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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십시오!
평소 사랑과 자비, 용서와 인내를 목청껏 외쳐왔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왠지 말씀에 날이 서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 발언의 강도나 수위가 꽤나 높습니다. 어떤 말씀은 너무나 섬뜩해서 듣기조차 거북스럽기까지 합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 9,43-44)
너무나 강경한 예수님의 말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때로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글자 그대로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밥 먹듯이 일상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들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돈보스코의 제자 가운데 도미니코 사비오란 성덕이 출중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 들어와서 돈보스코가 제시한 성덕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고 있던 중 안타깝게도 중병을 얻어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오래가지 않아 교회는 도미니코 사비오를 성인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여기 그가 짧은 생애 동안이지만 생명처럼 지켜왔던 모토가 있었습니다.
“죄보다는 죽음을!”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악마가 되는 법: 마중물의 법칙을 어기면 됨>
복음: 마르코 9,30-37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 사람이 심는 대로 거둔다”(갈라 6,7)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세상 모든 일에는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콩을 거두려면 손에 쥔 콩을 땅에 심어야 하고, 재물을 얻으려면 먼저 투자와 희생이 따르는 법이죠. 그러나 만약 아무것도 포기하거나 심지 않고, 단번에 열매만 얻으려 한다면 어떨까요? 오늘은 이를 무시하고 파멸에 빠진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하면 ‘악마가 될 수 있는지’”를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는 ‘무한한 쾌락, 지식, 권력’을 얻고자 악마(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합니다. 그는 정당한 씨앗이나 희생 없이 손쉽게 열매를 따려 했습니다. 예컨대, 육체적 욕망을 버리지 않은 채 그레첸(마르가레테)의 마음을 얻으려 했고, 헬레나를 차지하고 아들까지 가지려 들었습니다. 게다가 재물마저도 악령의 힘으로 한 번에 얻으려는 욕심에 눈이 멀었죠. 그 결과 자기 방종과 탐욕에 빠져 주변인들을 파멸로 몰고, 스스로도 영혼을 악마에게 넘기는 처지에 이릅니다.
사실 파우스트에게는 ‘자신을 뿌리는’ 기회가 늘 있었습니다. 그레첸을 진정으로 책임지려 하거나, 헬레나를 갈망하기 전에 헛된 욕심을 비우고 청빈과 성실을 지켰다면, 탐욕 대신 다른 결실을 거둘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마중물을 붓지 않고, 단지 결과만 얻으려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듯, “아무도 심지 않고는 거둘 수 없다”는 하느님의 정의 시스템을 어긴 것이죠. 그것이 곧 ‘사탄이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악령과 결탁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가진 씨앗은 지키고, 남의 결실만 취하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닙니다.
오늘 복음(마르 9,30-37)에서도 제자들은 누가 첫째가 될지 다투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며 스스로 가장 낮은 길을 택하십니다. 첫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내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희생 없이 자리를 차지하려 했고, 예수님은 이를 가리켜 “가장 낮은 자가 되어 모든 이의 종이 되라”(마르 9,35 참조)며 다시금 일깨우십니다.
반면,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는 아슬란이 배신한 아이 에드먼드의 죄를 대신 떠안고 돌탁자에서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나니아 세계를 구원하고 “진정한 왕”이 됩니다. 자발적인 희생을 ‘마중물’로 써서, 더 큰 자유와 존경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넬슨 만델라는 인종차별에 맞서 27년간 감옥에 갇힘으로써 물리적 자유를 내놓았고, 그 덕에 백인·흑인 모두의 신뢰를 얻어 남아공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이던 희생이, 오히려 더 큰 평화와 존중을 낳은 셈입니다.
결국, 콩을 심지 않고 콩을 얻으려 하면 그것이 곧 ‘악마가 되는 법’입니다. 그토록 원하던 성취를 악령과의 계약이나 부정한 방식으로 단숨에 얻으려 하면, 파우스트처럼 죄책감과 파멸만 손에 쥐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마중물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어 인류를 구하신 그분의 길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정의 시스템을 제대로 지킨 사례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영광이나 열매를 바란다면 먼저 그에 합당한 ‘뿌림’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씨 뿌린 이에게 열매를 배로 더해 주신다”(마르 10,30 참조)는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내 자유, 내 시간, 내 자리를 과감히 마중물로써 내놓는 사람이, 결국엔 더 큰 수확을 얻게 된다는 진리를 잊지 맙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9,41-50: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절) 자선을 베푸는 데는 누구를 막론하고 다 그 몫이 있다. 인간은 누구도 남과 나눌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다.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것 자체가 자선이라고 하셨다.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42절). 이 말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버려지는 모습이다. 땅에는 그가 묻힐 곳이 없어서 돌을 달아 바다에 수장시키는 것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45절) 하셨다고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이 잘라내라고 하신 것은 지체가 아니라, 욕망이다.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데,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우리 육의 욕망을 끊어내야 한다는 말씀이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47절) 눈은 우리 마음의 창과 같고 온갖 더러운 욕망이 눈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결국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하느님의 뜻을 놓고 갈등하는 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죽지 않는 구더기나 꺼지지 않는 불은 고통을 의미하는데, 이 세상에서 겪는 어떠한 감각의 고통도 죄인들이 받을 벌에 비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제할 길 없는 탄식과 후회가 있는 그곳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으며, 죽고 싶어도 죽음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들은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을 주고 자유의지로써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해준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50절) 소금은 말씀의 지혜를 뜻한다. 지혜롭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청중의 일치를 뒤흔들어 놓는 일이 없도록 매우 두려워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잘 선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나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나 자신을 두려워하며 더욱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체중이 쥐의 10,000배 큰 코끼리는 쥐보다 몇 배 많은 먹이가 필요할까요? 당연히 10,000배, 아니면 그 이상의 먹이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1,000배 정도 많이 먹을 뿐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봐도 그렇습니다. 자기보다 훨씬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이 그 체중만큼 더 많이 먹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크기가 두 배가 되었을 때, 에너지 요구량은 100%가 아니라 75% 증가할 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체중이 많이 나가면서 에너지 요구량이 그만큼 늘어나서 더 많이 먹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냥 적당량을 먹어야 했습니다.
만약 적당량을 넘어서는 양의 음식을 섭취한다면 어떨까요? 건강에 좋지 않게 됩니다. 체중이 늘어나 비만이 될 수 있으며, 이런 상태는 심장병, 당뇨병, 특정 유형의 암과 같은 만성 질환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먹는 것도 그렇지만, 소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당량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지금보다 더’를 외칩니다.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이 적당량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요? 약간의 풍요하고 넉넉한 삶을 주기도 하지만, 욕심과 이기심으로 정신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더군다나 욕심을 멀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정반대의 삶을 살기에, 주님과도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 힘든 희생도 주저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손이 죄짓게 하면 잘라 버리라고 하시고, 발이 죄짓게 하면 이 역시 잘라 버리라고 하십니다. 눈이 죄짓게 하면 빼 던져 버리라고 하시지요. 이만큼 강한 어조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과감히 결정해서 구원의 여정에서 마주하는 모든 걸림돌을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회개의 삶은 거창한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물 한 잔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늘에서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많은 것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물 한 잔이라도 줄 수 있는 작은 사랑의 실천만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소금이 짠맛을 잃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짠맛을 잃으면 소금으로서 가치가 없어지는 것처럼,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치가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야말로 참소금이 되는 비결입니다.
오늘의 명언: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앙드레 말로).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9,50)
상처에
소금이 닿으면
쓰리고 아프지만
소금의 살균으로 쉽게 아물고
그 상처의 자리에는
지혜라는
소금 꽃이 핀다네.
말씀은
소금의 짠맛에 절여지듯
오랜 묵상으로
우리 안에
깊숙이 스며들어야 하고
우리가
겸손의 짠맛으로 숙연해져야
세상에 평화가 온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인간이 만든 시스템에 매여있을 때,
전통과 관습 형식 등 겉치레에 빠져있을 때,
쓸데없는 일에 감정 소모를 할 때,
부수적인 것에 매달리며 본질을 잃어버릴 때,
전례 형식을 떠받드느라 상처 주는 일도 마다할 때...
소금은 제 몸을 녹여
자신을 내어주고 사라짐으로써
맛을 내고 보존해줍니다.
교회는 소금인형처럼 녹아들고,
자신을 내어주면서 기뻐하는 것이 그 본질입니다.
그래야 교회입니다.
오늘 하루 작은 소금 알갱이 하나가 되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2.27.목."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마르 9, 50)
지키고
간직해야할
짠맛의
신앙입니다.
흩어지는
모래같은
신앙이
아니라
짠맛으로
정화하는
소금같은
신앙입니다.
신앙의 길은
단맛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짠맛입니다.
짠맛으로
시련과
유혹을
이겨냅니다.
소금의 노래가
하느님께 드리는
오늘의 참된
노래입니다.
내어주는
짠맛이며
녹아내리는
우리
나날들의
짠맛입니다.
우리의 오늘은
어떠합니까.
빛과 소금이며
십자가와
짠맛으로
우리가
성장합니다.
거품이 아니라
녹아 스며드는
짠맛의
결단이며
서로를 구원으로
이끄는 소금의
실천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삶을
맛나게 하는
예수님이라는
소금이 있습니다.
신앙의 정체성은
예수님의
길을 가는
소금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생명의 길은
소금처럼
하나되는
짠맛의
길입니다.
짠맛을 되찾는
소중한
오늘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주님께 돌아가기를 미루지 마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5,1-8
1 재산을 믿지 말고 “넉넉하다.”고 말하지 마라.
2 너 자신과 네 힘을 붙좇지 말고 마음의 욕망을 따르지 마라.
3 “누가 나를 억누르리오?” 하고 말하지 마라. 주님께서 기필코 징벌하시리라.
4 “죄를 지었어도 내게 아무 일도 없었지 않은가?” 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분노에 더디시기 때문이다.
5 속죄를 과신하지 마라. 죄에 죄를 쌓을 뿐이다.
6 “그분의 인자함이 크시니 수많은 내 죄악이 속죄받으리라.”고 말하지 마라.
정녕 자비도 분노도 다 그분께 있고 그분의 진노가 죄인들 위에 머무르리라.
7 주님께 돌아가기를 미루지 말고 하루하루 늦추려 하지 마라.
정녕 주님의 분노가 갑자기 들이닥쳐 너는 징벌의 날에 완전히 망하리라.
8 부정한 재산을 믿지 마라. 정녕 재난의 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41-5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4)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6)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