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 신(臣) 아무는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에서는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없이 세상을 떠난 뒤에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가 성(姓)을 속이고 왕위를 도둑질한 것이 15년이었습니다. 무진년(1388) 봄에 이르러 망령되이 군대를 일으켜 장차 요동(遼東)을 범하려고 하여, 신(臣)을 도통사(都統使)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신이 그윽이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소방(小邦)이 상국(上國)의 경계를 범할 수 없으므로, 여러 장수들에게 대의(大義)로써 깨우쳐 즉시 함께 군사를 돌이켰습니다. 우(禑)는 이에 스스로 그 죄를 알고서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사양했는데, 창(昌)도 또한 어리석고 유약하여 왕위에 있을 수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공민왕의 비(妃) 안씨(安氏)의 명령을 받들어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 왕요(王瑤)로써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하였습니다. 요(瑤)가 혼미(昏迷)하여 법도를 어기고 형벌과 정치를 문란시켜서, 참소하고 아첨한 무리를 친근히 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하를 내쫓으니, 신하와 백성이 분개하고 원망했으나, 아뢰어 말할 데가 없었습니다. 공민왕 비(妃) 안씨(安氏)는 그렇게 된 이유를 깊이 생각하여, 그를 명하여 사저(私邸)에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이에 온 나라의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군민(軍民) 등이 말하기를, ‘군국(軍國)의 사무는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 하면서, 신을 권지군국사(權知軍國事)로 추대하였습니다. 신은 본디부터 재주와 덕행이 없으므로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여러 사람의 사정에 몰려서 도망해 피하지도 못하므로, 놀라고 두려워하여 몸둘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황제 폐하께서는 건곤(乾坤)의 넓은 도량과 일월(日月)의 총명으로써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길 수 없음과 미신(微臣)이 마지못했던 일임을 살피시어, 성심(聖心)으로 재가(裁可)하여 백성들의 뜻을 안정하게 하소서.”
첫댓글 京을....중국 서울이라고...해석을 해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