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이명박은 1941년 12월 19일 오사카부
오사카시의 조선인 마을에서 아버지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이명박은 가족들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여 경북 영일군 흥해읍의
덕실마을에 정착했고, 2년 후 포항읍내로
이사했다.
한국으로 오는 귀국편 여객선이 침몰하여
일본에서 모아둔 재산을 모두 잃고 목숨만
겨우 건졌다고 한다.
극빈층이 되어버린 일가는 포항에 정착한
후에도 아버지는 계속해서 목장 노동자로
일했고 어머니는 과일행상을 했다.
이명박은 중학교에서도 수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집안 형편도
어렵고 3남으로서 고등학교에 진학할 상황이
아니었다.
전교 2등을 했는데 이 성적이면 도내
명문고인 경북고등학교에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형편상 진학이 어려워 부모님을
담임교사가 불러서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를
추천하였고 진학하게 된다.
낮에는 거리에서 뻥튀기와 과일 등을
팔며 일했고, 밤에 공부한 이명박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내내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합숙소에
들어가 일당 노동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명박은 동숭동, 안암동, 신촌 대학가를 돌아
다니며 대학생에 대한 선망을 가지게 된다.
이후 이명박은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구해서 대학 입시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입시 준비라는 것이, 낮에는
일당 노동자로 일을 하고 밤에 합숙소
구석에서 작게 불을 켜놓고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합숙소에서 같이 생활하던 다른
노동자들에게서 '잠 좀 자게 불 좀 끄라'는
원성을 듣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과정 끝에 결국 1961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합격하게 된다.
합격 당시에는 대학 중퇴 학력을 만들기 위해
등록만 해놓고 자퇴할 생각이었으나,
1학기 이상 다녀야 학적이 생긴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고 좌절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이태원 시장에다가
이명박의 사정을 말하고 다녔고, 시장 전체에
소문이 났다.
이후 시장에서 평판이 매우 좋았던 어머니
덕분에 시장 상인들이 돈을 모아 이명박에게
등록금을 선불로 주고, 시장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일을 시켜 갚도록 한 것이다.
그 돈으로 이명박은 처음 의도와는 달리
본격적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학 입학 후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은
계속되었고, 이런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2학년 1학기 때 군입대를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논산훈련소 신체검사에서 기관지
확장증으로 귀가조치되어 병역면제
처분을 받았다.
이때 군의관은 도대체 스무 살밖에 안 된
놈이 몸을 어떻게 굴렀기에 이 모양이냐며
군대에서도 이런 몸은 안받아준다고
일갈했다.
복학 후 3학년 때는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64년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가 한일수교를 강행하자
이명박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서
이에 반대하였다.
한일수교에 반대하는 6.3 항쟁이 일어나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시위의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이명박에게도 수배령이
떨어져 도피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경찰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자 결국
자수하여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고, 자수 후 선고가 내려지고 풀려나기까지
6개월 동안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딱 한 번 면회에 와서, '너가 자랑
스럽다'는 이야기를 짧게 하고 돌아간다.
6.3 항쟁 때 이명박과 함께 활동했던 인맥들은
6.3 동지회를 결성해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곤 했는데, 그 중에 당시 중앙대학교
학생이었던 이재오와 경기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손학규도 있었다.
훗날 이 세 명은 김영삼 대통령이 발탁하여
정계에 입문하고 보수정당에서 같이
정치활동을 하게 된다.
이명박은 현대건설 입사 필기시험에 합
격했음에도 학생운동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한 전과 때문에 최종 입사가 불가능하게
되자,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젊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막는다면
국가가 영원히 책임지게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부당한 취직 방해를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이에 이낙선 청와대 민정비서관은 이 문장에
깊이 감명받아 현대건설에 이명박의 과거를
문제삼지 말도록 조치했다.
면접에서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창조입니다"라고 답했고,
1965년 현대건설 경리과 평사원으로
입사하였다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1968년
(27세)에 과장, 1969년(28세)에 부장,
1971년(30세)에 이사, 1973년(32세)에 전무,
1974년(33세)에 부사장, 1977년(36세)에
대표이사 사장, 1988년(47세)에 회장
에까지 올랐다.
현대건설 사장 재임 시절엔 이라크 건설
수주에 주력하였다.
당시 현대건설은 중동에서 연이어 터진
전쟁으로 막대한 공사 미수금이 쌓여
있었고, 대금 회수에 차질을 빚던 상황이었다.
이명박은 공적 자금을 투여받은 후 각종 국내외
공사를 무난히 진척시키며 위기를 극복했으나,
이라크 정부로부터 공사미수금 2억 달러
(당시 1조 703억 원)를 회수하는 것은
실패했고 이는 2000년 현대건설 부도의
원인이 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이명박 본인도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나의 전쟁은 패배로 끝났고, 원인이야 무엇이든 회사가 손해를 봤다면 관련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조직의 냉엄한 생리'라며
책임을 느끼는 듯이 기술했다.
완공(1985년)
당시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페낭대교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명박을 키워준 정주영과 관계가
본격적으로 틀어진 것은 정주영이 통일 국민당을 창당하며 정계에 진출할 때부터였다.
이명박은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치를 하기보단 기업에 남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주장하며 정주영의 정계 진출을 반대했다.
그 무렵 이명박은 조선일보에 정주영의 정계
진출 계획을 제보하기도 했다.
결국 정주영은 1991년 12월 이명박에게
"나와 함께 정치를 하든지, 아니면 현대에서
나가든지"라는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줬고,
이명박은 결국 사표를 내고 현대건설을 나왔다.
이명박은 이것에 대해 자서전에서 <현대라는
재벌이 정치 참여를 통해 권력을 갖게 됐을 때
사회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라고 언급한다.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했지만, 재벌 총수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것이 내가 정 회장의 창당에 반대한 이유였다'고 밝혔다.
1992년 정주영 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14대 총선 정국에서 돌풍을 일으키던
와중에 현대를 나온 이명박은 경제 전문가영입이라는 명목으로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14대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에 출마하게 되면서 정주영과는 완전히 갈라섰다.
이명박은 해당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한편 뒤이어 치러진 14대 대선에서 정주영은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고 3위로 낙선했다.
1995년 국회의원 임기가 아직 1년 남아 있었지만,
같은 해 처음 민선으로 치러진 서울특별시장 선거 후보자 선출을
위한 민주자유당 경선에 출마하였다.
최종 경선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정원식 前 국무총리에게 패배하였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정치신인임에도 불구,
11~14대 종로구 국회의원 이종찬, 그리고 노무현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거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이 그의 선거비용이 법정비용을 초과했다고
언론에 폭로했다.
1998년 2월에는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도전하기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명박의 사퇴로 무주공산이 된 종로구에서는
재보궐선거가 실시되었고,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후 피선거권이 회복된 것을 계기로,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서울특별시장 선거 후보로 선출되어 출마하였다.
당시 여당의 후보는 떠오르던 청년 정치인 김민석이었다.
청계천 복원사업과 대중교통 체계 개편을 공약으로 내걸어 일찌감치
분위기를 잡았고,
후보 토론에서도 판정승을 거두며 52%의 득표율로 당선에 성공했다.
이명박은 1941년생, 김민석은 1964년생이니
완전히 조카뻘인 상대와 싸워서 이긴 셈이다.
좌파나 진보적 성향 정치평론가도 대통령
이명박의 행적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서울시장 이명박의 행적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당시에는 야당 쪽 인사임에도 초창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도
의외로 괜찮았었다.
노무현도 이명박의 행정력을 신뢰해서 팍팍 지원해줬고,
이명박도 노무현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하는 등
대통령-야당 주요 인사로서의 관계는 이상적이었다고 평가해도 될 정도였다.
취임 후 공약대로 청계천 복원사업을 시행하여우여곡절의 과정 끝에 공사는 마무리를 짓는 데
성공하였다.
이명박의 서울 시장 대표적인 커리어이자
그를 대통령으로 진화시킨 최대의 교두보로
화자되지만, 임기 내에 끝내려는 무리한
시도 때문에 이런저런 탈도 많은 공사였다.
2004년 서울특별시 대중교통체계 개편
역시 주요 커리어로, 교통 카드 티머니도
이때 도입되었고 버스의 번호는 지역에 따라,
색은 종류에 따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였으며
이용 요금은 환승 횟수가 아닌 이동 거리 비례로 바꿔
당시 어려웠던 버스 회사의 재정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또한 부분적으로 시행되던 중앙버스 전용차로제를 서울시 전체로 확대하여
대중교통의 질을 높이기도 했다.
2007년 타임지에서는 위 2가지 정책을 높이
사 '환경 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이 인정하는 성공적인 정책이지만,
당시에는 버스번호가 늘어나서 중, 장년층이
외우기 어렵다는 등 상당수의 불편하다는
반응도 잠시 있었고,
이 외에도 뉴타운 사업 및 서울숲 조성, 숭례문
개방 등을 통해 대선을 향한 고지를 밟아간다.
아리수 브랜드화도 이명박 시장의 성공적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잘 언급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서울 시내에
많았던 경유버스들을 천연가스 버스로
전면 개편하기 시작한 것도 이명박이다.
오세훈 시장 체제에 와서 완성된 이 사업도
미세먼지가 이슈가 되고 있는 현재에 와서 다시
호평을 받는 사업이다.
청계천과 서울특별시 시내버스 개편 이미지가
컸지만, 그 외에도 서울시장으로서의 이명박은
민선 이래 시정 능력 면에서 따지면
으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대단히 우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