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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공예의 흐름
미술강좌
최공호 - 마사박물관장
Ⅰ.문제의 제기
Ⅱ.근대의 공예구조
Ⅲ. 근대의 공예관
Ⅳ. 현대공예의 전개
1. 해방공간의 공예 : 1945-1953년
2. 전후의 공예재건과 개인전 활동: 1954-1959년
3. 디자인과의 결별, 새 진로의 선택 : 1960년대
4. 전통과 현대공예의 영역 분점 ; 1970년대
5. 더욱 심화된 조형과 기능의 이원구조 ; 1980년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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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문제의 제기
한국미술의 가치를 논할 때 공예는 늘 그 중심축에 놓일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었다. 문명적 관점에서는 물론 미술사에 서 수행해온 역할이 '공예의 나라'라는 명성에 걸맞은 것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전통미술의 발전이 공예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사실 자체가 우리 미술사의 남다른 특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공예를 말할 때 우리는 늘 혼란에 빠지기 일쑤 이다. 현대공예의 구조가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울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공예계 내부에서마저 인식의 보 편적 규준을 마련하지 못한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고 극복해보려는 노력조차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 더욱 심각하다. 그저 관성적인 제작행위가 각종 첨단의 서구 미술사조를 빌어 난무할 뿐이다. 또한 오늘은 물론 과거 어느 시기에도 이러한 근본 문제를 진지한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본적 조차 변변이 없었다는 사실이 한국 공예의 오늘의 실상을 여실히 말해 준다.
우리 공예의 현실을 여기에 이르게 한 원인은 구조적인 관점에 서 면밀하게 관찰되어야 할 것이다. 빈곤한 역사의식으로 근대화 과정을 잘못 주도했던 세력과 공예 담당층, 해방이후의 공예상황 을 계도했던 일군의 공예가들은 물론, 오늘날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우리조차도 이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구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른 진단이 치료의 첫걸음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우리 시대 공예의 산적한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문제의 핵심을 명확하게 분석해내고 공감하는 일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서는 공예담당층의 전향적인 인식태도와 함께 오늘의 시대적 과제를 올바로 파악하고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페러다임의 구축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그리고 그 해법은 근대기에 대한 철저하고도 비판적인 검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근대기가 식민지라는 특수한 타율적 조건 속에서 비주체적으로 주도됨으로써 오늘의 제반 문제를 직접 배태한 인과(因果)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해방이후의 공예사를 논하기에 앞서, 19세기 말과 일제시기의 공예를 수요 담당층의 인식과 제작활동의 종합적 환경을 통한 구조적인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통하여 근대 공예계는 수구적 전통에 기반을 둔 [이왕직미술품제작소]와 식민지적 개화 세력에 의해 추진된 [선전]을 두 축으로 한 이원구조의 틀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이 구조는 오늘의 전승공예 분야와 현대공예로 각각 계승되면서 수구적 전통의 계승과 서구 모더니즘 미의식의 수용, 전통과 현대, 특수와 보편의 균형문제, 정체성의 시비와 같은 현대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여러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이 두 개의 중심축은 당시의 주도이념이었던 위정척사(衛正斥邪), 동도서기(東道西器), 급진 개화론의 정치적 부침에 따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이들 개화정국의 주도이념에 대한 중요한 실천형식의 구실을 수행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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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근대의 공예구조
근대기의 한국 공예의 흐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제작활동 의 목표가 실용에서 미술공예로 바뀌어간 과정이라 할 수 있 다. 그 동인(動因)은 공예계 내부의 자발적인 것이었다기 보다 는 서구적 개화의 추진과정과 맞물려 달라진 사회 경제적 토대 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부득이한 상황인식에서 직접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실용과 조형의 고전적 결합요소가 균형 을 상실한 채 가치의 중심이 점차 조형쪽에 치우치게 된 것으 로 이해 된다.
이러한 변화를 읽어내려면 공예활동의 존립을 좌우하는 제작구조와 수요기반이 전반적으로 해체되고 새로운 틀로 재편되는 상황에 수반하여 전개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문물과 제작기계의 수용을 최대의 관건으로 삼았던 개화기의 상황에서, 이와 직접 관련된 생활구조의 변혁의 중심권에 위치해 있던 공예분야는, 개화세력이 추진한 정책의 향배에 따라 제작활동이 크게 좌우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 이전 시기에는 국가의 기간산업으로서 지원과 통제를 함께 받았던 공예분야가, 개화와 함께 기계 생산체제의 수요 점유율이 대폭 증대되자, 수요기반을 상실한 채 수공예기술을 유지하면서 점차 창작미술의 한 분야로 성격을 탈바꿈해 갔던 것이다.
제작의 전과정을 수공예 방식에 의존해 온 공예분야로서는 기계생산 체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음은 물론, 무엇보다도 급속하게 추진된 생활환경의 개량추세가 이 분야를 크게 위축시킨 주된 요인이었다. 공예환경의 급속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당시 공예 담당층의 의식은 변화의 진폭에 크게 못미쳤기 때문이다. 더욱이 제작의 주체인 장인들은 오랜 기간을 거쳐야 체득할 수 있는 기술의 속성에 관련된 체질적 한계로 인하여 스스로 기계제작 방식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예관을 주도적으로 개진했던 이 무렵의 지식인들 또한 '탈봉건 근대화(脫封建 近代化)'라는 시대적 과제보다도, 수구와 개화의 이념적인 명분에 매몰되어 급박한 시대의 변화 추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세계관을 제시하지 못한 채 인식 수준이 계몽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
개항과 수호조약의 체결, 식민지적 개화의 순으로 급진전된 근대 초기의 시대적 추이에 따라 표명된 위정척사(衛正斥邪), 동도서기(東道西器), 급진개화론이 근대화 정책의 효율적인 주 도이념 구실을 수행하지는 못하였던 반면, 공예분야에 대해서 는 제작활동의 기본구조를 바꾸는 등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 던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구한국 황실에 의해 설립된 [미술품 제작소]와 개화의 주도세력에 의한 [선전] 공예부의 존재는, 근대 초기의 양대 해게모니였던 수구와 개화적 입장을 문화적 으로 구현한 구체적인 실천형식으로서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위정척사파는 물론 동도서기의 절충론 등 근본적으로 수구적 입장에 같은 뿌리를 둔 민족 지식인층의 공유된 시국관을 한데 통합하면서 기계를 배제한 수공예 기술전통의 복원을 적극 표방하였던 [미술품제작소]에서는 수구적 전통을,식민지적 개화의 추진세력에 의한 [선전]은 급진 개화파의 주도이념을 실천하면서 새로운 미술로서의 공예를 각각 표방하게 되어 이 두 가지의 양립된 제작활동 기반이 수구와 개화라는 이원적인 공예구조의 형성에 토대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형성된 구조가 근대기는 물론 해방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미술품제작소]의 공예전통은 오늘의 전승공예 분야로, [선전]의 미술공예는 실험적인 현대공예의 모태로서 각각 계승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양립구조가 상호 보완과 통합적인 관계로서 작용하기보다는 대립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해 옴으로써, 전승공예 분야의 유물화(遺物化) 현상과 현대공예의 탐신주의(探新主義)나 무비판적인 서양 추수적(追隨的) 경향 등 부정적인 체질 형성에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공예전통의 수립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점은 구조적인 한계로 지적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근대기에 형성된 공예계의 이원구조는 식민지 시기에 왜곡된 공예관과 함께 공예의 근대적 실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무렵 사회 경제적 토대를 지양하고 미술 문화적 토대로 제작기반을 전환한 이유와 동기가 무엇인지,그리고 근대기 정국의 주도이념이 공예활동에 구체적으로 어떤 구실을 수행하였고 그 한계는 무엇이며, 나아가 이들 공예환경의 변환요인이 공예양식에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이와 같은 연구과제들은 근대기의 공예적 실상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해방 이후 오늘의 공예계가 당면한 다양한 문제의 핵심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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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근대의 공예관
수구와 중도, 개화론의 순으로 정책의 주도이념이 교체되었 던 근대기의 정국 추이에 수반하여 표명된 이무렵 지식인들의 공예관은 공예의 근대적 실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건이 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작가 개인의 적극적인 의 식의 표출 대상이라기보다 쓸모에 기초한 사회적 기능의 창출 이 관건이었던 당시의 공예품 자체에서 형식상의 뚜렷한 시대 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작가의 위 치를 확보하지 못한 이 시기 장인들의 제작활동 방향이 사회적 변화와 관행화된 수요층의 취향에 의해 계도되는 봉건적인 제 작환경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구와 개화라는 논란의 본질은 결국 서양의 근대적 문물과 제작기계의 수용이라는 핵심적 현안을 두고 배척과 수용으로 대립한 견해차이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 지식인의 인식과 입장의 향배에 따른 당시의 공예품 제작환경과 수요구조에 심대하고 직접적인 파급효과를 미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공예활동의 기반을 이루는 당시의 공예관 등 드러나지 않은 공예환경의 변모가 양식의 변화에 앞서 검토해야할 중요한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근대 공예의 인식기반 형성에 중심축의 구실을 한 수구파와 개화파로 양립된 시대인식은 명분과 현실을 사이에 두고 다시 위정척사 - 동도서기 - 급진 개화파로 각각 관점을 달리하면서 전개되었다. 하지만 동도서기의 중도적 입장이 수구파에 같은 뿌리를 둔 현실적인 대응논리였다고 볼 때 그 이념은 결국 수구론과 개화론으로 압축된다.
이와 같은 본격적인 근대적 공예관에 앞서 18세기 말부터 홍대용(洪大用),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등을 중심으 로 하여 물산의 흥업과 제작기술의 개량 등 상공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북학파 학자들의 견해는 당시의 공예적 인식과 관련하 여 관심을 끈다. 화이론(華夷論)을 명분으로 한 현실성 없는 북벌론에 매달려 있던 당시의 정치적 여건에서 '비록 오랑캐에 게라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워야 한다'는 현실인식을 토대로 하여 공예의 질적 향상과 수요 환경의 개량을 강조했던 이들의 견해는 당시로서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으나, 공예 여건의 개선 에 구체적인 파급효과를 미치지 못한 채 수구적인 위정척사론 에 밀려나고 말았다. 이들 북학파 학자들의 공예관은 중국을 숭모하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을 일부 극복하고 중국을 자국의 공예산업 발전을 위한 모델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비추어 근대적인 요소가 일부 엿보이는 주목되 는 움직임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청국의 선진문물에 너무 심취 한 나머지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고까지 역설 했던 점은, 공예적 여건의 변화에 기여하지 못한 점과 함께 근 본적인 한계를 드러내었다.
위정척사파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1876년에서 1894년에 이르기까지 10여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정부에서는 외세에 대응할 새로운 정책과 적절한 논리의 수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본과 청국의 선진제도와 함께 문물을 조속히 수용하는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1880년 대외관계를 전담할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통상사(通商司)와 각종 기계의 제조업무를 관장할 [기계사(器械司)] 등의 부서를 개설하는 한편, 일본과 중국, 미국 등에 사행원을 수차례 파견하면서 서양식 기계 등 신문물의 수용에 적극성을 띠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나 외세의 압력은 배격하되 서양의 과학기술만은 수용해야 하겠다는 이른바 동도서기 사상이 배태된 것이다.
동도서기론이 표면화된 것은 1882년 8월 5일에 고종이 내린 교서를 통해서 였다."...그들의 기계라면 이익이 되니 진실로 후생(厚生)에 이용될 수 있다면 무엇을 꺼리겠는가? 그들의 교 (敎)는 배척하고 기계는 본받으면 참으로 병행해도 이상함이 없을 것이다..." 고 한 교서의 내용은 그 동안 유림 일각에서 일고 있었던 동도서기 사상을 현실적인 명분론으로 승화시킨 계기가 되었고, 정부에서 추진한 근대화 정책의 이론적 기반구 실을 담당하게 되었다.(『고종실록』,18년,윤7월6일) 따라서 1880 년대 부터 1900년 경까지의 개혁은 동도서기파와 일부 개화당 인사들의 협력에 의해 추진되었으나 1895년 개화당의 박영효가 반역음모 협의를 받고 해외로 망명함으로써 이 후의 개혁은 당 분간 동도서기파에 의해 주도되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근대화의 주도이념은 동도서기에서 개화파로 주도권이 바뀌었다. 이와 같은 인식의 변화과정에서도 개화적 추세와 현저히 다른 이해관계에 놓인 구한국 황실에서는 수구적인 입장에서 [이왕직미술품제작소]를 설립 운영하면서 전통공예의 진작을 표방하는 등 봉건질서의 복원 여망을 강하게 표출하였다. 개화의 주체세력과는 상반된 처지에 놓여 있던 구한국 황실에서 개설한 이 시설은, 외세의 힘을 빌어서라도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급진개화파의 입장에 대해 문화적 차원에서 전개한 당시로서 최선의 대응이었다고 판단된다. 이무렵 민족 지식인층의 대외 인식에 한 주류를 형성하였던 동도서기론은 물론 수구적인 위정척사론까지도 포섭하는 공유된 시국관에 기반을 두고 그 설립이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왕직미술품제작소]의 설립을 통해 그동안 3단계로 진행되던 근대기의 대외인식론이 동도서기와 위정척사론을 통합하여 수구와 개화라는 명백한 이원구조로 틀지워 지면서, 선전 공예부 설립을 통해 본격화된 공예의 근대적 개화론에 대한 전통 수구적 입장의 천명이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을 모은다. 더욱이 1900년을 전후하여 산발적으로 개진되던 공예에 있어서의 동도서기, 급진 개화론 등 여러 갈래의 공예관이, 제작소의 설립을 계기로 하여 수구적 입장에선 민족주의 진영의 견해를 최초로 집약하였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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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현대공예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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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방공간의 공예 : 1945-1953년
공예에 있어서 연대기적 현대의 출발점으로 불리는 이 시기는 오랜 암흑의 터널을 벗어나 해방을 맞았으나 정치를 포함한 모든 국면에서 앞 시기의 식민지적 체질을 청산하지 못하여 과도기적 혼란을 거듭했다. 정치적 상황과 함께 공예적 환경도 크게 달라졌지만, 공예활동의 근거가 조선총독부 주최의 [선전(鮮展)]으로 대표되던 앞 시기와의 연장선에서 별다른 개혁을 모색하지 못한 채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였다.
첫째, 공예전통의 회복에 대한 일부의 노력이 없지 않았지만, 기계생산 매커니즘과 맞물린 산업디자인의 수용으로 수공예 분야의 개념 및 사회적 위상이 위축되면서 분야 내부의 혼란과 갈등을 증폭시켰다.
둘째, 공예계의 주도적 흐름이 선전에 대한 구체적인 반성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1949년 새로 창립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공예부로 계승되었으며,
셋째, 미군정기의 특수 수요에 부응하여 지방특산품이라는 명목으로 질이 떨어지는 각종 공예품들이 성행하였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우리나라에 디자인 개념이 최초로 도입된 것은 일본에서 유학했던 임숙재(任璹宰)가 1928년 『동아일보』에 2회에 걸쳐 '공예와 도안'이라는 글을 연재하면서 부터였다. '도안'으로 번역된 당시의 디자인(Design) 용어는 오늘날과 같이 정돈된 개념은 아닐지라도 "우리 의식주에 관한 제반 물건과 기물에 대하여 자기 두뇌에 착상되는 형상과 문양, 색채 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라 하여, 공예에 대한 개념과 함께 비교적 명확한 정의를 제시하였다. 뒤이어 1931년에는 임숙재보다 3년 늦게 동경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한 이순석(李順石)이 『동아일보』 강당에서 국내 최초의 [도안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공예와 도안(디자인)의 개념과 영역이 부분적으로나마 논의의 대상이 되는 듯 하였으나 일제 식민지시기라는 특수한 여건으로 인해 유보된 상태로 해방을 맞이했었다.
해방과 더불어 [조선미술건설본부](1945년8월 ; 이순석, 김봉용, 김정숙, 김영주, 김재석, 장선희, 정인호, 한홍택 등이 참여)와 11월에 창립된 [조선미술가협회]에 각각 공예부가 설치되었으며, 12월 27일에는 [조선산업미술가협회] (이완석, 이봉선, 유윤상, 유태현, 엄도만, 조병덕, 조능식, 한홍택, 홍순문, 홍남극 등이 참여)가, 이듬해인 1946년 5월에는 [조선상업미술가협회]가 각각 경쟁이라도 하듯 결성을 서둘렀다. [조선산업미술가협회]는 그 후 [대한산업미술가협회]로 명칭이 바뀌었고, 특히 1965년부터 매년 회원전과 공모전을 함께 개최해 오면서 국내의 미술단체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미군정청의 후원으로 [조선공예가협회] (회장: 김재석, 부회장: 강창규, 상무이사: 백태원 등)가 발족, 그 해 6월 덕수궁 석조전에서 나전칠기를 중심으로 한 제1회 [조선공예미술전]을 개최함으로써 공예분야로서는 해방 후 첫 단체전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1949년에는 한국 현대공예의 전개에 긍정과 부정의 요소를 함께 배태한 [국전]이 창설되었다. 초기부터 함께 설치된 공예부는 1942년 21회 [선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던 관주도의 공모전 형식이, 충분한 반성과 검증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그 구조와 체질을 그대로 이어받아 부활됨으로써 한국 현대공예사에 수많은 명암을 드리우게 된다. 더욱이 [국전] 초창기의 출품 경향은 비단 공예부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지만, 대부분 [선전] 출신 작가들이 해게모니를 쥐고 심사와 운영의 중심축을 그대로 옮겨왔음은 물론, 선전풍의 재현 및 확대재생산 구조를 고착시킴으로써 '선전 공예의 재판' 이라는 비난에 가까운 지적을 듣기도 했다.
제1회 [국전]의 공예부는 선전을 무대로 활동했던 강창규, 김재석, 이순석, 장기명 등에 의해 주도 되었고, 건칠화병을 출품한 목칠공예의 박철주가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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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후의 공예재건과 개인전 활동: 1954-1959년
전쟁의 폐허 속에서 각 분야가 재건을 위한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던 이 시기의 미술계는 전반적으로 활동이 저조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공예계에서는 앞 시기에 대두되었던 개념상의 혼란 양상이 각기 지향을 달리하는 각종 그룹의 난립과 함께 더욱 심화되었다.
이 시기의 공예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담론기반을 형성하지 못한 채 산업현장보다는 전시회 활동에만 의존하는 디자인 분야의 개념적 혼란에 맞물려 활동 방향을 다각도로 모색하던 공예 분야에서도 개념상의 혼란이 증폭된 점을 들 수 있다. 부분적으로는 서구의 공예사조를 수용하여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조형실험이 시도되는가 하면, 대학에 공예 전공이 개설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특히 대학의 공예과 신설은 장인적 체질과 경험에 의존해온 기존 제작구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음은 물론, 영역상의 분명한 존립기반을 구축하는 등 공예계에 활력소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근대기를 통해 기능 중심의 보수적 전통과 조형예술의 영역으로 틈이 갈라진 공예이념의 이원화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사회적 기능보다는 실험 중심의 개인적 창의성에 치우친 편향된 공예이념이 대학 교육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는 등 현대공예가 출발점에서부터 회복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대학이라는 특수한 환경의 구축 및 교육적 기본틀의 확립, 일반 장인들과의 일정한 차별성이 동시에 필요했던 당시의 공예계로서는, 이를 위해 외국의 사례를 적극적으로 참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적 특수성은 감안하지 않은 채 우리와 전혀 다른 풍토에서 배태된 서구의 현대적인 공예형식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공예와 산업디자인의 성공적인 제휴의 결과보다는 일부에서 시도하던 조형실험의 편향적인 모델을 자의적인 시각에서 적극 수용함으로써 아카데미즘화를 더욱 촉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현대공예와 전승공예의 간격은 점점 멀어졌고, 수요층으로부터도 스스로를 이탈시킴으로써 공예의 올바른 정체성(正體性)의 문제나 수요층의 정서에 기초한 사회적 존립기반의 회복이라는 중대한 시대적 과제는 해결의 길이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학출신 공예가들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엘리트주의로 스스로를 무장하였고, 공예계 전반에 새로운 형식미의 창출에만 몰두하는 탐신적인 경향을 더욱 심화시키는 한계를 드러냈던 점은 매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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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디자인과의 결별, 새 진로의 선택 : 1960년대
60년대의 한국은 4.19를 통해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면서 그동안의 부정적 행태에 대한 반성으로 사회 각분야에 걸친 개혁 의욕이 충만했던 시기였다. 더불어서 미술, 문화분야에 있어서도 정부의 전통문화 진흥정책에 힘입어 창작기풍의 진작, [디자인센터]의 창립,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의 발족, [국립현대미술관] 창설, 빈번한 국제전 진출과 국제교류전의 개최 등 과거 어느때보다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공예계에서도 이러한 분위기에 가세하여 1960년부터 1969년까지의 10년 동안 무려 50회가 넘는 개인전과 30회가 넘는 각종 단체전이 개최되었고, 10여개의 그룹이 새로이 조직되는 등 전례 없는 양적 팽창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공예계 전반에서 개인전이나 그룹전을 지향하는 추세는 산업디자인과 결별하고 미술공예로 나아가기 위한 본격적인 체비였던 셈이다.
한편, 60년대의 초반부터 [국전]의 제도적 모순에 대한 개혁론이 활발하게 제기되어 주목을 끈다. 1960년(7월22일) 『동아일보』는 미술계 인사들의 비판적인 인터뷰 기사를 싣고 논쟁을 유도했으며, 같은 해 10월13일자 『동아일보』에서도 이봉상이 "[국전]은 의식을 잃었다-퇴폐적인 방향을 지양하라"는 제목으로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였다. 특히 공예 분야에 대해서 그는, "장식적인 작품이 많이 등장하여 파격의 대우를 받는 것은 공예미술의 형식화를 조장하는 것이며, 이 나라의 공예 발전에 커다란 저해요인이다"고 맹공을 가했다.
이와 같은 몇 가지의 문제점이 지적되기는 했으나 몇몇 관련 단체의 설립을 계기로 하여 그동안 미진했던 '공예'와 '디자인'의 영역은 어느정도 그 틀이 잡히고, 디자인의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어 예술성만을 추구하던 공예의 개념과 가치관의 일부에 재고의 여지를 남겼던 점 등은 긍정적인 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앞 시기까지 부진을 면치 못하던 도자기와 금속공예 분야가 외국인의 국내전시와 외국 유학생들의 잇따른 귀국 활동을 통하여 일반의 관심을 촉발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사실을 들 수 있다.
도자공예 분야는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다른 분야에 비해 매우 침체되어 있었다. 이 사실은 제10회 [국전]의 공예평을 통해서도 일부 확인 된다. (1961년11월7일자 『경향신문』 참조) 이 글은 과거 생활공예의 중심 구실을 수행했던 도자공예의 출품작이 거의 전무한 현상을 지적하면서, 근대공예의 목표인 생활감각과의 유대 및 실질기능의 회복의 어려움이 여기서도 일부 기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1960년 [정규도예전], 1961년 [토영회도자전], [황종례도자전] 등을 비롯하여 매년 수 차례의 개인전이 열리면서 어느 분야보다도 급속한 성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도자공예의 재흥은 점차 표현성이 강조되던 이무렵 미술계의 조형이념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여세를 몰아 1969년 12월에는 [한국도예협회]가 결성과 동시에 창립전을 열어 1970년대의 공예계를 도자공예 중심으로 이끌기 위한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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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통과 현대공예의 영역 분점 ; 1970년대
70년대에는 문화계 전반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고 이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정책과 학계에서의 움직임이 어느때 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시기이다. 문화재관리국을 중심으로하여 무형문화재의 발굴과 보존을 위한 조사 작업이 착수되었고, 문화재 관계의 서적도 활발하게 간행되었으며, 고고학계에서는 경주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문화재 발굴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동안 공예의 주류에서 밀려나 사양길로 접어 들면서 단절의 위기에 직면해 있던 전승공예 분야가 '중요무형문화재' 또는 '인간문화재'라는 별칭으로 그 중요성과 함께 가치가 부여되었다. 그동안 전승공예 분야는 근대화 과정을 통해 수요기반을 상실한 대신 일제시기에 선전을 무대로 작가지향의 길을 선택했지만, 해방공간에서는 1950년대 초부터 대학의 공예과 출신들이 배출되면서 [국전] 공예부를 중심으로 한 공예계의 주된 흐름에서 다시 소외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직업으로써의 성립조건과 무관하게 체득한 기술의 명맥을 묵묵히 계승해 왔던 몇몇 분야의 지조 높은 장인들과, 조악한 지역 토산품 수준으로 전락했던 일부 전승공예 분야가 이를 계기로 하여 전통문화로서의 정당한 가치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점증된 관심을 기반으로 하여 1976년에는 나전칠기 분야의 중요무형문화재 10호로 지정된 [김봉룡전]과, 1930년대부터 건칠공예가로 활약해왔던 강창원(본명;姜昌奎)의 [회고전]이 각각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바로 앞 시기에 공예계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부상했던 도자공예 분야의 개인전 및 그룹전은 이 기간에도 가장 두드러진 활동으로 꼽힌다. 대표적인 활동을 간추려도 1971년 한해동안 무려 20회가 넘는 도자 분야의 개인전이 열렸다. 이러한 추세는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공예 디자인 전시회의 거의 70%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비중으로 활성화 되었으며, 국전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인 공예의 흐름을 전시회, 특히 개인전 형식 위주로 이끌어가는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또 하나의 특징은, 부분적이나마 기능을 완전히 배제하는 실험적인 제작이념의 대두를 들 수 있겠다. 이러한 활동은 도자공예의 정담순, 신상호, 목공예의 최승천 등을 비롯한 일군의 공예가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국전 공예를 중심으로 한 그동안의 공예활동은 기능과 조형의 상대적 비중과 그 균형에 대한 시비보다는 산업공예, 디자인 분야와의 관계 및 위상설정 문제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무렵에는 비록 일부이긴 하나 관습적으로 묵수되어 오던 기능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는 이른바 탈기능의 오브제화를 시도함으로써, 비판과 함께 공예개념에 대한 논의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조각 분야와 재료를 공유하는 목공예나 금속공예의 경우는 물론, 애초부터 평면적 성격을 띤 염색과 타피스트리 분야는 회화와의 관계에서 특히 논란의 소지가 많았다. 이 문제는 분야별로 세력이 확산되면서 80년대에 들어서는 더욱 큰 이슈로 대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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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더욱 심화된 조형과 기능의 이원구조 ; 1980년대 이후
사회 각 분야가 민주화의 열망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80년대는, 미술계 내부에서도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한 에너지를 분출했던 시기였다. 그동안 미술교육 및 창작현장에서 공통적인 과제로 제기되어 왔던 서구 중심의 타율적 세계관의 극복과 올바른 정체성의 회복, 미술가의 사회적 책무가 새롭게 환기되면서 그 실천을 위한 방안들이 여러 각도에서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역동적인 변혁의 시기에도 공예분야에서는 별다른 대안이나 문제의식을 성숙시키지 못한 채 오히려 권위적인 아카데미즘이 심화되거나, 일부의 조형주의 계열의 활동이 눈에 띄게 확산되는 양상을 나타냈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특히 주도적 위치에 있던 공예가들의 결여된 역사의식과 [국전]의 파행적 운영, 그리고 기존의 틀을 해체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비롯한 새로운 미술사조의 무분별한 수용 등을 지적할 수 있겠다.
'80년대에 들어 [국전]이 문화공보부 주도의 관전에서 벗어나 문예진흥원으로 이관됨으로써 일제치하의 [선전] 이후 미술계의 오랜 숙원이던 민전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동안 권위주의적 아카데미즘과 보수적 성향, 심사과정에서의 편파성 문제 등 파행적 운영으로 오히려 현대공예의 발전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비판을 받아온 [국전] 구조의 변화는, 공예인을 포함한 모든 미술인들에게 새로운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민전으로 바뀐 뒤에도 변화를 주도해갈 가장 중요한 인적구조에서 명확한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근본적으로 개선된 점은 많지 않았다. 공예분야에서는 오히려 앞 시기에 부분적으로 시도되었던 탈기능의 조형주의 경향을 대표성을 지닌 [국전] 구조를 통해 승인함으로써 급속한 확산을 선도하였고, 공예개념과 가치기준에 대한 해묵은 논쟁을 재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민전 이관 후 처음 맞은 1980년 29회 [국전]에서는 출품작 수가 전년도에 비해 무려 43.7%나 급증하였고, [산업디자인전]( 17.2%)과 [산미전](20%)도 각각 증가되는 등 전반적으로 공모전이 활기를 띠는 추세였다. 단체전의 횟수도 1979년에 비해 13%가 늘었고, 1980년 한해 동안 10여개의 단체가 창립되어 공예계 전반에 걸친 각종 단체의 수가 무려 63개에 달하는 등 외형적 성장을 거듭해 나갔다. 공예계의 여러 단체들 가운데 [한국공예가회]와 각 분야별로 금속공예의 [홍익금속공예가회](1980),[서울금공예회](1983), [조형금속회](1985),도자공예의 [도작가회](1970),[토회](1972), [한국현대도예가회](1979), [서울현대도예비엔날레](1989), [진로도예지명공모전](1991), 목공예의 [홍림회](1982), 섬유공예의 [홍익섬유조형회](1980), [한국텍스타일디자인협회](1992) 등의 단체, 그리고 출신학교와 분야를 통합한 젊은 실험정신을 표방한 [현대공예창작회](1978) 등의 그룹활동이 공예계의 흐름을 주도했다.(자세한 내용은 부록의 《연표》 참조)
이 가운데 특히 [한국공예가회]는 1974년 8명의 회원으로 창립전을 가진 뒤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여 1980년에는 2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면서 현대 한국공예를 대표하는 단체로 성장하였고, 현재는 네 개의 분야별 산하 기구를 두고 그것을 [한국공예가협회]로 통합하여 회원 870명이 넘는 방대한 조직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매년 전람회를 열고 있는 이 단체는 공예계의 대표기구임을 자임해 왔지만, 한편으로는 회원 자격을 '50년대 이후 국내외에서 현대 공예교육을 받은 자'로 제한함으로써 공예계의 아카데미즘과 엘리트주의를 심화시켰음은 물론, 동시대의 전승공예 분야 작가들을 제도적으로 배제하여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공예계의 이원구조를 더욱 고착시켰던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80년대 공예계의 가장 큰 이슈는 앞에 언급한 대로 탈기능의 조형주의가 폭넓게 확산된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경향은 '90년대의 공예계에 가장 두드러진 흐름을 이루어 왔다.
이와 같은 공예 분야의 흐름 속에서도 전통의 문맥에서 현대도예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질그릇의 민서적 미의식의 탐색에 몰두하거나 분청사기의 법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일군의 작가들이 기대를 모았다.
그리고 1990년을 전후해서는 금속공예 분야를 중심으로 공예 본래의 생활정서의 회복과 실질기능의 복원, 수요층과의 접점 형성을 위한 노력이 부분적으로 시도된 바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8년 6월 [식탁 위의 도예전] 등을 통해 산발적으로 시도되었으며, [서울금공예회]에서 기획한 [집을 위한 금속공예전](1993)이나 [크래프트하우스]의 실내 조명등 기획전인 [빛이 있는 실내풍경](1994) 등을 통해 구체화 되고 있다. 이 일련의 기획 방향은 전시장이 아니라 실재의 쓰임을 위한 공간, 즉 삶의 현장을 상정한 기능의 통합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엘리트 공예가 집단에서도 사회적 기능의 바람직한 구현 방안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 셈이다.
한편, 여기에 앞서 80년대 전반에도 생활 속의 쓰임새를 찾아 존립기반을 구축해 보려는 움직임이 젊은 공예가들 사이에서 일어나 각별한 주목을 끌었었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수공예품 전문매장과 소규모 공방을 중심으로 활로를 찾아 나갔다. 앞에서 누차 지적한 대로 당시의 공예계가 안고 있던 가장 시급한 현안은, 전시장 중심의 공예활동이 수요층의 실용적, 정서적 요구를 외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양자간의 간극을 오히려 증폭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있었다. 공예가 일반 수요층과의 교감을 정당하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전람회 중심의 구조로는 그 기능이 매우 제한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공예가들의 창의적인 생활 공예품을 다양한 수요층에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하는 채널로서의 제작과 유통구조의 마련이 무엇보다도 필요했었다. 이를 위해서는 공예가들의 생활문화에 대한 전향적인 인식의 전환과 여기에 토대를 둔 제작이념의 수립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한다.
이상과 같은 우리 공예계의 실상을 감안할 때, 오늘의 공예가들에게는 참으로 공예다운 면모의 회복과 동시대의 문명구조에 순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로 존립기반을 확고히 수립해야 할 시대적 과제를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 없이 떠안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