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호 라디오 금성 A-50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58년 가을, 부산의 한 회사에서 고급기술간부 모집공고를 내자 2000명이 응시한다. 서류심사 후 필기시험 기회가 주어진 사람은 83명. 그리고 이 중 7명이 실기시험에 응할 수 있었고 최종합격자는 3명 뿐이었다. 그 중 수석합격자 이름은 김해수였다.
회사는 김해수에게 라디오 개발 특명을 내렸다. 이 회사는 럭키화학공업사 구인회(현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조부) 사장이 막 설립한 금성사였다.
6·25 전쟁 직후 일제와 미제라디오가 전부였던 그때 치약회사 럭키화학은 금성사를 설립하면서 국산라디오 시장 개척에 나섰다.
A-501 라디오를 탄생시킨 부산 연지동 공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국산라디오 제1호 'A-501' 개발 특명을 받은 김해수는 라디오 캐비닛 디자인은 물론 금성사의 상징 왕관모양의 샛별마크와 ‘Gold Star’라는 로고까지 창안하면서 이듬해(1959년) 11월 완제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금성 A-501 라디오 광고 사진. 제공: LG-e역사관
그러나 일제 밀수품과 미제 면세품 라디오가 판치고 있던 시절, 금성사 라디오 판로는 막막했다. 판매사 마다 국산 라디오는 끼워주지도 않았다.
때마침 정부에서 밀수품 근절에 대한 포고령이 내려졌다. 더불어 공보부 주관으로 전국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 발표가 나왔다. 금성사 전화벨은 북새통이 됐다.
훌륭한 개발자와 시대를 잘 만난 절묘한 타이밍이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공장 앞에 선 금성사 간부진들(왼쪽 네번째 김해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6살에 새 이정표의 주역이 된 김해수는 사실 라디오 수리공이었다.
1923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하동에서 성장한 김해수는 15살에 일본으로 간다. 과학박물관 미래관에서 우연히 송상장치를 접하고 미래에는 그림이나 사진을 기계장치로 먼 곳에 보낼 수 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리고 도쿄고등공업학교 전기공학과에 월반 입학하게 된다. 이때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은 공업학교 학생들을 조기 졸업시켜 각지의 조병창으로 보냈다. 김해수는 부평 조병창으로 배치받았다.
이곳에 부임한 직후 일본인들을 향한 한국인들의 분노가 상당함을 느끼고,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입지가 곤란해질 것을 예감한 김해수는 야반도주해 강원도 산골에 살고 있던 형을 찾아 숨어 들어갔다.
거기서 형의 소개로 만난 일본인 광산업자들의 전축을 고쳐주면서 연명하며 해방을 맞았다.
고향 하동으로 돌아온 김해수는 일본인 라디오가게를 인수한 사람의 도움으로 그 가게를 맡게 됐다. 라디오를 잘 고친다는 소문이 나면서 이웃 남해와 구례, 광양에서까지 고장난 라디오를 들고 찾아왔다.
하지만 하동군청 방화사건이 일어나면서 김해수를 포함 좌익청년 4명이 근거도 없이 방화범으로 몰려 수감되면서 죽을 고비를 맞았다. 부산에서 온 특수형사 4명이 청년 한 명씩 붙잡고 밤새워 고문을 가했다. 그리고 무조건 방화범임을 시인하라는 것이었다.
3주간 고문 끝에 교도소를 옮겼고 김해수와 다른 한 명은 끝까지 부인하자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됐으나, 고문에 못 이겨 시인한 2명은 유죄판결을 받고 옥사했다고 한다.
무죄로 풀려났지만 오랜 고문으로 몸이 많이 상한 김해수는 정신적, 심리적 안정을 위해 완도의 작은 섬 소안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곧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국제시장 옆에서 작은 라디오가게를 열었다.
1960년 금성사 생산과장 시절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그러던 중, 안면이 있던 미군 대위가 미군 PX의 라디오 수리점 위탁운영을 맡겨 운영하게 됐다. 이때 그가 고친 라디오가 3000대가 넘었고 그는 라디오 수리 최고 전문가가 됐다.
이 실력으로 새로 생긴 회사 금성사에서 단 3명만을 뽑는 시험에 수석 합격 할 수 있었다.
김해수는 금성사에 11년간 근무하면서 국산 라디오 성공을 발판으로 전화기, 텔레비전, 선풍기 등 가전-전자제품 생산을 총괄하며 금성사의 신제품 개발을 주도했다. 비교적 평온했던 생활은 거래기업 삼화콘덴서에 이직한 후, 5년 만에 직장생활을 그만둬야 하면서 어려움을 맞았다.
이후 그의 인생사 관심은 딸에게로 집중됐다.
김해수 선생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뒀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딸은 이종사촌이 데모를 하다 잡혀가자 운동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경동교회에서 노동운동가 박기평을 만나면서 딸은 급격하게 운동권으로 변해갔다. 그를 따라 노동운동에 뛰어들고 야학활동으로 가출하면서 부모 속을 꽤나 썩였다.
김해수 선생은 약대를 나온 딸과 박기평이 3년을 만나는 동안 전혀 알지를 못했고 마침내 결혼을 허락하게 된다. 그러나 그 직후 딸과 사위를 만날 수 없게 된다. 경찰이 김해수 선생을 찾아와 “박기평이 그 유명한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라는 것을 몰랐습니까?” 하고 따지듯 물었다.
그때서야 자신의 사위가 박노해라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1991년 초봄 딸과 사위는 사노맹(사회주의 노동자동맹) 사건으로 체포됐고 오랜 감옥살이에 들어갔다.
일제시대를 거쳐 6?25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온 김해수는 인생의 절정기에 산업화 시대의 주역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는 그 길이 위대하다고 여겼고 자랑스러웠지만 자식 세대가 자신과는 또 다른 길을 걷는 모습을 결국 응원하고 격려했다.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여든하고 셋의 인생 여정, 지난 2005년 조용히 한 시대의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