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어느 카페를 보다
엄마에 대한 느낌을 신경숙 작 " 엄마를 부탁해 " 에 버금 가는 감동을 주는 수기 같아 올려 봅니다
모든 분들 엄마에 대한 추억은 있을 겁니다
이분은 67세 인데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
대장님 너무 길다고 투덜 거랄 것 같네요
이분도 등산을 제일 좋아한대요 ㅎㅎㅎ
엄마를 만나고 돌아 나오는 들판 길에 서서
또 한 번 추모공원을 바라본다.
엄마는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계시는데
가슴을 에이는 이 슬픔은 어떻게 해야 하나
평생을 가난 속에서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살아내기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내색 않고 살아내기는 또 얼마나 힘드셨을까
노오란 은행잎이 우수수 바람에 날린다.
언제나 괜찮다. 괜찮다 하시던 엄마가
전화 속에서 작은 목소리로 배가 많이 아프시단다.
엄마가 아프다면 이건 보통 아픈 게 아님을 안다
한 달 쯤 되었고 약국에서 준 약을 먹어도 계속 아프단다.
“내가 갔을 때 왜 말 안했어”
한달음에 달려가서 엄마와 병원으로 향했다
방광염 이란다
이렇게 처방된 항생제로 엄마는 또 괜찮다며 얼마간을 더 견디셨다
전혀 차도가 없이 아픈 내색이 역역한 엄마를 119에 태우고 도착한 응급실에서는
아무래도 대장암이 의심스럽다며 조직검사 들어갔다고 기다리란다.
정신이 멍해진다.
방광염 이랬는데 -
아니야! 이건 아니야, 오진일거야
“엄마 방광염이 심해졌대 이참에 아주 입원해서 다 치료받고 나가자구”
근심이 가득한 엄마를 안심 시키며 병실에 입원 시키고 나니
머릿속에는 잡을 수도 없는 수많은 생각들이 아우성친다.
동생이 거창에서 올라왔고 그사이 입원준비를 위해 얼른 집엘 다녀왔다
남편이 엄마 수술과 병원생활에 대해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준다.
“내 걱정은 마.
당신이 쓰러지면 엄마 간호도 못해 마음 단단히 먹어“
- 고맙고 착한 사람 -
그때부터 엄마와 나의 시간이 합쳐진다.
<대장암 3기, 다른 장기로의 전이> 수술을 위한 준비가 며칠 동안 진행된다.
86세라는 연세 때문에 수술을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엄마! 방광염은 간단한 수술이니 겁내지마 금방 끝 날거야
엄마! 기도해 알았지?
불안한 내면과는 달리 차분한 표정으로 엄마는 수술실로 들어 가셨다
잘 이겨내실까 이게 마지막은 아닐까 온갖 방정맞은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교통사고와 뇌경색을 잘 이겨내신 후 병원도 자주 찾으시며 나름 몸 관리를
잘하신다고 생각 했는데
그런데 대장암 3기에 다른데도 전이가 되었단다.
살펴드리지 못한 자책감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여섯 시간이 지나고 삼십분이 더 지날 때쯤 모니터에 엄마 이름이 뜬다.
-중환자실로 이동 중-
집도한 의사가 부른다.
엄마가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깐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정신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다.
작은 몸에 연결된 수많은 주사 라인들, 피 주머니들, 입에 물려진 인공호흡기, 커다란 산소통, 콧속으로 들어간 굵은 줄, 수술부위에 주렁주렁 달린 주머니들, 계기판의 삐삐소리, 사지가 고정된 채 작은 숨을 할딱이며 엄마는 생사의 기로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눈도 못 뜨신다.
엄마! 엄마 나왔어!
딸의 음성에 아주 잠깐 반응을 보이신다.
“엄마 수술은 아주 잘됐어!
아무 걱정말고 이고비만 잘 견뎌내. 알았지?“
엄마 귀에 대고 몇 번이나 이 말을 넣어준다.
며칠 후 호흡이 약해지며 몸속에 산소량이 자꾸 떨어진다며 비상이 걸렸다.
기도삽관으로 강제 산소공급을 해야 한단다.
달리 방법이 없었고 엄마는 또다시 어려운 수술을 해야 했다.
“가지 마”
혼미한 정신으로 겨우 입술만 달싹 거리며 간절한 눈빛으로 딸을 바라본다.
왔다가 금새 사라지는 딸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아! 그 지옥 같던 중환자실의 한 달,
오롯이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는 엄마의 처절한 고통과 나의 안타까움이 눈물범벅이 되어 함께 머물던 날들이었다.
하루에 아침저녁 두 번의 면회시간
그동안 나는 인천에서 일산병원까지 그 소중한 20분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때는 그저 일반병실로 올라가는 게 소원이었고
그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던 기다림 속에
드디어 병실이송, 이 시간을 얼마나 가다렸던가?
이제부터는 모든 게 다 잘되는 줄 알았다
물, 미음, 죽, 순으로 이제 식사도 가능해진다
간식으로 딸기를 자주 드렸더니 이제는 눈만 뜨면 딸기를 찾는다.
그러나 이게 왠 일인가 엄마의 정신은 어디를 헤메고 있는지
창밖으로 보이는 얕은 산은 청와대 뒷산이고
집주소도 엄마 이름도 아무것도 모르신다.
그리고 쉴 새 없이 헤픈 웃음을 웃는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천정에 있다고 무서워 소리친다.
치매가 왔다고 쑤군거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일을 어쩌나!
늙고 쇠약한 몸에 힘든 수술을 겨우 이겨냈는데,
후유증으로 치매라는 그 무서운 병을 더 얻은 건 아닌지 눈앞이 캄캄 해진다
엄마 제발 정신 차려! 정신 놓으면 안 돼, 절대로!
치매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선망 이라는 의사의 말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말로만 들렸다
새파란 의사의 팔을 붙잡고 얼마나 울었던지 -
정신과 치료가 시작되고 호전과 악화가 교차되면서 서서히 엄마의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 한다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병원생활 두 달 열흘 만에 드디어 퇴원.
그동안 뭘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핼쓱하고 꺼칠해진 남편이
말끔히 치워놓은 방에 외손자들이 사 보낸 침대와 커다란 TV가 고맙다
아이구 우리 손자들이 보냈구나. 고맙다 얘.
그렇게 우리 집에서 엄마의 생활이 시작 되었다
병원에서 보다 아마 3배는 더 힘들다
배변주머니도 자주 살펴 드려야하고 소변도 때맞춰 처리해야 한다.
식사 세수 목욕 등 모든 케어가 침대에서 이루어지려니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고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너무나 모자란다.
체중이 5키로가 줄고 계속 되는 수면 부족으로 피로가 쌓여 쓰러질 것만 같다
두 번의 몸살이 찾아왔으나 남편의 많은 도움으로 겨우겨우 넘긴다.
67세라는 나이가 자꾸만 나를 주저앉힌다.
“여보 나한테 미안한 생각 조금도 하지 마
장모님은 끝까지 내가 모실 생각하고 있으니 당신 몸도 좀 챙기면서 엄마 간호해“
싫은 내색 한번 없는 고마운 사람 이다
뒤늦게 재혼해서 틈나는 대로 여행도 다니고 등산도 다니면서
나름 행복하게 잘사는 딸을 보며 그리도 좋아 하시던 엄마
이제는 병든 몸으로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이다.
“엄마 괜찮아!
우리가 엄마 모시려고 했는데 엄마가 마다했잖아“
아무리 잘해도 어찌 사위가 편하기만 했겠나.
어려운 자리에서 미안한 엄마의 표정이 안쓰럽다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으며 차츰 회복의 기미가 뚜렷해진다.
잠깐씩 앉아있던 엄마는 한발 한발 걷는 연습과 함께 식탁에 앉는 연습도 시작했다
그 무더웠던 올여름
유달리 더위를 못 참는 남편의 패션도 아래위로 한 개씩 더 추가되었고
매년 속초에서 보내던 여름휴가도 반납했다
엄마가 기르던 화초들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씩 일산 가서 물주고
일산병원 진료 다녀오고 신경과 정신과 안과 약 타러 가고
끝이 보이지 않는 일과의 연속에 몸이 바쁘다
한참 등산에 재미를 붙이는 중인데,
혼자 가는 안드레아 등산 준비를 할 때나
영상앨범 “산” 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마음한쪽이 허전 해진다
가질 수 없는 소중한 내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거창에서 동생이 올라 오던 날 엄마를 맡기고 광주 무등산으로 떠났다
오랜만의 등산이다
무등산 정상 차가운 안개의 바다에 마음이 울컥 해진다
그 후에도 몇 번 등산을 다녀왔다
내가 등산 다녀온 날은 엄마가 무척 좋아 하셨다
딸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얼마나 마음 쓰였을까
하루가 다르게 눈에 띄게 좋아 지신다
식사도 잘하신다.
아파트 주변 산책이 가능해지면서 동네도 한 바퀴 돌고
건너편 자유공원도 힘겹지만 내손을 꼭 잡고 쉬엄쉬엄 한 바퀴 돌아 오셨다
얼마 후 병원 진료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많이 좋아 지셨고
엄마집 에도 몇 번 둘러보고 왔다
병원의 정기검사도 이상 없단다.
엄마의 일상생활도 별 무리가 없다
화분에 물도 주시고 소복하게 올라오는 쑥갓도 솎아 주신다.
간식으로 챙겨드리는 과일을 맛있다며 잘도 드시던 엄마
평소에 딸기를 좋아 해서 떨어지지 않게 준비 해드렸고
또 부라보콘 을 그렇게 맛있게 잘 드시던 우리엄마 이제는 다 나으신 듯 했다
엄마의 회복은 여기까지 였는데 그때는 한계선임을 아무도 몰랐다
9월 어느 날인가 엄마가 식혜 좀 해라 하신다.
시원한 식혜를 아주 맛있게 드신다.
식혜 때문인가 식사량이 조금씩 줄어든다.
그걸 보충한다고 쌀을 많이 넣고 다시 한 번 식혜를 했다
아이고 맛있다 하시며 잘도 드신다.
식사량이 더 줄어든다.
소화가 잘 안되신다며 소화제를 찾으신다.
남편이 얼른 종합비타민을 사왔다 엄마가 아침마다 꼭꼭 챙겨 드신다.
배추 겉절이 좀 해라
고추 좀 삮혀라 먹고 싶다.
수소문 끝에 세실리아가 얼른 가져온 삼삼하게 삮힌 고추를 몇 끼 맛있게 잡수신다.
얼른 고추를 사다가 삭혀둔다
사위 생일을 기억하시고 십 만원이 든 봉투를 주시면서 최 서방 맛있는거 한번 사줘라 하신다.
며칠 후 추석 즈음에는 모처럼 많은 가족들이 엄마에게 인사를 왔다
그토록 엄마가 사랑했던 손녀 성미내외, 며느리, 친손자,
엄마가 남모르는 눈물로 키워주신 외손자들과 그들의 아이들, 손부들 ,
모두 운명처럼 할머니를 한번 씩 안아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웃는 얼굴로 돌아간다.
“할머니 11월에 애기 낳으면 데리고 또 올게” 성미가 돌아간다.
그래라 엄마가 아주 좋아 하셨는데 . . .
추석연휴에 근무하느라 못 온 아들이 추석이 지나서야 거창에서 올라왔다
하룻밤 엄마와 함께 자고 다음날 문을 나선다.
“엄마 얼굴 한 번 더 봐라 이제가면 또 못 볼지도 모르는데”
“아이구 참 못 보기는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아들이 문을 나선다.
“상희가 너무 딱하다”
아들의 사업실패는 주위에 깊은 상채기를 냈고 엄마의 기둥도 맥없이 쓰러졌다
엄마가 돌아누우신다.
아무리 죽을 만큼 힘들어도 마지막 보루는 가족이라는데 동생에게 남은 건 무엇일까
엄마가 점점 기운이 없다 이번에 검사 가면 잘 챙겨서 물어봐야지 이것저것 메모를 한다.
소화가 안 된다며 토했고 며칠 후 다시 토가 심해지며 초록색 액체를 토해내신다.
일산병원 정기검사를 이틀 앞두고 가까운 성모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검사결과는 너무나 허망했다
“다 전이가 되었어요. 수술하기도 위험하고 한번으로 끝나지 않을거 같아요”
“수술하다가 돌아가시면 어떡해요?”
“그러면 불행 중 다행 이지요”
뭐가 그렇게 다행인지 그 의사의 태연한 얼굴에 괜히 화가 난다
어떻게 손쓸 시간도 없이 이렇게 빨리 거짓말처럼 나빠 질수가 있단 말인가
언제부터 부터였나?
그래서 변이 줄고 가스만 계속 나왔었나?
나의 미련함을 수없이 자책하며 가슴을 친다.
위험하든 어쨌든 수술을 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제는 엄마에게 말해야만 한다.
엄마는 짐작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신다.
한번 수술 해본 엄마는 절대 수술은 또 안하신단다.
엄마도 나도 똑같이 중환자실을 떠올리고 있었으리라.
자꾸 집으로 가잔다.
주렁주렁 주사 줄에 매달려 병원에서 죽기 싫다고 집으로 가잔다
입원 사일 째 되는 날 퇴원해 집으로 왔다
다시 아들이 올라와 밤새 엄마를 돌본다.
더 있을 수도 없어 떠나는 아들에게 이제 마지막이다 하시며 아들을 보낸다.
축 처진 어깨위로 고개를 숙인 채 아들이 떠난다. 내려가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으리라
이제부터 정말 힘든 시간이 시작된다.
24시간 엄마 옆에서 가슴을 문지르고 등을 쓸어주며 잠들면 엄마를 꼭 안고 눈물을 삼켰다
눈을 뜨면 시원한 사이다만 찾으신다.
속이 답답한가 보다
칠성사이다! 할 때 마다 희미하게 씩 웃는다.
죽음에 대한 두려운 공포는 어디다 꼭꼭 감추고 저리도 초연하신지
딸 힘들까봐 얼마나 속으로 아픔을 참았을까
그 먼 길을 엄마가 가실 길이라 정해놓고
이게 최선이라고 엄마를 재촉 한건 아닌지 가슴이 찢어진다
이렇게 짧은 시간인줄 알았다면 더좀 잘해드릴걸 뒤늦은 후회가 가슴을 친다.
그 힘든 시간 속에서 나도 잊고 있는 내 생일을 기억하고 미리 마련해둔 봉투를 가리키신다.
이런 엄마에게 나는 어떤 딸이었나.
공부 잘하고 똑똑한 내 새끼들
엄마 품안에서 우리는 엄마의 자존심 이었건만 학교를 떠나 세상과 섞이면서 자식들이
겪어 내야하는 삶이 너무나 안타까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눈물로 기도 하셨던가.
고비때 마다 자식에게 아낌없이 다 내어놓으시고
정작 자신은 지독한 검소함으로 노후의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불쌍한 우리엄마,
아! 우리는 불효한 자식들 이었다
자그마한 엄마의 몸 위로 죽음의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신 채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놓고
시월 어느 날 엄마는 그린 듯이 곱게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엄마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엄마 미안해.
“아니야”
이 한마디 작은 소리를 남기고
조그만 두 손을 내손에 맡긴 채 그렇게 조용히 떠나가셨다
엄마! 사랑해
더 잘해드릴걸,
뜨거운 후회가 눈물이 되어 흐른다.
다시 추모공원 쪽을 돌아다본다.
엄마! 열 달 동안 엄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해
노오란 은행잎이 또 한 번 우수수 바람에 날린다.
첫댓글 삼국지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