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20-07-20)
< 언년이 >
문하 정영인 -
‘언년이’, 나의 둘째어머니 이름이다. 둘째어머니란 계모(繼母)를 말한다. 나는 계모란 말을 하기 싫어서 꼭 ‘둘째어머니’라고 한다. 사실 ‘둘째어머니’는 서모(庶母)를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계모에 대한 이미지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좋은 인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 장화홍련전의 계모도 그렇고, 신데렐라의 계모도 그렇다.
특히 옛날 여자 이름에는 막 지은 이름이 많다. 언년이, 섭섭이, 점박이, 간난이, 딸고만 등. 남자들 이름은 쇠돌이, 차돌이, 개똥이, 쇠똥이…. 남자들 이름은 태명(殆名)도 많았다. 귀한 집 아이일수록 태명을 허술하게 지어 악명위복(惡名爲福), 천명장수(賤名長壽)라 했던가? 여자들 그런 이름은 태명이 아니다. 그러니깐 둘째어머니 ‘언년이’도 태명은 아닐 것이다. 그저 대수롭지 않거나 성의 없이 붙인 허접스런 이름이 아닐까 한다. 그런 여자들 이름 속에는 남아선호 사상이 짙게 까려 있다. ‘언년이’ 는 ‘어찌 계집애냐?’ 라는 뜻 같고, ‘간난이’는 ‘갓 낳은 아이’라는 뜻이란다. ‘섭섭이’는 딸을 낳아 섭섭해서 그리 지었을 것이다. 딸만 낳은 딸부잣집은 ‘딸고만’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아들, 아들’ 하던 시대에서 ‘딸, 딸’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으니 말이다. 우수개소리로 외아들을 둔 엄마는 싱크대 앞에서 죽고, 외동딸을 둔 엄마는 비행기 안에서 죽는다고 한다. 더 나아가서는 무자식 상팔자라 하니 격세지감이 아니 들 수 없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하던가. 먼 친척뻘 형은 딸만 무려 일곱을 두었다. 아들, 아들을 바라다가 그리 되었다. 간신히 여덟 번 째, 그리도 원하던 아들을 낳았다. 금지옥엽처럼 키우던 그 아들은 초등학교 1학년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으니 말이다. 하늘도 무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인명은 재천이라 하던가. 다 인명재천은 신의 섭리인가.
나의 둘째어머니는 석녀(石女)였다. 시집가서 애를 못 낳는다고 소박 당한 여인네였다. 나의 첫째어머니(生母)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석녀인 둘째어머니와 재혼하셨다. 아예 그런 분을 골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우리는 육남매였다. 맨 위로 누님 한분, 그리고 오형제였다. 셋째 형까지는 다 컸고, 넷째인 나와 막내 동생은 어린애였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 살림 등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재혼을 하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둘째어머니에게 진정한 마음의 곁을 주시지 않았다. 늘 생모를 그리도 잊지 못하셨다. 지극한 순애보(殉愛譜)였다. 더구나 누나를 비롯하여 형 셋도 둘째어머니가 ‘낳은 어머니’가 아니라는 이유로 어머니 대접을 하지 않았다. 재혼을 했어도 이름 언년이처럼 대접을 받는 불쌍한 여인네였다. 아버지와 형들에게 어머니 대접을 못 받았어도 둘째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지극 정성으로 사랑을 쏟으셨다고 생각을 한다. 나는 지금도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값지다고 생각을 한다.
누나는 초등학교만 나왔지만, 형과 우리는 대처에서 최소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어려운 시골에서 다섯 명을 대처에서 공부시킨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래서 갈수록 우리 집 살림은 줄어 들었다. 둘째어머니는 비단도붓장사를 하셨다. 머리에 무거운 비단을 이고 이 동네 저 마을로 팔러 다녔다. 집으로 올 때에는 머리 위에는 비단 값으로 받은 무거운 곡식이 이어져 있었다. 집안 살림하랴, 장사하랴! 아버지나 누나, 형들은 장사하는 어머니를 못 마땅해 했다. 두 주머니 찰 것이라고 의심을 했다. 또 집안 살림이 자꾸 줄어드는 것은 어머니가 빼돌릴 것이라고 의심의 눈을 번득였다. 시골 농촌에서 아들 다섯 명을 대처에서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녹록치 않은 일임이 자명한데도 말이다. 맨 위 누나는 당신은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겨우 초등학교만 나왔다고 아버지를 원망했다.
속앓이를 앓던 내가 너무 아파 펄펄 뛰면 나를 업고 먼 십리 길을 달려 장터 의원에 데리고 갔다. 큰 고개 세 개를 넘어야 했다. 나를 업은 어머니 등에서는 땀이 줄줄 흘렀다. 어머니는 체수가 작았고 홍역 때 관리 잘못으로 얻은 천식으로 일생을 고생하셨다. 의원에 가면 놓아주는 주사는 모르핀이었다. 그거 한 대 맞으면 펄펄 뛰던 나도 금시 너누룩해졌다. 그러나 어려운 시골에서 병원에 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속앓이는 나를 대학생 때까지 괴롭혔다.
사실, 둘째어머니는 남편에게 받을 사랑을 못 받았기에 온 정성을 나와 막내에게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로 인해 우리에 대한 기대감은 상상 외로 컸다. 결혼해서도 우리 부부는 얼마나 많은 갈등을 겪었는지 모른다. 정말 상상 의외였다. 우리 부부는 부모님을 5년간 모시다가 결국 우리가 자청해서 분가를 했다. 더 이상 같이 살다가는 우리도 부모님도 너무 마음이 황폐화질 것 같아서였다. 맞벌이 부부라 아들을 전적으로 키워준 것은 부모님이었다. 둘째어머니는 머리가 아주 비상했다. 우리 부부가 무슨 생각을 하면 어머니는 우리 머리 위에 와 있었다. 원인은 며느리이지만 수시로 일어나는 가정 분란은 나와 집사람을 심장병에 걸리게 할 정도였다. 인간사(人間事) 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게 마련이다. 인간관계(人間關係)도 역시 마찬가지다. 둘째어머니는 곰 같은 집사람을 아주 못 마땅해 했다. 차라리 여우같았으면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가해서도 둘째어머니를 끝까지 중환자실 병원 수발도 하면서 뒷바라지한 것은 집사람이었다. 내가 아버지께 죄송한 것은 우리가 분가할 때 아버지는 숙환중이셨다. 그후 막내동생 부부가 모신다고 여러 가지를 따져서 들어갔으나 1년도 채 못 모시고 뛰쳐나왔다. 하여간에 넷째 아들인 나는 교사 발령을 받으면서 시골학교 시절부터 부모님을 모시긴 했다.
언년이던 둘째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 25년 더 사시다가 우리 부부가 임종을 했다. 하여간에 이름 ‘언년이’처럼 삶의 어려운 굴곡이 많았던 조선의 여인네였다. 아마 지금 세상에 태어났고, 제대로 공부를 했다면 커리어 우먼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학부모가 되었으면 극성스런 헬리콥터맘이 되었을 것이다. 그 바람에 나는 어느 장관이나 교수 부부 아들딸처럼 떵떵 거리는 ‘~사’자 붙은 유명인이 되었을 것이다. 겨우 40여년을 ‘교사(敎師)’로 마감을 했으니 ‘사’자는 ‘사’자로다. 그때의 교사인가는 다른 것 하다하다 ‘선생이나 할까?’ 하던 아주 인가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인가가 좀 있지만…….
지금 되돌아 생각을 하면 둘째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셨다. 농촌 살림하랴, 도붓장사하랴, 대처에 있는 우리들 유학 뒷바라지하랴, 나중에는 아버지 병 수발하랴, 속을 그렇게 썩히던 우리 아들 비위 맞추랴!
나는 중학교 때부터 인천에서 자취를 했다. 숭의동 전도관 밑, 지금으로 말하면 도원역 근처의 아주 작은 문간방에서. 둘이 누우면 겨우 누울 만한 그런 바깥채에서 자취를 했다. 어머니는 동대문시장으로 비단 피륙을 뜰 겸 인천 자취집에 들르셨다. 내가 먹을 쌀과 반찬을 이고서…. 동인천역에 내리셔서 기찻길 따라 숭의동 109번지까지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서 걸어오셨다. 그때 끓여주시던 비릿한 생선 아지국을 맛을 잊지 못한다. 어느 날은 신문 쪼가리에 고이 싼 것을 주시면서 국을 끓일 때 조금씩 넣으라고 하셨다. 그것은 일본산 조미료 ‘아지노모도’였다. 그것은 참으로 맛을 기적을 가져 왔다. 조금만 넣어도 맛이 확 달라졌으니 말이다. 하룻밤 주무시고 이튿날 동대문시장으로 떠나셨다.
둘째어머니는 누구에게도 그 이름 ‘언년이’ 처럼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괴팍하고 정을 주지 않던 남편, 어머니로 대접하지 않는 전실 자식들, 그렇다고 나와 동생이 잘해 드린 것도 없다. 둘째어머니에게는 진정 기댈 곳이 없었다. 말썽부리는 이복 남동생 하나, 그리고 찢어지게 가난한 홀로 된 언니 하나! 그래도 정 주고 기댈 곳은 나와 막내 동생이었다. 그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지 말라고 했던가?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편이다. 또 고부간이란 갈등이란 세계적인 공통 문제이기도 하다.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옛날 우리네 부모들은 자식을 위한 희생된 삶의 일관이었다. 못 먹고, 못 입고, 못 신고, 못 놀고, 못 쉬던…. 혹시 미워했던 마음들이 지금까지 있다면 훌훌 털어버려야 한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은 바로 내 마음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회한(悔恨)의 세월이었다.
첫댓글 너무감동적이네요ᆞ
그 어머니에게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빕니다 ㆍ아멘~~^^
@@@ 고맙습니다 @@@
이젠, 많은 사람들이 제 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큰형 부부, 두 명의 둘째 형수, 셋째 형, 누님, 누나 하나에 매형 두 분도...
서너서너 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