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77
2월24일[사순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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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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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0ALSVu-UmAI
[서울대교구 박형준 라파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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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원수 사랑이 실현되는 곳에 놀라운 기적과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원수(怨讐)란 말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원수란 한 마디로 적(敵)을 의미합니다. 내게 치명적인 손해를 끼쳐 사무치는 원한을 맺히게 한 사람입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생각해 보니 이런 사람들도 원수에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내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 견딜 수 없는 수모를 준 사람, 그래서 대면하기 껄끄러운 사람, 같은 식탁에 앉아 밥 먹기 싫은 사람, 자다가도 얼굴을 떠올리면 심장이 벌렁벌렁 뛰게 만드는 그 사람, 내 인생에 매운 고춧가루를 뿌린 사람, 틈만 나면 내 인생길을 가로막는 사람...
결국 원수는 멀리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 살아가는 존재들이군요. 원수는 어느 다른 하늘 아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내 가정 안에, 내 직장 안에, 내 공동체 안에,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버젓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하신 주님께서 바로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상종하기 싫은 사람이라고 안면 몰수하지 말고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꼴 보기 싫은 그 인간도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예수님의 당부 말씀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해도 해도 너무한 요구를 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건 뭐 속도 밸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말씀 아닌가요? 그저 바보 멍청이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정말이지 인간의 힘,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듯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아무나 실천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나를 탈피할 때, 나라는 질그릇 안에 들어있는 과거의 자아를 완전히 비워낼 때 실천 가능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하느님화될 때, 인간적 관점을 버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하며 죄인인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자취’가 남아있고 ‘하느님의 인호’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비참하지만, 하느님께서 위대하시기에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인간의 비루함과 옹색함을 벗어나 광활한 사랑의 평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원수조차 사랑할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진짜 원수는 사람이 아니라 죄와 사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늘 우리 곁은 졸졸 따라다니는 평생 웬수 같은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한 세상 열심히 살아가다보니 어느 순간 그 ‘웬수’가 다르게 보일 때가 있더군요. 그 순간은 그의 내면에 아로새겨진 깊은 상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앞에서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그의 쓸쓸하고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입니다. 그의 말못할 사정을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뒤돌아서서 흘리는 그의 눈물을 바라보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나도 나약한 한 인간이지만 그도 나약한 한 인간이로구나, 그때 내게 준 괴로움이 좀 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표현이었구나, 좀 더 사랑해달라는 손짓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더군요.
원수에 대한 사랑, 참으로 어려워 보이는 일이지만 그 사랑이 실현되는 곳에 놀라운 기적과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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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
외줄타기를 하는 한 서커스 단원이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다 강철 줄을 걸어 놓고 거기서 줄타기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손에 땀을 쥐면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열심히 이리 건너오고 저리 건너가고 하면서 시종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사람들 앞으로 와서 말했습니다.
“누가 내 어깨 위에 올라타겠습니까? 내가 한 사람을 어깨에 메고 건너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볼 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꼬마 소년이 “저요!”하고 손을 들면서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소년을 어깨에 태우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더 많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 겁나지 않든?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지?”
그 소년이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분이 제 아버지거든요!”
자녀는 부모를 믿습니다. 그러니 부모님과 함께라면 불가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시키는 것이라면 분명 가능하니까 시키는 것이고 불가능하더라도 도와주실 것이니까 시키는 것임을 압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완전해지는 길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원수가 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분명 나는 그를 원수로 여기기 때문에 나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유일한 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그것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나는 못 해도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분 등에 타기만 하면 됩니다. 이를 위해 그분은 성체성혈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분께 맡기지 않으면 내 안에 그분이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한 여행자가 관광 중에 몸의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수영을 전혀 할 줄 몰랐던 그는 물속에 빠져 죽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팔을 흔들어댔습니다. 그러나 곧 지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그는 ‘이제 난 죽었구나!’ 하며 자포자기했습니다.
그러자 물이 그를 세게 받쳐 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몸이 물에 둥둥 떴습니다. 그가 빠진 바다는 사해였던 것입니다. 사해는 다른 물과 달리 염분과 다른 광물들이 많이 섞여 있어 물에 가만히 몸을 맡기고 누워 있기만 하면 둥둥 뜨게 됩니다.
우리 안의 예수님은 마치 사해와 같습니다. 사해에 있으면서도 빠져 죽을 걱정을 한다면 자신이 사해에 있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하여 어쩔 줄 모르는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그냥 맡기면 됩니다. 이것이 성체성혈을 먹고 마시는 신자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의 기분을 상상해봅시다. 하느님을 잉태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신 데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못 해도 우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믿음으로 우리는 진정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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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학생 때까지 저는 산수를 좋아했습니다. 구구단을 외우고, 삼각형과 사각형의 내각 합을 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수에는 정수와 유리수 그리고 무리수까지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산수는 수학이 되었습니다. 수를 계산하는 것에서 수에 대한 학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소위 말하는 ‘수포자’가 되었습니다. 수학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물론 계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학교의 방침은 시험 때면 학년을 바꾸어서 앉게 하였습니다. 제 옆에는 한 학년이 높은 2학년 형이 같이 시험을 보았습니다. 과목도 달랐습니다. 저는 수학 시험이었고, 형은 영어 시험을 보았습니다. 원천적으로 ‘커닝’을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2학년 형이 영어 문제 중의 하나를 제게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다행히 아는 문제라서 알려 주었습니다. 감독 선생님이 그것을 보았고, 저희 둘은 따로 선생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답해야 했습니다. 다니엘이 못된 일을 하려 했던 두 노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로 물어보았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사실대로 이야기했고, 선생님은 제 수학 답안지 중에 한 문제를 감점 처리하면서 문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수학이 어려워졌습니다. 미분과 적분도 어려웠고, 확률도 어려웠습니다. 커닝 사건만 없었다면 어쩌면 저는 계속 수학을 좋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가 더 쉽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 중에는 ‘예포자’들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신앙인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신앙을 보여주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날, 성당 창문을 닫고, 하수구의 오물을 걷어내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가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명절이 되면 어르신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는 분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가 피정을 가면 매일 성당에 나오셔서 마당을 치우고, 수녀님을 도와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화가 치밀어 싸움에 이르려는 순간에 본당 신부의 말을 생각하며 용서했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마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살기 위한 길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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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43-48: 하느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게 되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원수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단지 그를 미워하기만 해도, 우리는 우리의 영에 더 큰 해를 입힌다. 우리가 원수를 미워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다. 미움이 우리를 더 휘저어 놓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 사람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주님의 법은 모든 법을 뛰어넘는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이르시지 않고 기도하라고도 하신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그런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신다.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주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45절) 아드님을 통해 자녀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해와 비는 바로 당신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 가르침을 따라 당신의 자녀가 되고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절) 친구를 사랑하는 삶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한다. 이때 그는 큰 보물을 지닌 사람이 된다. 자기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기 때문이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절)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복음적 사랑의 법으로 인간적 사랑을 넘어서길 바라신다. 이렇게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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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복음은 어제에 이어서 율법의 의로움을 넘어서시고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여 줍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레위 19,18 참조) 계명은 이웃의 경계를 원수와 악인까지 넓혀서 사랑하라고 이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도 당신께 해를 끼친 이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셨습니다.(루카 23,34 참조) 하느님께서 악인과 선인, 의로운 이와 불의한 자를 똑같이 돌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와 악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들의 악행과 죄를 용인하고 불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죄악을 멈추게 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악인들이 죄악을 저지르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자녀가 잘못하였을 때 부모는 따끔하게 혼내고, 잘못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지 알려 주며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게 합니다. 이것이 정말 올바른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악인들을 회개로 이끌고, 그들이 저지른 죄를 일깨워 주고, 죄의 결과에 대해서는 함께 용서를 구하고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맡겨 드리는 것이 악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악행에 마음 아파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일은 그들의 회개입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 그들의 죄를 멈추게 하는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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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나의 이웃’입니다. 따라서 원수는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저자가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도저히 저자를 이웃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저자는 나의 원수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원수 같은 사람에게도 이웃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저자를 용서할 수가 없다. 용서를 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려고 노력해도 용서가 안 된다. 사랑은 더욱더 할 수가 없다.”라고 하소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사랑 실천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느님의 힘’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경우에는 기도해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7-21)
이 말을 조금 쉽게 풀이하면, “그 나쁜 놈을 심판하는 일은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여러분은 자비만 실천하십시오.”입니다.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직접 복수하려고 나섰다가는, 나도 그 나쁜 놈과 똑같은 나쁜 사람이 될 것이고, 그러면 그 나쁜 놈과 내가 함께 심판을 받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나는 자비만 실천하는 것은, 사실 나 자신을 위한 일, 즉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이웃 사랑 실천에 관한 비유이기도 하고,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일에 관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0.33-35)
그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대방을 원수로 생각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그 사람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상대방이 원수 같은 유대인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강도를 당해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이 되라는 계명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 사랑 외에 다른 것은 일체 생각하지 않고 사랑을 주는 일만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여기서 ‘악인’과 ‘불의한 이’는 ‘그들’만이 아니라 ‘나’도 포함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는 악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악인들을 ‘그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원수’만 생각하고, 내가 누군가의 원수일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도, 또는 부정하는 것도,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왜 항상 의인 입장에서만, 또 피해자 입장에서만 생각하는가? 자기는 한 번도 악인이었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악인이 될 가능성도 없다고, 하느님 앞에서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은 정말로 실천하기 어려운 계명이라고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누군가는 원수 같은 나에게 그 어려운 사랑을 이미 실천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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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어떻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악인마저도 구원되기를 바라시기에, 옳은 이에게나 옳지 않은 이에게나 골고루 햇빛을 비추십니다. 의로운 이나 불의한 이나 모두가 당신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미워하거나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기란 어렵기만 합니다. 따라서 먼저 내가 부족한 존재임을 깨우쳐야 합니다. 내가 부족하기에 신앙생활을 통해 더 완전해지려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위해 누군가가 기도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나 역시 부족한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당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이는 대가를 바라는 행위가 아닙니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은 원수나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에 힘입어 그들의 마음속에 박혀 있는 악의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서서히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느님께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추구하는 이 사회에서, 오히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랑을 넓혀 나갈 때, 오늘날 확산하고 있는 죽음과 파괴의 문화는 점차 사랑과 생명의 문화로 변화되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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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상선벌악(賞善罰惡). 선한 이는 상을 받고 악한 이는 벌을 받는다는 뜻으로 가톨릭의 네 가지 기본 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지니지 않은 이들에게도 당연한 내용이지만 성경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느님의 다른 모습도 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왜 모든 이를 똑같이 대하시냐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악인이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기다림은 악인에게 자비를 체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하지 않는 이들도 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을 닮으라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따라 거룩해지고,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따라 완전해지고자 노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실천의 바탕이자 행동의 기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냅니다.
한편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겁고 힘겹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깊이 체험한 이들에게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그 사랑과 자비를 손수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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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관한 율법을 소개하시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면서 이웃 사랑에 대한 율법 조항을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라는 조문은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조적으로 강조하고자 더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규정을 준수하여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정당성을 부정하지 않으시면서도, 이웃만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십니다.
사랑받을 대상은 원수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 해석에 따라 레위기 19장 18절의 경계를 넘어서, 차별 없는 사랑이 선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비교 대상으로 세리와 이방인을 말씀하십니다. 세리들은 자기들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이방인들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합니다. 세리들은 정직하지 못하였고, 로마인들과 협력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세리나 이방인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행동 기준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없으며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마태 5,45 참조) 제자들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방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세리나 이방인과 같은 이들의 행동이 아닌, 아버지에게서 행위 기준을 찾아 행동할 때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살아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5,48 참조)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담긴 ‘이웃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웃의 대상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한정하지 않으시고(레위 19,18 참조), 확대하여 설명하셨습니다.(루카 10,30-37 참조)
예수님의 사랑이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이듯이, 우리도 이웃 사랑의 대상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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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 48)
오늘 제 마음을 움직인 단어는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신26,16)에서 ‘오늘’이라는 단어입니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오늘, 시간이 흐르고 있는 지금, 주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우리가 지킴으로써 “당신은 우리의 하느님이 되시고, 우리는 당신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다.”(신 26,17.19)라고 확약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지나간 어제를 후회하며 살거나 오지 않은 내일을 염려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바로 오늘 여기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온전한 길을 걷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시 119,1-2 참조)
하느님 가르침의 본질과 핵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삶이 행복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참된 삶이란 바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5,44참조)만이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 여부가 바로 사랑이신 아빠 하느님의 완전하심에서 사랑의 완전한 사람이 되는 올바른 길이며 지름길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세속적인 사랑에 비해 그 깊이와 높이, 길이와 너비가 다른 차원의 사랑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속적인 사랑은 대상에 대해 차별적이며 제한적인 사랑이라면 완전한 사랑은 보편적이며 전체적인 사랑입니다. 사실 미움과 사랑의 차이는 단지 그 사람의 타인에 대한 마음의 시선과 마음가짐의 차이이며 거리라고 봅니다. 어떤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한 인격을 미움의 대상으로 제한시키고 배제하지만, 무조건적이거나 무제한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나에게 보낸 사람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며 감사하며 소중하게 여기고, 오늘 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행복한 오늘이 되고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미움이 아닌 사랑을 선택하며 살아갑시다. 오늘, 바로 지금 시간이 흐르는 이날이, 오늘이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길 바랍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모든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테 4,3)라고 권고하면서 우리 모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촉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아버지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아버지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혼자의 힘만으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교회헌장 40항」에서는, 『모든 완덕의 천상 스승이시며 모범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친히 거룩한 생활의 창시자요 완성자로서 당신의 모든 제자들에게 어떤 신분,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이든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활의 성화를 가르치셨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고 하시었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신분이나 계층이든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 생활의 완성과 완덕으로 부름받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일이지만, 특히 복음적 권고의 실천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은 이 거룩함의 빛나는 증거와 모범을 세상에 보여 주고 있으며 또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네.”(2코 6,2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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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현대의 대표적인 영성가로 ‘토마스 머튼’을 뽑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트라피스트 관상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글 쓰는 일에 회의를 느꼈고, 진정으로 기도하는 관상가로 살기 위해 수도원에 입회한 것입니다. 입회 후에 그에게 수도원 장상이 불러서 소임을 맡겼습니다. 어떤 일이었을까요? 바로 ‘글 쓰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만을 바라보는 관상가가 되고 싶은데, 다시 세속의 일을 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글 쓰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면 이곳에서 살 수 없다는 생각까지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갈등 속에서 어느 날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관상가가 되느냐, 작가라는 활동가가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 후 자기가 싫어하는 일도 기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산다’라는 사실만 바라봐야 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과 함께하려고 하며, 포기하려는 텅 빈 마음에 그 자리에 하느님을 초대합니다. 즉, 하느님과 한편이 되기에 기쁨과 희망 속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싫어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또 싫어하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싫어하는 일과 사람 속에서 우리는 평화와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고, 미움 등의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하게 됩니다. 바로 잊어버린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위해 산다’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박해자까지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원수를 대하게 되는 것, 나를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모두 싫은 일이고 피하고 싶은 자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갑자기 그 사람이 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 하느님을 위해 살려면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싫어하는 일과 사람은 계속해서 우리 앞으로 다가옵니다. 그때마다 싫다고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적대적인 마음으로 싸워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앞세워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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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완전한 사랑>
마태오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완전한 사랑>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언제든
멈추지 않는
늘 사랑
어디든
가두지 않는
너른 사랑
아무도
버리지 않는
모두 사랑
무엇도
바라지 않는
그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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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 약이다>
홍문택 신부님의 ‘사람을 상대할게 아니랍니다’라는 글입니다.
“누가 당신을 모함합니까? 누가 당신을 두고 빈정거립니까? 누가 당신을 험담하고 다닙니까? 누가 사사건건 당신을 반대합니까? 누가 당신을 미워합니까?
그래서 얼마나 속이 상하십니까? 얼마나 분하십니까? 얼마나 야속하십니까? 얼마나 그가 밉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미워하시는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악(惡)의 세력입니다.
그러니 그가 상대가 아닌 만큼 그를 미워하거나 그에 대한 미움과 실망을 부질없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싸움 상대가 악의 세력인 만큼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생각하십시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완전한 선(善)입니다. 오로지 완전한 사랑입니다. 오로지 진실뿐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자제된 침묵입니다. 그렇게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긴 예수님의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었답니다.
절대, 당신을 비난하고 욕하며 미워하는 사람과 상대하여 싸우지 마십시오. 그건 적을 모르고 싸우는 꼴입니다. 싸움을 부추긴 장본인은 멀쩡히 놔두고 엉뚱하게 딴 사람과 아웅다웅하는 꼴이 되는 셈입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용서를 넘어 사랑하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길을 알려주셨기에 믿고 따르면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4-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골라서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만난 억울한 일들을 그저 ‘억울함’으로 안고 살면 그것은 억울한 채로 남아서 슬픈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슴에 담고 행복해야 하겠습니다. ‘돼지는 열받으면 바비큐’가 된답니다. ‘사람은 열받으면 쓰러집니다.’ 그리되면 누가 손해입니까? 마음에 화를 담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많은 사람이 로멘틱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요한)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한가할 수 없고 한가로운 사랑은 벌서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따라서 십자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사랑,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 밖에 난 사람에게도 마음을 두어야 하고 허물을 안고 있는 상대방을 보면서 바로 나의 숨겨진 연약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입힌 미운 사람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의 모습이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도 어둠이 도사리고 있으며 언제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그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결국 나를 올곧게 살아가게 하는 빛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감사해야 하고 한편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의 허물은 그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에 한순간 이용당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때 오히려 내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확인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움에는 세월이 약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약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방심하면 한순간에 어둠의 세력에 지배당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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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생공부, 평생과제>
-완전한 사람, 사랑이 되는 것-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 119.1-2)
교황청 홈페이지를 열으니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교황청에 근무하는 고위성직자들을 위한 칸탈메사 추기경의 사순 첫 강론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35절을 바탕한 강론이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누구든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누구든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영어에서 직접 직역했습니다. 참 반갑고 은혜로운 복음입니다. 첫눈에 “나는 생명의 빵이다” 말마디를 보는 순간 “나는 사랑이다”가 말마디가 연상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그대로 “예수님은 사랑이시다”로 바꿔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몇해전 연중피정때 “사랑이 되기(Becoming Love)”라는 주제도 생각났습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 사랑이 되어가는 존재론적 변화가 바로 우리의 평생공부요 평생과제입니다.
아직도 눈은 쌓였지만 곳곳에 녹아 흐르는 물이 완연한 봄이 시작됐음을 알립니다. 봄되면 맨먼저 마리아의 집 피정집 뜨락에 피어나는 영춘화(迎春花)를 어제 보니 참 반가웠습니다. 개나리보다 1-2주 빨리 피는 꽃으로 꽃말은 ‘희망’, ‘사랑하는 마음’으로 봄과도 잘 어울립니다. 겨울을 통과한 파스카의 꽃 영춘화입니다. 문득 오래전 써나눴던 “예수님은 봄이다”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1999.3
시공을 초월하여 25년이 지난 지금도 현실감있게 와닿는 시입니다. 예수님은 봄입니다. 봄은 사랑입니다. 다시 사랑을 공부해야할 봄입니다. 하느님은 자연을 통해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평생공부가 사랑이요 평생과제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한 완전한 사람입니다. 사랑공부에는 영원한 초보자라는 자각하에 다시 봄과 더불어 시작해야할 사랑공부입니다.
우리의 연장되는 날들은 사랑하라 주어지는 선물의 시간들입니다. 살아 있을 때 사랑이지 죽으면 사랑도 못합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아쉬움도 아마 사랑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일거란 생각이 듭니다. 허무나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사랑도 훈련입니다. 우보천리, 한걸음 한걸음 사랑을 선택하고 배워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19년 전 반가운 자작시가 생각나 나눕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지난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이사 43,18-19ㄱ)
그렇다
흘러간 것들에 마음 아파해 하지 말자
아쉬워하지 말자
쓸쓸해하지 말자
흘러간 물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
흘러간 사람은, 사랑은,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이고
설레는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다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는 사람에, 사랑에, 시간에 충실할 때 구원이다
이게 영원한 현재를, 젊음을 사는 길이다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흘러도
늘 새롭게 만나는 주님이 우리의 기쁨이요 행복이요 힘이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사랑에 있다”-2005.3
그렇습니다. ‘오늘’입니다. 오늘 다시 시작하는 사랑공부, 사랑과제입니다. 제1독서 신명기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세와 예수님은 참 좋은 짝을 이룹니다. 모세의 말씀을 구체화하는 예수님의 멋진 강론이 오늘 복음입니다. 뭇사람들의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고 거룩한 백성이 되는 구체적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참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명심하여 실천해야 할 평생과제가 평생공부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사랑공부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죽어야 끝나는 평생과제요 평생공부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닮아 완전한 사람이, 참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처럼 높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궁극의 목표입니다. 다산 어록의 한 말씀도 생각납니다.
“목적없이 공부하면 지식을 많이 쌓는다 해도 신기루처럼 사라질 뿐이다.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펼칠 수 없고, 뜻이 없으면 학문을 성취할 수 없다.”
참사람,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사랑공부요 평생 사랑을 배우는 여정에 충실할 때 사랑의 대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성적, 육체적 ‘에로스’ 사랑도 아니고, 친밀한 우정이나 배우자간의 상호사랑의 ‘필리아’ 사랑도 아니고, 대가가 없을 지라도 상대방의 유익을 깊이 배려하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싫어도 미워도 할 수 있는 순수한 사랑, 하느님다운 사랑, 아가페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는 주님의 오늘 멋진 복음 강론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랑의 완전성은 이런 실천적 사랑의 완전성입니다. 참으로 상생의 공평무사한 보편적이자 구체적 사랑입니다. 결코 애매모호한 낭만적 추상적 사랑이 아닙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윈윈(win-win)”의 상생(相生)의 사랑입니다. 원수나 박해자를 미워하고 저주하다보면 내가 먼저 다칩니다. 그러니 원수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사랑이요 박해자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약한듯 하나 참으로 적극적이고 강한 두려움 없는 용감한 사랑입니다.
사실 우리 눈에 원수요 박해자이지 그 나름의 깊은 사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무지의 악에 눈이 가려 있을 수도 있고 나름대로 깊은 상처가 있을지 모르는 치유받아야 할 무지의 환자일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무사(無私)한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때 악은 무장해제되고 보복의 악순환의 유혹에서 벗어나 무지의 병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런 아가페 순수한 사랑은 결코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또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끼리끼리의 유유상종의 배타적 닫힌 사랑이 아니라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햇빛같은 사랑이요 모두에게 내리는 봄비같은 사랑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인사하는 유유상종의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이요 주님께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부단한 자기초월의 아가페 사랑을 통해 날로 사랑의 주님을 닮게 하십니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시편 19,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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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전에 원수였어도 이젠 아닌 경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이 말씀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를 무척 씁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려고 도무지 애쓰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과 아닌 사람을 가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저는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써야 할까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에 반기를 들 듯이.
무슨 얘기냐 하면 원수를 만들어 놓고 사랑하려고 애쓰지 말고 원수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원수를 만들지 않으려고 아예 아무 관계를 맺지도,
누구와도 엮이지 말자는 뜻은 물론 아니고 누가 원수의 짓을 해와도 원수를 만들지 않겠다는 그런 뜻에서 말입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원수 짓을 해와도 원수로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게 원수가 악한 짓을 해도,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그것이 악한 짓이어도 내게는 그것이 악이 아닌 그런 경지에 이르면 애초에 아무 원수가 없고, 전에 원수였어도 이제는 원수가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지가 오늘 하느님 사랑의 경지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경지 말입니다.
이는 마치 연기에 그을려도 그을음을 전혀 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 어떤 악을 저질러도 그것이 그에게는 전혀 악이 되지 않는 경지입니다.
어렸을 때 수인선 협궤 기차를 타고 인천을 갔다 오다 보면 굴을 몇 개 통과하게 되어 있는데 굴을 지나고 나면 석탄 연기에 얼굴이 모두 검둥이처럼 되어 서로 킥킥대며 웃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머리를 좀 쓰는 친구들은 얼굴을 보자기로 감쌉니다. 그것처럼 누가 아무리 악의 비를 퍼부어도
우산을 큼지막하게 쓰면 그 비에 젖지 않겠지요?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노래를 보면 얼굴빛 차돌처럼 만든다는 노래가 있습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런데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건 얼굴에 보자기를 써 그을음 타지 않는 것과 같고, 차돌처럼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원치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합니다. 그러나 모욕과 수모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만 모욕이고 수모이고, 모욕과 수모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만 악이기에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것들이 악이 되지도 않고 얼굴빛 변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지만 프란치스코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곧 자기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외에 자기가 원하는 것은 없는 경지입니다.
전에 원수였어도 이제는 원수가 아닌 그런 경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외에는 원하는 것도 없고 원치 않는 것도 없는 그런 경지를 당장 이룰 수는 없어도 감히 꿈꾸고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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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참사랑!>
오늘 복음(마태 5,43-48)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라는 율법을 능가하는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마태 5,44)
어떻게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 왜 이런 사랑을 하라는 말씀인가?
참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조금도 나의 손해가 허락되지 않는 치열한 삶의 자리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힘들게 하고 박해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니,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5)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을 온전하게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온전하게 희망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시며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십자나무 위에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근거로 제시하신 것이, 하느님께서는 '악인과 선인, 의로운 이와 불의한 이'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보편사랑'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시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마태 5,46.47)
'가짜사랑'에 갇혀 있거나 '거짓사랑'에 만족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시는 '참사랑', 곧 '완전한 사랑'을 하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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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RDx-2GmJE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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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 44)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기도도 사랑도
빛을 발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사랑하는
인격을 배우고
기도를 통하여
사랑의 질서를
깨닫습니다.
완전하신
하느님을 향하는
완전한
사랑의 기쁨입니다.
삶이 있기에
사랑도
미움도
있습니다.
삶을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움이라는
동굴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언제나
삶을 놓칩니다.
숨어드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말씀에
귀를 열고
가슴을 여는
오늘의 삶이길
바라십니다.
우리의 사랑도
인간적인
집착의 사랑이
아니라
온전하신
하느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면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불행하게
살기를
결코 바라지
않으십니다.
박해하는
자들을
떠올려보면
너도 나도
모두, 삶의
미성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미움으로
왔다
미움으로
흩어지는 이들이
아니라
미숙함으로 왔다
미숙함으로
사라지는 이들이
아닌 온전하신
하느님과 함께 살다
완전하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인격은
기도와 사랑의
인격입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사이에서
관계의 뼈대와
사랑의
살을 만드시고
입히십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기도와 사랑이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사순을
이끌어가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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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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