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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2천여명 사망한 '톈안먼(천안문) 사태'는… ‘6.4’, 못다 핀 중국의 봄
[대기원] 6월 4일은 톈안먼 민주화 운동 20주년이다. 6.4의 발단이 된 1989년 4월부터 유혈진압으로 끝난 6월까지 중국 전역은 민주화에 대한 각계각층의 열망으로 가득했다. 중국 공산당 집권 후 최초이자 최후의 자발적 민주화 운동이었다. 그 날 이후 중국에서는 더 이상 민주를 거론하기 힘들어졌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6.4를 잊어 버렸다. 중공은 더 이상 당시와 같은 대형 유혈 진압을 하지 않는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 외에도, 언론과 사상 통제로 더욱 교묘하게 일당 독재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 ||||
6월 4일 새벽, 계엄군이 톈안먼 광장에 진입했다. 탱크와 무장군인이 갑작스럽게 밀어닥치긴 했지만, 학생들은 긴장하지 않았다. 적어도 계엄군이 그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새벽 2시 25분, 톈안먼 광장에 진입한 계엄부대는 마오 초상을 마주하고 서 있던 ‘자유의 여신상’을 넘어뜨렸다. 삼십 분 뒤, 광장 한편에서 총성이 들렸다. 한 곳을 향해 집중적으로 쏘는 듯한 총성은 분명히 공포탄이 아니었다. 총성이 터진 곳은 인민 영웅기념비 아래 군인들은 인민대회당에 숨어 있다 기념비 아래에서 노숙하던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로 총을 쐈다. 비명조차 지를 새도 없이 학생들은 죽었다. 설마….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총을 쏘는 군인들은 야수로 변했고, 광장은 말 그래도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때, 학생들의 몸속으로 파고든 것은 바로 덤덤탄(Dumdum bullets: 관통하지 않고 몸속에 박히는 탄환)이었다. 새벽 4시. 살아남은 학생과 시민들은 광장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대학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9년 6월 1일부터 10일 사이 총 31,978명 사망. 이 중 학생 10,974명, 시민 7,992명, 신원불명 11,865명 이었다. | ||||
1989년 초, 중국은 덩사오핑의 경제개혁으로 활기와 불안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국민 경제가 성장하고, 시장 공급은 풍부해진 반면, 국유기업 부도로 실업자는 증가했고 관료와 결탁한 상인들의 농간으로 물가는 폭등했다. 당 관료의 부패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을 무렵, 반부패와 개혁을 상징했던 후야오방 전 총서기가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그의 사망으로 베이징대를 비롯한 베이징 시 주요 대학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 모여, 후야오방의 이름으로 개혁과 언론 자유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 톈안먼광장 인민 영웅기념비 앞(1989. 4.16-4. 25) 아침공기가 걷히기 전, 대학생과 시민들이 하나 둘 톈안먼광장 인민 영웅기념비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기념비가 흰 국화로 덮였다. 그들은 전 날 심장마비로 사망한 중국 개혁의 선봉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총서기를 추모했다. 대학생들은 그를 찬양하며 보수파를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이며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들의 구호는 점점 커졌다. 4월 22일 후야오방 추도회가 열린 인민대회당 주변에는 ‘부패한 관리들을 엄벌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10만 명의 대학생들이 후야오방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 ||||
관영 ‘인민일보’는 ‘반드시 기치 선명하게 동란을 반대해야 한다’는 사론을 발표, 학생운동이 계획적인 음모이며 반당, 반사회주의 동란이라고 평가했다. 장쩌민은 개혁을 다룬 ‘세계경제도보’를 폐간시켰다. 인민일보 기자들은 머리에 “인권을 돌려달라, 말할 권리를 돌려달라”라는 띠를 두르고 자전거를 이용하여 베이징 시내를 돌아다녔고 학생들은 그들을 성원했다. 점점 커지는 시위대의 압력으로 중국 정부는 4월 29일 위안무(袁木) 대변인을 내세워 대학생들과 대화했다. 하지만, 정부는 계속 시간만 끌며 대학생들과 진지하게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5월 13일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지방대 학생들도 ‘베이징을 성원한다’는 깃발을 들고 달려왔다. 단식 투쟁에 나선 어떤 대학생은 부모에게 남길 유서를 깃발로 들고 나왔다. 단식 투쟁 첫 날 밤을 맞이했다. 베이징의 5월 밤은 아직 추웠다. 하지만, 대학생들은 모두 정부가 쉽게 타협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옷과 이불을 가져오지 않았다. 단식투쟁 이틀째, 교수들도 제자를 응원하러 거리로 나왔다. 베이징 시민들은 학생들에게 차로 도시락을 날랐다. 학생들의 구호는 점점 거세졌다. ‘생명은 애들 장난이 아니다’, ‘즉각 진지하게 대화하라’, ‘민주가 없다면 죽어도 좋다’ 시민들도 점점 학생들을 응원하며 톈안먼 광장으로 모였다. 초등학생들도 대학생을 지지하는 깃발을 들고 나왔다. 단식 투쟁 5일째,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여학생 차이링(柴玲)이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불교계 스님들도 “금강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 영웅은 두려움이 없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학생들을 성원하러 왔다. 이 날, 학생들을 성원하는 인파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톈안먼 광장에서 실시한 설문조사(북경청년보) 결과 대부분 사람들이 학생운동은 애국 민주운동이라 했다. 단식투쟁 6일째, 비가 내렸다. 허약해 쓰러져 가는 학생을 돕기 위해 베이징병원 구호대도 나섰다. 경찰학교, 노동자들, 법관, 중고등학생, 교사, 기자. 시민들의 성원도 끊이지 않았다. 법관들, “중국은 민주가 필요하다, 중국은 법치가 필요하다!” 중학생들, “형님, 누나들이 굶고 있으니 동생들은 괴롭습니다” 상하이 화동화공대 교사, “학생들을 지지한다, 부패한 관리들을 타도하자!” 단식투쟁 7일째, 중국 당국 계엄령을 선포(5월 19일)했다. 톈안먼광장에 있던 공공버스는 학생들의 집이 됐다. 직접 단식에 나선 학생들만 버스 안에 있을 수 있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쓰레기장 같은 바닥에서, 버스 지붕 위에 올라가서 추운 밤을 보냈다. | ||||
당시 그는 이미 당 내부에서 배척된 상태였으며 이후, 사람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저녁 10시, 리펑(李鵬)이 다음날부터 계엄에 들어간다고 선포하고 양상쿤(楊尚昆)은 군대를 지휘했다 | ||||
계엄령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대학생들이 목숨으로 톈안먼광장을 수호할 것을 결심했다. 계엄령이 발포되었지만, 200여 대의 계엄군 차량은 북경시내에 진입하지 못했다. 그들을 막아선 시민과 학생들 때문이었다. 대학생들은 계엄군에게 민주화 운동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고 시민들도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미국, 영국, 독일, 필리핀 세계 각국에서 학생운동을 성원하고 계엄령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 영원한 자유의 여신상 (1989.5.26-6.3) 5월 26일 저녁, 학생들은 지쳐가고 있는 동학들을 위해 음악회를 열었다. 몇 십만의 베이징 시민들이 이날 음악회에 몰려들었다. 5월 28일, 베이징 중앙미술대 학생들이 자유의 여신상 만들기 작업에 들어갔다. 5월 29일 저녁 6시, 중앙미술대 캠퍼스에서 초벌 완성된 대형 여신상은 3부분으로 나뉘어져 톈안먼 광장으로 운반되었다. 학생들은 밤샘 작업을 거쳐 30일 새벽, 마침내 자유의 여신상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아침, 자유의 여신상이 완성되었고 학생들은 경축행사를 가졌다. 마오 초상을 마주보며 세운 자유의 여신상은 6.4 학생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5월 31일, 거센 바람과 함께 폭우가 내려 사람들은 석고로 만들어진 자유의 여신상이 손상될까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자유의 여신상은 기적적으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중국의 어린이날인 6월 1일, 어린이들은 자유의 여신상을 찾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했다. | ||||
“진정한 대학살의 무대는 다른 곳에 있었다. 도시의 다른 곳에서 베이징 시민들은 싸우고 죽었다.” 1989년 6.4현장을 목격했던 로빈 먼로(감독, 중국노동지)가 PBS 다큐 ‘탱크 맨’에서 밝힌 말이다. 그는 ‘진정한 학살’은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을 떠난 후에 발생했다고 한다. 6월 4일 오전, 자식을 찾으려는 부모들이 광장에 진입하고자 광장을 에워싼 군대를 향해 다가간다. 한 장교가 확성기를 들고 “다섯을 센 후 발포하겠다”고 위협했다. 겨눈 총을 발견한 시민들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총은 그들의 등 뒤에서 발포됐다. 20~30명이 쓰려졌다. 다시 시민들이 기어서 군인에게 다가가 외쳤다. 다시 총이 발포됐고, 그들은 쓰러졌다. 한 시간 뒤 쓰러진 이들을 구하기 위해 구급차가 왔다. 하지만 의사, 간호사, 구조대원까지 모두 총에 맞았다. 학살을 끝낸 계엄군이 톈안먼 광장 학생들의 소지품과 시체를 태워 증거를 없앴다. | ||||
대학살 다음날, 탱크부대가 톈안먼 광장으로 진입하기 위해 모였다. 그러나, 늘어선 탱크 수 십대는 한 학생에 의해 저지당했다. 미국 타임지가 ‘세기의 위인’으로 선정한 그는 생사와 행방이 알려지지 않다가, 홍콩 언론을 통해 대만의 고궁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다른 학생들도 돌멩이를 던지며 탱크를 저지했다. 하지만, 탱크부대가 쏜 최루탄에 학생들은 곧 흩어졌다. 톈안먼 광장과 주변에 200여대 탱크가 들어섰다. 톈안먼광장엔 총을 든 계엄군이 순찰을 시작했고 베이징 거리엔 군인으로 가득찼다. 불안을 느낀 베이징 주민들이 생필품을 구입하려고 가게마다 줄을 섰고 미국 대사관 앞에는 당국의 보복이 두려워 중국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학생들의 희생자 추모식이 이어졌다. 대만에서 추모식에 백만 인파가 모였다. 그러나 베이징에서는 시민들에게 살해된 계엄군 군인을 추모하는 활동을 벌였다. 6월 9일, 덩샤오핑은 계엄군 군관들을 만나 진압 성공을 축하했다. 이미경 기자 |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106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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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명박이 이런 중국의 3만2천명을 학살하고도 계엄군으로 제압한 천안문 사태를 교훈 삼아 "무력으로 시민들을 제압하고 언론을 틀어잡으면 정권은 유지 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6월10일 시청에서 이런 비슷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미 전두환이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하고 언론을 통폐합하여 성공한바 있다.
★먼소린지.. ㅉㅉㅉ 어떻게 3만명 이상을 천안문에서 죽이나??? 그렇게 죽였다면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고도 남았을터인데...아무래도 중국이간질 시키는 단체같네요 내가 알기론 8백여명 죽은걸로 알고있습니다만... 각자 찾아보시길....
시체과 소지품을 다 태워서 증거를 없앳다고 합니다.
중국에 수만명 죽여서 어느 산에 다 파묻고 거기에 소나무 한그루씩 심어났어요. 중국속담에는 " 나무한그루 한그루 밑에 다 시체가 있다"는 말도 있어요... 실제로 점쟁이들이 거기가면 수만명의 젊은 유식한 청년들과 처녀들 귀신들이 자유민주화 운동하다가 죽었다고 억울하다고 한대요..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입니다. 중국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사망자 숫자도 왜곡보도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르는거 아닐까요? 그리고 중국은 10억이 넘는 세계 최대 인구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 생각하는 물량과는 다르겠죠. 한국 하고 똑같이 생각하면 안되요
민간인 까지 총 다친사람 사상자를 포함해도 3만명에 훨씬 못미칩니다.. 먼소리하는건가?? 중국 이간질??
그렇다면 민족끼리님은 혼자 추측해서 3만2천명은 될것이다 라고 글 올린거임??
전 기사 그대로 올린거임. 그리고 이 기사는 중국 언론입니다. 제가 뭐하러 중국 이간질을 하겠어요
놀고있네 놀고있어 그래서 3만2천 죽었다고 부풀려서 앞으로 6월10일 있을 시위에 대한민국 국민들 겁주기?
기사 앞부분에 잘 보세요 "1989년 6월 1일부터 10일 사이 총 31,978명 사망", 학생들을 성원하는 인파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학살을 끝낸 계엄군이 톈안먼 광장 학생들의 소지품과 시체를 태워 증거를 없앴다.
무서운놈들이네.. 시체를태워 증거 인멸하고.. 언론 왜곡보도.. ...무섭다
★대기원? 중국분열을 바라는 모임이네 저게 기사임? 지들쪽빠리 새끼들 얘깃거리지
제가 중문과 졸업하고 중국에서 유학도하고 직장도다녔었는데요. 중국사람들하고 이야기하다보면 공산주의 사상이 너무 짙어서 개념자체가 틀려요. 대화가 전혀 안되거든요. 그래서 공산주의는 참 무섭구나하는 걸 느낀적 있어요. 예전에 월드컵때도 중국에 있었는데 3명이상 모이면 한사람당 한국돈 100만원씩 벌금때리고 그랬어요.. ㅡㅡ; 쩝! 아무튼 공산주의 사상이란, 정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거에요.. 중국은 TV보도도 제대로 안해줘요. 절대!!! 정부 지네마음대로!! 나는 한국뉴스보고 중국국내상황 알았음.. 여러분 공산당은 무서운 것입니다. 제발 민주주의를 돌려주세요.
공산국가였던 나라는 민주주의하면 돈도 엄청벌고 자유롭게 살아가겠지만, 원래 민주주의하던 국가사람들은 갑자기 공산국가로 변하면 너무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대만과 중국에서 아직도 분열하고 있는이유가 여기에 있구요. 우리나라와 북한도 좀 문제지만, 솔직히 요새 북한도 뭔가.. 김정남이가 마카오로 망명한다는둥, 아버지를 만날수 있다는둥..소리들으니 그쪽도 뭔가 나쁜무리들이 있나본데.. 원래 최대의 적은 자신이자, 바로 가까운 곳에서 나오는거라 생각되요....... 그러니 한마디로 핵심은.........무서운 건........ 마우스 한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