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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시거(唯才是擧)
오직 재능만이 인재 추천의 기준이라는 뜻으로, 개인의 배경이나 과거의 전력을 문제 삼지 않고, 재능만 있으면 다른 것 따지지 않고 등용하겠다는 조조의 말이다.
唯 : 오직 유(口/8)
才 : 재주 재(扌/0)
是 : 이 시(日/5)
擧 : 들 거(手/14)
(유의어)
유재시용(唯才是用)
츨전 :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紀) 구현령(求賢令)
오늘날 고졸이나 지방대 출신은 이력서를 내도 대졸이나 명문대 출신에 비해 동등한 기회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졸과 지방대 출신이 모두 실력이 없고 대졸과 명문대 출신이 모두 실력이 좋은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졸이나 대졸, 지방이나 서울(수도권)을 따지지 않고 실력만으로 사람을 뽑는다면, 취업 준비생들에게 희망의 세상이 열릴 것이다. 조조는 바로 이와 같은 희망의 말을 했던 것이다.
이 성어는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紀) 구현령(求賢令)에 나오는 말이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조조(曹操)는 적벽대전 패배 이후 전쟁의 승패는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으로 철저히 능력 위주의 인사정책을 펼쳤다.
후한의 승상 조조(曹操)에게 수하의 화흡(和洽)이 말했다. '천하 사람은 재주와 덕이 저마다 다릅니다. 한 가지만 보고 취해서는 안 됩니다. 검소함이 지나친 경우 혼자 처신하기는 괜찮아도, 이것으로 사물을 살펴 따지게 하면 잃는 바가 많습니다.
오늘날 조정의 의논은 관리 중에 새 옷을 입거나 좋은 수레를 타는 사람이 있으면 청렴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모습을 꾸미지 않고, 의복은 낡아 해진 것을 입어야 개결하다고 말하지요.
그러다 보니 사대부가 일부러 옷을 더럽히거나, 수레와 복식을 감추기에 이르고, 조정 대신이 밥을 싸들고 관청에 들어오기까지 합니다.
가르침을 세우고 풍속을 살핌은 중용을 중히 여깁니다. 오래 계속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몫으로 감당키 어려운 행실만을 높여 다른 길을 단속하니, 힘써 이를 행하느라 반드시 지치고 피곤할 것입니다.
옛날의 큰 가르침은 인정을 통하게 하는 데 힘썼을 뿐입니다. 무릇 과격하고 괴이함을 행하면 감추고 속이는 짓이 용납될 것입니다.'
조조가 옳다 여기고 영을 내렸다. '맹공작(孟公綽)은 조나라나 위나라같이 큰 나라의 원로가 되기는 충분하나, 등나라나 설나라 같은 작은 나라의 대부가 될 수는 없다. 반드시 청렴한 뒤라야 쓸 수 있다고 한다면 제나라 환공이 무엇으로 세상을 제패하였겠는가? 너희는 나를 도와 다소 부족해도 고명한 이를 드러내어, 역량만으로 천거하라(唯才是擧). 내가 이를 쓰리라!' '통감(通鑑)'에 나온다.
큰 사람을 뽑을 때 작은 흠을 따지기 시작하면 온전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 청렴이 훌륭해도 무능과 맞바꾸면 안 된다. 욕먹을까 봐 명품 백 감춰두고 싸구려 들고 다니는 검소는 검소가 아니라 속임수다.
방법이 바르고 정도가 넘치지 않는다면 비싼 물건을 살 수도 있고, 외제 차를 몰 수도 있다. 청백리 정신을 지킨다는 것이 가식과 위선을 부르면 가증스럽다.
어느 일본학 전공학자가 학술 모임에서 툭 던지던 말이 생각난다. '일본의 경우 막부의 번주가 꾸미지 않고 허름하게 다니면 쇼군을 욕보이는 행동으로 간주하여 처벌됩니다. 사무라이의 입성이 초라하면 주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로 여기지요. 일국의 재상이 낡은 옷 입고 비 새는 집에서 사는 것만 미덕으로 알면 나라의 체면은 뭐가 됩니까?'
■ 유재시거(唯才是擧)
개인의 배경보다는 재능을 중시하겠다
1. 삼국시대, 한국인에게 핫한 시대
중국의 역사는 약 3000년에 이를 정도로 장구하다. 기나긴 시간 중에서 가장 각광을 받는 시대가 있다. 바로 후한이 무너지면서 시작된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시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삼국시대를 좋아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일찍부터 삼국지(三國志)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독서의 대상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 등으로 다양해졌지만 1960~70년대만 해도 삼국지는 필독서에 가까웠다.
이러한 열풍을 타고 이름이 알려진 문인이라면, 예컨대 박종화, 김구영, 이문열, 황석영, 김홍신 등 한번쯤 개인 이름을 내건 삼국지를 내놓았다.
만화도 삼국지 열풍의 대열에서 빠지지 않았다. 고우영, 이현세 등의 만화 삼국지는 문자 읽기를 버거워하는 독자층을 겨냥해서 출판되었다. 이러한 뜨거운 관심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도 많다.
첫째,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사람이 모두 남성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삼국지는 남성의 편향된 관점에서 역사를 풀이하고 있다.
둘째, 다양한 버전의 삼국지들은 진수(陳壽)의 역사(정사) 삼국지보다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자기 식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는 역사를 딱딱한 사실로 다가서는 것보다 흥미로운 소설(문학)로 다가서는 관행을 낳게 되었다.
셋째, 역사를 영웅 중심의 투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사회가 다양한 세력의 경쟁과 협력으로 움직이는 측면을 소홀히 하기가 쉽다.
넷째, 인간사의 다양한 사건을 승패(勝敗)의 단순한 프리즘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렇게 승패의 시각으로만 역사를 보면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게 타당해진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다양한 버전으로 만들어진 삼국지의 탐독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즐겨 지적하는 내용들이다.
한편 또 다른 입장은 소설을 소설로 보면 충분하지 다른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가 없다고 일축하기도 한다. 문학은 역사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소재로 다룰 수 있다. 또 역사는 사실에 매이므로 사건과 사건의 연관성을 다 밝히기도 어렵고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쉽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역사를 소설화 하는 작업은, 문학이 지닌 상상력으로 역사(사실)의 빈틈을 메워서 독자를 역사로 끌어들인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달리 보면 글을 쓰는 작가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개인의 관점에서 역사를 문학과 예술 등으로 재가공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역사학자가 역사적 실체를 규명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역사학자는 사실이라는 엄정한 기준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작가와 화가는 역사학자와 같은 엄정한 기준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제약이 없는 자유의 창작 공간을 사유화시킬 우려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작가와 화가는 자신의 삼국지가 어디에 초점이 있는지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 물론 평론가들에게도 다양한 삼국지의 차이를 정확하게 밝혀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때 우리는 그냥 또 다른 사람의 삼국지가 아니라 어떤 특징을 가진 삼국지를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삼국지를 문학을 넘어 역사로 만나는 심화된 관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2. 정통론:
촉한(蜀漢) VS 조위(曹魏)
삼국시대가 끝나자 정통론이 식자들의 관심사로 등장했다. 특히 송나라에 때에는 후한에서 당나라 그리고 당나라에서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북쪽 유목 민족의 정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가 학계의 현안이 된 것이다.
이러한 관심은 정통론이라는 주제로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정통론은 중국 사상사와 역사학의 빼놓을 수 없는 핵심 논의가 되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후한이 쇠퇴한 뒤 위, 촉, 오의 경쟁 시대가 막을 열었다. 그리고 위나라가 경쟁을 끝낸 뒤에는 진(晉)나라가 수립되었다.
그렇다면 후한에서 진나라까지 어떤 나라가 역사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까? 일견 쉬울 것 같은 문제이다. 이 중 어떤 나라가 전국적인 통제권을 장악했었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정통을 정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미 정통이 문제시 되는 것부터 현실과 정통의 괴리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정통성이 있는 나라가 대대로 이어진다면 아무도 정통성을 거론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특정 시대에 두 나라가 통치권을 두고 서로 경쟁하거나, 한쪽이 전국적인 통제권을 장악했지만 그 나라가 이민족인 경우에는, 어느 나라에게 정통성이 있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삼국 시대와 위진남북조 시대는 모두 통상적인 상황이라 정통을 가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삼국시대의 정통 문제가 크게 대두되기 전부터 역사 서술에서 정통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과거에는 한 왕조(나라)가 망하면 다음 왕조(나라)가 이전의 역사를 정리했다. 위나라가 망하고 진나라가 등장하자 진나라는 이전의 삼국시대의 역사를 서술해야 했다.
우리나라도 통일신라와 발해, 근대사의 정통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근대사의 경우 이승만과 군사정권에 대해서는 일반인과 전문가마다 각자의 입장을 가지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서진의 진수는 삼국지를 서술하면서 위, 촉, 오 중에서 조위(曹魏)를 정통으로 보았다. 동진의 습착치(習鑿齒)는 한진춘추(漢晉春秋)를 쓰면서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보았다.
진수는 위나라를 이은 진나라의 태생 과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삼국시대의 중심으로 위나라를 설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면 습착치는 동진에서 살았으므로 상대적으로 위나라와 진나라(서진)의 승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했다. 아울러 동진은 중원에서 쫓겨나 남쪽에 터를 잡았으므로 유비의 촉한이 서쪽 변방에 자리했던 것과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삼국시대의 정통은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저마다 다른 주장을 펼치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문제는 당나라를 지나서 송나라에 이르러 다시 학인들 사이에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은 주(周)나라에서 후주(後周)에 이르는 1362년간의 역사를 서술하여 통치의 자료로 삼고자 했다. 그리하여 책의 이름도 자치통감(資治通鑑)이라고 지었다. 이때 그는 삼국시대의 조위, 남북조시대의 남조를 정통으로 간주했다.
반면 남송의 주희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저술하여 삼국시대의 촉한을 정통으로 삼았다. 그는 현실을 움직이는 힘(성공)보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념(가치)을 중시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촉한이 실패 했을지라도 정통성을 갖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주희의 성리학이 지배적인 학문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일찍부터 삼국시대를 촉한 중심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이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보면 정통성 논쟁은 역사 인식의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고 현재를 운영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문제와 이어져 있다. 이 때문에 정통성 문제는 항상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이 문제가 한번 제기되면 쉽게 정리되지 않는 것이다.
3. 구현령(求賢令) : 유재시거(唯才是擧)
동아시아 역사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시대와 현실을 움직이는 세력과 주체가 집단에서 개인으로 변해왔다. 같은 집단이라 하더라도 과거로 가면 갈수록 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하며, 근대로 오면 올수록 집단의 규모가 작아지고 간단해진다.
후한과 삼국시대의 현실과 역사는 독립적인 개인 주체보다는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으로 결합된 집단이었다. 개인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하더라도 특정 집단의 일원에 들어 있지 않으면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당시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호족(豪族), 벌족(閥族), 벌열(閥閱), 세가대족(世家大族), 명문거족(名門巨族) 등이 있었다.
이들은 국정 운영의 지분을 분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축적해온 경제력을 바탕으로 공식 국가에 맞먹을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다.
건국 과정에는 다양한 인재가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많다. 승패의 결과가 엄중하기 때문에 개인은 사회적 전통적 제약을 덜 받았다.
하지만 건국 이후에 국정이 안정되면 기득권 집단이 생기게 된다. 이에 따라 다양한 인재는 국정에 진출할 수 없게 되고 국가는 몇몇 가문과 집단의 권익을 유지해주는 이익 단체가 되어버린다.
특히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왕이 어린 나이에 재위에 오르거나 국정을 장악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국가는 외척, 대신, 권신, 문벌의 이익을 증식시키는 사금고(은행)처럼 되어버린다.
후한에서 삼국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은 나라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삼국시대는 후한의 정권이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난세의 영웅들이 혼란을 수습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던 시대였다.
초반의 혼전을 겪은 뒤 위의 조조, 촉의 유비, 오의 손권의 정립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이 중에 조조는 협천자(挾天子), 즉 천자의 권세를 등에 업은 유리한 상황을 창출하면서 끝내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발판을 마련했다.
조조는 어떻게 오와 촉의 대립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 여기서 그의 인재 등용과 관련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모두 세 차례 인재를 구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210년, 구현령(求賢令)으로 알려진 첫 번째 글을 살펴보자.
若廉士而後可用, 則齊桓其何以覇世?
만약 청렴한 선비라야 등용할 수 있다면 춘추시대의 제나라 환공이 어떻게 패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今天下得無有被褐懷玉, 而釣於渭濱者乎?
지금 세상에는 주나라를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킨 강태공처럼 삼베옷을 입고 맑은 꿈을 품고서 위수의 강가에서 낚시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又得無有盜嫂受金, 而未遇無知者乎?
또 한나라 유방을 도왔던 진평(陳平)처럼 형수와 간통하고 뇌물을 받았지만 추천해준 위무지(魏無知)를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 없겠는가?
二三子其佐我, 明揚仄陋, 唯才是擧, 吾得而用之.
여러분들이 나를 도와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오직 재능만 보고 추천하여 내가 그런 사람을 쓸 수 있도록 하라.
국정의 책임자가 위기의 상황이 닥쳤을 때 인재를 찾는 것은 특별할 것도 없다. '서경'이 바로 왕과 인재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평화의 세상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임금과 순, 탕임금과 이윤의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또 '논어'에 보면 조정이 아니라 민간에 있는 인물을 등용하여 국정을 쇄신하라는 거일민(擧逸民)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진(秦)나라 효공(孝公)은 국내외적으로 인재를 찾는 명령을 내렸고, 그 결과 상앙을 만나서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사실 진나라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많은 인재는 자국 출신이 아니라 외국 출신이었다.
한나라 무제(武帝)도 자연재해가 일어나자 인재를 추천하라는 현량조(賢良詔)를 내리고 기성 관료에게는 국정을 쇄신할 대책을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선도 통상적으로 과거를 통해서 인재를 선발했지만 특별한 경우 추천을 통해서 숨은 인사를 발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유재시거’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전에 어떠한 정보 없이 개인의 재능만을 보고 과거의 전력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졸이나 지방대 출신은 이력서를 내도 대졸이나 명문대 출신에 비해 동등한 기회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졸과 지방대 출신이 모두 실력이 없고 대졸과 명문대 출신이 모두 실력이 좋은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졸이나 대졸, 지방이나 서울(수도권)을 따지지 않고 실력만으로 사람을 뽑는다면, 취업 준비생들에게 희망의 세상이 열릴 것이다. 조조는 바로 이와 같은 희망의 목소리를 전했던 것이다.
4. 시대정신: 한실부흥 VS 공치천하(共治天下)
조조는 1차 ‘구현령’으로 부족했던지 두 차례 더 비슷한 명령을 내렸다. 217년, 구일재령(求逸才令)으로 알려진 세 번째 글을 살펴보자.
昔伊贄傅說出于賤人.
옛날에 이윤은 요리사였고 부열은 노예 출신이었지만 명재상이 되었다.
管仲, 桓公賊也.
관중은 환공을 죽이려던 적이었지만 협력하여 제나라를 패자의 나라로 만들었다.
(…)
今天下得無有至德之人, 放在民間?
지금 세상에 존경받을 덕망을 가지고서도 재야에 방치된 사람이 없는가?
及果勇不顧, 臨敵力戰, 若文俗之吏, 高才異質, 或堪爲將守.
용감하여 제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적에 맞서서 힘써 싸우며, 번거로운 일을 처리하는 하급 관리라도 남다른 재주와 실력을 가지고 장수를 맡을 수 있다.
負汚辱之名, 見笑之行, 或不仁不孝, 而有治國用兵之術.
오명을 뒤집어 쓰고 웃음거리가 되었거나 잔인하고 불효를 저질렀지만 치국과 용병의 실력을 갖출 수 있다.
其各擧所知, 勿有所遺.
각자가 알아낸 사람을 추천하여 한 사람이라도 빠뜨리지 않도록 하라.
이 포고령은 재주만 있으면 개나 소나 가리지 않고 쓰겠다는 식으로 오해를 받았다. 이것은 결국 조조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람이라는 걸 반증한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되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포고령을 읽으면 조조가 불인불효한 사람만을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불인불효했던 실력자만을 쓰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는 염사(廉士), 지덕지인(至德之人)을 찾을 뿐만 아니라 제 실력보다 덜 알려진 사람과, 과거에 범죄를 저질러서 처벌을 받았지만 치국과 용병의 자질을 가진 사람을 찾고 있다.
조조는 후한시대에 인재를 찾던 방식의 외연을 최대한으로 넓히고 있다. 즉 인재풀의 제한을 없애고 있는 것이다.
유재시거는 ‘한실(漢室) 부흥’을 내걸었던 유비 집단과 차이를 보여준다. 유비는 조조의 권력 장악을 개인의 욕망으로 보았다. 조조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도 않는 것이다.
따라서 유비는 조조의 부당한 권력을 박탈하고 원래 한실이 가진 권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 인식에 따라 그는 ‘한실 부흥’을 목표로 내세웠다.
유비는 반(反)-조조와 복(復)-한실의 기치를 내걸었으므로 조조에 반대하는 세력과의 연합을 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실에 실망했던 사람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유비는 처음부터 ‘나쁜 조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한실을 부흥시킨 후의 대책이라 할 만한 포스트 이념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비로 하여금 외연 확장을 힘들게 하는 요소였다.
自古受命及中興之君, 曷嘗不得賢人君子, 與之共治天下者乎?
예부터 천명을 받거나 중흥을 한 군주가 어찌 현인과 군자를 얻어서 그들과 함께 천하를 다스리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가?
及其得賢也, 曾不出閭巷, 豈幸相遇哉?
현자를 구해도 집 밖을 나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군주와 현자가 서로 만날 수 있겠는가?
반면 조조는 ‘유재시거’를 통해 한실에 반대하는 인물을 끌어 들여서 ‘공치천하’로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조조는 이 비전을 얼마나 현실화 시켰는가에 따라 평가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보통 조조의 성공을 난세의 간웅(奸雄)에서 찾는다. 이것이 바로 과도하게 문학화된 ‘삼국지’의 병폐라고 할 수 있다.
문학 작품에서는 삼국시대의 두 주인공인 조조와 유비를 교활한 승자와 비운의 패자의 도식으로 엮는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조조는 성공해서 욕 얻어먹고 유비는 실패해서 동정을 받으니 결국 두 사람이 모두 승자가 되는 셈이다. 이것은 대단원의 해피엔딩이 될 수는 있겠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주희는 조위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을 힘의 논리보다는 이념의 지도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조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유재시거’와 ‘공치천하’는 신진 사대부가 문벌 귀족을 넘어서 이전과 다른 사대부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중요한 기틀이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편향된 시각으로 보면 피아의 논리밖에 없지만 객관적 시각으로 보면 과거 속에서 미래를 길어낼 수가 있다.
■ 유재시거(唯才是擧)
오직 재능 있는 인재를 천거하여 뽑다.
크거나 작거나 어떤 조직을 운영할 때 가장 중시해야 할 일이 인재등용이다. 유능하고 리더십이 강한 지도자라도 혼자서는 이루지 못하니 도와줄 인재를 찾는다. 어떤 사람을 구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니 그만큼 중요하다고 人事萬事(인사만사)라 했다.
大公無私(대공무사)하게 인품이 훌륭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찾는 任人唯賢(임인유현)이 바람직하지만 실제는 어렵다. 가까운 사람 임용하는 任人唯親(임인유친)이 많고, 소문만으로 아니면 겉모습만 보는 以言取人(이언취인)이나 以貌取人(이모취인)이 많아 亡事(망사)가 되는 일이 잦다. 오로지 재능 있는 사람(唯才)을 천거하면 등용한다(是擧)는 원칙은 曹操(조조)에게서 나왔다.
중국 晉(진)나라의 陳壽(진수)가 편찬한 정사 ‘三國志(삼국지)’의 魏書(위서)에서 유래했다. 강대국 魏(위)의 실력자 조조가 赤壁(적벽)의 싸움에서 蜀吳(촉오)의 연합군에 패하고 절박한 심정에서 求賢令(구현령)을 발표했다. 조조는 간웅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라를 경영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현인을 급히 구해야 할 때라며 재능만 있으면 개인의 배경이나 과거의 전력을 문제 삼지 않고 등용하겠다고 공포했다. 姜太公(강태공)같은 위인이 숨어 있을 수 있고, 管仲(관중)같은 청렴과는 거리가 멀어도 발탁돼 桓公(환공)을 패자로 올렸다며 이어진다.
‘또한 형수를 범하고 금을 받아도 재능을 알아본 무지를 못 만난 자가 어찌 없겠는가(又得無有盜嫂受金而 未遇無知者乎/ 우득무유도수수금이 미우무지자호)? 그대들이 나를 돕고자 한다면 흠결이 있어도 재능만 보고 천거하라(二三子其佐我明揚仄陋 唯才是擧/ 이삼자기좌아명양측루 유재시거).’ 二三子(이삼자)는 그대들, 仄陋(측루)는 흠결이 있는 사람. 劉邦(유방)을 도와 漢(한)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陳平(진평)은 도덕적으로 흠결이 많은 사람이었다.
項羽(항우)를 섬기다 왔고 형수와 사통했으며 뇌물을 받고 장군을 배치했다. 천거한 魏無知(위무지)란 사람은 유방이 왜 이런 사람을 추천했는지 나무라자 행실이 아니고 능력만 봤다고 했다. 실제 진평은 漢高祖(한고조) 사후 呂后(여후)들의 농단을 막고 한나라를 굳게 지켰다.
실제 조조는 인재를 발탁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아들 曹丕(조비)가 위나라를 세우는데 기반을 닦았다. 그런데 그가 예를 든 유방의 진평 중용은 천하가 난리통이라 흠결 투성이도 덮이고 뒷날의 성과가 드러났다고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의 인재 등용은 어지러운 시대도 아니니 정부 등 기관에 깨끗한 사람들로 채워질까. 능력은 고사하고 도덕성을 넘어 범죄자까지 발탁되고 버젓이 청문회를 통과하는 공직자들을 너무나 자주 본다. 정권이 바뀌면 오로지 내편만을 낙하산으로 곳곳에 배치하여 이전의 비난을 무색하게 한다.
▶️ 唯(오직 유, 누구 수)는 ❶형성문자로 惟(유)는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隹(추, 유)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唯자는 ‘오직’이나 ‘다만’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唯자는 口(입 구)자와 隹(새 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隹자는 꽁지가 짧은 새를 그린 것으로 ‘새’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새를 그린 隹자에 口자를 결합한 唯자는 본래 새들이 서로 지저귄다는 의미에서 ‘응답하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唯자는 어조사나 ‘오직’, ‘다만’이라는 뜻이 가차(假借)되어 있다. 그래서 唯(유, 수)는 ①오직, 다만 ②비록 ~하더라도 ③때문에 ④바라건대 ⑤이(어조사) ⑥예, 공손(恭遜)하게 대답하는 말 ⑦생각하다, 그리고 ⓐ누구(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만 단(但), 다만 지(只), 다만 지(祗)이다. 용례로는 오직 그것 하나 뿐임을 유일(唯一), 오직 홀로를 유독(唯獨), 오직 물질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일을 유물(唯物), 오직 내가 제일이라는 말을 유아(唯我), 네 네 하고 공손히 대답하는 소리를 유유(唯唯), 이 세상에 나보다 존귀한 사람은 없다는 말 또는 자기만 잘 났다고 자부하는 독선적인 태도를 이르는 말을 유아독존(唯我獨尊), 일이 선악이나 시비에 상관없이 남의 의견에 조금도 거스르지 않고 따름 곧 남의 말에 맹종함을 이르는 말을 유유낙낙(唯唯諾諾), 둘이 아니고 오직 하나 뿐이라는 뜻으로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말을 유일무이(唯一無二),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 한다는 말을 유공불급(唯恐不及), 비전 등을 오직 한 사람에게만 전하는 일 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전수받은 것을 이르는 말을 유수일인(唯授一人), 혹시나 또 무슨 말을 듣게 될까 겁난다는 뜻으로 한가지 착한 일을 들으면 다음에 듣게 될 착한 것과 겹치기 전에 어서 다 배워 익히려는 열심인 태도를 이르는 말을 유공유문(唯恐有聞) 등에 쓰인다.
▶️ 才(재주 재)는 ❶지사문자로 纔(재)의 간자(簡字)이다. 초목의 새싹이 땅에서 돋아나는 모양을 나타낸 글자로 초목의 싹이 자라나듯 사람의 능력도 클 수 있다는 데서 재주를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才자는 ‘재주’나 ‘재능’, ‘근본’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才자는 手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才자를 보면 땅속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才자는 이렇게 싹이 올라오는 모습으로 그려져 ‘재능이 있다’라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어떤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아이들을 보고 ‘싹수가 보인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니 才자는 힘 있게 올라오는 새싹을 사람의 재능이나 재주에 빗대어 만든 글자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갑골문과 금문에서의 才자는 종종 ‘있다’라는 뜻으로도 쓰였지만, 후에 土(흙 토)자가 더해진 在(있을 재)자가 만들어지면서 뜻이 분리되었다. 그래서 才(재)는 성(姓)의 하나로 ①재주 ②재능(才能)이 있는 사람 ③근본(根本) ④바탕 ⑤기본(基本) ⑥사격의 하나 ⑦겨우 ⑧조금 ⑨결단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재간 기(伎), 재주 량/양(倆), 재주 기(技), 재주 예(藝), 재주 술(術)이다. 용례로는 재주와 능력을 재능(才能), 재주와 타고난 바탕을 재질(才質), 어린아이의 슬기로운 말과 귀여운 짓을 재롱(才弄), 무엇을 잘하는 소질과 타고난 슬기를 재조(才操), 재치가 있어 훌륭하게 일을 해 내는 정신 능력을 재기(才氣), 재주와 도량을 재량(才量), 재주가 있고 풍채가 뛰어난 사람을 재준(才俊), 재주가 있는 여자를 재녀(才女), 재주와 덕행을 재덕(才德), 재주가 뛰어나서 현명함을 재현(才賢), 눈치 빠른 재주를 재치(才致), 재치가 있게 하는 재미스러운 말을 재담(才談), 재주가 많은 남자를 재사(才士), 여자의 재주와 용모를 재색(才色), 재주가 있는 젊은 남자를 재자(才子),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을 영재(英才), 학문과 재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을 수재(秀才), 재주가 놀라운 사람을 인재(人才), 선천적으로 타고난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을 천재(天才), 둔한 재주 또는 그러한 사람을 둔재(鈍才), 재주가 많음을 다재(多才), 세상에서 드물게 뛰어난 재기 또는 그 사람을 귀재(鬼才), 더할 나위 없는 재능을 지재(至才), 남달리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러한 사람을 고재(高才), 남보다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을 현재(賢才), 널리 사물에 통달한 인재 또는 그러한 재주를 달재(達才), 사리 판단이 날카롭고 재능이 빛난다는 재기환발(才氣煥發), 재주가 있는 사람은 병이 많다는 재자다병(才子多病), 재주와 덕행을 다 갖춤을 재덕겸비(才德兼備), 여성이 뛰어난 재능과 미모를 함께 갖춤을 재색겸비(才色兼備), 재주는 있으나 덕이 적음을 재승덕박(才勝德薄), 재주와 학식을 다 갖춤을 재학겸유(才學兼有) 등에 쓰인다.
▶️ 是(이 시/옳을 시)는 ❶회의문자로 昰(시)는 동자(同字)이다. 해(日)처럼 정확하고 바르다(正)는 뜻이 합(合)하여 옳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是자는 ‘옳다’,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是자는 日(해 일)자와 正(바를 정)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正자는 성(城)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바르다’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正자와 日자가 결합한 是자는 ‘태양(日)은 올바른 주기로 움직인다(正)’는 뜻이다. 즉 是자는 태양은 일정한 주기로 뜨고 진다는 의미에서 ‘올바르다’와 ‘옳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으로 해석한다. 是자는 때로는 ‘이것’이나 ‘무릇’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是(시)는 (1)옳음. 옳은 것 (2)도리(道理)에 합당함 (3)이. 이것. 여기. 이곳 등의 뜻으로 ①이, 이것 ②여기 ③무릇 ④이에(접속사) ⑤옳다, 바르다 ⑥바르게 하다 ⑦옳다고 인정하다 ⑧바로잡다 ⑨다스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의(義),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불(不),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다. 용례로는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다툼을 시비(是非), 옳다고 인정함을 시인(是認), 그릇된 것을 바로잡음을 시정(是正),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날을 시일(是日), 마찬가지로나 또한을 역시(亦是), 만일에 또는 가다가 더러를 혹시(或是), 도무지나 전혀를 도시(都是), 변하여 온 사물의 처음 바탕을 본시(本是), 나라의 근본이 되는 주의와 방침을 국시(國是), 옳다고 여기에 확정되어 있는 그 정당의 방침을 당시(黨是), 회사나 결사의 경영 상의 방침 또는 주장을 사시(社是), 학교의 기본 교육 방침을 교시(校是), 민족 정신에 비추어 옳다고 여기는 주의와 방침을 민시(民是), 다른 것이 없이 곧을 변시(便是), 자기 의견만 옳게 여김을 자시(自是),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꼭 들어 맞음을 칭시(稱是),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을 시비지심(是非之心),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다는 시시비비(是是非非), 옳고 그르고 굽고 곧음 또는 도리에 맞는 것과 어긋나는 것을 시비곡직(是非曲直), 옳으니 그르니 하고 시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일을 시야비야(是也非也), 어저께는 나쁘다고 생각한 것이 오늘은 좋다고 생각됨을 작비금시(昨非今是), 겉은 옳은 것 같으나 속은 다름을 사시이비(似是而非) 등에 쓰인다.
▶️ 擧(들 거)는 ❶회의문자로 举(거), 挙(거), 㪯(거)는 통자(通字), 舁(거)와 동자(同字), 举(거)는 약자(略字)이다. 擧(거)는 음(音)을 나타내고 더불어 같이하여 정을 주고 받는다는 與(여, 거)와 손(手)으로 물건을 들어 올린다는 뜻이 합(合)하여 들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擧자는 ‘들다’나 ‘일으키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擧자는 舁(마주들 여)자와 与(어조사 여)자, 手(손 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여기서 舁자는 위아래로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마주 들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 擧자에는 총 5개의 손이 그려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擧자를 보면 단순히 아이를 번쩍 든 모습만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소전에서부터는 다양한 글자가 조합되면서 지금의 擧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擧(거)는 ①들다 ②일으키다 ③행하다 ④낱낱이 들다 ⑤빼어 올리다 ⑥들추어 내다 ⑦흥기하다(세력이 왕성해지다) ⑧선거하다 ⑨추천하다 ⑩제시하다 ⑪제출하다 ⑫거동(擧動) ⑬행위(行爲) ⑭다, 모든 ⑮온통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할 위(爲), 옮길 이(移),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온 나라 모두를 거국(擧國), 일에 나서서 움직이는 태도를 거동(擧動), 어떤 사람의 이름을 초들어 말함을 거명(擧名), 손을 위로 들어 올림을 거수(擧手), 스승과 학인(學人)이 만나는 일을 이르는 말을 거각(擧覺), 기를 쳐듦을 거기(擧旗), 많은 사람 가운데서 투표 등에 의하여 뽑아 냄을 선거(選擧), 통쾌한 거사나 행동을 쾌거(快擧), 많은 무리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는 것을 대거(大擧), 인재를 어떤 자리에 추천하는 일을 천거(薦擧), 법령이나 질서를 위반한 사람들을 수사기관에서 잡아 들임을 검거(檢擧), 난폭한 행동을 폭거(暴擧), 경솔하게 행동함을 경거(輕擧), 온 국민이 모두 한마음 한 뜻으로 뭉치어 하나로 됨을 거국일치(擧國一致), 바둑을 두는 데 포석할 자리를 결정하지 않고 둔다면 한 집도 이기기 어렵다는 거기부정(擧棋不定), 살받이 있는 곳에서 화살이 맞는 대로 기를 흔들어 알리는 한량을 거기한량(擧旗閑良), 머리를 들어 얼굴을 맞댐을 거두대면(擧頭對面),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음을 이르는 거석이홍안(擧石而紅顔), 온 세상이 다 흐리다는 거세개탁(擧世皆濁), 밥상을 눈썹 높이로 들어 공손히 남편 앞에 가지고 간다는 거안제미(擧案齊眉), 이름 난 사람의 장례 때, 사회 인사들이 모여서 통곡하고 장송하는 일을 거애회장(擧哀會葬), 한 가지를 들어서 세 가지를 돌이켜 안다는 거일반삼(擧一反三), 모든 조치가 정당하지 않음을 거조실당(擧措失當), 다리 하나를 들어 어느 쪽에 두는 가에 따라 무게 중심이 이동되어 세력의 우열이 결정된다는 거족경중(擧足輕重), 명령을 좇아 시행하는 것이 민첩하지 못하다는 거행불민(擧行不敏)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