케이씨님을 따라 열심히 걸었다,
떠나기 전 카페에서 리장 MCA 게스트 하우스로 예정되어 있어 따리 MCA에서의 행복한 분위기를 떠 올리며 왔는데 휴가철이라 예약이 어려웠던지 고성 밖 중급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MCA 게스트 하우스는 리장 고성안에 있어 접근성이 좋겠으나 이 호텔은 고성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데다 로비가 너무 작고 바로 앞이 도로라 방안에만 콕 쳐 박혀 있을 수 밖에 없는 곳이라 실망이 좀 컸다 .
거기다 207호 우리 방은 모기가 많고 전기도 고장 나 있었는데, 충전은 커녕 방과 욕실에 불만 겨우 켜져 밤새 전기모기향이 소용없게 되었으니, 모기를 열 마리를 잡고도 결국 한 마라를 놓쳐 손등과 어깨를 모기에게 내 주고 말아 숙소에 대한 느낌은 더 안 좋을 수 밖에 없었다.
짐을 풀고 리장 고성으로 향했다.
리장 고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곳으로, 바이족, 한족, 티벳족 등 여러 민족의 민속을 융합한 바이족의 독특한 양식으로 형성되었는데,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되었으며, 1996년 리장 대지진으로 도시의 3분의 1이 파괴되었을 때 오화석 돌길로 이루어진 고성지역만 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현존하는 지구의 마지막 상형 문자라는 동파 문자를 사용하는 나시족의 고성 답게 거의 모든 상점이나 객잔에서 한자와 영어 동파문자를 동시에 볼 수 있어 그 재미 역시 좋았다.
일단 완고루에서 전망을 보고 목부로 가기로 했다.
완고루는 입장료 없이 리장 보호기금 80위안만 있으면 된다고 들었는데, 열명분 800위안을 내니 300위안을 돌려줘 우리는 단체 할인인가 싶어 파이팅을 외치며 무척 좋아했다.
근데 며칠 후 리장을 다시 와서 안 사실인데 50위안은 완고루 입장료였다.
그것도 모르고 단체 할인 받았다고 난리를 치며 좋아한데다 일주일 동안 잘 보관해야 한다며 가방 속 깊숙이 모셔두었으니 두고 두고 우스운 일이다.
완고루에서 보면 전주 한옥 마을의 몇 배나 되는 기와지붕의 장관을 감상 할 수 있다. 리장에서 내 시선을 가장 끈 것은 서로 맛 닿을 듯 길게 늘어 선 지붕의 선과 지진에도 끄떡 없었다는 오화석 돌길이었다.
500년간 리장을 지배했다는 목씨 가문의 저택인 목부를 거금 60위안을 주고 들어 갔으니, 그건 조선 왕조 500년과 맞먹는 목씨가가 과연 어떤 집인지 궁금함이 커서였다. 목씨 가문은 자식 교육을 최고로 우선시 했다는데 그 힘이 500년의 저력으로 나타난 것이니, 교육의 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중국인 단체 여행객들의 북새통에 정신이 없어 목부를 빠져 나와 차 한잔 마셔 볼 요량으로 거리를 두리번 거리는데 누군가가 우리 일행을 부른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수원 4인방과 부산 두 정선생님이 보인다.
우리도 올라가 전통차와 커피를 시켰다.
잔으로도 팔고 병으로도 팔아 병으로 시켰는데 잔이 모자란다.
그래서 잔을 두개만 더 달라고 하니 작은 유리잔을 갖다 주며 한 개당 5위안을 더 내란다. 기가 차서 다시 가져가라하고 정선생님께 종이컵을 얻어 해결하였는데, 중국인이 자본주의에 물들어 돈독이 오른 것 같아 잠시 정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저녁은 한국 식당인 서울가든에서 만찬이 이루어졌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한국 음식의 고마움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송이 버섯을 사다 나누어 주신 부산 초등팀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맛있는 한국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거리를 나서니 기분이 좋아 거리에서 흘러 나오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저절로 춤이 나온다.
까불이 심선샘과 김선생이 촐싹대며 잠시 춤을 춘다. ㅋㅋ
리장 고성의 야경을 보러 고성 입구에 갔다 엄청난 인파에 혼이 빠져 그만 야경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오고 말았다.
6.25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연상되는 인파였다.
사람 멀미가 나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으니 중국 여행에서는 중국여행객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7월 30일(6일째)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호도협 트래킹!
아침 일찍 호도협 트래킹을 위해 차오토우로 빵차를 나누어 타고 길을 떠났다.
나와 정화 샘은 서울 유선생님 부부와 같은 차에 탔는데, 사모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따뜻한 교감을 나누었다. 창 밖으로 펼쳐진 그림 같은 경치를 바라보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차는 차오토우에 도착했다.
아침을 차오토우에서 먹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맛있는 식사였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제일 기대하던 1박 2일의 호도협 트래킹이 시작되었다.
29명중 나와 따거(남자처럼 머리가 짧은 정화샘을 우리는 중국 와서 따거라고 불었다.ㅋㅋ), 주영샘, 대엽샘, 그리고 부산 정신영님과 진주 조선생님,여수 장선생님이 케이씨님과 함께 걷고 나머지는 말을 타고 호도협 28밴드를 따라 갔다.
제 작년 여름 스위스의 리기산, 융프라우, 필라투스를 트래킹 헸지만 세 산을 합쳐도 호도협의 경치를 따라 가지 못할 것 같다. 왜 호도협이 세계 3대 트래킹의 하나인지 충분히 공감이 갔다. 가벼운 짐을 진데다 날씨까지 받쳐줘 동네 뒷산을 가는 정도의 힘으로 호도협 트래킹을 할 수 있었다.
잠시 쉬어 가는 곳에 먼저 도착해 말을 탄 일행을 기다리며 따거와 주영샘과 같이 네스카페를 마셨는데 한국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은 캔 커피가 그곳에서 마시니 정말 맛있었다.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절경에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었고 그 장엄한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다 담을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결국 호도협은 내 가슴에 담아 두기로 했다.
수천년 세월 동안 마방들이 말에다 짐을 싣고 목숨을 이어 가던 길. 집을 떠나 몇 개월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매년 생존을 위해 떠나야 했던 길. 그들의 고된 삶을 위로하려고 그렇게 설산은 아름다웠나 보다. 삶을 이어 가기 위한 인간의 투쟁이 아름다운 호도협의 자연과 함께 장엄하게 다가온다.
나시 객잔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는데 음식도 맛있었지만 차가 기가 막혔다. 그래서 차를 물병에 담아 오후 내내 걸으며 차 맛을 음미했다.
이제 내리막 길이라 말을 타지 않고 전원 걸어서 우리가 1박을 할 차마객잔까지 가야 하는데 시간이 넉넉하여 담소도 나누고 사진도 충분히 찍으며 천천히 걸었다.
성질 급하고 걸음이 빠른 나는 어느새 제일 선두에 서게 되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늦게 올 사람이 앞 사람을 따라 잡느라 힘이 들 것 같아 따거와 주영샘, 경숙 샘과 같이 현정샘,금숙샘,문주샘을 기다렸다. 하도 안 와서 혼자 슬슬 다시 온 길을 되돌아 가니 저 쪽에서 세 사람이 나타난다.
반가운 마음에 박수를 치고 우리 일곱명은 그곳에서 음료수와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에게서 사과를 사서 나누어 먹으며 기쁨을 함께 했는데 그 사과 맛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내 몸무게 정도로 보이는 큰 짐을 지고 가는 서양 젊은이 세 명을 만났는데 헉헉 대며 가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동시에 그들의 젊음이 부럽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걷다 보니 내 속도로 걸을 수 없었지만, 때론 내 것을 포기하고 함께 하는 삶 또한 즐겁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를 마지막으로 차마객잔에 도착해 방을 배정 받았는데 욕실이 없는 대신에 창 밖으로 옥룡설산이 펼쳐진 멋진 풍경에 그만 입이 벌어져 기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스위스의 특급 호텔이 이 보다 더 좋은 전망을 가졌을 것인가!
침대에 엎드려 옥룡설산을 바라보며 충만한 행복을 느꼈다.
저녁으로 쫄깃쫄깃한 오골계 백숙과 김치 찌개, 그리고 부산 정헌룡님이 내신 맛있는 과일로 즐겁고 풍성한 맛의 향연을 즐겼다.(정선생님! 고마워요!!)
어둠이 깊어지니 산의 흔적이 사라졌다.
대신 쏟아지는 별을 기대했지만 날씨가 흐려 별을 볼 수 없었다.
여름철엔 별을 보기가 힘이 든다는데 다음 실크로드에서나 별을 기대해야겠다.
7월 31일(7일째)
호도협 트래킹 그리고 하파촌
나의 룸메이트 따거와 새벽에 눈을 떠 창밖을 보니 설산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방언님의 차마고도 음악을 들으며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는 기분으로 창밖을 바라보니 시간이 지남에 차차 선명하게 설산의 모습이 드러났다. 따거와 둘이서 아침 산책에 나섰다. 어제 온 길을 되 짚어 걸으니 폭포가 나와 우린 또다시 그곳에서 명상을 하고, 또 길을 걷고 하다가 숙소로 되돌아 오는데 누군가가 걸어 둔 모자를 발견하여 보니 금숙샘의 모자였다.
따거가 모자를 챙겨 들고 둘이서 마을 구경을 하다 객잔의 옥상에 올라가 설산의 풍경을 바라보며 모닝 커피를 즐겼다.
차마객잔은 공동 욕실과 화장실을 사용해야한다는 불편함이 있지만 객잔에서 바라보는 기막힌 경치와 운치 있는 분위기로 며칠간 푹 쉬다 가고 싶은 곳이다.
이곳에서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경치를 바라보며 며칠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침으로 닭죽을 먹고 다시 호도협 트래킹에 나섰다.
하행길이라 힘들지는 않았지만 곳 곳에 위험한 곳이 있어 조심해야 하는 구간이다. 저질 체력 문주샘과 현정샘의 보조에 맞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옥룡설산의 기막힌 경치만 바라보다 문득 하바설산을 바라보니 욕룡설산과는 또 다른 편안하고 정다운 풍경이 있다. 마치 스위스의 리기산을 트래킹하며 바라본 풍경과 비슷하다. 온갖 들꽃이 피어 있는 모습이 정겹다.20대인 우리 막내 현정샘은 책갈피로 만들려고 지천으로 피어 있는 에델바이스를 골라 따고 있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유명해진 꽃, 우리나라에선 본 적이 없는 에델바이스가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 눈이 호강하는 날이다.
내려오다 중도 객잔에서 간단한 요기를 했는데 천하제일경이라는 자신들의 자부심에 맞게 화장실에서 바라 본 풍경이 기가 막혔다.
호도협 트래킹을 마친 후 차를 타고 하파촌으로 향했다. 중간에 차를 세워 따쥐 마을을 내려다 보았는데 멀리서 봐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따쥐 마을을 못 가보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하파촌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계속 갈 수 있었지만 하파촌의 모습을 음미하기 위해 차에서 내려 40분 가량 숙소까지 걷기로 했다. 산 위에서 아래까지 도도하게 펼쳐진 계단식 밭이 참으로 멋지다. 숙소에 도착해서 방을 배정받은 뒤 두 사람은 쉬고 여덟 명은 마을 구경에 나섰다. 현정샘이 플로라이드 사진으로 꼬마들의 환심을 산 뒤 그 중 두 여자애를 따라 나섰다. 여자애들이 도착한 곳에 어머니가 산초를 따고 있었다. 외국인을 보고 수줍어 하는데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산초 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어머니와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 출력해주니 참 좋아했다.
여자애들이 사과를 먹고 있어 나도 사과를 먹고 싶다는 시늉을 하니 아이들이 엄마에게 뭐라고 말을 했는데, 어느새 아이들이 뛰어 가더니 우리 일행이 다 먹을 만큼 넉넉히 사과를 따 와 우리에게 안겨준다.
너무도 고마워 준비해간 화장품을 선물로 드리니 어머니가 무지 좋아하신다. 주영샘이 우리의 통역을 맡아주었는데, 어찌 어찌하여 꼬마들의 손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나시족의 집을 구경하게 되었다. 집에 가 보니 키가 아주 작은 할머니가 우리를 맞아주셨는데 우리에게 앉으라고 계속 작은 의자를 권하셨고 그 수가 우리 인원만큼이나 많았다. 집은 작았고 원룸 형식이었는데 한쪽에서 소죽(그들은 우죽이라 발음했다.)을 끓이고 있었고 바로 옆에 나무를 때는 화로가 있어 난방과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거기가 부엌과 식당과 거실을 겸하는 곳이었고 다른 쪽에 침대가 놓여진 침실이 있었다. 지붕은 높았고 곡식을 보관하는 다락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이었다. 할머니에게도 화장품을 선물해 드리니 수줍어 하시면서도 무척 기뻐하셨다. 나시어를 하는 할머니와 보통어를 하는 주영샘의 통역은 손녀가 하였다.
근데 같은 집 아이인 줄 알았는데 다른 한 아이가 자기 집으로 손을 이끈다.
따라가 보니 가게를 하는 집이였는데 원룸에 가게와 부엌, 침실이 같이 있는 형태였다. 그 어머니의 인상이 정말로 좋아 우리 마음까지 평온해 지는 기분이었는데 가져간 것이 없어 잠시 고민하다 그 가게에서 우리가 마실 물 열병을 사니 참 좋아하셨다.
숙소로 돌아와 보니 서울 사모님이 우리를 위해 손수 채소를 따서 기다리고 계셨는데 좋은 일 한다고, 수고 한다고 하는 말씀에 부끄럽고 동시에 고마웠다.
벌레가 먹은 무공해 채소를 실컷 먹고 몸이 건강해진 기분으로 방으로 돌아 와 한방에 모여 하하 호호 웃으며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8월 1일(8일째)
백수대를 거쳐 샹그릴라로!
아침 일찍 일어나 따거와 둘이서 마을 구경에 나섰다,
밥 짓는 연기가 나기 시작하는 평화로운 아침 풍경이었다.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서울 사모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셨다며 포도를 두 접시 가득 내 놓으신다.
우리 나라 포도 보다 훨씬 당도가 높은 맛있는 포도를 먹다 남아 비닐 봉지에 나누어 담아 가방에 챙겨 넣었다. 포도를 한 박스나 사신 유재명님, 변순남님 내외분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샹그릴라로 향했다.
가는 도중 학교를 방문했는데 방학 중이라 아쉽게도 교사도, 학생들도 볼 수 없었다.
하파촌 일대는 지역이 넓은데다 인구 밀도가 낮아 이곳에 학교를 크게 짓고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시설이 우리나라 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교실동과 학생 기숙사동, 교사 기숙사동 등으로 건물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교실 안을 바라보니 시설이 깨끗하고 좋아보였다. 책상과 의자는 우리 어릴 적처럼 두 명이 함께 사용하게 되어 있었는데 책상에 금 긋고 싸우고 하던 어릴 적 기억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우리가 준비해 간 학용품을 선물로 맡기고 교문을 나섰다.
비록 작은 선물이지만 이곳 아이들이 한국의 교사들이 준비해 간 한국제 학용품을 사용하며 한국을 조금이라도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
가는 도중 백수대에 들렀는데 나시족의 전통 종교인 동파교의 성지답게 맑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터키의 파묵칼레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자연스럽고 조용하고 낡고 아름다웠다. 향을 사서 불을 붙여 정성껏 기도하고 맑은 샘물을 떠 마시니 내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내려올 때 편하고 좋은 길을 두고 낡고 허물어진 나무계단을 밟고 왔는데 사이 사이로 핀 들꽃을 보며 걷는 맛이 참으로 좋았다.
샹그릴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아마 몇 분은 멀미로 고생 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 차는 계속 시동이 꺼져 이러다 차가 퍼지면 우리는 어찌되나 하는 불안감에 마음이 불편한 긴 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오후 서너 시 경에 샹그릴라에 도착하니 기진맥진하여 그날 밤은 화장실 한번 안 가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고산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몇 분은 아주 고생을 했는데 나 역시 처음엔 조금 어지러웠지만 따뜻한 수유차를 계속 마시다 보니 그 증세가 사라져갔다.
고마운 서울 유재명님 내외분께 수유차를 대접하기 위해 함께 수유차 카페에서 즐거운 담소를 나누며 수유차를 두병이나 마셨는데 그 맛이 고소하면서도 진한 것이 내 입맛에 꼭 맞았다, 저질 체력인 문주샘과 현정샘이 계속 수유차를 마시더니 어느새 체력을 회복해 가는 모습이었다.
샹그릴라 고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절과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마니차를 보기 위해 계단을 올라 갔는데 확실히 숨이 차는 증세가 심했다.
숙소는 샹그릴라 고성 안에 있었는데 시설은 열악했지만 몇 발작만 나서면 사방가가 있어 접근성이 아주 좋았다.
저녁을 먹고 힘이 남아도는 몇 명이서 고성 산책에 나섰다가 사방가에서 비를 피해 천막으로 들어가 송이 꼬지를 먹었는데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한 개에 10위안이나 하는 비싼 송이 꼬지를 세개씩이나 먹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물가 대비 무척 비싼 값에 먹은 송이였다.
8월 2일(9일째)
비타하이, 샹그릴라의 꿈을 꾸게 한 곳으로!
빵차를 대절하여 비타하이와 석하 설산으로 가기로 했다.
사실 샹그릴라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을 읽으며 느낀 상상의 세계가 이번 여행으로 깨지지 않을까 오히려 두려웠다.
그런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비타하이는 샹그릴라의 결정체였다.
그런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는 걸 상상 조차할 수 없었는데, 어릴 적 꿈 꾸던 세상이 내 바로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예전 읽었던 성경의 말씀 중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MP3를 꺼내 혼자 조용히 걸으며 케빈 컨과 앙드레 가뇽,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을 듣는데 어느새 내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샹그릴라는 그 곳에 있었다.
맑고 큰 호수를 둘러 싼 풀밭에는 온 갓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고 그 주변은 신비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 숲 사이 사이로 맑은 개울이 호수로 흘어 들어 가고 흰 구름은 뭉개 뭉개 하늘과 숲을 이어 주고 있었다.
샹그릴라는 우리 마음 속에 있다 하지만, 풍경으로 따진다면 나에게 샹그릴라는 비타하이 바로 이곳이었다.
비타하이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이 내 영혼 깊숙이 들어와 충만한 기쁨이 되어 흘러 넘쳤다.
주영 샘의 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러 날 쉬고 싶은 곳이다.
여기에서 책을 읽고 낮잠을 자고 명상을 하다 경치를 보며 하루 종일 지낸다면 그게 바로 신선 놀음이겠지.
다음 번 호수를 산책하기 위해 순환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할머니 한분이 송이를 팔고 있어 주영샘과 현정샘이 송이를 흥정하는데 버스가 왔다. 우리 일행이 먼저 타고 송이를 산 두 사람이 타려고 하니 인원 초과라고 다음 버스에 타라는 통에 이산 가족이 되고 말았다. 다음 호수에 내려 두 사람을 기다렸는데 두 사람 탄 버스가 그 곳을 그냥 지나치고 만 것이다. 빵차 운전기사와 1시에 만나기로 되어 있어 우리는 눈 앞의 새로운 호수 트래킹을 포기하고 호수 입구에서 미리 준비해 간 점심을 먹고 다시 출구 행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바라 본 경치도 역시 아름답고 평화롭다.
들꽃으로 가득 찬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와 말, 야크의 모습이 평화롭다. 여긴 사람보다도 동물들에게 진정한 샹그릴라 인 것 같다.
약속한 시간을 넘겨 빵차에 도착한 우리는 석하설산으로 향했다.
근데 케이블카를 타기 위한 줄이 너무 길었다.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 겨우 케이블카를 타다 보니 중간 마을은 들르지도 못하고 정상으로 바로 가게 되었는데 고산증세와 추위로 많은 샘들이 고생을 하였다.
두통과 어지러움, 매스꺼움 등으로 입술이 새파래지고 얼굴이 백지장 같이 변한 샘들을 보니 걱정이 되었다.
나는 계단 올라갈 때 평소보다 숨이 좀 차는 것 빼고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는데, 사람마다 고산 증세가 다르게 나타나는가 보다.
정상에서 바라 본 메리 설산과 옥룡 설산의 풍경이 멋있긴 했지만 감동적일만큼은 아니었다. 오히려 5월 소백산 철쭉제 때 국망봉에서 바라 본 산의 물결과 지리산 노고단에서 본 비경이 나에겐 더 감동적이었으니 그것은 나의 주관일 뿐 보는 이 마다 다를 것이다.
내려갈 때 케이블카를 또 한 시간 기다려야 하는 관계로 우리는 정상에서 바로 내려 와야 했는데 오전에 석하설산을 다녀온 분들의 말씀을 들으니, 중간 마을에서 두시간 동안 마을 구경하고 차를 마시며 행복하고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니 우리는 결국 시간에 쫓겨 석하 설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못 보고 온 것이다.
그래서 석하설산은 가격과 투자 시간 대비 아쉬운 곳이 되어 버렸다.
만약 다음에 또 올 기회가 생긴다면 비타하이 하루, 석하 설산 하루, 이렇게 계획을 잡아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
석하설산에서 숙소로 오는 길에 잠시 나파하이에 들렀는데 비도 오고 약속한 저녁 시간이 다 되어 밖에서 잠시 나파하이의 풍경을 보다 다시 차에 올랐다.
들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파하이를 말을 타고 달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저녁을 먹으며 케이씨님이 저녁 9시에 송이 버섯 파티를 한단다.
우리 일행이 송이 버섯을 한턱 쏠려고 송이를 샀는데 케이씨님이 이미 3.5킬로나 샀다고 해서 가서 보니 그 양이 어마 어마 해 우리가 산 송이는 그냥 다음에 먹기로 했다.
고산증세가 심해 몸이 불편한 분들은 숙소에서 쉬고 몸이 말짱한 나와 따거, 문주샘, 주영샘, 현정샘이 고성 구경에 나섰는데 사방가에서 흥겨운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평소 음악만 나오면 오두방정 까불이가 되는 나와 문주샘이 춤판에 끼어 빙빙 도는 건 당연한 것인데 현정 샘 뿐 아니라 평소 춤 추기를 멀리하고 경계하던 따거까지 춤을 추니...세상에 놀랄 놀자로다!!!ㅋㅋ
고산에서 춤을 추니 몇 바퀴 못 돌아 숨이 차 올라 헉헉되는데 여기 주민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편안하게 춤을 잘도 춘다.
송이 파티 시간이 되어 돌아가려는데 서울 유선생님이 아직도 춤을 추고 있어 송이 드시러 가자니 송이보다 이 분위기를 즐기고 싶다하신다.
시간이 갈수록 점 점 더 멋진 분이시다.
빙 둘러 앉아 송이를 손질해 날 것으로 소금과 참기름에 찍어 먹었는데 양이 얼마나 많던지 도저히 그 많은 송이를 다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근데 막내 현정샘이 갑자기 오른쪽 뺨에 마비 증세가 온다고 해서 송이 과다 복용으로 인한 부작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나 송이 먹기를 중단하고 수유차를 먹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우리가 처음 수유차를 먹던 카페가 문을 닫아 외국인 거리에 있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수유차를 주문했는데 종업원이 영어를 유창하게 해서 깜짝 놀랐다. 중국 와서 처음 들어 보는 유창한 영어다.
근데 가격은 비싼데 비해 수유차의 맛은 첫날 집 보다 못하여 우리는 분위기만 마시고 돌아왔다.(우리에게 수유차를 쏜 따거, 고마워요!)
8월 3일(10일째)
송짜린스, 그리고 다시 리장으로!
오전 일찍 케이씨님을 포함한 17명은 먼저 리장으로 떠나고 나머지 12명은 송짜린스를 본 후에 오후 1시 차로 리장에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 눈이 떠진 나와 따거는 새벽의 고성 구경에 나섰다.
날씨는 꽤 쌀쌀했지만 고요하고 한적한 고성을 걷는 맛이 괜찮았다.
아침을 먹고 송짜린스로 향했다.
송짜린스는 티벳에서 두 번째로 큰 사원인데 지나치게 중국화 되고 관광 상품화 되어서인지 별로 감흥이 일지 않았다.
산딸기를 파는 할머니의 주름살이 하도 인상적이라 선물로 준비해 간 볼펜을 드리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니 몸을 빼시면서 딸기를 사 달라고 하신다.
볼펜까지 받았으면서 왜 딸기까지 사달라고 하는지, 할머니의 장사 속에 살짝 실망을 하며 그 곳을 떠났는데 그게 두고 두고 내 마음에 부끄러움으로 남아 지금까지 나를 아프게 한다.
왜 나는 그때 그 할머니의 산딸기를 사 드리지 못했을까?
그래봤자 한국 돈으로 많아야 1,2천원일 것인데.
나란 인간은 순간 아둔하고 부족하여 꼭 이렇게 뒤 늦은 후회를 한다.
다행이라면 아홉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하도 예뻐 산딸기를 두 컵 사주었는데 그 아이의 해 맑은 미소가 지금까지 눈에 선하다.
엄마 사랑인가 하는 한국 식당을 찾아 돌솥 밥을 시켰다.
그리고 현정샘이 신주 단지 모시 듯 안고 다닌 송이 버섯을 손질 해 구워 줄 것을 부탁하니(30위안) 가스랜지와 불판, 소금, 참기름, 간장에다 버섯을 곱게 썰어 내 온다. 얼마나 맛이 있던지 우리의 젓가락질은 바빠졌고 그 많던 송이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옥상(금숙샘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이 자기는 버섯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지 몰랐다고 하니, 나 역시도 그렇게 맛있는 송이는 처음이다.
11시 50분에 나파하이에서 자전거 트래킹을 하고 돌아온 박성문님과 진주 조선생님을 로비에서 만나 리장 행 버스를 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리장 행 버스에서 바라보는 샹그릴라의 풍경이 참 아름답다.
무슨 버스 투어를 하는 기분이다.
샹그릴라는 윈난 곳 곳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치 감상은 두어 시간 후에 깨어지고 말았다.
가파른 절벽 위로 도로가 나 있는데, 그 위험한 곳을 곡예 운전에다 끼어들기를 밥 먹듯 하는 중국 운전자들의 운전 행태가 우리의 잠을 달아나게 하였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바이벌 경주를 지켜보게 했다.
우리 버스 운전 기사님은 부처님 반 토막인지 그렇게 막무가내로 끼어 드는 차들에 짜증 한 번 내지 않을 뿐 아니라 표정에 미동조차 없었다.
우리 나라 같으면 Ten Baby , Dog Baby, ㅈ을 포함한 욕이 난무 했을 것이다. ㅋㅋ
도로에 사고가 두건이나 나서 5시간 정도 만에 리장에 도착했다.
터미널에 도착하는 순간 우리 일행이 운전 기사님에게 박수를 보냈는데 그는 그 박수의 의미를 알까?
숙소에서 일행과 합류하여 저녁을 먹은 후 리장 야경에 다시 도전장을 냈다.
사실 내가 기대한 리장을 이렇게 실망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을 뚫고 리장의 밤을 헤매고 다녔다.
은은한 불빛과 기와 지붕의 선들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인파를 피해 조용한 곳으로 들어서니 학교가 있었는데 운동장을 바라보며 계단에 앉아 준비해 간 망고스틴을 먹으며 즐겁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일행 중 일부는 숙소로 돌아가고 나와 따거, 주영, 문주, 현정샘은 다시 인파 속으로 빠져 들어 리장의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너무 무리해서인지 문주샘이 거의 방전이 되어 에그타르트를 먹인 후에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8월 4일(11일째)
인상리장과 운삼평
따거와 함께 새벽의 리장 고성의 속살을 누볐다.
골목길을 들어서니 객잔에서 여행객들이 캐리어를 끌며 조용히 빠져 나오고 있었고, 밤새 어질러진 골목을 청소부들이 싸리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수로에 빠져 있는 쓰레기를 건져 내는 청소부의 모습도 재미있었다.
골목길을 계속 가다 우연히 센과 치이로의 행방 불명을 통해 내가 상상한 리장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어 기분이 좋아진 따거와 나는 마구 사진을 찍어댔다.
이렇게 결국 리장과 만나게 되었구나. 우하하!!!
아침 식사 후에 빵차를 대절해 총 21명이 옥룡설산에 가게 되었다.
인상리장 공연을 본 후에 운삼평을 보는 일정이었는데 옥룡설산 정상에 서 보기를 기대했던 부산 두 정선생님의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거장 장위모우 감독이 제작한 인상 리장 공연은 두고 두고 기억에 남을 만 하였다.
웅장한 옥룡설산을 배경으로 오픈된 무대에서 500명 가까운 소수 민족이 보여 준 무대는 내 세포속 DNA 에 내재된 원시적 생명력과 에너지로 가슴이 뛰는 벅찬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혼신을 다해 춤을 추는 젊은 남자들의 힘찬 에너지가 북소리와 함께 내 영혼을 흔들었다.
공연을 보는 도중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는데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운삼평이라...
운삼평을 보기 위해 쓴 경비가 보호기금 포함 300위안이 넘었는데 이미 비타하이를 본 우리에게 그곳은 가격 대비 그렇게 만족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전동차를 타지 않고, 계속 인원 수 21명을 세는 그 아줌마의 수법에 걸려들지 않고, 자신의 속도대로 천천히 트래킹하며 그 많고 어여뻤던 들꽃을 보았더라면 행복했을 것이다.
백수하는 백수대에 비해 규모도 크고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인위적인 맛이 강해 별 감흥이 나지 않았다.
우리 21명은 중국 아줌마에 이끌려 너무도 이른 시간에 허탈한 기분으로 숙소로 돌아왔는데 그 날 중국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같은 여행객의 입장으로 즐기지도 못하고 우리에게 시달린 수원 중국어 선생님께 미안한 마음이 가장 컸다.
예상치도 않았던 중국 1일 패키지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해 우리 일행은 모두 뻗어 버렸다.
이래서 패키지 여행은 다시는 못 할 것 같다는 누군가의 말에 모두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시장의 허름한 꼬지집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맥주를 많이 마셨다. 다섯명이 맥주 네병을 마셨으니 우리에겐 깨나 과한 음주였다.
다시 리장의 야경에 도전했다.
오늘은 딸에게 줄 선물을 사야겠기에 현정샘이 산 깜찍한 가죽 가방을 찾아 나섰다.
평소 길눈이 어두운 내가 지금 앞장 서서 길을 찾고 있으니, 여행 내내 길잡이 역할을 한 내가 참 신기하기만 하다.
드디어 혼잡한 인파를 뚫고 가게를 찾아 우리 애 가방을 샀다.
순애샘, 현정샘, 경숙샘, 대엽샘도 모두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멋진 가방들을 하나 씩 사서 가격 대비 몇 배의 즐거운 쇼핑 시간이 되었다.
선물 하나에 기쁨을 가슴 가득 안고 비오는 리장 고성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8월 5일(12일째)
아! 못 잊을 수허고성이여!!
원래 계획은 그냥 자는 거였다.
근데 새벽의 리장 고성이 우리를 유혹해 따거와 문주, 이렇게 셋이서 또 리장 고성에 가게 되었다.
비를 피해 리장 고성의 나시 문화 극장의 대문 앞에 퍼질러 앉아 KFC 원두 커피와 베이커리에서 사온 빵을 먹었는데, 장미 꿀빵을 입에 넣는 순간 입 안 가득 퍼지는 장미향과 진한 꿀맛에 우리 셋은 그만 감격해 버렸다.
나중에 다른 곳에서 또 장미 꿀 빵을 샀는데 그 맛이 나지 않아, 그 때 좀 많이 사서 일행들에게 맛보게 할 걸 하는 후회를 하게 한 특별한 맛이었다.
센과 치이로가 나올 것만 같은 맑은 수로가 흐르는 멋진 풍경의 골목에 도착하니 문주샘이 감격을 한다. 연신 감탄을 하는 문주샘의 사진을 많이 찍어 주었다. 떠나려고 하니 리장이 가슴에 파고든다. 처음엔 실망하고 샹그릴라에서 다시 돌아오기 싫었는데 이렇게 이별하려 하니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오늘은 리장에서의 마지막 날.
택시를 나누어 타고 수허 고성으로 향했다.
별로 멀지 않은 수허고성 까지의 길은 험했다.
왜?
똘똘한 우리를 사기 쳐 먹으려는 나뿐 중국 운전 기사와 맞짱 뜨느라고.
이 인간이 순진한 얼굴로 계속 이상한 수작을 걸더니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수허고성이 아니고 보석 파는 집.
영리하고 총명한(ㅋㅋ) 우린 바로 사태를 파악하고 다시 차를 돌려 수허고성으로 향했는데 그 기사의 실망한 얼굴을 한 대 쳐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수많은 사연과 곡절 끝에(그 사건은 밝히지 않겠음. 생각하면 분하고 짜증이 뻗쳐 정신 건강에 해로울 것 같아서. ㅠㅠ)수허고성에서 먼저 간 일행과 해우했는데 그녀들 역시 우여곡절 끝에 도착해 있었다.
비오다 그치다를 반복하는 수허고성을 돌아봤다. 수허고성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리장고성 보다 200년이 더 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조용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곳이다.
리장고성에서 누릴 수 없었던 여유와 한가로움에 우리 모두 수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잠시 정신줄을 놓고 다녀도 될 만한 아주 편안하고 조용한 거리를 마음껏 천천히 음미하며 걸었다. 한적하기도 했지만 고성이 아름다워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니 마지막 리장을 여기로 선택한 것은 참으로 잘 한 일이다.
배가 고파 점심을 먹기 위해 음식점 거리로 갔는데 나시 전통 음식점이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분위기도 괜찮고 장소도 널찍하여 편안하게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자리를 잡았는데 그 주인이 참 친절하였다.
그러나 나시 음식점에서 시킨 것은 모두 중국 음식.ㅎㅎ
그런데 가장 맛있는 중국 음식을 거기서 맛 보았으니 우리 팀의 얼굴에는 어느새 행복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또 어디 있으리.
굳이 대만 영화 음식남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맛있는 차를 계속 부어 마시고 한류 팬이라는 주인 아줌마와 소박하고 어여쁜 미소의 아가씨(주인아줌마의 딸로 보임)의 친절로 더 즐거운 점심 시간을 보내고 포만감으로 가득 찬 배를 안고 다시 길을 나섰다.
부산의 두 정선생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사면정을 본 후 고성 구석 구석을 누비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윈난 커피 판매점.
거기서 우리는 진열된 일부 품목의 커피를 싹쓸이 했는데, 한 쪽에 커피를 마시고 쉴 수 있는 테이블이 마련 되어 있어 마치 카페를 우리가 전세를 낸 것처럼 10명 모두가 퍼질러 앉아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분위기가 어느 카페 못지않게 멋진데다가 귀여운 종업원 총각이 계속 맛있는 커피를 서빙 해 줘서 우리는 여러 가지 커피를 맛 보며 즐거운 수다 타임을 가졌다.
공항으로 갈 시각이 가까워져 어제 마트에서 장을 본 세사람은 바로 숙소로 가고 나머지 일곱 명은 리장 고성 입구에 있는 대형 마트로 향했다.
현금이 다 떨어진 세사람이 돈을 인출하러 가고 우리는 마트에서 각자 사갈 물건을 골랐다. 나는 꿀을 사 가기로 했다. 사시사철 온갖 꽃이 피는 윈난이라면 꿀이 좋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여유 있게 마트를 나서서 숙소로 향했다.
길을 잘 아는 나 보고 앞장을 서라기에 그리했는데 그게 사건의 시작이었다.
문제는 내가 너무 걸음이 빨랐다는 것이다.
숙소에 도착해서 가지고 온 꿀의 포장을 해체해 옷 사이에 넣고 짐을 정리하려는데 누군가가 옥상이 안 왔다는 것이다.
처음엔 별 걱정하지 않았다. 며칠간 늘 다녔던 길이라 천천히 걸어 온다고 좀 늦는 것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옥상은 계속 안 나타났다. 공항을 가기 위해 빵차가 온다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옥상을 찾으러 주영과 밖으로 나왔다. 비가 쏟아지고 있어 우산을 든 주영이 먼저 찾아 나서고 난 다시 우산을 들고 뒤 따라 나갔다.
서울 사모님이 쏟아지는 빗속을 부러진 우산을 쓰고 달려가는 나의 모습을 보셨다는데 아마 영화의 한 장면이었으리라.
왜 그때 소나기는 그렇게 쏟아졌던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려 그랬던 것인지, 아무튼 주영과 나는 옥상을 외쳐 부르며 거리를 헤맸다.
그러다 옥상과 전화 연결이 되었는데 음성이 무척 떨리는데다 현재 있는 장소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서 생각한 끝에 리장 고성 앞 사거리로 오라고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옥상은 오지 않는다.
설마 이 곳을 모르진 않겠지.
주영이 저쪽 길로 가서 찾아 보겠다고 하더니 잠시 후 반가운 소리가 들린다.
“선생님! 옥상을 찾았어요!”
비에 홀딱 젖은 채 시장 본 짐을 몇 꾸러미나 안고 하얗게 질린 옥상이 걸어 온다.
반가운 마음에 짐을 빼앗듯이 나누어 들고 숙소로 향해 바삐 걷는다.
내 다시 옥상을 놓치지 않으리라.
걸으며 계속 뒤를 돌아보니 주영이 제일 끝에서 옥상을 몰아 오고 있다. ㅋㅋ
도착하니 빵차에 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일행이 박수를 치며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른다.
숨을 몰아쉬며 빵차에 타자 바로 공항으로 출발.
우리를 기다려주신 케이씨님과 박성문님, 진주 조선생님이 오히려 우리를 위로한다. 참 고마운 분들이다.
옥상! 여행의 반전을 위해, 우리에게 진한 기억을 남게 해 주려고 일부로 길을 잃은 건 아니죠?
따거는 옥상에게 청심환을 먹여야겠단다. 그 마음이 참 어여쁘다.
공항 가는 차 안에서 조용히 옥상의 손을 잡아 보았다.
같은 학교에 2년 가까이 근무하며 그녀의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는데.
공항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분들과 우리 일행이 쏜 과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10명이 우르르 몰려 다녀 혹 다른 분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미안함을 상쇄할 요량으로 과일을 냈는데 그게 공항에 도착한 것이다.
줄을 서서 과일을 허겁지겁 먹다 보니 케이씨님과 이별할 시간이 되었다.
그 새 정이 들었는지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케이씨님과 사진을 찍고 내년 여름 실크로드를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리장에서 쿤밍 가는 비행기 안에서 긴장이 풀린 나는 거의 기절 수준으로 잠에 빠졌는데 그래도 나중에 잠이 깨어 온갖 구름을 본 것은 이번 여행이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쿤밍 공항에 잠시 내려 대기를 하다 상해 가는 비행기를 탔다.
거의 네시간에 걸친 긴 비행 시간이었는데 옆자리에 앉은 서울 사모님과 이야기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첫눈에 반해 내 마음을 연 분이었는데 이렇게 나란히 앉아 여행의 마지막을 정리하게 되니 참 고맙고 소중한 인연이다.
내년 실크로드에서 다시 재회하기를 간절히 빌며 그때까지 두 분 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시길 기원해본다.
새벽 한시가 다 되어 상해 홍차오 근처 숙소인 한팅 호텔에 도착하여 한시 삼십분 쯤에 잠이 들었다. 여기는 한증막이다. 숨이 턱 막힌다. 에어컨을 약하게 틀고 잠이 든다.
8월 6일(13일째)
다시 부산으로! 일상으로!!
새벽에 따거가 일어나 부스럭 대는 통에 나도 잠이 깨어 버렸다.
에어컨을 밤새 튼 때문인지 재채기가 터지고 콧물이 나온다.
동네 구경을 할 요량으로 호텔을 나섰는데 아침 6시인데도 한증막이다.
10분쯤 걷다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로비에 진주 조선생님이 컵라면을 사들고 앉아 있었다.
잠시 우리도 앉아 몇마디 인사를 나누고 일어서려니 종업원이 우리를 부른다.
조식이 나온단다.
우씨! 그런 이야기는 어젯밤 체크인 할 때 해 줬어야지.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이방 저방 돌아다녔다.
4층에서 5층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갈 때 더위에 숨이 막혔다.
다행이 서울 유재명님을 만나 서울팀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 달라고 부탁드렸다.(우리는 부산팀 방 번호 밖에 몰라서^^)
그것도 모르고 아침을 사 먹고 왔다고 유재명님과 정헌룡님은 툴 툴 대신다.
나중에 조식을 먹으로 식당에 가니 두분 다 음식을 드시고 있다.ㅋㅋ
유재명님 말씀 하시길 “여행 중에는 잘 먹어야 되는거야!”(맞습니다. 맞고요.^^)
아침 먹고 나가니 서울 팀은 벌써 떠나고 없다.
우리는 출발 시간이 11시라 책도 읽고 잠도 자고 하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따거가 준 감기약 때문인지 감기 기운이 싹 사라졌다.
민첩하고 상황 판단이 빠른 정신영님 덕분에 우리는 편하고 저렴한 가격으로 자가용을 타고 공항에 갈 수 있었다.(정선생님! 고마워요!!)
탑승 수속을 마친 뒤 상해 공항 면세점을 둘러 보니 한국 보다 가격도 비싸고 물건도 다양하지 않다.
탑승 게이트에서 쉬고 있으니 시간 되어 우리 일행이 모여든다.
그 때 우리의 맏언니, 순규 샘이 이번 여행에서 대장 하느라 수고 했다며 고디바 초콜릿을 내미시고 일행들이 박수를 친다.
사실 가족들 끼리 있을 땐 나 먹는다고 정신이 없고, 멍 때리며 여행에 푹 빠져 남편 믿고 정신 줄 놓고 다녔는데, 일행의 리더가 되다 보니 항상 말을 많이 하게 되어 좀 피곤하기는 했다. 먹을 때도 못 먹는 사람 없나 살펴야 했고 다른 팀과의 조화를 위해 평소 친한 사람한테는 까불이지만 낯가림이 심한 내가 사교성을 발휘해야 했으며, 내가 입 다물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내가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고 불편해 할까봐 필요 이상으로 말을 많이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피곤함 보다도 함께 한 즐거움이 훨씬 더 컸다.
혼자 느낄 걸 아홉 명이 맞장구쳐 주고 공감해 주니 그 기쁨이 아홉 배가 되었다.
원래 내가 좋아해서 여행을 함께 한 분들이었는데 이번 여행으로 이 사람들이 더 좋아져 버렸다.
배려와 따뜻함, 그리고 양보로 열명이 여행 내내 분란 한 번 없이 사이 좋게 지냈으니 이 분들의 인격과 사람 됨됨이에 다시 한번 감동할 뿐이다.
그래서 또 우리는 내년 실크로드를 함께 꿈꾼다.
상해에서 부산까지가 중국 내 이동 보다 훨씬 시간이 짧다.
점심 좀 먹고 커피 한 잔 마시고 나니 어느새 내릴 준비를 하란다.
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찾고 각 자 아쉬운 인사를 하고 집을 향한다.
우리 아파트 정선생님 남편분의 차를 타고 편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이웃을 잘 두니 참 편하다.(어여쁜 정선생님!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2013년 나의 여름의 여행이 끝이 났다.
여행을 끝내고 나니 함께 한 사람들이 사무치게 내 가슴에 남는다.
제일 맏언니 순규샘.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매력적인 외모와 멋진 포즈의 소유자로 여행 내내 자진 찍사가 되어 우리가 사진에서 해방되어 편하게 여행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 가장 맏언니로서 까부는 동생들을 귀엽게 봐 주셔서 고마워요.
둘째 언니 순애샘.
안과 밖이 모두 매력으로 똘똘 뭉친 분으로 늘 자상함과 따뜻한 배려로 여행 내내 우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 샘은 상담 교사하면 참 잘 할 것 같다.
셋째 언니 경숙샘.
한마디로 진국인 샘. 몇마디 말씀은 안하지만 하는 말이 모두 정답인 선생님.
발령 첫 학교 때 만나 그 인연이 다시 동주에서 이어졌는데 정말로 내가 존경하는 분. 평소 표현 안하는 선생님이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감탄하는 모습에 내가 더 행복했다오.
넷째 언니 따거.
한국에서는 시크공주로 불렸으나 윈난에서는 따거로 불린 우리 형아.ㅋㅋ
우리 여행의 중심을 잡아주었고 내가 정확하고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준 분. 앞으로 내 여행 파트너로 모시고 싶은 멋진 분. 겉은 시크하지만 마음은 그지없이 따뜻한 분. 나의 시크공주님! 나의 따거!
다섯째 언니 대엽샘.
인도에서의 인연이 윈난으로 이어졌는데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싶은 매력적인 분.평소 묵직한 분이 가끔씩 던진 말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대엽샘의 돌직구가 그리워질거예요. 윈난스린에서 그분이 오셔서 우리를 가이드 해 준 덕에 윈난스린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게 되어 정말로 고마웠어요.
내 친구 옥상.
존재감 없음이 오히려 가장 큰 존재감인 사람.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늘 우리를 착하게 만드는 분. 함께 있으면 그냥 내가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은 분. 만난 지 2년도 채 안되었지만 인도, 인천,강화도, 청도, 윈난, 그리고 며칠 후 강원도까지 늘 나와 함께인 사람.
내 큰 동생 문주샘.
가녀린 외모와 저질 체력으로 여행 전 걱정을 많이 했지만 막상 함께 다녀보니 호기심도 많고 감수성도 풍부해 여행 분위기를 업 시켜 준 귀염둥이. 왜 나는 문주만 보면 까불이 본능이 발동하는지 몰라. 그녀는 나의 엔돌핀. 여행 내내 우리를 즐겁게 해준 나와 쌍벽을 이루는 까불이.
내 둘째 동생 주영샘.
이번 여행이 아니었다면 우린 그녀의 진가를 반에 반도 못 알아 봤을 것 같다.
능숙한 영어 뿐 아니라 중국어로 여행을 편안하게 이끈 우리의 통역사.
무수리 본능으로 문주 공주를 여행 내내 잘 보필하고 마이너스의 손 문주 공주가 저질러 놓은 일을 마이더스의 손으로 수습했으니 그대는 어찌 우리의 보물이 아니리.
우리 막내 현정샘.
거의 엄마 나이인 언니들 따라 20대 꽃띠 처녀가 함께 여행 갈 마음이 생겼다는 게 신기한 사람. 또래 친구도 없는데 함께 와서 총무하느라 참 고생이 많았다. 가만히 보기만 해도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 쇼핑 신이 강림하셔서 그녀를 흔들 때 마다 사고 싶다는 욕망과 주머니 사정 사이에서 고민하여 언니들을 웃게 하던 아가씨.
그녀가 리장에서 남긴 명언.
“저 카드 되는 여자예요.ㅋㅋ”
이렇게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은 추억이 되어 흘러가고 대신 사람이 남았다.
잠시 꿈을 꾸고 온 듯한 윈난에서의 한 여름.
우리의 총대장 케이씨님, 서울 유선생님 내외분, 여수 장선생님 내외분, 수원 4인방, 부산 초등 4인방, 진주 조선생님, 서울 박선생님, 부산 두 정선생님, 그리고 중국에 유학 오신 두 분!
함께 해서 정말 고맙고 행복했어요.
함께 한 분들과 또 어느 지구별을 떠 돌다 만날 인연도 있으리라.
살아 있음이 행복하고, 사람으로 태어나서 고맙다.
한여름 밤의 꿈, 윈난!
윈난 여행을 통해서 내가 더 향기롭고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 기쁘고 또 기!쁘!!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가보고 싶은곳 1순위 ㅎㅎㅎㅎㅎ
똘똘하고 빤짝 빤짝하신 심샘 글이 올라왔네요.같이하신 샘들한테 안부 전해 주셔요.
인상 리장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여독은 다 풀렸는지요? 함께 해서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저희들을 배려해주신 그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인연이 되어 또 다른 여행지에서 뵙게 되길 바랍니다.
사주신 아침 맛있게 먹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
성쌤 말마따나 어찌 이리도 다양한 재주를 가졌을까?
그날 그날의 여행기가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아주 생생하게 기록으로 접하니 얼마되지 않은 시간이 벌써 추억으로 자리매김 하네요.
우리 멋진 재란쌤!
당신을 비롯한 여러분들과 함께 한 시간이 진정한 힐링이요, 행복이었습니다,....^^
덕분에 여행 잘하고 일상으로 돌아가 살려니 정말 덥섭니다. 같이 했던 모든 분들 건강하게 여름 잘 보내셔요.감사했습니다.
부산도 얼마나 덥던지 등산도 못 가고 방콕만 하고 있습니다. 3시간 걸리는 호도협 계곡을 1시간 30분 만에 주파한 그 체력이 부럽습니다. 비타하이와 석하설산에서 보여주신 그 매너있는 모습 우리 모두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내고향 진주~~~체육샘!
진주는 더 덥죠?
마지막 여름 잘 보내소서...
아니 재란 공주 도대체 못하는 것이 무엇이여? 이렇게 재미난 여행기를 올리다니 샘 덕분에 다시 한번 윈난의 풍경들이 눈앞에 아련히 다시 떠오르네요 우리 다시 한번 뭉쳐 내년 실크로드로 가보아요
어떻게 같은 아파트 주민이 같은 날 떠나게 되었을까요?
반짝반짝 빛나는 여행기 잘 보았습니다. 학~~~실하네요...ㅋㅋ
어여쁘다 해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샘과 난 윈난이 이어 준 인연. 같은 아파트 살면서도 여지껏 모르다가 이렇게 13일을 함께 보내게 됐으니...이제 친하게 지내라는 운명?ㅋㅋ
3년 전 겨울에 케이씨 따라 갔었는데, 호토협 트레킹 풍광이 너무 좋아 닉네임을 호도협으로 바꾸었답니다.
다시금 운남을 상기주켜 준 여행기에 감솨... 다음 번에는 여름에 가서 송이 버섯 많이 먹고 싶네요.
찜통 대구에서 시원하게 감상하고 갑니다. ^~^
와우, 새록새록 추억이 되살아나니 또 행복감을 주는 사막별님.
글 속에 살아나는 함께 했던 분들의 캐릭터들... 그립군요.
다들 건강하게 일상 복귀 성공하셨죠?
부족한 저희의 자충우돌을 푸근하게 다정하게 봐 주셔서 감사했고, 함께 함이 행복했습니다.
윈난 앓이로 홀로 푹~빠져 그 곳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동안 사막별 그대는 또 하나의 빛을 발사해 행복을 나누고 있었네요*^*
한수 또 배웁니다. 13일간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제 삶의 감동의 순간으로 남게 해주시고 좋은 인연 맺게 해 주어 넘 감싸해요~ 복 받을거예요 아니 벌써 복 받고 있죠~제가 퀵 배송 했거든요 복 ㅅ ㅠ~~~ㅇ
귓전을 울려오는 '따그'소리와 눈에 선한 그 무리들의 모습이 그립네요. 개성 강한 언니야들도 ...
더 행복할 수 있는 내일을 생각하며 2013 윈난팀 홧팅!!
글을 참 재미있게 잘 쓰시는 분 . 누군지 만나 보고 싶은 마음 ! 가보았던 곳이지만 다시 가본듯 잘 읽었습니다.^^
이번에 17박 18일 일정으로 윈난 동행했던 분들과 실크로드 갑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구요.
내년 여름엔 22일 동티벳 코스 가려는데 인연이 있으면 함께 하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