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고금리·고환율… 추석에 날아온 청구서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물가가 치솟자 ‘냉장고 파먹기’가 다시 유행이 됐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습관처럼 주문해 먹던 배달음식 가격이 치솟자 다들 냉장고 앞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고물가의 여파가 만만치 않다. 잔치국수에 고명이라도 얹으려고 보면 애호박 하나 값만 4000원이 넘는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계란 한 판(30구) 가격이 1만 원에 달하면 ‘금란(金卵)’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젠 뉴노멀이다. 이 정도로 비싸다고 흥분해선 장보기가 어렵다. 상추는 고기만큼이나 비싸다. 소포장된 상추 한 팩(200g) 값이 6000원이 넘는다. ‘그래도 이건 있어야지’와 ‘고명 따윈 사치야’ 같은 자아 분열을 거듭하다 보면 장 보는 시간이 길어진다.
자연히 추석 풍경도 한 해 전과는 사뭇 다르다. 작년만 해도 추석 선물로 고가의 구이용 한우세트가 불티나게 팔렸다. 거리 두기 때문에 잘 보지 못하는 대신 선물만은 통 크게 쐈다. 올해는 다르다. 한 이커머스 업체 설문에 따르면 올해 추석 선물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실용성과 가격이었다. 대형마트에선 5만 원 미만 선물 수요가 증가세다. 코로나19 이후 성장한 중고플랫폼에는 추석을 맞아 때 아닌 ‘큰 장’이 들어섰다. 어차피 안 쓸 추석선물 서로 싸게 되사고 파는 추석 선물 중고거래가 많아져서다.
최근 성균관에서 육류, 생선, 떡, 전을 뺀 2022년 버전 신(新)차례상 표준안을 내놨지만, 올해는 이게 아니어도 물가 때문에 간소화가 불가피하다. 추석 차례상 차리는 비용이 지난해에 비해 7% 가까이 올랐는데 개별 품목을 뜯어보면(지난달 31일 기준) 체감 물가 상승률은 훨씬 가파르다. 배추 한 포기 값은 작년보다 51% 뛰었고 무(38%), 홍로 사과(29%), 시금치(34%)도 대폭 올랐다. 작년 비용으로는 상차림을 절반 정도로 줄여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타격이 사회 안팎으로 거세긴 했지만 그래도 지난 2년은 세계적으로 유동성 잔치가 벌어졌던 시절이었다. 비대면 경제 성장으로 오히려 수혜를 누린 기업도 많았다. 저금리 기조가 유지됐고, 부동산을 비롯해 주식·코인까지 자산 가격이 모두 치솟았다. 정부는 각종 재난지원금 명목으로 현금을 수시로 뿌려대며 인플레이션을 부추겼다. 소비자들 씀씀이도 커졌다. 소비의 핵심 키워드가 ‘플렉스’(과시형 소비)였다.
하지만 잔치는 끝났다. 고삐 풀린 물가를 잡기 위한 미국의 연이은 자이언트스텝을 기점으로 파장 분위기가 뚜렷해졌다. ‘영끌족’이 자취를 감췄고, ‘파이어족’(조기 은퇴족)은 재취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눈물겨운 강제 아나바다를 실천 중인 소비자들도 늘었다. 실질적 효과도 없던 재난지원금 탓에 살벌한 고물가로 뒤통수를 맞은 서민들로선 어쩐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심경이다. 엔데믹 이후 맞이한 첫 명절이지만 다시 만나는 기쁨을 마냥 즐기기 어렵다. 추석을 앞두고 모두에게 날아든 유동성 잔치 끝의 호된 청구서다.
박선희 산업2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