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鄭地)는 처음 이름이 정준제(鄭准提)이며 나주(羅州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사람이다. 풍모가 장대했으며 성품이 관후했다. 어려서부터 큰 뜻을 가져 독서를 즐겼는데 책에 나오는 대의에 통달해 남들이 그 설명을 들으면 모든 의문이 시원히 풀렸다. 또 드나들 때 항상 서적을 지니고 다녔다.
공민왕 23년(1374),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이희(李禧)가 글을 올려 수전(水戰)을 훈련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왕이,
“이희는 초야에 묻힌 신하이면서도 이런 훌륭한 전략을 올렸는데, 백관과 위사(衛士) 가운데는 아무도 이희 같은 사람이 없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 이에 위사 유원정(柳爰廷)이 나서서, 중랑장 정준제가 왜구를 평정할 전략을 기초한 적이 있으나 올리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정지가 쉬구치[速古赤]로 전각 계단에서 왕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왕이 돌아보고 정말 그러한가라고 묻자 즉시 자신이 만든 전략초안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바쳤다. 왕이 읽어 보고 크게 기뻐하며 정지를 전라도 안무사(安撫使)로, 이희를 양광도 안무사(安撫使)로 삼아 모두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를 겸하게 하였다. 최신길(崔臣吉)과 박덕무(朴德茂) 등도 글을 올렸는데 이희와 정지의 계책과 같았으므로 박덕무를 경기왜인추포부사(京畿倭人追捕副使)로 삼았다. 그리고 재상들을 이렇게 다독였다.
“지금 이희 등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에 대해 경들은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그들이 공을 이루고 민심을 분발시키기를 바랄 뿐이다. 장차 전공을 세우지 못하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또 정지 휘하의 군사 85명과 이희 휘하의 군사 67명에게 첨설직(添設職)을 주었으며 밀직사(密直司)에게 명해 정지와 이희에게 천호공명첩(千戶空名牒) 스무 개와 백호공명첩(百戶空名牒) 2백 개를 주도록 하였다. 당시 정지와 이희가 두세 번에 걸쳐 모두 수십 조에 달하는 전략을 올렸는데, 그 개략은 이러하다.
“내륙에 사는 백성은 배를 부리는데 익숙하지 못하니 왜구를 막기 어렵습니다. 바닷섬에서 나고 자랐거나 해전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만 등록시켜 저희들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게 하면 5년 내에 바닷길을 깨끗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순문사(都巡問使) 같은 관직은 군량을 허비하고 민생을 소란하게 할 뿐이니 바라옵건대 그것을 없애소서.”
왕이 순찰사(巡察使) 최영을 불러 그 전략에 대해 의논하였다. 최영이 애초 여섯 도(道)를 순시한 후 전함 2천 척을 건조해 각 도의 군사들로 하여금 왜구를 잡게 하려는 전략을 세웠는데, 백성들이 모두 지긋지긋해 하고 고통스럽게 여긴 나머지 집을 부수고 달아나는 자가 열에 대여섯이었다. 이러한 때 정지 등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사태가 수습되었다.
우왕 3년(1377) 여름, 왜구가 순천(順天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낙안(樂安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등지를 침략하자 정지가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순천도병마사(順天道兵馬使)가 되어 적을 격파해 열여덟 명의 목을 베고 세 명을 사로잡았다. 판사(判事) 정양기(鄭良奇)를 보내어 승첩을 보고하자 우왕이 기뻐하며 정양기에게 백금 50냥을 하사하고 그의 모친에게 쌀 10석을 주었으며, 정지에게는 안마(鞍馬)와 나견(羅絹)을 하사하였다. 겨울에 또 왜구를 공격하여 40여 명의 목을 베고 두 명을 사로잡은 후, 판사 정용(鄭龍)을 보내어 승첩을 보고하니 우왕이 정용에게 베 2백 필과 말 한 필을 하사했다.
4년(1378), 왜구가 영광(靈光 :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광주(光州 : 지금의 전라남도 광주직할시)·동복(同福 :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 등지를 침략해 오자 정지가 도순문사(都巡問使) 지용기(池湧奇) 및 조전원수(助戰元帥) 이림(李琳)·한방언(韓邦彦) 등과 함께 옥과현(玉果縣 :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까지 추격했다. 적이 미라사(彌羅寺)로 들어가자 아군이 포위한 후 불을 지르고 마구 공격하니 적은 대부분 불에 타 죽었으며 말 백여 필을 노획했다. 이 전투에서 정지의 공이 가장 컸기 때문에, 승첩을 보고하자 정지 및 지용기에게 각각 은 50냥을 하사하였다. 왜구가 다시 담양현(潭陽縣 :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을 침략했으나 정지와 지용기가 격파해 열일곱 명의 목을 베었다. 곧이어 정지는 전라도 순문사(巡問使)가 되었다.
8년(1382),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었는데, 왜선 50척이 진포(鎭浦 :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로 들어오자 정지가 공격하여 그들을 쫓아내고 군산도(群山島 :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까지 추격하여 배 네 척을 포획하였다. 9년(1383), 또 왜구와 싸워 크게 쳐부수니 우왕이 금대(金帶) 1개와 백금 50냥을 하사하였다. 때가 마침 봄이라 전염병이 크게 창궐해 수군 가운데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바다에서 죽은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육지로 나가 장사를 지내주니 군사들이 다들 감격하여 울었다. 정지가 병이 들자 우왕은 산기(散騎) 하충국(河忠國)을 보내어 술을 가지고 가서 위문하게 하였다. 정지가 전함 47척을 거느리고 나주(羅州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목포(木浦 : 지금의 전라남도 목포시)에 주둔하고 있던 차에 적이 큰 배 120척을 거느리고 경상도로 침략해 오니 바닷가의 고을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漫殊)가 위급함을 알리자 정지는 밤낮으로 진군을 독려하면서 어떤 때는 스스로 노를 젓기까지 하니 노젓는 군사가 더욱 힘을 다하였다. 섬진(蟾津 : 지금의 섬진강)에 도착하여 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의 군사들을 징집하니 적은 벌써 남해(南海) 관음포(觀音浦 :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에 이르러 우리 군세를 정찰하고는 아군이 약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마침 비가 내리자 정지는 지리산(智異山) 신사(神祠)에 사람을 보내,
“나라의 존망이 이번 싸움에 달려 있으니 바라옵건대 저를 도와서 신령께서는 스스로 수치를 만들지 마소서.”
라고 기도했더니 비가 과연 그쳤다.
적의 깃발이 하늘을 가리고 칼과 창이 온 바다에 번쩍이는 가운데 적은 사방으로 에워싸고 전진해왔다. 정지가 머리를 조아리고 하늘에 절을 하자 얼마 뒤에 바람이 아군에 유리하게 바뀌었다. 바다 가운데에서 돛을 올리니 배가 날아가는 것처럼 빨리 달려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렀다.
적은 큰 배 20척을 선봉으로 삼고 배마다 강한 군사 140명씩을 태우고 있었다. 정지가 진공해 먼저 그들을 쳐부수자 떠있는 시체가 바다를 덮었다. 또 남은 적을 활로 쏘니 쏘는 족족 거꾸러져 마침내 크게 적을 격파했으며 화포를 쏘아 적선 17척을 불태웠다. 이 전투에서 병마사(兵馬使) 윤송(尹松)이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전투가 끝난 후정지가 장좌(將佐)들에게,
“내가 이전에도 전쟁터에서 많은 적을 격파했지만 오늘처럼 통쾌한 적은 없었다.”
고 토로했다. 승전 보고가 올라오자 우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극명(李克明)과 안소련(安沼連)을 보내어 궁중의 술을 하사하고 노고를 치하했다.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房之用)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던 길에 왜적을 만나 포로가 되어 목에 자물쇠가 채워진 채 배 밑에 갇혀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적들은, “만약 이기지 못하면 반드시 너를 먼저 죽여버릴 것이다.”라고 을렀는데, 싸움이 끝나자 적들이 모조리 섬멸되어버렸기 때문에 방지용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정지는 병 때문에 사직했다가 얼마 뒤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자, 각 도에서 전함을 만들어 왜구에 대비할 것을 건의해 허락을 받았다. 얼마 후 해도원수(海道元帥),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慶尙)·강릉도(江陵道) 도지휘처치사(都指揮處置使)로 임명되었다.
10년(1384),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있을 때 우왕이 환관 김실(金實)을 정지에게 보내,
“도통사(都統使) 최영은 전함을 건조해 해전에 대비하고 화포까지 장착해 주도면밀하게 대응했다. 그런데 경이 해도원수로 있는 요즈음은 왜구가 고을들을 침략해도 소탕하지 못하니 이는 실로 경의 죄다.”
라고 책망하니 정지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13년(1387), 정지가 글을 올려 스스로 대마도 정벌을 자청했다.
“근래 중국이 왜를 정벌한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만약 그들이 우리 영토에까지 전함을 분산해 정박시킨다면 각종 물자를 뒷받침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우리의 허실을 엿보게 될 것이 우려됩니다. 왜는 온 나라가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반도들이 대마도와 이끼도[一岐島](지금의 나가사키현[長岐縣] 이끼도[壹岐島])에 웅거해 가까운 우리 동쪽 변방으로 무시로 들어와 노략질 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세상에 공표한 다음 대군을 동원해서 먼저 여러 섬들을 공격해 그 소굴을 전복시킨 다음, 일본에 공문을 보내 빠져 달아난 적을 쇄환해 귀순시킨다면 왜구의 우환이 영원히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의 군대가 우리 영토로 올 이유도 없어질 것입니다. 현재 우리 수군은 모두 해전에 익숙해 신사년 일본 정벌 당시 몽고병과 한병(漢兵)이 배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만약 적절한 때에 순풍을 기다렸다가 기동한다면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가 오래되면 썩고 군사가 오래되면 피로해 질 것이며 또한 지금 수군이 군역에 지쳐 날마다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타서 전략을 세워 소탕해야지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원문]十四年, 禑遣我太祖攻遼, 地以安州道都元帥隷焉, 遂從太祖回軍. 時倭寇三道, 自夏至秋, 屠燒州郡, 將帥守令, 莫有禦者.
以地威名讋倭寇, 命爲楊廣全羅慶尙道都指揮使, 與諸將往擊之. 倭自咸陽, 踰雲峯八羅峴, 至南原, 地帥都巡問使崔雲海,
副元帥金宗衍, 助戰元帥金伯興, ▶陳元瑞, 全州牧使金用鈞, 楊廣道上元帥都興, 副元帥李承源等, 奮擊大破之,
斬五十八級, 獲馬六十餘匹. 賊夜遁, 地以諸軍無食, 不能追. 時人謂, “非此戰, 則三道民幾盡矣.” 禑賜宮醞段絹.
14년(1388), 우왕이 우리 태조를 보내 요동을 공격할 때 정지는 안주도원수(安州都元帥)로서 태조의 휘하에 있었는데,
결국 태조를 따라 회군하였다. 마침 왜구가 세 도(道)를 침략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주(州)·군(郡)의 사람들을 죽이고
불태워도 장수와 수령 가운데 막아낼 자가 없었다. 왜구가 정지의 위세와 명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를 양광(楊廣)·
전라(全羅)·경상도(慶尙道)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임명해 장수들과 함께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왜구가 함양(咸陽 :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으로부터 운봉(雲峯 :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팔라현(八羅峴)을 넘어 남원(南原 :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에 이르자,
정지는 도순문사(都巡問使) 최운해(崔雲海), 부원수(副元帥) 김종연(金宗衍), 조전원수(助戰元帥) 김백흥(金伯興)과
▶진원서(陳元瑞), 전주목사(全州牧使) 김용균(金用鈞), 양광도(楊廣道) 상원수(上元帥) 도흥(都興),
부원수(副元帥) 이승원(李承源) 등을 거느리고 분전해 적을 대파했으며 58명의 목을 베고 말 60여 필을 노획했다.
적이 밤중에 달아났으나 정지는 군량이 떨어져 추격을 중지시켰다.
당시 사람들은, “이번 전투에 이기지 못했다면 삼도의 백성은 거의 다 죽었을 것이다.”라며 안도했다.
우왕은 궁중의 술과 단견(段絹)을 하사하였다.
공양왕 원년(1389),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도(慶尙道) 절제체찰사(節制體察使) 겸 총초토영전선성사(總招討營田繕城事)가 되었다. 당시 김저(金佇)가 변안열(邊安烈) 등과 함께 우왕을 복위시키려고 모의하다가 발각되었는데, 정지의 이름이 그들의 공술에 나온 관계로 외지로 유배되었다. 2년(1390), 좌헌납(左獻納) 함부림(咸傅霖)을 파견해 정지를 계림(鷄林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국문했으며 대간이 항소해 법에 따라 논죄할 것을 청하자 횡천(橫川 : 지금의 강원도 횡천군)으로 옮겼다. 대간이 거듭 논박하자 다시 더 먼 곳으로 옮겼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변안열전」에 나와 있다.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지는 청주(淸州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이시중(이성계)이 대의를 바탕으로 회군할 때, 내가 이곽(伊霍)의 고사를 들어 시중에게 풍간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니, 그런 내가 어찌 윤이와 이초 같은 자들과 일당이 되겠는가? 하늘에 맹세하고 하는 말이다.”
라며 자복하지 않았다. 그 말의 지닌 의미가 마음 속 깊은데서 우러난지라 능히 사람을 감동시켰기에 옥관(獄官)도 더 이상 진술을 받아내지 못했다. 정지가 물러 나와 사람들에게,
“사람이 나서 한 번은 죽는 법이니 목숨이 무어 그리 아깝겠느냐? 다만 왕씨가 다시 왕위에 올랐는데도 억울하게 죽는 것이 비통할 따름이다.”
고 말했다. 이튿날 혹독한 고문을 가해 국문하려 했으나 마침 물난리가 나서 죽음을 면했다.
3년(1391), 회군의 공으로 이등공신이 되었고 녹권과 토지 50결을 하사받았다. 대성(臺省)과 형조(刑曹)에서, 정지가 변안열과 같은 일당이라 하여 죄를 받은 것은 기실 억울한 모함이라고 간언해 마침내 풀려나게 되었다. 광주(光州 : 지금의 광주직할시) 전장[別業]으로 물러가서 살다가 판개성(判開城)으로 소환되었으나 부임하지도 못하고 병으로 죽으니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시호를 경렬(景烈)이라고 하였으며 아들은 정경(鄭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