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76
2월23일[사순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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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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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kJTDKHnMJA
[작은형제회 오학준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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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와 다른 한 존재를 견딘다는 것,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때로 본의 아니게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을 건널 때가 있습니다. 주고받은 상처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세월이 많이 흘러도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아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때 왜 그런 처신을 했을까? 왜 그때 입을 딱 틀어막지 않았을까? 후회하며 자다가도 생각이 떠올라 이불킥을 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아, 되돌릴 수 없으니 더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런 갈등과 상처는 멀리 시드니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사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벌어지지 않습니다. 지극히 가까운 사람들, 예를 들면 배우자나 연인, 형제자매, 절친한 친구, 매일 얼굴 마주하는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예의를 지키고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하루 온종일 가까이 지내는 이웃이라 할지라도, 나와 그 사이에 일정의 완충지대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생활 속 거리 두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가까이 지내다 보니 서로 다름으로 인한 고통이 당연히 발생합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처럼, 나와 다른 한 존재를 견딘다는 것,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존재로 인한 고통과 십자가는 때로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오늘 우리에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가르침을 건네고 계십니다. 상호 관계가 극으로 치닫기 전에 예방책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상호 관계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는 데는 일련의 과정이 있습니다. 각각 살아온 환경이나 지니게 된 가치관, 정치적 견해 차이 등등 모든 것이 다른 현실에서 너무나 당연히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 일을 해나가거나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입장 차이가 발생합니다. 그럴때는 적정한 어느 순간 딱 멈추면 좋을 텐데, 그게 또 의지대로 되지 않습니다.
서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언성이 높아집니다. 화를 내고 성을 냅니다. 최악의 상황은 바로 욕설이요 폭력입니다. 상대방을 향해 바보, 멍청이라고 외칩니다. 그럴 때 상대방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멱살을 잡던지 주먹을 날릴 것입니다.
그 순간 둘 사이의 관계는 생명력을 잃습니다.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살아생전 불붙는 지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이십 년 삼십 년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으셨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자상하고 인자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분은 당연히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도 절대로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온유와 사랑의 박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비결은 그치지 않는 일상적인 기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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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xAJxJ7VX-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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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가 무의미해지는 결정적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의로움’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움은 심판의 기준입니다. 의로움은 자신이 받은 것만큼 내어줄 줄 아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의롭지 못함은 내가 그렇게 받았는데도 이웃을 심판하는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나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 하십니다.
만약 우리 자녀가 서로 형제끼리 싸우고 미워하면서 부모에게 와서 사랑한다고 하면 기쁠까요? 모두가 나의 자녀들이고 나의 자녀를 무시하면 나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미워하며 부모를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성당에 아무리 오해 다녀도 사랑이 증가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구역 판공을 하다 보니 그런 것들로 상처받아서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어서 상대가 성당에 나오지 않게 되었는데 자신만 하느님을 만나러 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까요? 먼저 예물을 바치기 전에 상처를 준 사람에게 가서 사과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예배하려 할 때는 그 누군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과 집착은 완전히 다릅니다. 미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무엇일까요? 성체성사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봉헌입니다. 봉헌이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이어주는 중앙에 위치합니다. 말씀도 성체도 중요한 부분이지만, 봉헌이 온전하지 않으면 두 부분이 다 의미를 잃습니다. 선악과를 바치지 않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과 생명나무를 무의미하게 만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봉헌해도 내가 봉헌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예전에는 짐승을 바쳤습니다. 짐승을 바칠 때는 흠 없는 것을 바쳐야 했습니다.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바쳐야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시는 말씀과 성체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래야 마음이 이어져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봉헌하면 어떨까요? 그들은 집착하는 걸 바쳤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봉헌한 것에 보답을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아야 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인정입니다. 참다운 봉헌은 집착하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 여겨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이가 형제를 소유하게 되지 않고 부모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보면 동생이 태어난 질투 때문에 동생의 머리카락을 뽑거나 꼬집으며 괴롭히는 경우를 봅니다. 누나는 아기 남동생이 밉습니다. 만약 아기 남동생의 뽑힌 머리카락을 부모에게 내밀며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게 사랑일까요?
먼저 자신이 바친 것이 부모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첫째가 부모처럼 아기에게 젖을 주고 목욕시키는데 도와주라 권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가 부모가 된 듯이 동생을 돌봐줍니다. 이때 누나는 동생을 부모의 심정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동생에게 봉사하며 부모를 예배하게 됩니다. 이때 하는 행위는 부모를 기쁘게 합니다.
사랑은 창조자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때 생기고 그 사랑하는 것을 바칠 때 참다운 예배가 되고 성체를 영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야만 온전한 봉헌이 되고 온전한 봉헌이 될 때야만 미사가 참다운 예배가 됩니다. 성당엔 나오지만, 생명을 경시하고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 중에 여러분이 하느님이라면 누구를 구원해주시겠습니까? 답은 뻔합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며 형제를 미워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참다운 예배는 부모의 피땀이 묻어있는 것에 대한 태도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제물을 봉헌하기 전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의 것으로 먼저 사랑합시다. 가장 완전한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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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학교에 다닐 때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군자는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타인에게는 부드럽다는 의미였습니다. 반대로 ‘외강내유(外剛內柔)’라는 말은 소인배들의 행동이라고 배웠습니다. 소인배는 자신에게는 부드럽지만 타인에게는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외강내강(外剛內剛)’하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본인에게 엄격할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엄격한 사람입니다. 군대와 같은 조직에서는 필요한 덕목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소방대원들에게도 필요한 덕목 같습니다. ‘외유내유(外柔內柔)’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흔히 ‘술에 술 타고, 물에 물 타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평상시에는 큰 무리가 없겠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본인은 물론, 조직에도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본당 사목자에게는 어떤 덕목이 필요한지 생각해 봅니다. 저를 신학교에 보내 주신 아버지 신부님은 ‘외강내강’의 사목자였습니다. 고향이 황해도셨고, 실향민이었습니다. 북한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탈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사시면서 외강내강의 삶을 살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최 씨에, 옥니에, 곱슬머리 면 고집이 엄청 세다.’ 아버지 신부님은 삼박자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최 씨였고, 옥니였고, 곱슬머리였습니다. 그런 성품이셨기에 교구의 재정 담당을 하였고, 본당 신축을 3번이나 하였습니다. 은퇴하여서도 식복사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하였습니다.
33년 사제생활을 하는 저를 돌아봅니다. 저는 아버지 신부님처럼 ‘외강내강’의 사목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떠올리면 ‘잘했네, 잘 될 거야’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저는 시편의 이런 말도 좋아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기어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그가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햇님과 바람의 이야기도 좋아했습니다. 결국 길 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게 하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따듯한 햇빛이 나그네의 옷을 벗게 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무엇인가를 잘 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별로 없었습니다.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듯이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에 저 자신을 맡기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도 큰 어려움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일이든 미리 준비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읽었습니다. “당신이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다. 당신은 습관을 결정할 수는 있다. 그 습관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외유내유하는 제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욱’하는 성격입니다. 제가 부족한 부분이 자꾸 드러나면 참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지나고 나면 늘 후회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외유내강’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롭고 온유하셔서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면 용서해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이웃이 잘못을 했을 때라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한 없이 넓은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스스로의 삶에는 엄격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성격이신지요? 어떤 성격이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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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20-26: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가지라고 하신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살인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22절),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22절) 하신다. 예수께서는 행실에서 율법이 단죄하지 않는 것도 징계하신다.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3절). 이 말씀은 예물을 바치고 나서나 예물을 바치기 전이 아니다. 그것은 예물이 제단에 놓인 순간에, 제사가 시작된 바로 그때,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 하신다. 예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형제에게로 달려가야 한다. 이것은 주님께서는 사랑을 가장 훌륭한 예물로 여기신다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예물이 없으면 제물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둘째로는 주님께서는 화해를 참으로 필요한 것으로 만드시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게 하신다. 화해하기 전에는 그의 제물은 봉헌되지 못한 채 제단에 그대로 놓여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화해하여야 한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우리의 양심이기도 하며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죽음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우리의 고발자가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제단에 나올 때도, 우리가 이웃과 가지는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올바를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죗값을 모두 치르기까지 풀려나지 못한다. 우리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하여 주님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참된 예물을 드리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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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분노에 대하여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십계명의 규정을 풀이하여 심화시키십니다. 바리사이들에게 의로움이란 조문에 쓰인 극단적 행위를 삼가는 것이지만, 예수님께는 그러한 행위로 나아가게 하는 싹을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분노하지 마라.’, ‘분노를 한 사람과 화해하여라.’라는 뜻으로 풀이하십니다. 문자 그대로 살인만 금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의 원천이 되는 분노라는 감정까지 제어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성내는 것을 금지하시고, 나에게 원망을 품은 이들과도 화해하기를 바라십니다.
교부들은 분노를 두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 분노는 오늘 복음에서 말한 분노로서 영혼이 굳는 병입니다. 이는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그 뿌리마저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분노도 있습니다. 죄악과 불의 앞에서 일어나는 분노, 악으로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 솟아나는 분노입니다.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것을 보시고 상을 뒤엎어 버리신 예수님의 분노나 구약에서 불의 앞에서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분노가 이러한 분노입니다. 이 두 번째 분노는 이유가 있는 분노로, 성내지 않으면 오히려 죄가 되는 분노입니다. 무질서한 것을 올바르게 질서 잡으려는 분노는 정당합니다. 이것은 정의와 사랑을 위한 ‘거룩한 분노’로 일컬어집니다.
지금 나에게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것이 이기심에서 오는 분노인지, 의로움을 지향하는 분노인지 식별하여야 합니다. 불의 앞에서 분노하지 못하는 것은 덕이 아니라,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거룩한 분노일 때도 그 분노의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되어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겸손도 함께 지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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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올바른 실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0-22)
이 말씀은 앞의 17절에 있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계명과 율법의 ‘완성’은 ‘완벽하게’ 지키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올바르게’ 지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라는 말은, 겉으로만 의로운 척 하는 것, 즉 ‘위선’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는 말씀은, “위선자들처럼 살지 마라.”, 즉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않으면 “살인하지 마라.”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군가를 마음속으로 죽이고 싶어 하는 것도 살인죄라고 가르치십니다.
“성을 내다, 바보라고 하다, 멍청이라고 하다.”라는 말은, 실제로 형제를 죽이지는 않지만 마음으로는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마음속의 그 미움이 분노와 모욕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재판, 최고의회, 불붙는 지옥’은 하느님의 처벌을 ‘점층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각각의 죄에 상응하는 처벌이 아니라…… 세 가지 다 정신적인 살인이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앞의 말씀은 ‘내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말씀이고, 지금 이 말씀은 ‘누군가’가 나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는 ‘내가’ 화가 나 있는 상황만 생각하고, 형제가 나에게 ¹화가 나 있는 것을 모르거나 무시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몹시 화가 나 있고, 나를 미워하고 있고, 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화’만 잘 다스리면 신앙생활을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때문에 화가 나 있는 ‘그 사람의 화’도 잘 풀어 주어야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나거든’이라는 말 때문에, “생각이 안 나면, 또는 모르면, 그냥 넘어가도 된다는 것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내가 모른다고 해서, 또 내가 잊어버렸다고 해서, ‘그의 화’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고, 그를 화나게 만든 나의 잘못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항상 잘 성찰해야 합니다. 양심성찰뿐만 아니라, 상황에 대한 성찰도 필요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한 것이 아닌데, 그가 오해를 하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 오해를 풀어 주는 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화해’는 나의 부족함을 내가 먼저 인정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용서와 화해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내가 그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만 생각하는데, ‘용서를 청해야 하는’ 상황도 생길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평생 용서할 일만 있고 용서받을 일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는 말씀은,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위선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동시에, 똑같이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5-26)
이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1) 회개는 ‘바로 지금’ 해야 한다. 나중으로 미루다가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심판대에 선 다음에 후회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회개와 보속은 철저하게,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한다.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다. 나는 할 만큼 했다.”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심판을 받기 위해서 법정으로 가는 도중”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그 심판을 받을 준비를 하는 시간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전부 다 ‘벌을 받기 위한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심판결과가 주님의 칭찬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인 사람도 있고, 처벌과 멸망인 사람도 있는데, 어떤 쪽이 될지는 ‘지금’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마지막 한 닢을 갚다.”라는 말은, 연옥에서 보속을 완전히 마치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지옥은 보속을 하는 곳이 아니라 처벌을 받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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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 5장 21-48절은 예수님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말씀(5,17-20 참조)에 이어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과 가르침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켜야 하는 여섯 개의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주제는 살인, 간음, 이혼, 거짓 맹세, 보복,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 규정을 제시하시고, 이어서 각 율법 조문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제시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유다교 전통을 받아들이시면서, 또한 제자들에게 율법의 근본정신, 곧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율법 규정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5,20 참조).
예수님께서는 살인 금지에 관한 율법의 가르침(탈출 20,13; 신명 5,17 참조)과 규정 위반에 따른 결과를 설명하십니다. 살인은 율법이 금지하고 있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을 금지하는 율법의 가르침에 동의하시지만, 제자들에게 살인을 유발하는 원인까지 살피게 하십니다. 성을 내는 행위는 살인의 첫 단계가 될 수 있습니다.
살인과 성냄의 대조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완성하러 오셨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된 율법의 요점은 인간관계와 관련됩니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 극한 상황에서 살인까지 이어질 수 있지만, 화해를 통하여 회복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이라는 죄의 뿌리를 볼 수 있도록 안내하시면서, 한편으로는 화해함으로써 인간관계를 회복하도록 요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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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복음서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로 예수님과 논쟁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여 율법을 따르고 지키던 이들이었습니다.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유다교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실천하며 살았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실상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것도 힘겨워하며 살아갑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그들을 능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법은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법대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기준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법대로’ 살던 사람들이었고 그것이 그들 삶의 가장 큰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법대로’ 사는 것에 만족하고 떳떳해할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생각하고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리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해쳐서는 안 될 뿐더러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입으로 많은 이들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예물로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웃과 화해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용서를 청하고,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갚는 것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이 지닌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그 의미를 먼저 생각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로움에 이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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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그런데, 대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대당명제로 제시하십니다. ‘대당명제’란 한 명제를 먼저 내세우고, 그 다음에 그에 대한 반명제를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곧 이는 “~라고 이르는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말씀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화해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곧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형제들 사이의 사랑과 화해를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말해줍니다. 형제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단의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예물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맺는 관계가 곧 하느님과 맺는 관계요, 형제와의 의로움의 관계가 곧 하느님과의 의로움의 관계임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러므로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무엇이 우선이고 먼저 해야 할 일인지를 헤아려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6,24) 그리고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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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시비를 따짐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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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20)
예전 가수 ‘나애심’ 씨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란 노래를 불렀습니다. 때론 우리는 어둡고 힘들었던 과거를 잊고 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자신 앞에 스스로 부끄러웠던 발자국, 흑역사를 지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의 빗나간 발자국을 바르게 고쳐 줄 수는 있어도 없는 발자국은 바르게 할 수 없다는 표현도 있더군요. 이런 우리에게 특별히 이사야 예언자의 다음 말씀이 희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43,18) 위로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에18,21.23)을 보시고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어두운 과거의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에 대한 참된 신앙의 응답은 바리사이들이 외치던 구태의연한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의로움보다 더 큰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은 오늘날 흔히 표현하는 大義名分과 유사하다고 생각되는데, 대의명분이란 사람이 큰 뜻을 펼치기 위해 지켜야 할 본분이나 도리를 뜻합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 대의명분이란 틀에 연연할 때, 소수의 약자와 장애인 그리고 타인의 배려와 도움을 절실히 필요한 죄인들에겐 숨을 자리와 숨 쉴 여백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대의명분에 얽매여 그들을 판단하고 단죄할 때, 자신과 화해는 물론 타인과 세상과 화해를 통한 새로운 통합과 친교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다만 되돌아옴을 보시고 새로운 기회와 시작을 약속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그러기에 우리는 배우고 깨달을 때만이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게 되고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제가 저 자신을 잘 알고 있고, 제가 살아오면서 만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를 잘 알고 있기에,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선 우리의 의로움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의 의로움을 더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선뜻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예전 개그 콘서트의 개그 코너였던 도긴개긴처럼, 우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의로움이라는 게 사실 도긴개긴, 오십보백보인데 더 능가하지 않으면, 이라는 단서가 무척 어깨를 짓누르고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의롭게 살고 있지 않다, 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이나 옳음에 있어서 더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는 단서가 여간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어디 그게 쉬운 일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당대에 의롭게 살고 옳게 산다, 고 자부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롭게, 더 옳게 사는 것이 어디 그리 쉬웠겠습니까? 더더욱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과 제자들의 의로움의 기준은 천양지차이었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로움은 그 실천적인 면에서 훨씬 더 엄격하고 힘들었다는 점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란 기껏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데 있었던 반면,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의로움은 율법 그 이상의 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과 이후의 복음에서 세세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형식은 6개의 대당 명제로 제시되고 있는데 전자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라면, 후자가 제자들이 살아야 할 의로움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는 대당 명제의 첫 번째만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전체를 요약해 보자면, 첫째 살인하지 마라 - 성내지도 마라.(마태5,21-26절) 둘째 간음하지 마라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마라.(27-30절) 셋째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하지 마라.(31-32절) 넷째 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마라(33-37절), 다섯째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마라.(38-42절) 여섯째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바리사이들의 의로움과 제자들 곧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의로움을 비교해서 보니 훨씬 힘들다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살기를 바라는 6가지 의로움은 그것을 실천하기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고 분명히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의로움이 어떤 것인지 알았고 아울러 우리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를 실천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하늘나라의 의로움을 실천할 수 있기 위해 주님께 성령을 주시도록 청하고 찾고 두드릴 수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절감하셨으리라 봅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를 실천하고 실현한다는 것은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다만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실천하도록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발을 디딜 수밖에 없습니다. 실천도 해보기 전에 ‘나는 못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기보다 주님 당신께서 도와주시고 능력을 주시면 그렇게 살아 보도록 힘써 노력해 보겠습니다, 고 말하도록 합시다. “주님, 당신께서 저희의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누가 당신 앞에 감당할 수 있으리까? 주님 다만 당신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신 하늘나라의 의로움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시도록 간청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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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은 이야기는 ‘결과보다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결과를 가지고 과정을 말합니다. “A학점을 맞지 못한 것을 보니, 공부 안 했구나.”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해도 A학점을 맞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산수’를 강조하셨습니다. 지금 ‘산수’를 잘해야 중학교 올라가서 수학을 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시간 시험을 봤고, 그 결과를 보시고는 몽둥이로 때리셨습니다. 특히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번에 다 맞았는데, 이번에 1개 틀렸으면 성적이 떨어졌다고 맞아야 했습니다.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고, 이때 많은 친구가 수학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를 가지고 실패의 삶이라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완벽주의는 직관적이고 익숙한 문제 해결에는 탁월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익숙한 문제만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직관적 형태의 문제만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결과 중심의 삶은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아직도 결과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과정 중심의 삶이 이 세상을 사는데 훨씬 더 현명하고 지혜롭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결과보다 과정의 삶이 중요함을 명령하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결과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를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사랑은 마음 깊은 데서부터 실천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계명을 새롭게 해석해 주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에는 험담이나 멸시도 금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화해 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형제와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바친 예물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결과만을 위한 삶보다 과정을 더욱더 깊이 있게 실천해야 한다면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고 화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로 사랑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다고 하는 순간, 하늘 나라는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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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분노와 화해>
마태오 5,20ㄴ-26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분노와 화해>
분노는
그의 뜻대로
나를 그에게 넘겨
나를 없애는 것이요
화해는
나의 뜻대로
그를 나에게 품어
나를 키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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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뿌리를 다스려라>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 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를 보거나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는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 있고, “다재다능하지만, 혀를 다스리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알베리오네) 그러니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성녀 데레사)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화해하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입니다.”(코헬10,13)
아무리 조심해도 마음 한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귀가 둘이고, 눈이 둘인데 입은 하나일까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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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하라, 그러면 살리라>
-구원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여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시편130,3)
오늘 화답송 후렴이 반갑고 은혜롭습니다. 이런 깨달음에 투철한 이들이 진정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이들이 남을 판단하지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들은 결코 남을 판단하지도 단죄하지도 않습니다.
일찍이 공자께서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익히어 새로운 것을 온전히 앎으로’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과거의 것을 새로운 깨달음의 계기로 삼는 일이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이겠습니다. 면담고백성사를 통해서, 또 지난 옛 스승을 책에서 다시 만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새삼 반복되는 역사임을 깨닫습니다.
20년 전에 수도원을 찾은 어느 자매가 참 반가워했습니다. 당시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30대 초반이였는데 아르헨티나에 이민중 잠시 20년 만에 귀국했고, 그 사이에 세 자녀를 둔 50대 초반의 나이라 했습니다.
“20년 후에 귀국할 때 그때 다시 뵈어요.”
“20년 후에라, 하루하루 살다보면 되겠지요.”
대답하고 나이를 헤아려 보니 96세! 자신할 수 없었고, 하루하루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새로이 했습니다. 지난 20년이 순간이듯 앞으로의 20년도 순간일 것입니다.
70대 말의 노부부와의 만남도 잊지 못합니다. 비슷한 연배의 형제자매들을 만나면 세월의 무게와 더불어 저절로 동질감과 더불어 친밀감을 느낍니다. 어느 자매의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몇 년 전 시어머니는 9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6.25 사변 시 남편을 잃고 26세 홀로 되어 유복자 아들 하나만 키웠고 제가 며느리로 들어왔을 때 시어머니는 46세 참 젊었습니다. 독실한 신자분으로 믿음으로 사셨지만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결혼후 평생을 모시고 살았고 임종전 몇 년 동안은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켜드리며 온갖 시중을 다 들었습니다. 임종전 마지막 말씀이 모든 앙금을 말끔히 씻어냈습니다. ‘무서워하지 마라. 나도 에미다. 네 아픈 것들은 내 모두 가지고 가서 요단강에 버리고 가마. 아프지 마라.’ 마지막 유언 후 아무 말씀도 못 하시고 일주동안 누워 계시다가 임종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 온 시어머니의 한평생 삶이 얼마나 기구했는지 마음이 아렸습니다. 6.25사변 전후로 얼마나 많은 분이 참혹한 불행과 시련을 견뎌냈는지, 정말 무죄한 이들의 피를 흘리는 전쟁이 한반도에서 다시 있어선 안 될 것입니다.
1970년대 제20대 시절은 군부독추기경입니다. 한 분의 생존 인물을 꼽으라면 저보다 몇 살 적지만 여전히 한결같이 꼿꼿한 선비재의 엄혹한 시대였지만 사회 곳곳에는 어른도 많았고 의인도 스승도 큰 스님도 많았고, 찾아 읽고 또 들으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현실이 잡목(雜木) 우거진 야산(野山)같다면, 그때는 곳곳에 큰 산에 푸르른 정신의 우람한 아름드리 거목의 스승들도 많았습니다. 그 한 예가 김수환 같은 삶을 살는 영원한 현역의 원로 정치가 충남 청양 출신의 이해찬일 것입니다. 이분의 평전도 동시대 사람으로 참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어른도 스승도 예언자도 찾아보기 힘든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이요, 지식인은 많아도 지성인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삶의 희망을, 길을, 중심을, 의미를, 목표를, 방향을, 가치관을 잃어 정신들도 많이 사악(邪惡)하고 쇠약(衰弱)하고 왜소(矮小)하고 변질(變質)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서사가 사라진, 스토리와 컨텐츠가 너무 빈약한 세상이요 개인들입니다. 뜻밖에 찾아 읽게 된 “리영희(1929-2010) 평전”을 어제는 뜨거운 마음으로 틈틈이 많이 읽었습니다. 시인 고은은 화갑 기념문집에서 그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상의 은사
시대의 선구자
60년대 70년대 80년대 대표적 지성
아 이 한반도의 살아 있는 정신
불
얼음
우리들의 전위와 후방”
그가 항상 웃어른으로 모신 '시대의 스승', 무위당 일속자 장일순(세례자 요한1928-1994)에 대한 그의 고백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사회에 매몰되지도 않고, 인간속에 있으면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시키면서도 본인은 항상 그밖에 있는 것 같고,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고, 밖에 있으면서 인간의 무리들 속에 있고, 구슬이 진흙탕에 버무려 있으면서도 나오면 빛을 발하고 하는 그런 사람은 이제 없겠죠.”
이런 분들이 저에게는 지금도 빛을 발하는 스승들이요 평전도 늘 가까이 두고 읽습니다. 답은, 진리는, 구원은, 빛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길도 하늘문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빛나는 깨우침을 주는 분이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입니다. 이분들의 존재가 그대로 살아 있는 하느님 증명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정말 신자들이라면 늘 깨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는 정신(精神)으로, 결의(決意)로, 기개(氣槪)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주님은 직설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지적합니다. 무시와 멸시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 형제를 바보라고 멍청이라고 하는 것, 말하는 자체가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의 근본적 변화를, 마음의 순수를 촉구하는 주님입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샘솟는 자비와 지혜요 바로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주저함 없이 예물을 바치기전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있다면 이들을 찾아 용서를 청해 화해할 것이며,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더라도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는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들이겠습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우리 모두 근본적인 마음의 혁명인 회개를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다시 생각하는 참행복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묻지 않는 주님이십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바 어제가 아닌 오늘이요 과거가 아닌 현재입니다. 용두사미가 아닌 유종의 미가, 끝이 좋도록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한결같은,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이 중요합니다. 변절, 배신의 부패한 삶이라면 정말 희망이 없습니다. 역시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를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목숨을 살릴 것이다.”
새삼 삶은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용기와 지혜로 의인의 삶을 선택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정의롭고 지혜로운 의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에제18,30-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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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사랑에 압도되어>
오늘은 부끄러운 제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너희의 의로움이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묵상하다가 부끄러운 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 의로움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불의를 자주 많이 보는데, 얼마 전엔 어느 나라 대통령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서 종교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요즘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 인간이 사라져야 종교 자유가 올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비단 한 번이 아닙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났을 때도.
그런데 오늘 에제키엘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저는 그들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주님은 그들의 죽음이 당신의 기쁨이겠냐고 저에게 물으십니다.
저의 의로움은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을 단죄하는 의로움입니다. 저의 의로움에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로움이 의로움이기는 한 것입니까? 자기 불의를 보지 못하는 의로움을 어떻게 의로움이라고 하고, 사랑이 없는 의로움을 어떻게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가 악하면서 더 악한 사람을 단죄하려는 저의 의로움, 사랑이 없는 저의 의로움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이제 악인도 죽기를 바라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의도도 고작 저와 인간의 죄와 악을 들추는 것이 아니고 악인도 살게 되길 바라시는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을 돋보이게 하고자 함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왜 압도적인 사랑이라고 합니까?
어떤 거대한 힘들도 어쩔 수 없을 정도일 때 우리는 압도적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이란 어떤 거대한 악도 하느님의 사랑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의 이해는 자주 능력의 하느님이 왜 극악한 사람을 내버려 두시는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사람까지 살려 두시는지 이해하기에 버겁습니다.
그 한 사람의 악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데, 그러니 그 한 사람을 척살하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지 않는데, 그러니 많은 이를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의일 텐데 왜 그러지 않으시는지.
그러나 어쨌거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의보다 사랑을 선택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당신 의로움 때문에 악한 인간을 죽이시면 살아남을 자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내가 나보다 더 불의하다고 하여 그를 죽여야 한다고 하면 의로우신 하느님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튼 하느님은 아무리 악해도 그가 죽길 바라지 않고 살길 바라십니다. 아무튼 하느님 사랑은 한 사람도 죽기를 바라지 않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하느님도 의를 선택하여 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벌도 사랑입니다.
그 벌은 불의에서 의로 돌아서게 하는 사랑의 벌이고, 돌아설 기회마저 없애버리는 마지막 징벌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벌 때문에 의로 돌아서는 그런 미성숙한 자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악을 압도하는 그 사랑에 감동하여 돌아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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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순 제1주간 금요일🕯(2.23)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용서와 화해!>
오늘 복음(마태 5,20ㄴ-26)은 '화해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면서 지켜온 '율법을 능가하라.'는 말씀입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는 '율법을 능가하라.'고 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도' 재판에 넘겨질 것이고, '바보!'라고 하거나,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안에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5,23)
오늘 독서(에제18,21-28)도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냐?"(18,23)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18,27-28)
지금은 '회개의 때'입니다.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인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야 할 시간'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따라 날마다 죽지 않고 사는 길을 선택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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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1ZmujRes_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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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사순시기는
특별히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일깨워주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해이며
존중입니다.
하느님의
참 뜻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화해이며
존중입니다.
정말 중요한
하느님의 뜻은
서로 만나는
화해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그 뜻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화해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자신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자신의
허물을
반성하는
거기에서
화해는
시작됩니다.
성찰의 눈빛은
서로를 위하는
기도가 되고
서로를 살리는
지혜가 됩니다.
참된 지혜는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가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해를
실천하는
바로 그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곧 나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화해 없이는
평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서로를 향한
인정이
필요한 것이지
서로를 못 박는
단정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화해의 길은
우리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존중과 기도로
우리 관계의
일방적 모순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앙금을
털어버리고
화해이신
예수님과 함께
화해로 나아가는
존중의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참된 화해는
참된
성찰이며
참된
존중이며
평화입니다.
옳고 그름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완전한
우리들의
노력이며
실천입니다.
그 노력과 실천이
저마다의
십자가이며
저마다의
성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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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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