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별로 다시 뼈로 읽는 시(詩)
전홍구
1. 지워진 얼굴 남겨진 문장
내 기억의 첫 페이지에는 아버지가 없다.
아버지는 역사의 전면에 이름을 남긴 독립 열사도 아니었고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나 정객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장터 모퉁이에서 푼돈을 걸고 밤을 새우던 노름꾼이나 술꾼처럼 극단적인 얼룩을 남긴 이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흙을 파서 목숨을 지탱하던 평범한 시골 농부였다.
삼 남매의 입에 들어갈 거친 밥을 위해 소작논의 진흙 속에 온 생애의 관절을 묻었던 사람.
농사일의 정직한 피로가 가뭇없이 쌓여 어느 날 쓰러진 후 고작 일곱 살이던 내게 병명조차 남기지 않은 채 바람처럼 증발해 버린 존재.
그리하여 내 유년의 하늘은 언제나 아버지가 빠진 반쪽짜리 천체였다. 동네 아이들이 아버지라는 커다란 그늘을 자랑할 때마다 나는 소외감의 자리에 어머니라는 이름을 더 힘주어 박아 넣곤 했다.
“시골구석에 붙어살다가는 평생 흙먼지나 마시는 농사꾼 팔자 못 벗어난다.”
아버지가 떠나고 3년이 지나던 해 어머니는 남겨진 삼 남매의 손을 쥐고 무작정 도심의 소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연고도 비벼볼 언덕도 없는 막막한 콘크리트의 바다였다. 어머니는 우리를 거친 세상에 방류하며 단 한 가지만을 주문했다. ‘스스로 앞길을 개척하라.’
그것은 모진 명령이자 생존을 위한 형이상학적 화두였다.
첫 보금자리는 형이 소사(小使)로 일하던 동사무소의 차디찬 숙직실이었다. 낮에는 형이 공무원들의 심부름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로 향했기에 나와 누나는 형의 빈 숙직실을 지키며 밤을 보냈다. 겨우 국민학교 5학년이던 내가 마주한 도시는 웅장했으나 차가웠다.
1961년 가을, 형이 군대로 떠나면서 나의 본격적인 고학(苦學)이 시작되었다. 새벽안개를 가르며 배달하던 신문과 우유 주머니는 내 유년의 유일한 책장이자 시집이었다. 끼니를 거르는 일은 형이하학적인 통증이었으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배움에 대한 갈증은 형이상학적인 구원이었다. 눈물 젖은 빵을 삼키며 마침내 공과대학을 졸업하던 날 나는 비로소 가난의 문턱을 한 걸음 넘어선 것만 같았다.
형은 장기 복무로 월남의 붉은 황토밭 정글로 떠났고 나는 군에 입대해 DMZ의 밤하늘을 보며 병영일지를 썼다. 군 수송기 소리와 포성이 들리는 행간 사이로 내가 쏘아 올린 글들이 전우신문에 게재되던 그 시절 문학은 이미 내 핏줄 속에서 조용히 맥박치고 있었는지 모른다.
2. 사막의 철(鐵)과 사선(死線)의 냉동실
제대 후 산업 장학생으로 들어간 곳은 거대한 시멘트 제조회사의 기계과였다. 거친 쇳가루와 시멘트 분진이 날리는 현장은 또 다른 의미의 농사였다. 아버지가 흙을 일구었다면 나는 현대 문명의 뼈대인 시멘트를 일구었다. 근무 3년 차에 가정을 이루고 첫아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평범하고도 견고한 삶의 궤도에 진입했다고 믿었다.
1980년, 기회는 지중해의 푸른 바람을 타고 왔다. 수출용 산업기계 설치 팀장으로 임명되어 리비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벵가지에서 트리폴리까지 사막의 뜨거운 열풍이 몰아치는 10개 지역에 10개의 거대한 플랜트를 건설하는 작업이었다. 모래바람과 폭염 속에서 철판을 용접하여 시멘트 저장탱크를 설치하고 기계를 조립하고 세우는 일은 보이지 않는 무(無)의 공간에 인간의 의지라는 유(有)의 질서를 부여하는 신성한 노동이었다. 이국땅의 붉은 태양 아래서 나는 가난의 유령을 완전히 떨쳐내기 위해 온몸의 진액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운명은 가장 정점에 달했을 때 가장 깊은 수렁을 준비하는 법인가.
귀국 후, 반월산업단지에서 기술상무 겸 공장장으로 숨 가쁘게 일하던 어느 날 밤이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피로를 조종하며 운전하던 귀갓길 어둠 속에서 마주 오던 승용차가 전조등의 폭발적인 섬광과 함께 내 삶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쿵쾅!
철과 철이 부딪치며 내는 기괴한 비명과 함께 세상이 암전(暗轉)했다. 사고 현장은 참혹했다.
구급대원들과 경찰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일그러진 자동차 속에서 꺼낸 내 육신을 보고 현장에서 즉사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단다. 내 몸은 백색의 천에 덮인 채 어느 대학병원의 차디찬 시체 보관 냉동실로 운반되었다. 영하의 냉기 속에서 나는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의 서류가 마감되려는 순간 신(神)의 서명은 다르게 움직였다. 냉동실 관리자가 시체가 먼저가 아니라고 사망진단서를 요구했고, 발급을 위해 시체를 검안하던 의사가 경악했다.
머리와 배가 터지고 두 다리가 으스러져 형편없는 고깃덩이처럼 변해버린 육신 속에서 기적처럼 심장이 아주 미약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살아있어! 응급실로 옮겨요, 빨리!”
어둠의 심연에서 들려온 그 한마디가 나를 이승의 빛 속으로 다시 끌어당겼다.
3. 기어가는 육체 솟아오르는 영혼
수술을 끝낸 그때부터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병원은 나의 무덤이자 부활의 제단이었다. 수없이 살을 찢고 뼈를 맞추는 수술이 이어졌다. 1994년, 마침내 병원 문을 나설 때 내 신체는 휠체어에 의지해 있었다. 의사는 다시 걷기 힘들 것이라 말했지만 내 안의 웅크린 영혼은 그 선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날 나는 휠체어를 마당 구석으로 밀쳐버렸다. 그리고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두 다리가 힘을 잃었다면 엉덩이와 두 손이 있었다. 나는 방바닥을 거실을 그리고 마당의 흙을 엉덩이와 네발로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짓물러 터지는 살점과 뼈마디의 통증은 내가 살아있다는 형이하학적인 증거였다.
인간이 가장 낮은 곳으로 엎드릴 때 비로소 하늘이 가장 가깝게 보인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7살 때 나를 떠난 아버지의 평범한 농사꾼의 뒷모습이 엉덩이로 기어다니는 나의 처절한 실루엣 위로 겹쳐 보였다. 나는 절망을 파고 뒤엎는 영혼의 농부였다.
‘주여, 나를 이 사선에서 건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날마다 마음속으로 울부짖던 기도는 기적의 마중물이 되었다. 네발 기기에서 목발로 목발에서 지팡이로 그리고 마침내 아무런 보조 기구 없이 맨발로 대지를 딛고 일어섰을 때 나는 그것이 나의 인간적 노력을 넘어 나를 지키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체의 부활은 영혼의 개화(開花)로 이어졌다. 군 생활과 산업전선에서 틈틈이 써 내려갔던 작품 속에서 고른 작품으로 1991년 문단에 데뷔했고,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에는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공부했다. 퇴원 후 아파트와 상가의 관리소장으로 15년간 치열하게 근무하면서도 내 손에서는 펜이 떠나지 않았다.
낮에는 입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는 생활인이었고 밤에는 우주의 본질과 인간의 구원을 노래하는 시인이었다. 전국 문학작품 공모전에서 상을 받고 10권의 시집을 세상에 상정하는 동안 나는 비로소 ‘문학인’이라는 온전한 옷을 입게 되었다.
4. 여든의 숙제 길 위에서 쓰는 시
이제 내 나이 여든을 훌쩍 넘겼다. 한 세기를 거의 다 채워가는 이 시점에도 내 안에는 여전히 풀지 못한 두 가지 형이상학적인 숙제가 남아 고요한 통증을 유발한다.
하나는 평생을 쫓아다닌 ‘가난’의 잔재를 온전히 털어내지 못했다는 세속적인 아쉬움이요 다른 하나는 수천 편의 시를 썼음에도 ‘이것이 나의 대표 시’라고 내놓을 만한 영혼의 정수(精髓)를 아직 건져 올리지 못했다는 예술가로서의 갈증이다.
가난과 대표 시. 이 두 가지는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 같다. 가난했기에 시를 썼고 시가 완벽하지 못했기에 여전히 가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 무엇을 새로 시작하겠는가. 내게 남은 일은 밤낮없이 이 생각 저 생각을 백지 위에 쏟아내고 썼던 글을 다시 고쳐 쓰고 지웠다 다시 새기는 일뿐이다.
문장을 고치는 행위는 내게 지나온 삶의 굴곡을 다듬는 행위와 같다. 리비아의 사막에서 플랜트를 조립하듯 단어를 맞추고 교통사고로 부서진 뼈를 맞추듯 문맥을 맞추었다.
지금도 나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팡이 대신 카메라와 노트를 들고 이곳저곳을 기행(紀行)을 한다.
내 눈에 비치는 푸른 나무 오래된 성곽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나는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숨결을 읽는다. 여러 매체에 보낸 글들이 활자화되어 세상에 나올 때마다 나는 냉동실의 차가운 철판 대신 따스한 햇볕 아래 살아있음을 새삼 감사하게 된다.
내 아버지는 평범한 농부였고 나는 기계를 만지다 뼈가 부러진 기술자였으나 지금의 나는 별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가난을 다 털지 못하면 어떠랴 대표 시를 쓰지 못하면 또 어떠랴.
여든이 넘은 노시인이 밤을 새워 원고지 위에 눈물로 꾹꾹 눌러쓰는 이 행위 자체, 살아 숨 쉬며 끊임없이 존재의 본질을 고쳐 쓰는 이 삶 자체가 바로 신이 내게 받아쓰게 한 가장 위대한 ‘대하소설’이자 단 하나의 ‘대표 시’가 아니겠는가. 창밖으로 새벽안개가 밀려온다.
오늘도 한 편이 부족하여 또 다음 시를 꿈꾸는 마음, 그 마음이 늙지 않는 한 시인도 늙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나는 다시 펜을 쥔다. 아직 건강이 허락하기에 나는 쓰고 또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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