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도미에(1808년 2월 26일 ~ 1879년)
프랑스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어려서 유리 직공인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여, 파리에서 철두철미하게 서민의 삶을 살았다. 회화를 거의 독학으로 익히는 동안에, 1829년부터 친구로부터 석판화의 기법을 익혔고 그것으로 생계를 삼았다. 1830년부터 잡지에 정치 만화를 발표하여 1932년에는 한때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으나, 이후 40여 년 간에 걸쳐 날카로운 풍자와 따뜻한 인간애가 담긴 걸작을 많이 남겼다. 만년에는 시력을 잃고 고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대표작으로 석판화 〈로베르 마케르〉, 유채화 〈3등 열차〉등이 있다.
신문-잡지에 연재된 풍자화는 막대한 양이다. 후반은 유화(油畵)로 옮겼다. 대작은 없지만 <삼등열차>나 <돈키호테>의 연작(連作)과 그밖의 것을 그렸다. 이들 회화는 생전에는 아무런 존경도 받지 못했다. 깊은 음영(陰影) 속에 색채는 열(熱)을 띠고, 간결하면서도 진실이 넘치고 있다. 최만년(最晩年)에는 장님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쇠퇴하여 교외인 마르몽드아에서 살다가 생애를 마쳤다.
* 밀레(Jean Franiois Millet : 1814-1875)
프랑스의 화가.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 출생.
1833~36년 셰르부르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루브르미술관에서 푸생, 르냉, 샤르댕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48년 살롱에 출품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은 그 후 농민생활을 그리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49년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지와 맺어져 있는 농민생활의 모습과 주변의 자연풍경을 그렸다.
이 시절에 루소, 코로 등과 친교를 맺고, 빈곤과 싸우면서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는 오히려 농민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 그런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상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만년에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아 화가로서의 영광을 누렸으며, 68년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의 일화들을 보면, 시골의 가난한 청년이 파리에 와서, 살롱전에서도 빛을 보지 못하여, 아주아주 어렵게 살았다. 화랑에서 누드를 그리자는 유혹을 받고, 몇 점 그렸다.(전해오는 그림을 보면 그렇게 야한 그림은 아니다.) 전시장에서 자기의 그림 앞에 선 사람이 ‘밀레라는 화가는 벌거벗은 여자나 그리는 화가이네’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묵었다고 한다. 이후로는 다시 누드화를 그리지 않았다.
이때 밀레가 부양해야 할 아이가 9명이나 되었다.
팔리지 않는 밀레의 그림을, 데오도르 루소(바르비종의 대표적인 화가)가 미국인이 사겠다면서 자기가 사 주었다. 밀레의 그림을 밀레의 눈에 뜨이지 않게 감추어두려고 루소가 애를 먹었다고 한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고 ---
만종 이야기
밀레가 돈이 없어 개고생을 하자 화상이 선불 1000프랑을 건네고 몇 점의 그림을 받기로 하였다.(밀레를 도와주는 마음에서 였다고 한다.) 이때 다른 그림과 함께 만종을 넘겼다.
화상은 이 그림을 팔았다. 몇 백 프랑에 팔려나가서 주인이 바뀌면서 가격이 조금씩 올랐다. 마침내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의 미국인은 유럽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가서 돈을 번 부자가 많았다. 그들은 유럽의 풍경화 등등을 많이 구입하였다. 농촌 풍경 그림이 그들의 향수심리를 자극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1889년에는 만종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이때 경매장에 30만 프랑으로 나왔다. 프랑스는 국가의 체면 문제라면서 모금 운동을 하여 50만 프랑에 낙찰받았으나. 그 돈을 맞추지 못하여, 그림을 구입하지 못 하였다.
다시 가격이 오르고, 국가도 지원했으나 세금으로는 무한정 지원할 수도 없고, 이때 돈 많은(백화점 주인이라고 함) 프랑스인이 80만 프랑에 사서 루불에 기증한다. 지금은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옆의 짐차 안은 어린이의 시신이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기도의 의미가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