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박물관에서
사라진 모나리자
1911년 8월 22일 화요일.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화가 루이 베루드가 루브르 박물관 카레관에서 모나리자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전날은
휴관일이었다. 도난 사실을 알게 된 파리 경시청장 루이 레핀은 루브르
박물관을 폐관하고,
프랑스 국경을 봉쇄했다.
루브르 박물관의 카레관에서 얼마 안 떨어진
비상계단 한쪽 구석에서 액자 두 개가 버려진
것이 발견되었다. 모나리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호외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Stolen
Mona Lisa" ...유력한 용의자 두
명이 떠올랐다. 화가 피카소와 시인 아폴리네르.
1911년 8월 29일 ‘파리-주르날’은 “한
도둑이 루브르에서 훔친 조각상을 우리에게 가져
왔다”라고 보도했는데 그 자는 ‘이냐스 도르므상 남작’이라고
하였고,
‘이냐스 도르므상’이라는 이름은 아폴리네르가 쓴 소설의 주인공 이름과 같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아폴리네르가 용의선상에 떠올랐다.
아폴리네르가 ‘박물관이 예술가의 상상력을
마비시킨다며 전부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경찰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아폴리네르가
체포되었고, 그는 ‘도르므상 남작이라고
서명한 도둑과 접촉한 바
있고,장물을
받았다’는 혐의(범인 은닉죄, 장물 소지죄 등)를 받았다.
경찰의 취조에 아폴리네르는
화가 피카소의
이름을 댔다. 두 사람은 대질 신문을 하게 되었다.
이때 피카소는 아폴리네르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별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아 석방되었다.
모나리자(Mona
Lisa)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가 그린 초상화로
‘모나’(mona)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 경칭이고, ‘리자’(Lisa)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다. 즉, ‘리자 여사'라는 뜻이 된다.
그때까지 모나리자는 다른 르네상스 걸작들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각종 언론이
루브르 박물관의 소홀한 관리 실태를 비판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모나리자와 작가 다빈치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면서 세간의 관심이 모나리자에
집중됐다. 파리 시민들은 그제서야 프랑스가 그런
걸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림이 걸려 있던 빈 공간이라도 보기 위해 줄
을 섰다.
프랑스 정부와 언론
등은 모나리자의 무사 귀환을 위해 포상금까지 내걸었으나 그림은 행방이
묘연했다.
사건이 잊어갈 즈음
범인이 잡혔다. 1913년 12월. 피렌체의 미술상 알프레도 제리가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보낸 이는
‘레오나르도’라고 적혀 있었다. 1913년 11월29일자 소인이
찍힌 이 편지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도난 작품을
내가 갖고 있고, 화가가 이탈리아인이니
작품이 이탈리아에 있어야 할 것 같다. 이 나라에 작품을
돌려주는 게 나의 꿈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페루지아가 그림
값으로 제시한 금액은 10만 달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편지를 보낸 이의
본명은 빈센초 페루지아. 루브르 박물관에서 2년 동안 유리공으로 일했던
페루지아는
모나리자가 탄생지
이탈리아에 있지 않고 프랑스에 있다는 사실에 격분해 그림을
훔쳤다고
강변했지만, 사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왕 프랑수아1세에게 돈을 받고 팔아
넘긴
그림이다.
그리고 그는
이탈리아 정부가 후한 포상금을 주고, 국민의 영웅으로 환호 받으며 풀려날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 그는 조국애를 강조하는 인터뷰를
여러 차례 가졌고, 그의 감방에는 격려와 선물이
쏟아졌다.
그가 최종적으로
받은 형량은 7개월 9일. 프랑스 정부는 엄중한 처벌을 촉구하지 않았다.
어설펐던 수사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았고, 이
절도범을 이탈리아의 순교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탈리아 또한 모나리자를 고국으로 되찾아온 자에게
가혹한 처사를 내리는 것이 꺼림칙했다.
게다가 재판 기간 중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암살
당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각각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 편에 섰고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런 정황이 빈센초
페루지아에 대한 형량에 영향을 미쳤다.
빈센초 페루지아는
석방된 이후 고향
두멘차로 돌아가 영웅으로 환영 받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육군에 입대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했다.(펌글)
첫댓글 이렇게 선선한 날은 물한병 들고 동네산을 다녀오는게 더욱 상쾌할것 같지만 걷기를 못한지 거의 3개월째, 당뇨로 인한 지병이 더 극성을 부리는듯 합니다. 실내 체조등으로 대체하는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건강 제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