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동이 진행하는 MBC 인기 연예프로그램인 ‘무릎 팍 도사’에서는 그 분야 최고의 고수가 된 유명 인사들이 나와 전설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웃음과 함께 전해준다. 평소 잘 알지 못했던 유명 인사들의 뒷이야기를 들으며, 팬들은 그들을 통해 대리만족과 함께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무릎 팍 도사’ 제작팀은 KCC 허재 감독을 모시기 위해 여러 차례 연락을 취했지만, 오락프로그램 자체를 꺼려하는 허재 감독의 거절로 무산됐다고 한다. ‘무릎 팍 도사’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끌어낼 명 MC는 없지만, 한국 농구의 전설로 남은 수많은 농구인들의 뒷이야기들만으로도 농구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더 큰 감동과 귀감이 될 것이라 믿는다.
전설 속 이야기는 할아버지가 손자손녀에게 전해주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때로는 과장되고 부풀려져 동화 속 동물들이 말을 하기도 하고, 사람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 거북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한국 농구를 이끈 영웅들의 수많은 일화도 시간이 지나면서 살이 붙고 부풀려져 전설이 되기도 한다. “내가 봤을 때 그 당시의 허재는
마이클 조던을 능가했어.” “이충희는 3점슛 1,000개를 던지면 1,000개를 다 성공시켰어.” 이런 이야기들은 허구를 넘어 농구팬들에게 재미있는 흥밋거리로 입 소문을 타기도 하고, 갑론을박의 토론장에 오르기도 한다. 수많은 전설 속 이야기들 중 일부에 불과한 보따리를 풀면서 당부하고 싶다. 한국 농구를 빛낸 전설 속 영웅들은 실제로 더 위대했었다고.
# Shooter 슈터 계보의 시작…‘원조 슈터’ 신동파농구의 전설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누구일까. 60~70년대를 호령했던
신동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마치 원죄를 짓는 것과 같다.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에 발탁이 된 신동파는 ‘원조 슈터’로 알려져 있다.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권까지 이름을 알렸던 신동파는 1969년 아시아게임 필리핀과의 결승전에서 50득점을 넣어 필리핀에서도 전설로 남아있다. 당시 3점슛이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의 득점력은 가히 전설로 남아도 될 만한 일이었다.
이후 1970년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8경기 평균 32.6득점으로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가 농구를 시작한 것은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우연히 농구공을 잡고 슛을 던지는 순간 림에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너무 좋아 농구의 매력에 빠져버렸다는 신동파는 그 때부터 이미 슈터로서 자질을 타고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99%의 정확도 높은 슛이다. 자유투와 외곽 점프슛을 연습삼아 세어가며 100개씩을 던져 단 1개씩 실패하고 모두 성공시켰다는 전설은 이미 알려진 이야기. 한국농구슈터의 계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슛 도사’ 이충희 “99%의 노력과 1%의 천재성”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슈터의 탄생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슈터란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아닌 본래 타고나야 한다는 것과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의견이다. 전자에 따르면 하루에 1,000개의 슛을 던진다고 해서 모두가 최고의 슈터가 될 수는 없다는 말. 왠지 전자의 의견에 무게가 실릴 법도 하다. 그러나 한국 최고의 ‘슛 도사’라 일컬어지는 이충희에게는 그 어떤 태생론도 모두 적용된다. 즉, 1%의 천재성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슈터라는 결론이다.
이충희는 ‘전자슈터’ 고(故) 김현준과 , ‘농구천재’ 허재와 함께 1980년대를 주름잡은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지만, 슛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충희에 대한 전설 같은 일화와 소문은 무성하다. 손가락 두 개의 길이가 같아서 슛을 잘 넣는다거나 하루에 슛을 성공시킨 것만 1,000개 이상이라거나 하는 것들이다. 1,000개를 세는 것만으로도 불가능하지 않겠냐는 질문에 혹자는 “이충희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말한다.
대학 졸업 후 실업에 들어와서도 5시간 이상의 훈련을 꾸준히 했다고 하니, 노력으로 만들어진 스타임이 분명할 법도 하다. 실제로 이충희는 송도고 2학년이 되기까지 거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송도중 시절부터 꾸준히 슛 연습을 했지만, 당시 코치였던 고(故) 전규삼 할아버지는 그에게 실전 훈련대신 호된 기본기 훈련을 시켰다. 본래부터 타고난 슈터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단 1%의 천재성을 발굴해 노력한 결과라고 해도 할 말은 없겠지만….
이충희의 선수시절에 대해 방열 교수는 “당시 충희는 인간이 아닌 짐승이었다”고 말한다. 1988년 남자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방열 감독은 강원도에서 훈련을 하던 이충희를 보고 지나가는 말로 살짝 튀어나온 배를 툭 치며 한마디를 건넸다. “요즘 살쪘나보네?” 그 말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원도 경포대를 가기 위해 한계령을 넘어 차량 이동을 하던 대표팀 버스 안에서 한 겨울에나 입을만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이충희가 내려달라고 방 감독을 졸랐다. 그 위치에서 경포대까지 뛰어가겠다는 것이 이충희의 생각이었다. 거리상 뛰어갈 곳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방 감독이었지만, 이충희 고집은 아무도 못 꺾는다는 것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못이기는 척 내려주고 출발했다.
방 감독은 다음 날 오전 훈련을 하기 위해 선수단을 집합 시켰지만, 이충희가 보이지 않았다. ‘밤새 뛰어오느라 늦잠을 잤겠구나’ 생각했던 방 감독은 숙소를 뒤졌지만 어디에서도 이충희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1시간이 지났을까. 운동복 차림의 이충희가 농구공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택시에서 내리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방 감독이 택시 기사에게 물은 자초지종은 이랬다. “아니 이 사람이 다짜고짜 택시를 타고는 농구 골대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잖아요.(당시만 해도 농구 골대가 있는 학교가 흔치 않았다) 데려다 줬더니 글쎄, 슛을 던질 건데 공을 집어서 패스해주면 택시비 따블을 준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공 집어주다 왔어요. 허허.” 이충희는 그날 밤새 달려와 새벽부터 슛을 던진 것만 1,000개였다. 왜 방열 교수가 당시 이충희를 보고 ‘짐승’이라고 했는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선수시절 ‘슛 도사’가 나이를 좀 먹었다고 어디 갈까. 이충희의 슛은 한국나이 마흔이던 창원 LG 감독 시절에도 변함이 없었다. 당시 LG 루키로 입단한 단대부중 최성우 코치에 따르면 이충희 감독과의 슛 대결에서 한 번도 이긴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당시 이벤트로 이충희 감독 팀과 당시 정덕화 코치(현 여자대표팀 감독) 팀으로 나눠 청백전이 있었다. 수비5걸에 여러 차례 이름을 올렸던 박규현(LG)이 이충희 감독 수비를 맡았지만, 이충희 감독이 올린 득점만 30점이 넘었다고 한다. 최성우 코치는 “수비를 느슨하게 생각했을 거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당시 상금이 걸려있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수비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당시 이를 지켜보던 한 기자는 플레잉 감독을 해도 되겠다고 농담을 했을 정도.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철벽수비의 대명사였던 당시 정덕화 코치가 슈터 양희승을 맡아 단 2점만 내줬다고 하는 후문이다. 이충희 감독은 현역선수들과 심심치 않게 슛 내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 감독을 상대로 자신 있는 자리에서 연속으로 3점슛을 더 많이 넣는 선수에게 10만원을 주기로 했다는 것. 단, 도전비는 천 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숱하게 도전한 선수 중 단 한 명도 이 감독을 이긴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한 번 슈터는 영원한 슈터인가보다.
‘캥거루 슈터’ 조성원의 캥거루 되기‘슛 도사’ 이충희가 뒤로 넘어지면서 슛을 쏘는 페이드 어웨이 슛을 완성했다면, ‘캥거루 슈터’ 조성원(현 국민은행 감독)은 높이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일명 ‘캥거루 슛’을 완성했다. 180cm의 단신이었던 조성원도 신체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전형적인 노력형 선수였다. 조성원은 배재중 3학년 때 농구를 시작한 늦깎이 선수였다. 뒤늦게 시작한 농구였기 때문에 동기들에 비해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농구선수로서 단신인 그는 스피드와 슛만이 살아남을 길이라 생각했다. 홍대부고로 진학했지만, 잘하는 선수들에 묻혀 지냈다. 그때부터 그의 슈터 탄생기가 시작된다.
조성원은 납조끼를 입고 새벽 운동을 하기 시작해, 오후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저녁에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머리맡에는 항상 주먹크기만한 돌을 두고 자나 깨나 위로 던지는 슛 연습을 했다. 전지훈련을 갈 때도 머리맡 돌은 필수 품목이었다. 아파트에 살던 그는 형이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동안 매일같이 계단을 뛰어올랐다. 화장실에서는 물을 틀어놓고 습기가 찰 때까지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스피드와 순발력을 기르기 위한 그의 노력은 독특했다. 조성원이 산에 나타나면 산행을 하던 할아버지들 눈에는 ‘미친놈’으로 비쳤을 정도였다.
그가 납조끼를 입고 산에 올랐다가 내리막길을 미친 듯이 뛰어내려오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들이 외친 말이다. 길이 나 있지 않은 산을 나무를 피해 내려오며 넘어지고 까지고 하는 모습을 본 할아버지들로서는 정말 ‘미친놈’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조성원은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며 “하다보니까 요령이 생겨서 잘 피할 수 있었다. 그 때의 산악훈련이 나중에 순발력을 기르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태연하게 전한다.
조성원은 노력파에 승부근성까지 남달랐다. 명지대 시절에는 하기 싫은 겨울 새벽운동을 거르지 않기 위해 같은 학교 축구부 선수와 암묵적인 경쟁을 벌였다. 방법은 유치했다. 누가 먼저 나가냐가 경쟁이었다. “새벽에 나가 눈 덮인 운동장에 발자국이 있으면 엄청 열 받았다. 그의 승부욕은 상무 시절 빛을 발한다. 조성원의 ‘캥거루 슛’이 완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상무에는 문경은 이상민 김재훈 김승기 홍사붕 조동기 등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즐비했다. 쟁쟁한 스타들을 뒤로하고 게임에 뛰기 위해 조성원은 세트 슛만 갖고는 이겨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상무 시절이 그에게는 제2의 농구 인생을 열어준 시간이었던 셈이다. 세트 슛이 아닌 점프슛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줄넘기와 발을 번갈아 가며 한 발씩 뛰는 ‘2단 뛰기’를 택했다. 저녁마다 거르지 않고 체육관 두 바퀴를 2단 뛰기를 하던 그는 도중에 힘에 부쳐 멈출 때면 다시 처음부터 두 바퀴를 돌았다. 2단 뛰기 훈련을 마칠 때면 상무에서 훈련을 하던 승마부가 체육관으로 올라오곤 했는데, 그는 승마부 선수 세 명을 붙잡고 1대3으로 풀코트 경기를 해 체력훈련을 대신했다.
상무 제대 후 조성원이 ‘4쿼터의 사나이’라고 불리며 98-99시즌 플레이오프 MVP(현대)와 00-01시즌 정규리그 MVP(LG)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피나는 훈련으로 노력했던 결과물이었다.
# All Around Player 한국남자농구에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라는 수식어에 어울리는 선수가 있을까. 한국 농구는 예전부터 외곽 3점슛에 의존하는 전형적인 슈터 중심의 농구였다. 과거 70~80년대만 해도 이충희,
김현준과 같은 확실한 외곽슈터를 보유하고 있는 팀들이 우승보증수표로 여겨지곤 했다. 90년대 이후에 들어서야 우승보증수표가 달라졌다.
서장훈을 비롯해 김주성, 하승진 같은 걸출한 센터가 등장해 장신화를 이루면서 슈터보다는 센터 중심의 농구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계농구의 또 다른 변화는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의 등장이다. 60~70년대 한국농구에도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가 있었다면 믿겠는가.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가드, 포워드, 센터로만 구분을 하던 60년대 후반 신동파, 곽현채 등과 함께 남자농구를 아시아 정상으로 이끈 유희형(前 KBS 해설위원)을 과거 한국농구의 혁신을 가져온 전천후 플레이어로 꼽는다.
유희형, 시대를 앞서간 전천후 플레이어1960년대만 해도 장신 가드라는 것이 낯선 시대였다. 키가 크면 센터를 봐야하는 시절 184cm의 유희형은 가드 포지션을 맡았다. 당시 180cm 후반대 선수들이 센터였던 것을 감안하면 가드 유희형의 존재는 한국남자농구의 신선한 바람이었다. 가드를 맡고 있는 그였지만, 그의 플레이를 하나로 정의하기에는 부족했다. 타고난 넓은 시야에 창의적인 농구를 구사했던 그는 가드부터 센터까지 손이 뻗지 않는 곳이 없는 전형적인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였다.
가드 명문 송도고 출신의 시발점인 유희형은 장신의 핸디캡인 스피드와 점프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365일 쉬지 않고 뛰고 또 뛰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인천에서 서울로 이주한 그는 성북동 누나 집에 함께 머물면서 개인 운동을 시작했다. 1년간 새벽마다 산을 뛰어 오르고 내리며 스피드와 체력을 길렀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하루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 대표팀으로 발탁된 뒤 태릉선수촌에서 산을 오르는 산악구보를 할 때면 전 종목을 통틀어 1등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1년간 혹독한 훈련을 거친 덕에 그의 서전트 점프력도 20cm나 늘어있었다. “점프력이 늘면서 림 위로 손이 30~40cm는 족히 올라갔었어. 아마 71년도에 있었던 공식대회에서 내가 최초로 덩크슛을 성공했었을 거야.” 유희형은 넘치는 탄력을 주체하지 못한 부분이 또 하나 있었다. 보통은 센터들의 전유물인 블록슛 부분이다. 그는 1968년 국가대표 선수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제리 웨스트와 윌트 체임벌린이 활약하던 LA 레이커스 vs.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의 NBA 경기를 보고 블록슛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온 유희형은 국내 무대에서 가드임에도 불구하고 경기당 10개 이상의 블록슛을 기록하는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당시에는 탄력이 좋다보니까 수비할 때 센터를 블록하기도 했었지. 공이 가는 길만 알면 되거든. 백보드와 공을 함께 치면서 공을 잡아내기도 했었는데 뭐.”
센터 플레이까지 스스럼없이 담당했던 그에게 드리블에 있어서 약점이 있지 않았을까. 그의 드리블은 이미 송도고 시절 코치였던
전규삼옹 밑에서 다듬어져 있었다. 당시 그는 약점이었던 왼손 드리블을 익히기 위해 훈련할 때를 빼놓고는 모든 것을 왼손으로 생활했다. 오른손을 묶은 채로 일주일씩 기간을 정해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며 밥을 먹을 정도로 철저하게 기본기를 익혔다. 일찍이 익힌 기본기 덕에 장신인 그는 드리블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농구천재’ 허재, 그는 천재가 아니었다?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라는 정의를 내리기도 부족한 희대의 스타가 있다. ‘천재’ ‘대통령’ ‘풍운아’ ‘악동’ 셀 수 없이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한국이 낳은 최고의 농구스타 허재. 코트 안팎에서 숱한 문제를 일으키며 트러블 메이커로서 언론 지면에 빨간 줄이 그어져도 그의 농구에 대한 평가 앞에서는 모두 한 줌 잿더미처럼 땅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80년대 후반 혜성같이 등장한 그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단 한 명도 이견을 다는 이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고 타고난 천재로 일컫지만, 사실 허재는 철저하게 다듬어지고 만들어진 천재다. 다시 말해 그는 천재란 칭송을 듣기까지 남모르는 곳에서 남모르는 시간에 잠시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주당’으로도 잘 알려진 그의 불명예스러운 커리어 덕에 허재는 천재와 문제아의 흑백논리로 밖에 조명 받지 못했다. 바로 그런 점이 허재를 끊임없는 노력보다 쉽게 얻어진 것만 같은 천재성으로 과대포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적인 예로 2008년 정규시즌을 마치고 술자리에서 만남을 가졌던 허재 감독은 자신의 옛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무척이나 쑥스러워했다. 잠깐이나마 남들 몰래 노력했던 이야기를 꺼냈다가도 누가 훔쳐 듣기라도 할까봐 입을 다물어버릴 정도다. 아마도 그동안 쌓아온 그에 대한 이미지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지나칠 정도로 건방져야하고 고개를 쉽게 숙여서는 안 되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 길들여져 있는 야생마처럼 말이다.
허재와 상명초등학교 시절부터 용산중, 고등학교를 함께 나온 동부 전창진 감독은 후배 허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허재는 천재가 아닌 절대적인 노력파였다. 전 감독은 허재의 종아리를 먼저 보라고 말한다. 허재는 용산중고교 시절 남산 로드워크를 할 때면 가파른 언덕을 앞꿈치만 사용해 뛰어올라갔다. 다리 힘을 기르기 위해서다.
슈팅 연습을 할 때도 남들보다 1~2시간씩은 항상 남아서 더 하기도 했다. 허재는 흔들리지 않는 슛을 위해 손목과 팔 힘을 기르며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팔 힘을 기르기 위해 매일 팔굽혀펴기 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 그것도 세손가락만을 사용해서다. 등하교 길에 버스를 타면 손잡이를 잡고 손목을 계속 흔들거나 가벼운 아령과 같은 물건을 손에 움켜쥐고 쉴 세 없이 움직였다. 잠자리에서 누워 공을 위로 던지는 일은 그의 일상과도 같았을 정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던가. 허재는 남들 눈에 띄게 운동을 하는 것이 영 불편했던 모양이다. 새벽 운동이 있는 날이면 항상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운동을 나가 산을 올랐다 내려와 아무렇지도 않게 동기들과 운동을 함께 했다. 새벽뿐만이 아니었다. 밤이면 조용히 체육관에 나와 불도 키지 않고 드리블 연습을 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남들 눈에 보이는 것이 싫었고, 캄캄한 곳에서 공을 보지 않고 드리블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허재를 다시 말하고 싶다. 그는 천재가 아닌 천재. 천재가 아닌 시대의 산물이라고….
# Spirit “양궁이란 종목은 그다지 체력을 많이 소모하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훈련 당시 난 꼬박꼬박 불암산에 올랐다. 너무 힘들어서 발이 안 떨어질 때도 있었다. 그럴 적마다 내가 지금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올림픽 현장에서 한 발 한 발 활을 쏜다고 생각하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그것이 많이 도움이 됐다.”
YTN 김호성 체육부 부장이 진행했던 ‘명예의 전당’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신궁’ 김수녕 인터뷰의 인용 부분이다. “내겐 연습이 곧 실전이었다”는 그녀의 말에서 1남1여를 둔 ‘아줌마’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전설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남들이 봤을 때 전혀 노력하지 않는 것 같지만, 스타가 되기 위해서 남들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 것. 한국여자농구의 한 획을 긋고 있는 전주원과 정선민도 그랬다.
전주원의 농구인생 ‘특별할 것 없는 특별함’남자농구 현역 최고의 인기스타를 꼽으라면 7년간 올스타 인기투표 1위 자리를 한 번도 양보한 적이 없는 이상민을 떠올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90년대 초반 이상민의 ‘오빠부대’가 있었다면 여자농구계에는 ‘누나부대’를 몰고 다니는 동갑내기 전주원이 있다. 전주원은 올해로 한국나이 37세. 이미 지난 1998년에 결혼해 6년 뒤 딸 수빈이를 낳은 대한민국 아줌마다.
그는 2004년 출산을 위해 은퇴를 선언하고 홀연히 코트를 떠났다가 1년 6개월 만에 다시 정든 코트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를 아이를 둔 아줌마로 보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뽀얗고 곱상한 외모에 가냘픈 몸은 전성기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를 처음 실제로 대하는 사람은 두 번 놀란다.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외모에 한 번 놀라고, 미소가 떠나지 않는 친절함에 두 번 놀란다. 누가 그를 17년간 태극마크를 한 번도 놓치지 않은 한국 최고의 농구스타라고 기억하겠는가.
전주원에게는 왠지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신비스러움이 있다. 그러나 막상 그를 파헤쳐 보면 싱겁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평범하다. 그에게 지금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던 비결을 물어도 멋진 대답을 기대하긴 힘들다. “그냥 다른 사람보다 몸이 약해서 연습할 때 정말 열심히 하는 거예요. 그게 전분데, 특별한 게 없죠?” 그는 노-하우 대신 성실함을 무기로 들었다. 연습할 때 실전처럼 하는 것. 너무도 뻔한 이야기지만,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그의 말투에 순간 숙연함이 느껴졌다.
어린 시절부터 전주원은 평범한 여학생 그 이상도 아니었다. 그는 선일초교 6학년 때부터 선일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8년간 왕복 4시간이나 되는 거리에 위치한 학교를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다녔다. 학교 운동을 마친 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 그는 파김치가 된 상태로 집에 들어왔기 때문에 개인 운동을 할 시간이나 여력조차 없었다. “우리 가족이 나 하나 때문에 이사를 간다는 것이 싫었죠. 차라리 혼자 고생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전주원은 개인 운동을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연습하는 동안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인터뷰를 하던 전주원은 갑자기 생각난 듯 자신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끈기다. 어려서부터 끈기가 좋아던 그는 안 되는 것이 있으면 될 때까지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8년간 4시간 왕복을 해가며 힘들다는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만 봐도 어림잡아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전주원은 가장 약하고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으로 웨이트를 꼽는다. 지금까지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힘도 하루도 빠짐없이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왔기 때문이다. 최고의 자리에서 은퇴도 경험했고 산전수전 다 겪어본 그에게 요령이 생길 법도 한데, 전지훈련이나 체력훈련을 할 때도 나이가 있기 때문에 후배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후배들은 그의 그런 모습 때문에 오히려 더 빨리 뛰어야 돼서 싫다고 푸념할 정도다. 어려서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에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안 하면 허전할 정도의 습관이 생겼다. 평소에 적어도 1시간 정도는 꼬박꼬박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것은 필수고, 팀 훈련 30분전에는 무조건 혼자 먼저 내려와 하체 근력 운동을 한다. 시합 날은 대부분 가벼운 몸 풀기 정도를 하지만, 그에게는 시합 날 아침 근력 운동이 더 중요하다. “보통 다른 선수들은 다리가 더 무거울 거라 생각하지만, 전 습관이 돼서 그런지 오히려 안 하면 더 무거운 거 같아요.” 그는 꾸준함과 성실함 하나로 지금껏 최고의 자리를 지켜 온 것이다.
전주원은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세월이 흘러 신체조건은 좋아졌는데, 개인기술도 그렇고 정신적인 부분도 그렇고 많이 약해진 것 같아요. 침체된 여자농구를 내가 살리자는 마음으로 농구를 즐겼으면 좋겠어요.”
“제 얘기 너무 예쁘게 잘 쓰시면 안돼요. 재수 없어 보이잖아요. 하하.” 90년대 초반 ‘누나부대’의 일원이었던 기자도 어느덧 전설이 되어버린 전주원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취재를 하면서 들은 어떤 그럴 듯한 이야기 거리보다 더 진한 감동이 전해졌다.
‘도전과 진화’ 정선민을 말하다 세상도 ‘바스켓 퀸’ 정선민을 시기한 걸까. 취재를 통해 만나본 정선민은 시원 털털한 여장부였다. 지긋지긋한 오해와 주위의 시샘에 지쳐 있는 듯 최근 오해로 겪은 속상한 심정에 대해 푸념하듯 먼저 말을 꺼내는 여장부다. 피해 가기보다는 먼저 솔직하게 부딪히고 보는 여장부다. 뒤에서 말을 만들고, 작업(?)을 할 만한 소인배가 될 인물조차 못 되는 여장부다.
정선민은 명실상부한 한국여자농구의 최고 스타다. 정선민은 1998년 신세계에서 프로무대 데뷔를 한 후 통산 6번의 MVP와 득점왕, 우수수비선수상도 5차례나 선정돼 공격과 수비에 있어서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2003년에는 한국 최초로 미국여자프로농구(WKBL) 드래프트 1라운드 8순위로 시애틀 스톰에 지명돼 국제무대에 데뷔, 한국농구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정선민의 셀 수 없을 정도의 화려한 경력은 어린 시절 혹독한 개인 훈련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선민은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때까지 웬만한 거리는 일부러 걸어 다녔다. 버스를 타나 걸어 다니나 시간이 비슷했다고 말하는 그였지만, 일상생활에서조차 훈련을 하기 위함이었다. 과거 허재 감독의 선수시절 훈련 모습에서 볼 수 있었던 훈련법을 정선민도 알았는지 그대로 답습했다. 걸어 다닐 때는 일부러 뒤꿈치를 들고 앞꿈치로만 다녔다. 특히 오르막길이 나오면 앞꿈치 걷기 훈련을 더 열심히 했다. 마산여고에 진학한 뒤에는 남모르게 훈련을 했다. 단지 개인 훈련하는 것을 들키기 싫어서 오전, 오후 팀 훈련이 끝나면 집에 가는 척 하고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와 불을 꺼놓고 1~2시간 연습을 했다. 대신 매일 훈련을 하기보다는 10~15일 정도 훈련 기간을 정해서 체계적인 연습을 했다. 주말이면 집근처 운동장에 나가 슈팅 연습을 500개씩 했다. 공을 집어다 주는 것은 부모님 몫이었다.
어린 시절 기본기에 중점을 두고 훈련했던 정선민은 청소년 시절부터 대표팀에 발탁됐다. 이때부터 그의 진화하는 농구가 시작된다. 당시 대표팀에는 최고참 유영주(현 WKBL 해설위원)와 전주원, 권은정 등 한국여자농구를 이끈 선수들이 있어 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1년 중 6개월은 대표팀에 차출 돼 나가 있었기 때문에 개인연습을 할 시간은 없었다. 사실 특별한 훈련을 하는 것보다 너무나 잘하는 언니들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우면서 실력이 늘 수 있었다.” 개인기가 뛰어난 가드 출신 선수들과 항상 함께 했던 그는 모르는 농구를 배우면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까지 연습했다.
그는 개인 연습을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전에서 최대한 많이 활용해보면서 실전을 연습처럼 사용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그의 농구는 매년 새로운 스타일로 변해갔다. 농구를 배우기에 너무나 좋은 조건에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 그였지만, 정작 더 힘든 것은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코트에서 보여 지는 강한 이미지와 솔직한 성격 탓에 오해와 비판을 남들보다 많이 들어야만 했다. 그는 그런 비판 속에서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WNBA에 도전을 하게 된 시기도 이때다. 한 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뒤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이는 성격인 그에게 미국 도전은 생애 최고의 기회였다. 6개월간의 짧은 미국 도전에 언론의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실패한 미국행이라는 비판 속에서 그는 더 독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정선민이 상상할 수 없는 신체 조건을 갖춘 미국 선수들과의 만남을 통해 느꼈던 것은 ‘내가 별거 아니더라’였다. 그에게 선진 농구의 경험은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었지만, 또 다른 농구를 한국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다는 마음으로 들떠있었다. 그는 6개월의 시간 동안 개인 훈련 2~3년을 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똑 부러지는 성격인 그의 농구 지론은 효율적인 농구다. 훈련 시간을 많이 한다고 해서 좋은 훈련이 아니라 집중을 해서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는 훈련을 해야 된다는 것. 그는 개인 훈련 시간에 가만히 서서 하는 세트슛을 쏘는 것을 가장 비효율적인 훈련이라 말한다. 실제 경기에서는 세트슛 기회가 거의 찾아오지 않기 때문. 그는 슛을 쏘기 전까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항상 움직이며 슛을 쏘는 연습을 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경기에 임하면 동료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려고 노력한다. 다섯 명의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많이 움직여야 쉬운 농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못하는 부분을 항상 개발하고 도전하는 정선민의 진화하는 농구는 그를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로 변화시켰다. 그는 포워드와 센터를 보면서도 넓은 시야로 동료를 살리는 농구를 하기 위해 또 한 단계 거듭났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정선민은 07-08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여자프로농구 사상 최초로 트리플더블을 달성한 것은 물론 한국프로농구 남녀 통틀어 최초로 통산 9차례 트리플더블을 기록할 수 있었다. 도전을 통해 진화하는 ‘여장부’ 정선민. 은퇴 후 농구계에 더 이상을 발을 딛고 싶지 않다고까지 말하는 그는 더 이상 비판받아야 할 존재가 아닌 한국여자농구의 전설로 남아야 할 존재다.
# 故 전규삼옹 2003년 5월 8일 밤 9시. 한국 농구의 큰 별이 졌다. 향년 88세를 일기로 타계한 전규삼옹은 농구코트의 대부(代父)라 일컬어진다. 전옹은 1961년 교직에서 은퇴하고 송도중고교 농구 지도에만 전념했다. 전옹을 회고하는 사람들은 농구부 코치가 아닌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한국 농구의 전설이 된 수많은 별들을 손자처럼 키워낸 전옹은 전설 중의 전설이었다.
‘가드의 산실’ 송도고… 故 전규삼옹을 회고하다 농구 명문 송도고는 가드의 산실이다. 유희형-김동광-이충희-강동희-신기성-김승현 등 이름만 들어도 입이 벌어지는 가드 계보는 모두 송도고에서 전옹의 가르침 속에 재목으로 성장하며 이뤄졌다. 전옹의 가르침은 특별했다. 만화 ‘슬램덩크’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가르침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당시 구타와 욕설로 얼룩져있던 학원농구에서 전옹은 단 한 번의 매를 드는 일이 없었다. 전옹이 가르친 것은 이기기 위한 농구가 아닌 즐기는 농구였다. 송도고가 가드의 산실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송도고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스피드를 앞세운 창조적인 농구였다. 6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 농구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전옹은 미국 농구잡지를 즐겨 볼 정도로 선진 농구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마치 손자를 돌보듯 선수들을 대했다는 전옹은 자율 농구로 흥미를 유발시키고, 선수로 키우기보다는 그에 앞서 인간으로 성장시켰다. 송도고 선수들의 운동은 항상 오후 2시 이후가 돼서야 가능했다. 학교 수업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전옹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송도고 시절 유희형은 새벽 7시에 슈팅 연습을 한 후 학교 수업시간에 졸지 않기 위해 일부러 맨 앞자리를 맡을 정도였고, 신기성은 “농구를 못해서 야단맞은 적은 없어도 숙제를 안 해서 혼난 적은 있다”고 전한다.
송도중을 나온 이충희가 송도고 1학년이 돼서야 경기에 나설 수 있었듯 전옹은 기본기를 철저하게 가르쳤다. 최고의 테크닉을 갖고 있는 김승현도 인터뷰마다 “할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기본기 덕분”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을 정도다. 전옹은 기본기와 체력, 순발력이 바탕이 돼야 비로소 개인기를 통한 팀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송도고의 전매특허였던 전광석화 같은 속공은 기본기를 바탕으로 완성된 것이다. 60년대 유희형이 이끌던 송도고의 속공은 단 2~3초 만에 이루어졌다고 하니 얼마나 빨랐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 유희형과 함께 송도고를 이끌었던 센터 서상철(전 산업은행 감독)은 “공이 림을 맞은 후 발이 바닥에 닿기 전에 유희형에게 패스가 나갔고, 유희형의 손에 닿은 공은 곧바로 상대 골대까지 연결되어 득점으로 이어졌다”고 기억했다. 전옹의 속공 훈련 방식은 그랬다. 드리블을 절대 치지 못하게 하는 속공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 당시 수원 야외코트에서 벌어진 종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송도고는 경기 종료 3분을 남겨 놓고 상대에 10점을 뒤져 패색이 짙었지만, 경기를 마치고 난 후 스코어는 10점을 오히려 이긴 상태였다. 속공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실례다.
전옹의 자율 농구는 당시로서는 금기시 됐던 모든 기술을 허락하기도 했다. 사실 허락이 아닌 권장이었다. 훅 슛을 비롯해 비하인드 백 드리블이나 비하인드 백 패스 등 다른 고교라면 건방지다고 흉내도 못 냈을 동작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만들었다. 당시 ‘에어 슛’이라고 불리던 앨리웁도 송도고에서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당장의 성적보다는 국제 감각을 익히기 위해 미래를 보고 가르친 전옹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항상 수비를 달고 슛을 쏘는 것을 강조했던 다른 고교와 달리 전옹은 포지션이 어떻든, 자리가 어디든 상관없이 수비를 피해서 슛을 쏘는 것을 가르쳤다. 오히려 전옹은 수비를 붙이고 슛을 쏘면 용서를 하지 않았고, 수비를 속이라고 가르쳤다. 농구는 결국 사기의 스포츠라는 것이다. 당시 송도고를 졸업하고 고려대로 진학한 서상철은 송도고 시절과는 정반대로 가르치는 센터 플레이에 적응을 못하고, 고생 끝에 포워드로 전향해 국가대표로 활약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전옹 가르침의 또 하나 특징은 맞춤형 교육이었다. 전옹은 선수들의 특성에 맞춰 드리블이면 드리블, 리바운드면 리바운드, 그 선수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쳤다. 강동희와 김승현은 송도중 시절 키가 작아 다른 학교 같으면 받아주지 않을 상황이 될 수도 있었지만, 전옹은 소질 있는 선수들을 발굴하는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당시 서울에 있는 학교들은 못 하게 하는 것들이 많았지만, 전옹은 강동희와 김승현에게 “너희들 마음껏 하고 싶은 것 해라”라고 풀어줬다. 전옹의 미래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면 한국 가드계의 거목 둘을 못 볼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아찔함 마저 든다.
1996년 코치직 은퇴 후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타계하기 며칠 전까지 매주 두 차례씩 빠지지 않고 학교를 찾아 손자뻘 되는 선수들을 지켜보고 갔다는 전규삼옹의 제자 사랑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 찡한 감동을 안긴다. 일생을 바쳐 한국 농구의 전설로 남은 전규삼옹의 가르침이 아직도 과거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눈앞에 성적에만 급급해 하고 있는 현직 아마추어 코치들의 귀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글 서민교 기자
JUMPBALL 2008년 06월호(발행일 05월 25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