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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묵상글 (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 우리가 진정 끊어야 할 것.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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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가 진정 끊어야 할 것.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무엇일까요?
새로운 사조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새 부대는 무엇일까요?
새로운 사고방식인가요?
그렇습니다.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려면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고루한 사고방식으로는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며칠 전 한 형제가 요즘의 놀라운 흐름을 들려주었습니다.
15분짜리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팝콘을 다 먹기 전에 영화가 끝난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도 단편 영화는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그런 것인가 했는데 그것과는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긴 것은 지루해서 보지 못하고,
짧아야지만 보기 때문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것은 이런 사조나 흐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제 생각에 이것은 새롭기는 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또 많은 것이 새롭기는 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몰려드는 새로운 것들 가운데서
어떤 것이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것인지 늘 식별해야 합니다.
사실 요즘은 새로운 것이 너무 많아서 문제이고,
나이 든 사람에게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또 새로운 것이 나와 문제이고 그래서 새로운 것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늘 식별해야 하고
잘 식별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이로운 겁니까?
물론 이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로운 것이 해롭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로운 것도 또 식별해야 하는데
많은 새로운 문명과 문물이 대개 이러합니다.
요즘 인공 지능의 문명과 문물이 이러합니다.
제 생각에 식별의 완전한 기준은 사랑입니다.
문명이건 문물이건 제도이건 주의이건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에 이바지하면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 포도주이고,
그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새 부대이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단식의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십니다.
사랑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단식이요 사랑을 위한 단식은 우리가 해야 할 단식이고,
그런 것이 아니라 굳이 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도 남에게 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단식이란 음식을 끊는 것인데
우리가 끊어야 할 것은 음식이 아니라 욕심이지요.
우리가 끊어야 할 것은 사랑이 아니라 애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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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매일 자정이 되면 누군가 당신에게 24만 원씩 꼬박꼬박 입금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규칙이 있습니다.
첫째, 매시간 1만 원씩 어떤 주식이든 사야 합니다.
둘째, 같은 종목에 반복해서 투자할 수 있습니다.
셋째, 단, 1시간에 1만 원씩만 투자할 수 있으며, 1시간이 지나면 1만 원은 소진됩니다. 그래서 하루가 지나면 24만 원이 모두 소진됩니다.
넷째, 받은 돈은 모아둘 수 없습니다.
다섯째, 자정에 다시 24만 원이 입금되면 매시간 1만 원씩의 투자를 반복합니다.
실제로 꼬박꼬박 24만 원씩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 이야기입니다. 매일 현실 속에서 주어지는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잠자는 주식에, 누구는 글 쓰는 주식에, 누구는 기도하는 주식에, 누구는 공부하는 주식에, 또 운동하는 주식에 투자하기도 합니다. 투자라고 말하는 이유는 미래를 위한 나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뻔히 알면서 과연 투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런 모습을 취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순간의 재미만을 위해 스마트폰, 유튜브, 게임 등에 집중하고 있다면 좋은 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이에 대한 험담과 같은 뒷담화는 또 어떨까요? 역시 좋은 투자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전혀 실천하지 않으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급급하다면 이 역시 좋은 투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위해 매일 받는 24시간으로 어떻게 투자해야 할까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가 열렸고 신랑이 잔칫상에 함께 있는데, 어떻게 단식하느냐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런 모습이 당시 바리사이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식만 하면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식의 모습을 보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가득 담아낼 수 있는 잔칫상의 새 부대가 바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삶을 과거에 연연하면서 낭비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진정한 투자를 해야 합니다. 이런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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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에 있어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빅토르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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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
왜 단식을 하며, 무엇을 위해하며, 누구를 위한 단식인가?
‘단식’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판관 20,26-28), 회개의 표시로(요엘 2,12), 죽은 이를 위한 애도의 표시로(2사무 7,6) 행해졌으며, 이사야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사 58,6-7)에 대해 언급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전에 광야에서 단식하셨으며(마태 4,2), 사도의 임명이나 파견 때 행해졌고(사도 13,2-3;14,23), 마태오복음사가는 단식할 때의 바른 자세(마태 6,17-18)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곧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 9,15)
이는 단식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신랑이 와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 34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신심행위로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안했고, 요한의 제자들은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아무도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마태 22,1-14)와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에서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요한 3,2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새 천”과 “새 포도주”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6-17)
그러니, 이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새 부대는 새 시대를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
사실, 이 비유들은 ‘새것’(헝겊, 포도주)과 ‘묵은 것’(옷, 포도주 부대)의 부조화를 강조하면서, 신랑이신 예수님의 때는 단식이 적합하지 않는 특별한 순간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마치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비연계성을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는 이 말은 붙임으로써, 다른 전환을 가져다줍니다. 곧 ‘묵은 것’을 잃기를 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묵은 것’이 ‘새것’에 의해서만 보존된다는 것을 제시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의 잔이오니, 술잔 가득 사랑을 채우소서.
취해, 기뻐 흥겨우리이다. 온통 젖어, 향기 품으오리이다.
만나는 이마다 축복과 기쁨, 생명과 진리 그득 담아 건네오리이다.
오늘, 저의 삶이 화들짝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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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미래지향적인 삶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하지만, 과거의 허물이 또는 옛 생각이 오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기 위해서는 오늘에 충직해야 하고, 오늘에 충실하다는 것은 희망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오늘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옛것에 매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늘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마음 써야 합니다. 껍데기에 치중한 삶이었다면 알맹이를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스승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사실 단식은 그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식하는 것은 밥을 굶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식할 합당할 이유가 있어서 단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식한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 단식하는가?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면 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잔칫집에서는 함께 웃고 축하하는 것이요, 상가에서는 함께 울고 슬픔을 나누면 됩니다.
슬픈 일이 생기거나, 새 삶의 시작을 위해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웃과의 나눔을 위해서라면 단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을 통해 자신을 비우고 새 생활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에페4,22-23).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흔히 말하는 다이어트와는 분명 구별됩니다. 단식의 정신은 고행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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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2019년 8월에 뉴욕으로 왔습니다. 매년 6월에 교구사제모임이 있습니다. 2020년 6월에는 과테말라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과테말라에서 선교하는 신부님이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 코로나 팬데믹이 있었고, 교구사제모임은 취소되었습니다. 2021년에는 아직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지 않아서 교구사제모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022년에는 댈러스에서 교구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먼저 있던 신부님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복귀했습니다. 워싱턴 DC에 있는 신부님만이 저보다 먼저 미국으로 왔습니다. 2023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교구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2019년, 제가 미국에 왔을 때 있던 신부님들은 모두 한국으로 복귀했고, 저와 같이 2019년에 미국에 왔던 신부님이 한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2024년에는 워싱턴 DC에서 교구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제가 뉴욕의 신문사 일을 마치고,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옮겼기 때문에 저보다 먼저 온 신부님도, 저와 같이 왔던 신부님도 모두 한국으로 복귀했습니다. 이제 제가 제일 오래 되었고, 제일 연장자가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시간의 무상함도 느껴집니다. 너무 오래있었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으면 부대도 찢어지고, 새 술도 쏟아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술과 새 부대’의 의미는 무엇일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낡은 부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처럼 미국에 온지 오랜 된 사제가 낡은 부대라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이제 막 미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사제가 새 부대라는 의미도 아닐 겁니다. 저처럼 33년 된 사제가 오래된 술은 아닐 겁니다. 이제 막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이 새 술은 아닐 겁니다. 그렇습니다. 새 술과 새 부대는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새 술과 새 부대는 ‘생각’의 문제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낸다면 언제나 새 술과 새 부대입니다. 반대로 현실에 안주하고,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언제나 오래된 술과 낡은 부대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와 복음’이라는 새 술을 준비하였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는 비록 많은 지식이 있고, 율법을 잘 지켰을지라도 낡은 부대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받아들였던 어부들은 새 부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술’의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을 쫓아가는 사람은 결코 새 술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썩어버린 사람도 결코 새 술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멍에를 남에게 씌우고 편한 길만 가는 사람도 결코 새 술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레위와 사제도 새 술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새 술이 될까요? 그렇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새 술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가 새 술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닭이 울자 통회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가 새 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새 술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가 새 술입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왔던 착한 이웃이 새 술입니다. 겸손한 사람,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은 새 술입니다. 그렇습니다. 새 술이 되는데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새 술이 되는데 능력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새 술이 되는데 직책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가 새 술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감사 할 수 있다면 저도 새 술과 새 부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병들었던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깨끗하게 되었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로 인해서 매일 새로운 세포들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우리들의 신앙생활로 거듭나야 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 밭에는 농부가 원하지 않는 잡초가 함께 자라나듯이 우리의 마음에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악한 것들이 자리 잡곤 합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악한 세력들입니다. ‘탐욕, 분노, 질투, 게으름, 미색, 교만, 과식’입니다. 이것들은 암세포와 같아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면 좀처럼 나가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없애는 것은 새로운 것들을 우리의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기도, 희생, 봉사, 나눔,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있을 때 우리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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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얼마 전 수원의 한 본당에 특강과 미사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외부 특강이 있을 때면 교통 상황과 미리 도착해서 해야 할 사소한 일들, 예를 들면 화장실과 같은 일들 때문에 조금 일찍 출발합니다.
그날도 역시 일찍 출발했습니다. 특강 30분 전에 도착을 목표로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곳에 30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본당 마당에 주차하고 화장실을 다녀와서 원고를 한 번 더 확인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의 계획은 성당 마당에 도착하자마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당 마당에서 교우분들이 묵주기도를 봉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모인 백여 명의 교우분들 모두가 성모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게는 그 장면이 여느 아름다운 풍경보다 장관이었습니다.
모두가 한곳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모습, 그 누구도 바라보지 않고 한곳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 저는 그 모습 자체가 우리 신앙생활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신앙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느님, 그리고 우리들의 도움이신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곳은 그곳입니다. 다른 것은 2차 혹은 3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복음도 이런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의 물음에 주님께서는 지금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형식이 아닌 마음이고, 함께 계신 하느님의 아들에게 우리는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신앙의 대상은 주님이십니다. 그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악한 것은 물론이고 그것이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보다 더 우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하루가 주님과 함께 주님만으로 행복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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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사람 되기
날이 덥습니다.
더운 것을 잘 견디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쌀쌀한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은 원합니다.
몸이 더운 것과 마음이 따뜻한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몸이 뜨거워도 마음 차가운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몸이 뜨겁든 차갑든 우리가 모두 따뜻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려면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나에게 내가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나에게 따뜻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따뜻합니다.
나에게 따뜻한 사람이 자녀들과 배우자에게도 따뜻합니다.
나와 대화하세요.
나를 돌봐주세요.
그리고 그 따뜻함으로 내 옆의 누군가를 안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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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선물이자 선택
“날마다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삽시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85,11-12)
교황청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1면에, “일치와 희망,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로의 사도적 여정을 위한 교황의 일정”이란 톱기사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교황은 ‘일치의 사도’가, ‘희망의 사도’가 되어 2024.9.2.-13일까지 제45차 해외 사도적 여정차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아, 동티모로, 싱가폴을 방문합니다. 87세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열정이 참으로 경이(驚異)롭습니다. 가톨릭 교회에 하느님 주신 참 좋은 선물이 현재의 교황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선택이다. 날마다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삽시다.”
오늘 말씀 묵상중 문득 떠오른 말마디이자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주시는 축제인생의 선물을 선택해 사는 것, 바로 이것이 지혜입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참 좋은 선물이자 선택이된 교황님의 존재입니다. 제가 자주 고백하는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꽃자리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옵니다”
행복 또한 선택이자 선물입니다. 그러니 행복을 선택,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날마다 바치는 선물과 같은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공동전례의 선택이 행복의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 그날의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지 못하면 내일도 살지 못합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야 할 하늘 나라입니다.
오늘로서 제1독서 아모스 예언서는 끝납니다. 정의의 예언자이자 희망의 예언자인 아모스입니다. 거의 대부분 예언자가 전하는바 언젠가 그날의 희망입니다. 바로 희망의 그날을 앞당겨 오늘 사는 것입니다. 역시 희망의 선택, 희망의 훈련, 희망의 습관입니다. 그대로 풍요로운 하늘나라의 실현입니다. 다음 아모스의 희망을 우리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을 메우고, 허물어지 곳은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리니, 밭가는 이를 거두는 이가 따르고, 포도 밟는 이를 씨 뿌리는 이가 따르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바로 오늘 그날을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어제 고백성사차 방문했던 수녀원에서의 하늘나라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저는 감히 하늘나라 체험이라 명명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꽃처럼 환히 웃으며 환대하는 수녀님이 참 반갑고 고마워 살며시 안으며 기쁨의 인사를 나눴습니다. 흡사 수녀님이 요즘 수도원 뜨락에 때되어 활짝 피어나 은은한 향기를 발하는 백합꽃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수녀님을 뵙는 순간 백합꽃인줄 착각했네요! 백합꽃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마침 찍어둔 백합사진과 함께 보낸 메시지에 즉시 답을 받았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저에겐 그대로 하늘나라 기쁨의 체험이었고 오후 내내 행복했습니다. 동시에 아주 예전 꽃 한송이를 선물로 갖고온, 지금은 고인이 된 가난한 자매에게 드린 답시도 생각납니다. 이 답시를 받았을 때 얼마나 행복해 하던지요! 여러번 나눴지만 나눌 때 마다 늘 새롭습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언젠가 그날의 하늘나라가 아니라 오늘 하늘나라의 행복을 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꿈을 펼쳐가며 우리 자신이 하늘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최고의 모범입니다. 예수님 삶 자체가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예수님 가는 곳마다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걸어다니는 하늘나라같은 존재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땅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처럼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 하늘나라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요한의 제자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단식이 판단의 잣대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사랑이 그 판단잣대입니다. 예수님은 단식에 큰 중요성을 두지 않습니다. 단식 많이 한다고 구원이 아니요 이런 단식 경쟁은 백해무익할 뿐입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는 옛 장상의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요한이 제자들이 바리사이들처럼 단식 많이 함을 과시하며 당신의 제자들을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느냐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통쾌한 답변입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입니다.”
단식의 때 되면 단식할 것이지 주님과 함께 즐겁게 보내야 할 축제인생을 분별없는 단식으로 어리석게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정 살 줄 아는 지혜로운 자라면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 선물을 선택해 살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기막히게 적절합니다.
“아무도 새 천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마찬가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새 천조각을 헌옷에 대고 꿰매는,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는 어리석은 꼰대가 되지 말고 발상의 전환, 사고의 전환으로, 예수님처럼 늘 새포도주의 하늘나라 현실을 담아낼 ‘늘 새롭고 좋은, 깊고 넓은, 너그럽고 자비로운’ 새 부대로 참 사람이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예수님처럼, 성인들처럼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u)”,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 하늘나라의 삶이겠습니다. 참 고맙게도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되어. 새 날, 새 부대에 새 포도주의 하늘 나라의 삶을, ‘에버 오울도, 에버 니유’의 하늘 나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걸어가리라.”(시편85,1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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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로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
늘
더욱
밝아오니
새 날
늘
더욱
굳건해지니
새 믿음
늘
더욱
솟아나니
새 희망
늘
더욱
타오르니
새 사랑
늘
더욱
뜨거워지니
새 열정
늘
더욱
여물어가니
새 나
늘
더욱
이루어가니
새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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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마태 9,16)
헌 옷에 새 천을 대어 옷을 찢지 마라
또다시 예수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예를 들어 가르치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튼튼하지 않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아직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은 아직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았다. 아직 배우는 단계인 그들에게 지금은 많은 계명을 떠안길 필요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한 단계 한 단계 성숙해 감으로써 계명들을 더 잘 받아들일 준비가 됨에 따라, 그들을 위한 좌우명과 계명을 하나씩 세우기 시작합니다. 나중에 그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하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제자로 맞게 될 때, 사람들을 더없이 온화하게 대하도록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엑카르트는 빛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깬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한다. 그것은 경험의 문제, 맛보았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엑카르트는 맛보지 못한 사람들을 성난 태도로 대한다. 말하자면 그들이 인생을 헛되이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포도주를 저장고에 쌓아 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맛보지 않는 사람은 포도주를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알고 계신 모든 것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을 아는 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본심, 하느님의 단일성,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노룻입니다. 이와 달리 내적인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는 자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포도주를 저장고에 쌓아 두고 있으면서도 포도주를 마시거나 맛보지 않는 사람처럼 무엇이 좋은지를 모르는 자입니다.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들이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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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 형제의 노래(피조물의 노래)
1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좋으신 주님,
2찬미와 영광과 영예와 모든 찬양이 당신의 것이옵고(참조: 묵시 4,9.11),
3홀로 지극히 높으신 당신께만 이것들이 속함이 마땅하오니,
4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나이다.
5내 주님, 당신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찬미받으시옵고
6그 가운데 각별히 주인이신 해님 형제와 더불어 찬미받으소서.
7해님은 낮이옵고, 그로써 당신께서 저희를 비추시나이다.
8아름답고 장엄한 광채로 빛나는 해님은,
9지극히 높으신 당신의 모습을 지니나이다.
10내 주님, 달 자매와 별들을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시편 148,3).
11당신께서는 빛 맑고 귀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나이다.
12내 주님, 바람 형제를 통하여 그리고 공기와 흐린 날씨와 갠 날씨와
13모든 날씨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다니 3,64-65).
14저들로써 당신 피조물들을 기르시나이다(참조: 시편 103,13-14).
15내 주님, 쓰임새 많고 겸손하고 귀하고 순결한
16물 자매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시편 148,4-5).
17내 주님, 불 형제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다니 3,66).
18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참조: 시편 77,14).
19그는 아름답고 쾌활하고 씩씩하고 힘차나이다.
20내 주님, 우리 어머니인 땅 자매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다니 3,74).
21그는 우리를 기르고 보살피며
22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온갖 열매를 낳아 주나이다(참조: 시편 103, 13-14).
23내 주님, 당신 사랑 까닭에 용서하며(참조: 마태 6,12),
24병약함과 시련을 견디어 내는 이들을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
25평화 안에서 이를 견디는 이들은 복되오니(참조: 마태 5,10),
26지극히 높으신 이여, 당신께 왕관을 받으리로소이다.
27내 주님, 우리 육신의 죽음 자매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
28살아 있는 어느 사람도 이를 벗어날 수 없나이다.
29불행하옵니다, 죽을 죄를 짓고 죽는 이들이여!
30복되옵니다,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뜻을 실천하며 죽음을 맞이할 이들이여,
31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이다(참조: 묵시 2,11; 20,6).
32내 주님을 찬미하고 찬양들 하여라(참조: 다니 3,85).
33감사를 드리고, 한껏 겸손을 다하여 주님을 섬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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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김준수 신부님.
성녀 마리아 고레티 동정 순교 기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9,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9,17)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대의 유대인들에게나 지금의 우리에게도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표현인데 굳이 그렇게 강조해야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예전에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씀하신 표현 역시도 당연한 것 같지만 당연하지 않은 표현으로, 이를 체험하지 않으면 헷갈린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이 살다 보면 당연한 것의 당연하지 않음과 당연하지 않은 것의 당연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를 만나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당연한 말씀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 ~하게 살아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라고, 즉 들어 온 대로, 늘 하던 대로, 반응하고 처신하다 보면 당연한 일도 당연하게 인식되지 않고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반응합니다. 그러기에 경험하지 않으면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고 느낀 것들로 말미암아 달라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겪어보고 체험해 보지 않고서는 당연한 것도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하며 슬퍼할 수 없다.”(9,15)라는 예수님의 말씀 의도는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향한 예수님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바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9,14)라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으며,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9,16,17)라고 답변하신 그 근저에는 요한의 제자들과 유대인들이 ‘새 천 조각이며 새 포도주인 당신 자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음을 빗대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꿰맨다면 그 헌 옷이 새 천 조각에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가 그 가죽 부대를 터뜨려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된다, 는 것도 같은 논리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새로운 내용물은 새로운 용기에 담아야 한다는 것. 복음을 율법의 그릇에 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는 말씀을 통해서 옛 가치가 아니라 새 가치를 담아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지금껏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의 당연하지 않음이고 당연하지 않는 것의 당연함이 지금은 바로 정답이고, 당연한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려고 하는 사람이나 헌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려는 사람은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옛사람이며 고지식한 사람입니다. 사실 새 옷엔 새 천 조각이, 새 부대에는 새 포도주가 어울리고 적당합니다. 그러나 이토록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자신을 비우고, 죽어야 만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란 새 옷을 입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새로운 존재 의식과 행동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때만이 자기 몸과 영혼 안에 새 포도주인 주님을 온전히 모실 수가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9,17)
*성녀 마리아 고레티 동정 순교자 축일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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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 잔칫날에 어찌 단식이라니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id=2098929&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40705.19:59 ㅣNo.173955
혼인 잔치가 열렸고 구원자 예수님께서 신랑으로 잔칫상에 오시어, 이미 새로운 시대가 열려있다. 만일 그분을 제대로 알아보았더라면, 그들은 하늘나라의 잔칫상의 손님으로 그 잔치의 즐거움을 누렸을 게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그 새로운 시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늘 세속적인 율법 해석과 비난의 시각으로 살았기에. 반대로 이미 하느님나라를 사는 이들도 많이 있다. 늘 희망차게 때때로 닥치는 난관에도 좌절하지 않고 언제나 하느님 편에서만 사는 이들이다.
다 만사형통인 것 같지만, 어쩌면 그들은 오로지 하느님 뜻으로 삶을 산다.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행위일 게다. 사실 유다인들의 율법에는 단식이 엄격히 규정되었다. 단식은 그네들의 고유 전통이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단식의 이유에 앞서, 보여 주기식인 단식 그 자체에만 매달렸다. 목적 없는 단식은 오히려 육체를 괴롭히는 고통과 전혀 다를 바 없다. 단식은 주님께로 다가가는 수단이다. 절제를 통하여 오직 마음을 다잡아 그분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니까.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꼭 올 것이다. 그러면 그때 그들도 단식하리라.”’ 그렇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날은 언제나 흥에 겨운 축제 기간이다.
성체를 모시는 날은 그야말로 잔칫날, 하지만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단다. 삶이 늘 축제가 아니란다. 믿음이 흔들리고 신앙생활이 힘겨워질 때는 절제를 해서라도 내 감정, 욕망을 다듬어 시선을 그분께로 고정시켜야 하니까. 그러면 주님은 다시 힘을 주시리라. 단식은 언제나 은총이니 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자신이 신랑이기에 잔칫날에 단식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에게 구원을 베푸시고자 우리에게 오셨다. 잔치에 초대된 우리는 그분 사랑과 그분께서 사랑하는 이를 찾아 잔칫상 차려놓고, 덩실덩실 춤추며 찬미의 노래 부르자. 이같이 기쁜 날 어디 아니 놀 수 있으랴! 사실 예수님께 단식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분께서 참으로 원하셨던 것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감지하고 그 초대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또한 편한 것만 찾는 믿음이 아닌,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겠다는 굳센 결심을 간직할 때만이, 온전한 삶을 누린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단식은 이러한 관점에서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또한 단식과 혼인 잔치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헌 옷에다 새 천 조각을 대어 꿰매는 것만큼 어색하다. 단식은 하느님과 새 관계를 이루기를 바라는 회개의 수단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들은 곧 신랑을 빼앗길 게고, 그때에 제자들은 단식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새로운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길 것이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의 백성이 슬퍼하듯이 그렇게 슬퍼할 필요는 없을 게다. 사실 신약의 백성은 자의 반 타의 반 비록 신랑을 빼앗겼지만, 그 신랑을 곧 되돌려 받을 것이리라. 아니 그때부터 신랑과 영원히 함께 살리라. 그렇게 다시는 단식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배불리 먹고 마시는 그런 시대를 살아갈 게다. 그러니 보여주는 단식을 굳이 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예수님은 바로 혼인 잔치의 신랑이시다. 그를 위해 잔칫집에 어울리게 흥겹게 풍악 울리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 좋은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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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헌 옷”과 “헌 가죽 부대”의 공통점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당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변화도 새로움도 없이 언제나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신앙생활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구원의 길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으로 느껴지게 합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가장 작은 이’와 나누라는 말씀, 용서하여야 한다는 말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 구원을 얻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 앞에서 때때로 주저앉아 버립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말씀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새 포도주”가 되어 “헌 가죽 부대”인 내 삶을 터뜨려 버린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다음에요.' '예수님, 이 말씀은 저에게 너무 어렵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결코 실천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하느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런 마음이 자주 든다면, 그 믿음은 이미 “헌 옷”과 “헌 가죽 부대”가 되어 버렸을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되돌아볼 때, 어느새 기도하는 삶이 사라져 버렸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고해성사를 한 지 한참 지났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세례 때 예수님을 새 옷으로 우리 모두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입고 있는 예수님이라는 옷이 다시 빛날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이 새 부대가 되어 하느님의 구원을 담아낼 수 있도록, 고해성사를 준비하며 기도하는 삶을 다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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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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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그것을 알게 되어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다리시는 때는
십자가 위에서 수난 당하시는 때임을
우리는 요한 복음의 다른 구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수난의 때이며 동시에
영광의 때임을 또한 말씀하십니다.
수난의 때라는 관점에서 그 때는
아직 멀리 있습니다.
요한 복음의 수난기가
18장, 19장에 있다고 본다면
우리는 아직 2장에 있습니다.
하지만 영광의 때라는 관점에서 그 때는
이미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신성이 드러나는 것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우선 요한 복음 앞부분에 나타나는
7가지 표징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십니다.
그렇지만 이것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1장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도
예수님을 메시아 또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분의 정체성을 알아보았습니다.
만남 안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보았기에
그것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육화를 통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은
그렇게 당신을 드러내신 것은
육화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육화를 요한 복음은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 표현은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의 부탁으로 나타납니다.
육화하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 사랑에 의지하여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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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록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한 아이의 출생이 과거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었는데, 저출산 시대인 요즘은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을 주민 전체가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다들 아이 얼굴 구경하러 가고, 마을 입구에는 축하 플래카드까지 내걸립니다.
사실 이게 정상인데, 그동안 우리는 비정상이 정상이 시대를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청춘 남녀들이 결혼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시대를 살다 보니, 결혼식이 거행되고,
주님 안에 한 커플이 탄생하는 것이 엄청난 일로 여겨집니다.
요즘 우리 모두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결혼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혼인이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고, 두 가문이 만나고,
두 가치관과 두 세상이 만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혼자 살아왔는데, 이제는 함께 걸어줄 동반자가 생긴 것입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할 평생 동지가 생겼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기쁨인지 모릅니다.
이토록 기쁨 충만한 혼인 잔칫날에 어두운 표정으로 인상 쓰고 있다면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일일 것입니다.
잘 차려진 축하연에 단식한다며 숟가락조차 들지 않고 우울하게 앉아있다면 그것보다 더 꼴불견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혼인 잔치의 가장 기본적인 분위기는 축제입니다.
함께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며 축제를 즐기고 만끽하는 것은 혼인 당사자 입장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딱 마음에 드는 짝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우리를 위해,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해 세상 멋진 신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그분과 이 세상, 그분과 그분의 신부인 교회, 그분과 우리 죄인의 혼인을 의미하는 대 사건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매일 새롭게 결합되고 한 몸이 됩니다.
매일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 우리 사이의 혼인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세례 성사를 통해 주님과 혼인한 우리는 매일의 성찬례를 통해 그 혼인을 갱신한다니, 이 보다 더 큰 은총과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따라서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하루 하루는 매일이 기쁨 충만한 축제여야 마땅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의 이 지상 순례 여정이 비록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매일 주님과 혼인하고, 그 혼인을 갱신하는 우리들이니, 얼굴을 활짝 펴고,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축제를 만끽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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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유다인들에게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 자주 단식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별로 단식하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4절) 묻는다. 예수께서는 결혼식을 예로 들어 설명하신다. 그들의 결혼은 집에 있으면서 일주일 동안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기쁨의 축제를 지냈다. 이때에는 모든 율법의 의무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즐길 수 있었다. 그때에는 단식의 의무에서도 해방된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신랑에, 제자들은 신랑의 친한 친구들로 비유하신다. 그러한 잔치에서 슬퍼하며 단식할 수 없다. 그때는 단식할 때가 아니고 즐기는 때이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을 빼앗기고 슬퍼하는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기고 난 후 단식을 하게 된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영광을 입으시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시고 나서 제자들은 단식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요 잔치이다. 주님과 함께 있는데 슬픔과 어두움이 있을 수 없다. 주님을 모시고 항상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하며, 내 잘못으로 주님을 모시지 못했을 때는 우리는 기도하고 단식하며 자선을 베풂으로써, 주님을 다시 모셔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에 매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16-17절). 수축이 강한 새 천을 찢어서 헌 옷을 깁는 사람도 없지만, 새 포도주도 발효가 심하므로 수축 작용이 거의 없는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의 고정화된 나 자신의 틀인, 헌 옷이나, 낡은 가죽 부대를 버려야 한다. 내 마음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모두 복음을 새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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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쁜 놈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나쁜 놈’은 ‘나뿐인 놈’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나쁜 사람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요?
나쁜 사람은 누구도 그 사람을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을 만큼 사랑해주지 않아서 생깁니다.
누군가를 위해 살 대상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약에 중독되어 3번 죽을 뻔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어머니만은 그를 믿어주었습니다.
못된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어머니는 믿어주었습니다.
술과 마약을 하고 새벽에 들어올 때도 어머니는 깨어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대화 좀 하자고 할 때 마크는 짜증을 내고 방문을 꽝 닫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믿어준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자신과 대화 한 번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어머니가 믿어준 대로 나쁜 친구들을 끊고 술과 마약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최고의 프로레슬러가 되었습니다.
이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일본에서 경기를 마치고 새벽에 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가 내리는 거리를 뛰어나가 울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돌아가신 어머니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일어나요. 엄마가 저의 영웅이에요.
저의 모든 것, 제가 되길 원하는 모든 것은 다 엄마를 위해서였어요.
저를 믿어준 건 오직 엄마뿐이었어요.”
그리고 청년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진짜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지금은 청년들을 위해 전 세계 강연을 하러 다니는 전직 레슬러 ‘마크 메로’(marc mero)의 이야기입니다.
어린이들을 생각해봅시다. 어린이들은 누구를 위해 살까요? 보통은 부모를 위해 삽니다.
부모를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따라서 부모가 나쁜 사람이 아닌 이상 부모 덕택으로 아이들은 어느 정도 나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사랑을 제대로 주지 않을 때는 아이들은 부모에게 원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 살거나 그것도 안 되면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나쁜 아이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이들을 잡아줄 수 있는 나이는 밥을 차려줄 때까지만 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때 부모를 위해 살아야 할 이유가 줄어듭니다.
이때 자신을 잡아줄 새로운 부모님, 즉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자동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나쁜 놈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살아도 대부분 그 이웃들에게 이용당하고 상처받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하느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영원한 아기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힘들 때 의지할 신을 찾습니다.
찾아서 그 신을 위해 살면 다행이지만 찾지 못하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단식은 좋은 것입니다.
자기를 절제하면 덜 나쁜 사람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단식하면서도 그 단식이 자기 자신을 위할 때는 그 사람이 나쁜 놈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단식을 하더라도 당신을 위해 하라고 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같은 단식이라도 자신을 존재하게 해 준 하느님을 위해 한다면 그것이 좋은 것이나, 그 단식만의 가치 때문에 한다면 결국 그것도 자기 영광을 위해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비록 구약에 있었던 가르침과
다르지 않으나 새로운 가르침인 이유는 그 모든 율법을 당신을 위해 지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절로 나쁜 놈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특정한 날을 중시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중시하는 것이고,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려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가려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6-9)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합니다. 자크 라캉이란 학자가 한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살게 창조되었습니다.
성자께서 성부를 위해 사신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도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살라고 하시는 이유는 당신이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나쁜 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 때 나쁜 놈이 됩니다.
이는 부모가 아이들이 비뚤어지지 않게 하려고
아이들이 자신에게 순종하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나쁜 놈이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우리 하는 모든 일이 주님께 영광이 되려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야 나쁜 놈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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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입니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4-17)”
1)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이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메시아가 이미 와 있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은 하면 안 된다.” 라는 뜻입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고 슬퍼하는 단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실천하는 단식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단식입니다.
2) ‘새 옷’과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등을 뜻합니다.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바리사이들의 규정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는, “헌 옷을 꿰매려고 새 옷을 조각내지 마라.”입니다.
16절의 표현만 보면, 헌 옷이 찢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 같은 표현인데, 예수님 말씀의 뜻은 ‘헌 옷’을 잘 보존하라는 것이 아니라, ‘헌 옷’은 그냥 버리라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도 같은 뜻입니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라는 말씀 때문에,
‘헌 가죽 부대’를 잘 보존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헌 가죽 부대’는 그냥 버리고, ‘새 포도주’를 잘 보존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구약은 버리고 신약만 잘 보존하여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은 신약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구약의 율법들을 실천하는 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구약성경과 구약의 율법들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이 마음대로 만들어 놓은 복잡한 규정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규정들을 모두 무시하셨고,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3) 예수님의 가르침은 영원히 ‘새 옷’이고, ‘새 포도주’입니다.
그렇지만 만일에, 바리사이들 같은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킨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겉으로만 지킨다면, 또는 ‘의무감’으로만 지킨다면, 그것은 ‘새 옷’을 ‘헌 옷’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되고,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신앙생활은 의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의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이어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천을 통해서 참된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얻기 때문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지금 신앙생활에 기쁨은 없고 부담감만 있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다는 표지가 됩니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성직자들에게 있습니다.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또 신자들의 여러 가지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지 않느냐고 야단만 치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쁨을 빼앗는 일이 될 뿐입니다.
남들은 다 쉽게 하는 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못하는’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신자들의 사정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
그것은 ‘목자’들의 임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여기서 ‘먹고 마시는 일’이라는 말은, 음식 문제에 관한 유대인들의 규정들을 가리키는데, 넓은 뜻으로는 유대인들의 잡다하고 복잡한 규정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의 뜻은, “규정들만 잘 지킨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들어간다.”입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치유와 화해의 기쁨을 말해야 합니다.
사실 의무감으로 보는 고해성사는 회개도 아니고,
그것으로는 치유와 화해의 은총을 얻지도 못합니다.
판공 때에 의무적으로, 억지로 고해성사를 보면서,
점점 더 고해성사가 부담스러워지고, 그래서 고해성사를 기피하게 되는 것은, 성직자들과 지도자들의 잘못입니다.
단식재, 금육재, 여러 전례들과 기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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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그분의 제자들을 질책하듯 묻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자신들은 단식을 이렇게나 많이 하는 열심한 신앙인들이라는 자부심이, 그리고 그런 자부심으로 자기들보다 열심하지 못한 다른이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교만함이 묻어나는 질문입니다. 자기들이 단식을 해보니 너무 좋아서 다른 이들도 그 좋은 길에 초대하는게 아니라, 우리도 이만큼 하니 너희도 하라는 식으로 일종의 ‘강요’를 하고 있는 셈이지요. 자기들이 하는 단식에서 뜻하던 바를 이루고 만족을 얻었다면, 그 참된 의미와 기쁨을 깨달았다면, 왜 너희들은 안하냐는 식으로 단죄하기보다, 이렇게 좋은 것이 있으니 함께 해보자고 초대했을텐데, 그러질 못하니 억울한 마음에 억지로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단식하는 횟수라는 기준을 통해 자기들이 더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있음을 드러내 과시하려는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처로운 모습입니다.
단식은 부족하고 약한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 더 깊이 일치하기 위한 종교적 방편입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도록 나 자신을 비우겠다는 마음가짐을 음식을 끊는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주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 때 그분께로 돌아가기 위해 하는 겁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의심하게 될 때, 그분의 존재와 함께 하심을 자꾸만 망각하게 될 때, 하느님 뜻에 따르는 삶이 의미없고 무가치하다고 여겨질 때, 그런 나로하여금 ‘첫 마음’을 회복하도록 영적인 ‘리셋’버튼을 누르는게 바로 단식인 것이지요.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삶과 행동으로 드러내 보여주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시는 동안은 단식할 게 아니라, 그분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축제에 참여하여 그 기쁨을 함께 누릴 때 입니다. 사람은 때와 장소를 잘 가려야 한다고 하지요. 남들은 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과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데, 나만 심각한 표정으로 가슴을 치며 그분의 부재에 대해 묵상한다면 주님께서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시는게 아니라,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안타깝게 바라보실 겁니다.
우리가 단식과 금육이라는 재계를 지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함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고통과 희생을, 내가 절약하고 모은 부분을 이웃과 나누는 자선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단식을 했는지 안했는지, 금육재를 지켰는지 안지켰는지의 결과에만 연연하며 스스로를 구약의 율법으로 옭아매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세상 종말의 순간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대에 섰을 때 금요일에 고기를 먹었다고 혼날까요? 아니면 기회될 때마다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은 안일하고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혼날까요? 그 답을 잘 알면서도 금요일에 고기를 먹지 않는데에만 신경쓴다면 내 신앙생활이라는 포도주를 구약의 낡은 율법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세상과 삶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을 하느님 중심으로, 복음 말씀을 기준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새로운 존재로 변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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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하나님의 회복의 시간을 소망하는 삶
<2024.7.6> 아침을 여는 묵상 (렘 29:1~14절)
❝하나님의 회복의 시간을 소망하는 삶❞
❚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며, 절망 중에서도 부르짖을 때 구원의 은총과 기쁨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는 길을 무엇입니까?
➲ 징계 속에서도 은혜를 바라며 순종해야 합니다(1~7절).
예루살렘에 있는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간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 때는 여고니야(여호야긴)와 왕후와 관리들 및 기술자들이 포로로 잡혀 간 이후였습니다(1~2절). 이 편지는 여호야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이들 편에 편지가 전달되었습니다(3절). 편지의 내용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으로 잡혀 간 자들에게 그곳에서 집을 짓고 텃밭을 일구며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라고 말씀하십니다(4~6절). 이는 예루살렘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심지어는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이 임하도록 기도하고, 그들이 살고 있는 성을 위해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성이 평안해야 그들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7절). 이러한 권고는 그들의 칠십 년 포로 생활이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한 권고로서 괜히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결코 중단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과 현실에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계속해서 징계에 대해 불평하고 반항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회복의 은혜를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확신하며 인생을 가꾸어 간다면 회복의 역사도 속히 임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내 자신뿐 아니라 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평안을 간구해야 합니다. 징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끊이지 않음을 믿고, 그 은혜를 바라며 순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 절망 속에서도 달콤한 유혹을 분별해야 합니다(8~9절).
바벨론의 유다 포로들은 그곳에서의 일상에 충실해야 할 뿐 아니라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그들의 꿈 이야기에도 귀 기울이지 말라고 명하십니다(8절). 그들의 말을 경청한다는 것은 곧 그들을 좇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받은 것처럼 거짓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9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미혹함으로써 결국은 파멸에 이르도록 잘못 이끄는 악한 자들입니다.
어려움을 겪고 살아갈 때 일수록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믿음이 흔들려 하나님보다 다른 의지할 것들을 찾아 분주해지지 않도록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인생의 절망을 겪는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약해있을 때, 스스로가 의지할 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분주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이 들려주는 기분 좋은 소리에 마음과 인생을 빼앗기는 불행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귀에 좋은 소리를 들려 주는 거짓된 자들과의 관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풍랑이 때로 배를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게 해 주듯이 우리가 겪는 고난은 속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절망 속에서도 달콤한 세상 사람들의 유혹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회복의 때를 소망중에 기다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10~14절).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해야 할 기간이 칠십 년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10절). 이것은 하나님이 확증하신 희망의 약속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바벨론에서 칠십 년 동안의 포로 생활에 처하게 하셨지만 그것은 그들을 멸망케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참 회개와 결단의 기회로 삼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로 인해 참된 평화와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11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어 주겠고, 온전한 마음으로 찾고, 찾으면 만나 주시겠다(12~13절)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은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것을 넘어서 사로잡혀 간 모든 곳에서 다시 돌아오는 회복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내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14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범죄하면 그 죄에 대해서는 엄히 징계하시면서도 백성 자체만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회개하면 다시 회복시키시고 은혜로 덧입혀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확증하신 희망의 약속만큼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약속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부르짖으며 간구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회복의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회복을 사모하는 사람이 받아들임으로써 그 회복은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수술대 위해 있는 환자가 전적으로 의사의 손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우리 자신들의 순종과 믿음의 간구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구하려는 마음과 부르짖고자 하는 간절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온 마음으로 구하고 또 구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만남으로 모든 시련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진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징계를 받는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끊이지 않음을 분명히 믿고, 신뢰하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원의 은총과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29:1~1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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