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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불구로 만든 일본어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이 과연 이런 불구어(不具語)였을까?
`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자는 "이달에 임금이 언문(諺文) 28자(字)를 직접 만들었다[親制]"고 세종이 창제자임을 밝히고 있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세종 28년 발간)`은 훈민정음에 대한 일종의 해설서이자 사용설명서다.
여기에서 세종은 "정음을 만드는데…단지 그 소리를 따라 그 이치를 다할 따름"이라고 소리 위주로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병서(竝書)와 연서(連書) 원칙만 따라도 모든 발음을 적을 수 있다.
◆훈민정음은 모든 소리 표기 가능
병서란 초성(初聲)에 2~3개 자음을 나란히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L은 `ㄹ`로 적고 R은 `ㄹㄹ`, 또는 `ㅇㄹ` 등으로 적으면 `L과 R`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연서는 순음(脣音:BㆍVㆍPㆍF 같은 입술소리) 아래 ㅇ을 연서(連書)하여 순경음(脣輕音:입술 가벼운 소리)을 만드는 원칙이다.
순음 `ㅁㆍㅂㆍㅍㆍㅃ` 아래에 `ㅇ`을 연서하면 `ㅱㆍㅸㆍㆄㆍㅹ` 같은 순경음이 되는데 B를 `ㅂ`로, V는 `ㅸ`으로 적으면 `B와 V`를 구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세종은 이런 식으로 인간의 구강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고, 이를 훈련하면 발음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한국어를 일본어 비슷하게 개악
그런데 1912년 일제는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 등 일본인 학자들과 일부 한인 학자들을 동원해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을 만들면서 훈민정음의 발음체계를 크게 제한했다.
아래아(ㆍ)를 폐지하고 한 글자 받침 `ㄱ, ㄴ, ㄹ, ㅁ, ㅂ, ㅅ, ㅇ`과 두 글자 받침 `ㄺ, ㄻ, ㄼ`의 열 가지만 인정했으며, 설음 자모 `ㄷ, ㅌ` 등과 `ㅑ, ㅕ, ㅛ, ㅠ`의 결합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한국어를 일본어 비슷하게 개악한 것이다.
문제는 해방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제의 언문철자표기법 틀에서 벗어나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정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ㄹㆍㄴ`이 어두(語頭)에 오면 `ㅇ`으로 발음하게 한 두음(頭音)법칙 같은 반언어적 조항이 실려 있는 현행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일제의 언문철자표기법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을 말해준다.
◆세종의 창제정신이 영어 해법
세종은 재위 26년(1444년) 2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등 7명의 학사가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를 올리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또한 너희들이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四聲) 칠음(七音)을 아느냐? 자모(字母)가 몇 개인지 아느냐?(세종실록 26년 2월 20일)"고 일갈했다.
세종이 현행 한글 정책을 본다면 지하에서 벌떡 일어나 "너희들이 일본인 학자들은 옳다고 하면서 나는 그르다고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너희들이 사성ㆍ칠음을 아느냐? 자모가 몇 개인지 아느냐?"고 꾸짖을 것이다.
정부가 휴대폰을 비롯한 각종 정보기술(IT) 단말기의 한글 입력자판을 표준방식으로 통일할 방침이라는데 그 전에 이 문제를 연구 정리해야 한다. 세종이 완벽한 표음문자를 만들었던 이유는 `제 뜻을 시러펴지 못하는 어린 백성`을 위해서였다. 이제는 일제 식민정책의 여파로 `제 발음을 시러펴지 못하는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덕일이 중앙일보 2010년 10월 10일 칼럼에서 두음법칙에 대한 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책[1]인
『우리 안의 식민사관』에서
내가 이런 절름발이 훈민정음을 만든 줄 아느냐? 왜인들이 우리 말글을 말살하려던 1940년에 경상도 안동에서 내가 만든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세종 28년 발간)』이 발견된 것이 우연인 줄 아느냐? 나는 우리말과 다른 겨레의 말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말들을 적으라고 병서(竝書)와 연서(連書) 원칙을 만들었다. 초성을 두 개 이상 자유롭게 사용하라는 것이 병서(竝書)다. L은 ‘ㄹ’로 적고 R은 ‘ㄹㄹ’, 또는 ‘ㅇㄹ’ 등으로 적으면 두 발음을 구분할 수 있다는 뜻이다. B와 V, P와 F는 모두 입술소리인 순음(脣音) 아니냐? 그중 하나를 입술가벼운소리인 순경음(脣輕音)으로 표기하는 것이 연서(連書)다. B를 ‘ㅂ’으로 적으면, V는 ‘ㅸ’으로 적고, P를 ‘ㅍ’로 적으면, F는 ‘ㆄ’으로 적으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원칙만 사용해도 영어는 물론 세계의 거의 모든 발음을 대부분 적을 수 있고 발음할 수 있다.
왜인(倭人)들이 너희를 점령하고 2년 후(1912년)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을 만들면서 내가 만든 훈민정음을 난도질했지 않느냐? 누가 다양한 모음을 내는 아래아(·)를 없애라고 했느냐? 누가 ‘ㄱ, ㄴ, ㄹ, ㅁ, ㅂ, ㅅ, ㅇ’과 두 글자 받침 ‘ㄺ, ㄻ, ㄼ’의 열 가지만 받침으로 인정하라고 제한했느냐? 누가 설음 자모 ‘ㄷ, ㅌ’ 등과 ‘ㅑ, ㅕ, ㅛ, ㅠ’를 결합하지 못하게 했느냐? 누가 ‘ㄹ·ㄴ’이 어두(語頭)에 오면 강제로 ‘o’으로 발음하게 하는 두음법칙(頭音法則) 따위를 만들어 우리 아이들을 반벙어리로 만들라고 했느냐?
모두 왜인들과 그에 붙은 역도(逆徒)들의 짓거리가 아니냐? 왜인 지배 때는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나라를 되찾았으면 나의 훈민정음 창제 원칙대로 돌려놔야 하지 않느냐? 이런 절름발이 글자를 가지고 내가 만든 훈민정음이라고 우기려면 내년부터는 한글날을 없애라. 내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이 문제가 바로 잡힌 이후에야 후손들이 바치는 제사를 흠향(歆饗)하련다.
필자가 대한민국에서 '나라 국國'자가 들어가는 학문들에서 말하는 나라 국國이 어디인가에 의문을 갖는 것은 절대 과도한 의심이 아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국문학자들도 상당수 있겠지만 이인직을 선각자로 가르치는 학자들이나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극복하고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정신으로 돌아가는 제안을 거부하는 학자들에게 나라 국國자가 어디를 뜻하느냐고 묻는 것은 당연하다. 지구상의 어떤 나라가 'ㄹ·ㄴ'이 어두에 오면 강제로 'ㅇ'으로 발음하게 하는두음법칙 따위를 갖고 있는가?일단 한국인의 발음 능력을 크게 퇴화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습득에도 크게 불리하니 지금 같은 세계화 시대에도 전혀 맞지 않다. 그러나 식민사학자들이 절대로 자발적으로 식민사관을 폐기하지 않는 것처럼 식민국어학자들도 절대로 자신들의 식민국어학을 폐기하지 않는다. 식민사학자들이 조선총독부의 시각으로 한국사를 보는 것처럼식민국어학자들도 조선총독부의 시각으로 한국어를 본다. 이런 말을 듣고 자신들이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면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 체제와두음법칙따위를 폐기하면 된다. 그러나 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자발적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타율적 개혁의 객체가 될 수밖에 없다.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5, 47~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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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국문인협회 /
2008.11.09 11:26
최성철조회 수:81
주시경 스승과 그 제자들
주시경(周時經) 스승과 그 제자들.
주시경(周時經) 스승님은 자신의 연구에서, 글자를 소리를 적는 글자[기음문자(記音文字)]와 뜻을 적는 굴자[기사문자(記事文字)]로 나누었으며 소리를 적는 글자[기음문자(記音文字)]가 훨씬 훌륭한 것이니 한자(漢字)대신 국문(國文=한글)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분으로부터 직접 혹은 간접으로 배운 사람들인 최현배, 김윤경, 권덕규, 신명균, 장지영, 정 열모, 이윤재, 이병기 등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면서 한글을 뜻을 적는 글자[기사문자(記事文字)]로 둔갑시켜버렸다.
그러니까 결국 이 사람들은 “한글은 소리를 적는 글자[기음문자(記音文字)]이다”라는 스승의 가르침에 거역(拒逆)했다는 말이다.
세계 모든 글자가 그렇듯 일본 글자도 뜻을 적는 글자[기사문자(記事文字)]로, 형태주의(形態主義)인 표의적기사법(表意的記寫法)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글은 뜻을 적는 글자가 아니라 소리를 적는 글자이다.
그들은 자신들 스승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소리를 적는 한글[기음문자(記音文字)]을 뜻을 적는 글자[기사문자(記事文字)]로 둔갑시키면서 자신들의 영달(榮達)을 위해서 친일분자(親日分子)로 변신(變身)했던 것이다.
그 결과 참여정부시절 문화체육부장관이 “자장면”은 표기에 대한 측면이고, “짜장면”은 발음에 대한 측면이라는 엉터리 논리로 답변을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유인촌 문화체육부장관은 이들을 가리켜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지신 조선어학회의 선각자들”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가히 대한민국 국채(國債)보다 일본 국채(國債)를 많이 사재기하는 유 장관다운 답변이다!
미안한 말씀이지만 우리말과 글을 지킨 것은 그들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이다.
일본은 이 땅에 발을 붙이면서 백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서 1912년에 이미 ‘보통학교 언문 철자법’을 만들었고, 1921년에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 대요’를 만들었으며, 또다시 1928년에 시작하여 1930년에 새 철자법인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실상 이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은 표음적기사법(表音的記寫法) 지지파(支持派) 때문에 완벽한 형태주의를 채택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새 철자법인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이 조선 총독부에서 발표되고 시행에 들어가자 이 철자법(綴字法)을 제정할 때 참여했던 최현배, 권덕규, 신명균, 장지영, 정 열모 등은 불만을 품고 조선어학회로 무대를 옮겨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을 바탕으로 자기네들이 주창해온 형태주의 표기법을 더욱 보완한 소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라는 것을 만들었으니 그들이 스승을 매도하고 친일했던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래도 그들을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지신 조선어학회의 선각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스승을 욕보이고 스승의 뜻에 거역하고 일본 앞잡이로 일했던 사람들을 선각자라고 한다면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던지고 순사하신 분들은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일제 때 학교에서 조선어과가 없어진 것은 1936년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총독으로 부임하여 민족말살과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감행하면서부터이다.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은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제도를 실시하였던 것이므로 적어도 1936년까지는 우리말과 글이 사용되었고 일본이 아동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스승의 뜻에 거역하고 욕보인 죄인들, 그것도 모자라서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을 선각자라고 대접해 주는 이 나라 백성들이 어리석고 불쌍하기만 하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총독부에서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을 만드는데 참여했던 사람들은 친일분자로 보아야할 것이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한글 연구회
최 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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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글, 잃어버린 4글자와 잘못 꿴 첫 단추
2024-01-15정경시사 Focous
[기고] 한글, 잃어버린 4글자와 잘못 꿴 첫 단추
심의섭(명지대 교수)
한글은 28자로 만들어 졌는데 지금은 24자를 사용한다.
일제 강점기인 1912년 및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4개 글자를 정리하였다.
'조선어학회'는 그 당시 논리와 판단으로 삭제했지만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게 되었다. 더구나 일제하에서 일본학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4글자를 빼어버려 해당 소리를 알맞게 적는 방법이 사라지게 되었고, 알맞은 소리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훈민정음에 있는 원래의 모든 표기법을 활용하면 지금 글로벌 시대에 외국어 표현과 발음도 정확하게 구분해서 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24자를 사용하지만 사라진 4자( ㆍ, ㅿ, ㆆ, ㆁ )를 되살린다면 전 세계 언어의 표기와 발음을 그대로 나타낼 수 있기에 앞으로 사라진 4자를 되살리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일제의 한글정책의 굴곡
먼저 네 글자가 사라진 곡절(曲折)을 살펴보자. 인위적이고 고의적으로 꿰어진 첫 단추는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이다.
1446년에 조선왕조에서 훈민정음의 이름으로 반포된 이후 훈민정음의 철자는 성문화된 맞춤법 없이 관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근대에 이르러 1907년에는 대한제국 학부(學部)에 국어 연구소를 설치하여 한국어 맞춤법을 정비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1910년 한일병합에 의해 그 작업은 조선총독부로 인계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한일병합 후 보통학교의 한국어 교과서에 사용하는 한글 철자를 정리, 통일하기 위하여 철자법을 정하기로 했다.
1912년 일제는 고쿠분쇼타로(國分象太郞) 등 일본인 학자들과 일부 한인 학자들을 동원해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을 정하였다.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은 그때까지 내려오던 한국어의 관습적 표기법을 정리하여 처음으로 마련된 한국어 맞춤법이다. 따라서 표기의 기본은 발음대로 적는 종전의 표음주의적 표기법이었다. 이때에 훈민정음의 발음체계가 크게 제한되었으며, 서울 방언을 표준으로 삼았고, 서언(緒言) 4항과 철자법 16항으로 이루어진다.
이 철자법은 그 후 1921년에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 대요(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大要)’로 개정된다.
1930년에 조선총독부는 언문 철자법(諺文綴字法)을 2번 더 개정하여 현대 한글과 유사해졌다.
1912~1930년간 조선총독부가 언문철자법 확정 시행한 후 조선어학회로 업무가 옮겨진다.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는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정하게 된다. 해방 후, 남북 분단 후의 맞춤법은 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기초로 형성된다.
첫 단추인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
한글정책의 첫 단추인 일제하의 한글정책의 기본이 된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의 몇 가지 특징을 보자.
아래아(ㆍ)의 폐지 :
중세 한국어에 있었던 모음 ㆍ(창제시 음가 ʌ)는 16세기부터 그 음가를 잃기 시작하며 18세기 후반에는 한국어 음소로서 소멸되었다. 그러나 문자로서의 ㆍ는 그 후 20세기 초까지 관습적으로 계속 사용되어 왔다.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에서는 고유어의 표기에서 ㆍ를 폐지하고 실제 발음에 맞추어 ㅏ, 또는 ㅡ로 표기하기로 했다.
관습적 표기법의 일부 폐지:
현실 발음에 맞추어 자음 자모와 모음 자모의 조합 중 몇몇을 바꿔 적기로 했다.
* 고유어에서 설음 자모 ‘ㄷ, ㅌ’과 반모음 j 를 수반한 모음 자모 ㅑ, ㅕ, ㅛ, ㅠ의 조합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때까지 ‘댜’와 같이 표기되어 왔던 것은 실제 발음이 ‘자’이기 때문에 실제 발음과 떨어진 ‘댜’와 같은 표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 고유어에서 ㅏ와 ㅑ, ㅓ와 ㅕ, ㅗ와 ㅛ, ㅜ와 ㅠ 두 가지 표기가 있을 수 있는 것은 ㅏ, ㅓ, ㅗ, ㅜ로 적는 것만 인정한다. 구체적으로는 치음 자모 ㅈ, ㅊ, ㅅ등에서 쟈, 죠 등을 인정하지 않고 자, 조 등만 인정했다.
* 다만 한자음의 표기는 종전의 관습적 표기법을 따랐기 때문에 이와 같은 표기법은 한자음의 표기에 적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모두 일본어처럼 ㅑ, ㅛ, ㅠ, ㅕ가 없어지고, △는 음가를 없애므로 한글의 왜곡이 고착되었다.
받침의 표기의 제한:
받침의 표기에는 한 글자 받침 ㄱ, ㄴ, ㄹ, ㅁ, ㅂ, ㅅ, ㅇ과 두 글자 받침 ㄺ, ㄻ, ㄼ 열 가지만 인정했다.
된소리의 표기: 된소리 표기는 ㅺ, ㅼ, ㅽ, ㅾ과 같이 왼쪽에 ㅅ을 덧붙이는 방법만 인정하고 ㅂ을 사용하는 ㅳ, ㅄ이나 현행 맞춤법처럼 동일 자모를 나란히 쓰는 방법은 인정하지 않았다.
기타:
부사를 만드는 어미는 ‘-히’로만 적기로 했다. 그리고 장모음을 표시할 때는 한글 왼쪽 어깨에 ‘・’ 표를 달았다.
이처럼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은 아래아(ㆍ)를 폐지하고 한 글자 받침 ㄱ, ㄴ, ㄹ, ㅁ, ㅂ, ㅅ, ㅇ과 두 글자 받침 ㄺ, ㄻ, ㄼ의 열 가지만 인정했으며, 설음 자모 ㄷ, ㅌ 등과 ㅑ, ㅕ, ㅛ, ㅠ의 결합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훈민정음의 장점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크게 퇴보했으며, 한국어를 일본어 비슷하게 개악한 것이라고들 평한다.
사라진 4글자와 순경음
훈민정음에서 사라진 4 글자는 ㆍ(아래아), ㅿ(반치음, 반시옷), ㆁ(옛이응, 꼭지이응), ㆆ(여린히읗, 후음)이고 사라진 과정은 아래와 같다.
* ㆍ (아래아):
ㆍ 음은 ㅏ와 ㅗ의 중간발음이다. 공식적으로는 네 글자 중 가장 먼저 사라진 글자이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발표하면서 아래아는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ㆆ (여린히읗, 후음):
순우리말의 초성에는 쓰인 적이 없어 음가를 가지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문헌에서는 네 글자 중 가장 빠른 15세기 초부터 문헌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ㅿ (반치음, 반시옷):
반치음의 음가는 15세기에 소멸되었지만 이후 이응과 혼용되다가 15세기 후반에는 거의 사라졌다.
*ㆁ (옛이응, 꼭지이응):
16세기부터 이응과 혼용하다가 17세기 문헌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예 : 베틀에서의 잉(이+ㆁ)아대, 유리창에 기인 성애(ㆁ+ㅐ), 아기의 울음소리 응(ㆁ+ᅟᅳᆼ)애
이처럼 아래아와 세 글자 여린히읗, 반치음, 엣이응은 15~17세기에 걸쳐 서서히 자취를 감추다가 1933년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면서 기존 28자에서 쓰임이 적은 4글자를 제외하여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훈민정음을 “어디로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고 바람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까지 모두 표현해 쓸 수 있다”고 표현되어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 역관들은 생소한 외국어 학습을 위해 28자의 훈민정음을 활용해 외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 받아 적었다고 한다.
창제 당시 28자에 들어있지 않지만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에 대한 해설서이자 사용설명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순경음이 나온다. 순경음(脣輕音)이란 가벼운입술소리이면서 파열음인 ㅍ, ㅂ, ㅃ, ㅁ 밑에도 동그라미를 붙인 입술 가벼운 소리를 말한다. ㅱ, ㅸ, ㆄ, ㅹ음을 말하는데 실제로 국어표기에 사용된 것은 ㅸ만이었으며 ㅱ, ㅹ, ㆄ은 창제시점에도 음가 없었다. 동국정음식 한자음 표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동국정운이란 한자가 오래전에 들어와 발음이 변하여 원래 중국식 발음과 차이가 있으므로 이글 교정하기 위해 편찬한 것이다. 순경음은 한국어 고유의 음운 표기에 이용된 것은 ㅸ뿐이며 음운 변화로 세조(15세기 중엽)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ㅸ(여린 비읍)은 이른바 순경음 비읍이라 부르는 것으로,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우리 말의 표기에 약 20년간 사용되었다; ㆄ(여린 피읖) 소리는 옛날 중국음 f 발음이 나는 글자를 표시하는데 쓰였다; ㅹ(표준어: 가벼운쌍비읍, 문화어: 가벼운된비읍)은 한글 낱자 ㅂ을 어울러 쓰고, 그 밑에 ㅇ을 쌓아 놓은 것이다.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ㅿ의 정확한 음가는 영어의 z 음이다 ; ㆅ 음은 ㅋ과 ㅎ의 중간 음이다.
현재 사용하는 24자로도 다양한 표현과 발음이 가능하지만, 네 글자와 두 자음이나 모음을 나란히 쓰는 방법(竝書), 자음을 위아래로 이어 쓰는 방법(連書)을 활용한다면 어떤 언어도 헷갈리지 않고 구별할 수 있다. 병서(竝書)란 초성(初聲)에 2~3개 자음을 나란히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L은 ‘ㄹ’로 적고 R은 ‘ㄹㄹ’, 또는 ‘ㅇㄹ’ 등으로 적으면 `L과 R`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연서(連書)는 순음(脣音 B, V, P, F 같은 입술소리) 아래 ㅇ을 연서하여 순경음(脣輕音 입술 가벼운 소리)을 만드는 것이다. 순음 ‘ㅁ, ㅂ, ㅍ, ㅃ’ 아래에 ‘ㅇ’을 연서하면 ‘ㅱ, ㅸ, ㆄ, ㅹ’ 같은 순경음이 되는데 B를 ㅂ로, V는 ㅸ으로 적으면 B와 V를 구분하고, P는 ㅍ로, F는 ㆄ으로 적는 식으로 정리하면 현행 한글맞춤법 통일안으로 적을 수 없는 발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현행 맞춤법으로는 영어 발음 표기 못해 영어 26자 중 L과 R, P와 F, B와 V, G와 Z, E와 Y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비록 1948년 문교부에서 제정한 ‘들온말 적는법(외래어 표기법)’에서 외래어 발음을 표기할 때 f는 ㆄ, v는 ㅸ을 쓴 것은 어원과 형태를 밝혀 적으려는 세종의 표기의식을 존중하고 글로벌 시대를 미리 내다 본 표기법 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어 등 외국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기의 생활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1958년 ‘로마자의 한글화 표기법’에 의해 폐기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이덕일 박사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두음법칙을 재고하여야 한다. 식민지 언어정책이 철저하게 극복되지 않은 결과 현행 한글은 특정 발음을 표기할 수 없는 절름발이 언어로 전락했다. 두음법칙 같은 것들은 수많은 일제 잔재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지금까지도 일제의 언문철자표기법 틀에 갇혀 ㄹ, ㄴ이 어두(語頭)에 오면 ㅇ으로 발음하게 한 두음법칙 같은 반 언어적 조항이 실려 있는 현행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일제의 언문철자표기법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다.
우리는 글로벌 시대에 한글의 국제화를 위해 소리글자인 한글의 우수성을 되살리어 사라진 네 글자와 경순음 같은 글자들을 부활시키는 방법도 고려하여야 한다. 우리가 외국어를 만날 때 지금 안 쓰이는 사라진 글자들에 대한 아쉬움과 부활의 절실함이 공감되는 시대이다. 글로벌 시대, 다문화 시대에 살면서 이러한 아쉬움을 우리보다 먼저 타자가 알아주고 속 풀이를 해줄 계기가 마련되고,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역사에서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등한시했던 혜초의 ‘왕오천국전’과 일연의 ‘삼국유사’의 가치를 우리보다 타자가 먼저 알아준 사례에 대해 우리의 어떠한 변명도 자위도 공허한 메아리이었을 뿐이다. 첫 단추를 잘 못 꿴 한글의 왜곡은 바로잡아야 한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