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시 당선작_ 이희형
2018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 시 당선작
심사위원 : 이근화, 임승유
예습 (외 4편)
이희형
근조 화환은 나보다 더 키가 컸다 열을 맞춰 천천히 시들어갔다 상주보다 더 상주 같았다
혼자서 가운을 여미는 것은 나에겐 벅찬 일이었다 낵타이를 잘 매지 못해서 장례식장에서 삼천 원짜리
자동 넥타이를 샀다 얼마 안돼서 실밥이 다 터져 나와서 부끄러웠다
친구들은 모두 목을 잘 동여매고 있었고 모두가 검정색 양복 한 벌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누가 죽을 것을 어
디서 배워온 것처럼
복도마다 가지런한 영정 사진
다들 너무 늙었고 너무 젊다
빈소엔 죽은 사람들과 산사람들이 함께 웃고
나는 이제 잠이 온다
미동하지 않는 것들의 어깨를 흔들어도 될까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한번 흔들어볼까
늘어진 화환은 형들의 목매달았던 나무와 무척 닮았다
떨어져 있는 꽃잎을 보면 죽은 친구들이 생각났다
국화는 시들어도
정말 하얬다
나는 키가 작아서 죽지 못했어, 작은 형이 이 말을 하고 일 년 뒤 죽어버렸을 때 나는 죽기에는 너무 늦었구나
생각했다 역시 형들은 뭐든 나보다 잘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필사적으로 걸었다
걷다 보면 저기
나의 나무가 보였다
그곳은 어땠니?
사람이 많이 왔니?
누수淚水
태어나지 않은 딸이 예뻐서 신발을 사버렸다 신발을 포장하는 점원 손길이 한 번도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
는 사람처럼 서툴다 나는 신발을 달래면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문밖에서 우는 아이를 만나게 된다
신발은 놀라서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은 모두 잘 우는 법을 안다
우는 아이를 보면 울고 싶어진다 내가 울면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손을 잡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아이는 없고 가로등의 오래된 빛만 모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앞을 보지 못한 아이처럼 가장 밝은 방향으로 걸었다 걷다 보면 더 밝아지는 곳이 생
겨났다 어느 쪽이든 방향이라 했다
모르는 것에 대해 모른다는 이야기는 친구 앞에서 알 수 없는 것도 아는 것이라고 대답했던 것과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에 쪼그려 앉은 아이 때문에 나도 무릎을 굽혔던 기억이 잠들기 전에 흘렀다
세수를 한 얼굴은 마르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얼굴을 담아도 흘러넘치는 것들이 더러 있었다
2부 첫 번째 시
버스 정류장엔 사람들이 많고
우산을 들고 있고
아무도 젖지 않았다
비를 이해하고 있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우산을 다루는 사람들을 보면서
약속도 없이 내가 늦은 것을 안다
묻지 않는 말에 대답하는 연습을 하면서
조금씩 젖어간다
간밤에 가드레일을 먹어치우고 누워버린 트럭처럼
부릉부릉
비처럼 짖는다
밤중에 창밖에서 널 부르는 기분으로
비는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 새아버지가 따라 흘리는 눈물 죽은 친구가 흘리는 눈물 건강한 친구도 흘리는
눈물 어머니가 아버지와 새아버지를 보다가 흘려보려는 눈물 우산 속에 빈자리가 만들어내는 눈물
안경에 묻은 빗방울
언젠가 네가 한 번쯤 해야 할 일들이 된다
나는 가로등에 잠시 걸렸다가
철거되는
현수막처럼
흔들린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간판이 날아가고 있다
한 번만 펼쳐본 책처럼 비는 그쳤으니
정류장 앞에 선 사람들은 우산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을 보고 있다
▲ 이희형/ 1991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2018년《현대문학》신인 추천으로 시 등단.
⸺《현대문학》2018년 6월호
너의 프라하 / 이희형
텅 빈 광장에 네가 있다
네가 있는 광장에
긴 의자들이 열을 맞춰 놓여있다
한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돌을 깎아 만든 것이라고 했다
오래된 돌 의자 위에 네가 앉으면
시계탑에도 새 한 마리가 내려앉는다
너는 그곳에 오래 머무를 것 같다
먼 옛날 이곳에서 군중들은 행진을 했다고 모두가 모여서 광장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흩어졌다고
분수대에서 뿜어진 물들이 공중으로 퍼졌다가 흐른다 떨어진 물방울들이 쉼 없이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람들이 떠나가고 함성들이 멀어지고 많은 시간이 지나 너는
광장에 혼자 남겨져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곳에 대해 생각하면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멀어지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광장에서 떠나간 함성을 들으며
새가 앉기 전으로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기 전으로 분수대가 생기기 전으로 광장이 광장으로 불리기 전으로
돌의자가 의자가 되기 전으로 돌이 아닌 무엇이 되기 이전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아무 이유 없이
한 사람을 꾸짖기 이전의 모습으로
툭 떨어진 물방울이
너의 코트자락에 묻는다
어쩌면 막 바다에서 도착한 것일 수도 있고
백 년 전에 뿜어진 물줄기일 수도 있었다
네가 걷고 광장에서 멀어진다
오래된 의자가 다시
돌이 되어가고 있었다
미제未濟 /이희형
문이 닫히는 동안
복도의 찬 공기가
이곳으로 불어오고
나무로 된 바닥이
그 사람과 함께 삐걱였다
애써 울지 않으려는 표정이기도 했고
애써 울고 난 뒤의 표정이기도 했다
그가 쥐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쿵 하는 소리가
복도 바깥으로 퍼졌다
1인칭과 1인분과 사람 하나 / 이희형
미리 불려놓은 쌀을 밥솥에 옮겨 담는다
잡곡은 오래 불릴수록 맛이 좋지만
요새는 버튼만 잘 누르면 된다고
그러니 끼니를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엄마는 말했다
오븐은 180도에 타이머는 10분을 맞춰 놓아야 한다
버튼을 잘 누르고 10분이 지나면
오븐은 비로소 뜨거워진다
그러나 나도 1인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최소 주문비용에 맞춰서 음식을 주문하고
배달비를 지불하면 누군가가
식사를 대접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지만
부엌에 있는 세탁기는 아직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요새 집들은 다 이렇게 나와요
집을 보여주면서 웃는 그의 표정 때문에
나는 왜 부엌에 세탁기가 있어야 하는지 물어보지 못하고 그만
그와 함께 웃어버렸다
마치 변명처럼 이게 온전히 나의 탓은 아니라는 듯이
이사를 축하한다며 그가 건넨 화초는
지난여름에 말라죽어버렸다
어디서든 잘 자랄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던
그의 부동산은 이제 없고 통신 대리점이 생겼다
화초를 잊어서 말려 죽인 내가
이제는 화초가 죽은 것을 잊고서
모르는 척 물을 준다
어쩌면 죽은 이파리들 틈으로 싹이 틀지도
다음날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서
내가 미안한 마음이 모두 사라질지도 모를 일인데
너는 욕심이 참 많아
누군가가 했던 말과
그냥 2인분을 시킨 다음에 남은 음식은 냉장고에 넣어 놓고 다음날 드세요 그것은 벌이 아니고 당신과 당신이 음식 하나를 온전히 나누어 먹는 것뿐이라고요
말하는 사람에게는
차마 답하지 못했다
나는 함께하는 것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라고
그게 남이던지 나이 던지는
크게 상관없는 것이라고
오븐 속의 고구마는 타버렸고
밥솥의 잡곡들은 익지 않았다
베란다의 고구마는 물도 주지 않았는데
계속해서 자라나고
겨울 옷은 미리 꺼내서
겨울이 오기 전에 빨아 입으려 했지만
어느새 해가 길어졌다
아무리 자고 일어나도
나는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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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1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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