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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사건의 계엄부대(六四事件中的戒嚴部隊) |
| 총 20사단 병력 투입돼
진압 당시 투입된 군대는 14개 육군의 연합군과 공군 제 15사단, 베이징 공군 포병 제 14사단, 톈진 경비구 탱크 제 1사단, 베이징 경비 제 1사단과 제 3사단, 무장부대 베이징 본대 등이다.
우 편집장은 이와 함께 지금까지 일각에서 제기된 계엄군과 관련된 보도나 발언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신화사 관계자가 홍콩에서 발간한 서적의 계엄군 관련 내용도 정확하지 않으며, 최근 공개된 자오쯔양의 육성 테이프에서 언급한 계엄군 내용도 마찬가지다. 자오쯔양은 5월 19일부터 감금돼 최종 군대 배치 정보를 상세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발포 명령을 내렸나
줄곧 논란이 된 최초 발포 명령 시점, 고위층의 명령 여부도 밝혀졌다. 당시 계엄군 지휘부의 작전 내용은 현재 군사 박물관과 인민대회당에 전시돼 있다.
최초로 발포 명령을 접수한 것은 38부대이며, 광장 인근 우커쑹 거리에서 총격이 시작됐다. 첫 사망자로 알려진 저우 샤오밍도 우커쑹에서 살해당했다.
정부가 조작한 軍警 사망
우 편집장은 다각도의 고증을 통해 당시 15명의 군인과 경찰이 사망한 것을 밝혀냈으며, 정부의 발표는 과장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지금까지 시민 폭도들이 군인과 경찰을 공격해 살해했고, 정당방위 차원에서 발포했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사망한 15명 중 8명은 사태와 관련 없는 다른 사고로 사망했으며, 나머지 7명도 정부의 발표와는 다른 정황으로 사망했다.
이와 함께 우 편집장은 당시 폭동 등 시민들에 의한 소요 사태가 전혀 없었다면서, 톈안먼 광장 인근의 톈탄(天壇)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했다.
당시 6~7만 명의 시민들과 300여 명의 정부군이 톈탄의 동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고, 시민들은 정부군에게 진입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군은 진입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11명의 군인이 부상을 입었다. 시민들은 즉시 군인을 인근 병원으로 이송했고, 음식을 보내 위로했다. 당시 상황은 우호적이었다.
백동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