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평가 받는 극사실주의 미술
- 척 클로즈에서 론 뮤엑까지
글ㅣ홍경한.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

하이퍼 리얼리즘(hyperrealism)은 영국과 미국에서 기승을 부린 팝아트(pop art)가 점차 쇠퇴해질 무렵인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출발한 회화 및 조각의 새로운 경향의 미술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퍼 리얼리즘은 슈퍼리얼리즘(superrealism)을 비롯하여 국가와 문화의 차이에 따라, 또는 집단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극사실주의, 초사실주의, 포토리얼리즘, 리얼리즘 나우, 포토그래픽 리얼리즘, 라디칼리얼리즘 ·샤포포커스리얼리즘 ·포토아트 등으로도 불렸다.
하이퍼 리얼리즘은 간단하게 말해 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생생하고 완벽하게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중립적 입장에서 사진처럼 극명한 화면을 구성하며, 아무 뜻 없이 사물이나 장소, 친구나 가족 등 ‘흔한 것’들이 화면에 등장한다. 사실적인 묘사에 머무는 리얼리즘과는 달리 극단성을 지니는 이것은 우리 가까이 있는 광경들을 일순간 정지시켜 강조해 표현하려는 미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나치게 정확하고 세밀한 묘사, 사진(혹은 도구)을 이용한 표현의 관계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하이퍼 리얼리즘은 본질적으로 현실적인 대상을 관찰, 외형적으로 똑같이 옮기는 것을 포함해 그 ‘사물자체와 직면’하는 그림들로까지 나아가 있는 미술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실용주의와 도구주의가 만연했던 60년대 당시의 미국식 리얼리즘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은 앞서 언급한대로 주변의 일상을, 대중적 속성을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끌어들인 것으로써 미술사적으로 팝아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었다. 실제로 하이퍼 리얼리즘은 팝아트에서처럼 매일 매일의 생활, 즉 우리 눈앞에 항상 존재하는 이미지의 세계를 반영한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얻을 수 있는 이미지들, 그와 유사한 시각적 현상들을 화면에 안착시켰으며 또한 그러한 것들을 소재로 삼았다. 사실 이 둘은 닮은꼴과 다른꼴이 동시에 존재한다. 객관적이며 중성적이고, 냉정하고 무표정하며 어떠한 비판적인 논리조차 부여하길 꺼려했다는 점에서 이 둘은 유사한 성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이퍼 리얼리즘은 외계의 실재를 파악하는 인식태도에서부터 출발해 사물의 객관적인 존재에 대한 신뢰, 있는 그대로의 주어진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진실 되고 거짓 없이, 그리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팝아트의 애매한 표현성과 차이를 갖는다.
즉 하이퍼 리얼리즘의 억제된, 비감동적이고 있는 그대로의 현상세계를 다룬 점, 하찮고 별 것 아닌 것조차 아무런 코멘트 없이 그 세계를 현상 그대로만 취급한다는 것은 팝아트와의 명확한 구분요소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사실주의 작가들은 극히 일회적이고 일시적인 이미지에 시선을 돌려 그것들을 확대하거나 실물처럼 재생시켜 그것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그 나름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역설적이게도 ‘사실에 대한 허구’를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가치가 없고 허무한 것에 대한 생명을 불어 넣으며 또 다른 가치를 만드는 것, 카메라가 볼 수 없는 것까지 들여다보는 신기한 예술로도 인정을 받은 하이퍼 리얼리즘은 눈에 그대로 제시되는 표면상의 얇은 이미지가 아닌, 현실에로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오히려 현실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하이퍼리얼리즘 작품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노력이 작업과정에 스며있고 개인적 흔적이 드러나는 작가의 고유성을 담보로 했다. 본 글 2편에서 언급한‘척 클로즈(Chuck Close)’나 현재 잘 나가는 리얼리스트 ‘론 뮤익(Ron Mueck)’처럼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스타일의 작가들도 많았다. 실제로 그들이 생산한, 감정이 배제된 채 기계적으로 확대된 화면의 효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관람자 역시 너무나도 노동집약적인 상황에서 극도로 정확하게 모방해 놓은 것을 접하는 즐거움은 그 이전 미술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매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서구의 재현예술로서 사진조차 파악할 수 없는 극대화된 이미지를 보는 놀라움도 있지만 하이퍼 리얼리즘을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문제가 있다. 기실 오늘날의 하이퍼 리얼리즘은 정교하게 같은 외형 외에도 그 배후의 비(非)시각적 영역에 관한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캔버스 너머에 있는 그 무엇, 즉물적인 표면 뒤의 어떤 것이 베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육안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추악함, 이를테면 모발에

가려진 점이나 미세한 흉터까지도 부각되어, 보통이라면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현상이 보는 이로 하여금 잔혹한 인상을 받게 하는 외적 요소 외, 특별한 도상들이 숨어 있다. 그것이 개인이든 사물이든, 또 다른 무언가가 화자와 타자 사이를 교묘하게 오간다는 의미이다.
하이퍼 리얼리즘은 이러한 일련의 배경 아래 팝아트가 강조한 일상성과 현장성을 빨아들이며 본격적인 상륙에 나섰다. 사물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기존 가치를 함유시키고 미니멀 아트의 평면성과 전면성 강조에서 드러난 리얼리티의 새로운 해석을 당위성으로 삼았다. 여기에 고도로 개발된 현대 사진술의 재현성에 자극되어 여러 형태의, 이른바 새로운 사실주의를 만들었다. 특히 리얼리스트들에게 사진기는 경이로운 작업도구였다. 사진기의 기능을 활용해 쉽게 작업할 수 있었으며 사진 이상의 무언가를 찾게 되는 동기를 부여하기도 했다. 사물을 재현하고 복제하는 손의 기능을 사진기에 빼앗기고 난 후 회화는 사진기로는 할 수 없는 회화만의 고유한 매체성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이퍼 리얼리즘 작가들이 사진기를 선택하는 이유가 일체의 주관성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사진기의 선택 여부는 곧 왜 사진과 같은 그림을 그릴까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그냥 사진을 찍으면 되는 데 말이다. 그것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은 배경을 근간으로 한다. 20세기 초 사진기의 등장은 회화에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점에서 극사실화는 사진에 역공을 취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또한 극사실화는 멀리서 보면 사진이고, 가까이서 보면 붓의 움직임과 원근감이 살아있다. 사진은 할 수 없었던 일종의 환영(illusion)효과를 던져주기도 한다. 여기에 사진처럼 형상을 재현할 수 있는데다 사진에는 없는 회화의 질감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사진이 사실성을 고스란히 전달한다는 차원에선 하이퍼 리얼리즘의 기본 정신과 맞닿아 있지만 결과적으로 하이퍼 리얼리즘은 종래의 추상미술과 사진 자체에 대한 아이러니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한 시각의 다원화를 통해 존재파악의 폭을 확대시킨, 인간 시각의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하고 또 다른 창구에서 열어 준 일종의 혁신적인 미술경향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