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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생을 살겠습니까?
□ 본문 : 룻기 4장 1-6절
하나님의 은혜로 안식주간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기도해 주시고, 또 한결같이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를 지키며 교회를 섬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식주간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교회를 향한 말씀이고, 또 하나는 성도님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라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는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대단한 말씀을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교회를 향한 놀라운 비전을 말씀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평범한, 너무나 평범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 이보다 더 아름답고 멋진 교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에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에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성도의 삶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순종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로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은 신앙생활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복잡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만 하면 됩니다. ‘아멘’ 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왜 신앙생활이 복잡합니까? 왜 신앙생활이 어렵습니까?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고난을 만납니까? 왜 돌아가는 인생을 삽니까?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종종 차를 타고 움직이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그때 운전으로 섬겨주신 분이 계십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데 네비게이션이 운전하시는 분이 가려던 길과 다른 길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운전하시는 분이 아는 길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막히는 시간대도 아닙니다. 그리고 시야로 확인 가능한 거리까지 앞의 자동차들이 잘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비게이션은 다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운전하시는 분은 네이게이션의 안내를 무시하고 자신이 늘 다니던 길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살아있는 네비게이션 아내분이 고집부리지 말고 네이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가라고 말합니다.
남자들에게는 아내의 말을 거역하고 싶은 죄인의 본성이 있습니다. 아내의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데 말입니다. 특히 운전할 때는 더 그렇습니다. 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다른 길로 가려고 하다가도 아내가 ‘여보, 이 길이 아니야.’ 하는 순간 이상한 고집이 발동되어서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길이 맞아.’ 하며 틀린 길인 줄 알면서도 갑니다. 설령 아내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순교를 각오하고 그 순간에는 고집을 부립니다.
운전하시는 분도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다니던 길로 가려고 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분기점에서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갔습니다. 그렇게 조금 달리다보니 원래 가려던 도로의 자동차들이 서행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정체구간이 꽤나 길어보였습니다. 그때 운전하시는 분이 네비게이션 말을 듣기 잘했다고, 만약 고집을 부리고 갔으면 집에 가서 아내에게 혼날 뻔 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운전하시는 분들은 누구나 경험했던 일일 것입니다.
네비게이션 말을 듣지 않으면 조금 돌아가면 됩니다. 고생은 하겠지만 큰 일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 돌아가는 정도가 아닙니다. 고생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순종과 불순종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 사실 이 두 가지는 하나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됩니다.
우리는 이정도 쯤이야 라고 생각하지만 불순종의 결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습니다. 사울 왕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자기 혼자만 고통당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들들도 죽고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아말렉 왕 아각과 기름진 양과 소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왜 진멸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자 사울 왕이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함이라고 대답합니다.(삼상15:21) 그때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15:22)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기뻐하시는데, 순종이라는 그릇에 담긴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순종의 그릇 안에 담기지 않은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봉사와 섬김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순종의 그릇에 담기지 않은 봉사와 섬김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순종의 그릇에 담기지 않은 봉사와 섬김은 갈등을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교회의 덕을 무너뜨립니다. 그런 봉사와 섬김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봉사와 섬김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순종의 그릇에 담겨있는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배드리고 버림받습니다. 사울 왕처럼 말입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15:23) 순종이 없으면 예배를 드리고도 버림받을 수 있고, 봉사한 후에도 버림받을 수 있고, 심지어는 복음을 전한 후에도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지난 주간에 룻기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룻기를 통해 신앙생활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룻을 통해서는 신앙생활이 이삭줍기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화요일 새벽에 나누었지만 중요한 말씀이어서 수요예배 시간에 조금 더 깊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시 한 번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를 통해서는 진정한 신앙생활은 기업 무를 자로 살아가는 것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중요한 말씀이어서 오늘 한 번 더 나누려고 합니다.
룻기의 핵심 단어는 ‘기업 무를 자’입니다. 히브리어는 ‘고엘’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도로 사는 자, 속전을 주고 구제하는 자, 보복하는 자 등입니다. 한 마디로 잃어버리거나 빼앗겼던 것을 되찾아 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본어성경은 기업 무를 자를 ‘買い戻しの権利のある親類’로 번역했습니다.
기업 무를 자가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①땅을 팔고 심지어는 몸을 팔아 노예가 된 친족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고 그 땅을 사서 돌려주는 것입니다. 노예가 된 친족을 사서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②친족이 살해당했을 경우 살인자를 죽여서 보복하는 것입니다.
③형제가 자식이 없어 죽었을 때 가장 가까운 친족이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대결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형제의 아들이 됩니다. 그래서 죽은 형제의 이름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마귀의 노예가 되고 사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사셨습니다. 이것을 구속(출15:13)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구속’과 ‘무르다’가 똑같은 단어입니다. ‘구속자’가 바로 ‘기업을 무를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속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엘이 되셨습니다.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사망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1절 말씀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룻이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가 되어달라고 합니다.(3:9) 청혼한 것이지요. 보아스는 자신이 기꺼이 기업 무를 자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신보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더 가까운 친척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기업 무를 자가 되면 됩니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 자신이 반드시 기업 무를 자가 되겠다고 약속합니다.(3:13)
다음 날 보아스는 성문에 앉아 있다가 마침 지나가고 있던 엘리멜렉의 기업 무를 자를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사람을 ‘아무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그 사람의 이름을 몰라서 아무개라고 불렀을 리가 없습니다. 성경이 의도적으로 그 사람의 이름을 아무개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에 기록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여러 가지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돈 있는 사람과 돈 없는 사람, 유명한 사람과 무명한 사람, 힘 있는 사람과 힘 없는 사람,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등입니다. 그러나 룻기는 이와 같은 세상의 기준과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는 사람과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기준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니까요. 이왕 이면 돈 있는 사람, 유명한 사람, 힘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 똑똑한 사람이 되면 좋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인정받고, 세상에서 받은 인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돈 있는 사람도 돈 없는 사람도, 유명한 사람도 무명한 사람도, 힘 있는 사람도 힘 없는 사람도,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똑똑한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도 얼마든지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쓰시는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격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누구를 쓰십니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룻기는 하나님의 기준이 바로 기업 무를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업 무를 자의 기준은 정말 중요합니다. 모든 인생은 기업 무를 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십니다. 우리의 구속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일평생 죄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습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기준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기업 무를 자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 한 가지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기업 무를 자로 살았는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작은 예수로 살았는지, 제자로 살았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느냐 인정하시지 않느냐의 기준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습니다. 보았을 뿐 아니라 직접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을 제자가 아니라 ‘무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은혜 받고 표적을 체험해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무리입니다. 아무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은 무리가 아니라 제자입니다. 예수님처럼, 보아스처럼 기업 무를 자가 되는 것입니다.
3절, 4절 말씀입니다.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10년 동안 땅을 돌보지 않아 너무 황폐해져서 팔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친족 아닌 다른 사람에게 땅이 팔리지 않도록 기업 무를 자가 그 땅을 사야합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입니다. 매매의 대상이 아닙니다. 혹 매매가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희년에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은 희년을 지키지 않았지만 이것이 율법입니다.
기업 무를 자는 보아스의 말을 듣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엘리멜렉의 땅을 사겠다고 말합니다. 엘리멜렉도 죽었고 엘리멜렉의 두 아들 기룐과 말론도 죽었습니다. 희년이 와도 돌려줄 대상이 없습니다. 나이든 나오미는 죽을 것이고, 기룐도 말론도 자녀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돈을 주고 사지만 영원히 자신의 땅이 되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땅을 사고 싶어도 마음대로 사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5절 말씀입니다.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그때 보아스가 말합니다. 땅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론의 아내 룻과 결혼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룻을 통해 아들을 낳아 죽은 자, 즉 말론의 기업을 세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룻이 낳는 아들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말론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나오미에게 산 엘리멜렉의 소유지는 모두 그 아들의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엘리멜렉과 말론의 이름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세워지게 됩니다. 이것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입니다. 방금 전까지 주저하지 않고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사겠다고 말했던 기업 무를 자가 이 말을 듣고는 마음을 바꿉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기업 무를 자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누구라도 이렇게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돈으로 산 땅을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데 누가 선뜻 기업을 무르겠습니까? 누가 이런 손해를 보겠습니까?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을 무르는 사람이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그렇다 해도 누가 이런 손해를 보려고 하겠습니까? 더욱이 이 때는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삿21:25)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 때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이런 상황에서 바보같이 기업 무를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요? 어쩌면 한 사람도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보아스였습니다.
저는 두 가지 간절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는 아무개의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개도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아무개도 하나님을 알고 말씀도 알고 하나님을 예배했던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무개에게는 아무개의 인생을 살지 않고 보아스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놀라운 축복을 저버렸습니다.
기업을 무르지 않았기에 물질적인 손해는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잘했다고 칭찬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안 주고 안 받습니다. 계산도 정확합니다. 맞는 것은 맞고 틀리는 것은 틀립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도 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이고 계산적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살아야 잘 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누가보아도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에 없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용서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순종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리지 제자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아무리 성실히 살아도,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인정받아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아무개입니다.
저도 아무개가 될까 두렵습니다. 평신도도 아닌 목사인데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주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첫 번째 사람이 선지자 노릇했던 사람입니다. 요즘 말로 목사 노릇했다는 것입니다. 목사 노릇이 있다면 장로 노릇, 권사 노릇, 집사 노릇도 있을 것입니다. 성도 노릇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제자가 아니라 무리입니다. 아무리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 내며 많은 권능을 행해도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준비하는 제 마음은 간절했습니다. ‘주님, 제가 아무개가 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우리 교회 성도들이 아무개가 되지 않게 하소서.’
그리도 또 한 가지 간절한 마음은 우리가 바로 보아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업 무를 자가 되는 것은 의무입니다. 책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권리입니다. 특권입니다. 6절 말씀을 이전의 개역한글성경을 보겠습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일본어성경도 ‘買い戻しの権利’로 번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는 잃었던 생명을 되찾았습니다. 천국을 되찾았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유산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기업 무를 자로 살기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특권입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기에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 예수님의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 아무나 작은 예수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작은 예수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의 죄를 짊어질 수 있습니다.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회개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특권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욕을 먹고 침 뱉음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형제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욕을 먹고 수치를 당하는 것이 우리의 특권입니다. 나의 시간, 나의 재물, 나의 기업이 손해를 보면서 내어주고 또 내어주고 심지어는 생명까지 내어주는 것, 이것은 기업 무를 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의 권리요 특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똑똑해서 너무 계산을 잘해서 십자가마저 내버리고 아무개의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삶입니다. 온 인류의 기업 무를 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예수님을 전하는 것보다 더 귀하고 더 중요하고 더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살아가는 시간은 아무개입니다. 나를 위해 사용하는 물질은 아무개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와 복음 위해 사는 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미 있는 인생입니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가 되었습니다. 룻과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오벳입니다. 오벳은 보아스의 아들이 아니라 룻의 죽은 남편 말론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말론의 이름이 아니라 보아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마1:5,6)
기업을 무른 자 보아스는 온 인류의 기업 무를 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이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빛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인생을 살겠습니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무개의 인생, 아니면 보아스의 인생입니다.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주님, 이제는 아무개의 인생을 끝내게 하소서. 오늘 이 시간부터 보아스로 살게 하소서.’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