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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스 콜롬버스
초기 생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제노바에서 직공으로 일하던
스페인인 아버지 도메니코 콜롬보와 스페인계 유대인 어머니 수산나 폰타나로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콜럼버스의 어린시절에 관해서는 현재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어렸을 때부터 선원이 된 것은 확실하다.
선원 생활
1474~75년 에게 해의 키오스 섬에 유향을 사러가는 항해에 참가했고,
1476년 5월 상선대에 승선하여 플랑드르로 향했다.
그러나 항해 도중 산비센테 갑 앞의 바다에서 카스티야-포르투갈 전쟁에 말려들어 콜럼버스가 탄 배에 불이 붙게 되었다.
콜럼버스는 불이 배의 갑판 위에까지 올라오는 상황에서 배를 탈출하여 라고스 해변까지 수영을 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 다음해인 1477년 초반 스페인의 구조선에 다시 승선하여 영국까지 여행했고 그후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갔다.
1478년에는 사탕을 구입하기 위해 마데이라 섬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 때문에 대서양의 서쪽에 대해 커다란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후 미지의 바다에 대한 정보를 수입하면서
라틴어와 스페인어를 배웠고 여러 지리학자의 세계지리서를 섭렵했다.
그 결과 서쪽을 돌아 지판구('황금이 나는 땅'이라는 뜻 : 현재 일본의 영어 이름인 'Japan'이 이 말에서 유래)와
카타이(고대 중국을 가리키는 유럽어)에 도착하는 계획을 세웠고
피렌체의 학자 토스카넬리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1480년경에는 마데이라 제도의 포르트산드 섬의 초대 총독인 바르도로메우 페레스트레로의 딸인 펠리페와 결혼했다.
1482~83년에는 아프리카 서해안 남쪽을 항해하는 여행에 나서
먼바다를 항해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방문지인 엘미나 교역 성채에서 흑인 노예들이 실제 매매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1483년말에는 동쪽 나라로 가는 항해 계획안을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2세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당시 아프리카 서해안 남쪽 항해가 착실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으므로
막대한 비용이 드는 항해에 대한 교섭은 잘 진척 되지 않았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아들인 디에고를 데리고 이웃 나라인 카스티야에 갔다.
산타페 협약
1486년 1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을 만나 항해계획을 제출했다.
이에 대한 타당성 여부 심사가 타라베라 신부가 주관하는 위원회에 위탁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은 이슬람 세력의 최후 보루인 그라나다 공략에 정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으므로
콜럼버스의 계획에 대한 최종판단은 그후 몇 년 뒤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포르투갈 왕과 재교섭을 시도하기도 했고 친동생인 바르돌로메를 이탈리아 왕에게 파견하여
의사 여부를 타진시키기도 했으며 콜럼버스 자신이 프랑스에 한번 가볼 결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가 함락되어 새로운 전망이 열리게 되었고
스페인의 여러 성직자와 궁정 인사들이 협력을 해주어
마침내 1492년 4월 항해를 허용한다는 산타페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에 따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세습권으로서 제독의 지위를 획득하는 한편
종신직으로서 부왕의 지위에 버금가는 총독의 지위를 약속받았다.
또한 새로이 발견된 지역으로부터 얻어지는 모든 이익의 10%를 취득하고 앞으로의 교역활동에 대해
최고 1/8의 자본참가권을 승인받았다.
첫번째 항해
항해의 준비는 핀손 3형제의 협력을 얻어 진행되었는데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 호, 핀타 호, 니냐 호 3척에 120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마침내 파로스 항구로부터 그토록 꿈꾸어오던 항해에 나서게 되었다.
카나리아 제도에 정박한 후 9월 6일, 고메라 섬을 떠나 북위 28˚선상에서 계속 서쪽으로 항해하면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자침편차와 사르갓소 해의 불안을 극복했다.
10월 12일에는 구아나하니라고 불리는 바하마 제도의 한 섬(지금의 와틀링 섬)에 도착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자신이 인도의 한 부분에 도착한 것으로 확신하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이 섬을 산살바도르('성스러운 구제자') 섬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곧 원주민인 인디오들로부터 황금과 향료가 나는 땅에 대한 정보를 캐면서
쿠바 섬으로부터 히스파니올라 섬(지금의 아이티 섬)까지 항해했다.
그러나 1492년 크리스마스 밤, 산타마리아 호가 좌초하여 난파했기 때문에
급히 나비다 거류구를 설치하여 약 40여 명의 인원을 잔류시킨 뒤 귀환길에 올라 1493년 3월 15일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후속 항해와 탐험
완전한 성공이라고 판단된 첫번째 항해 덕분에
2번째 항해(1493. 9. 25 출발) 때는 17척의 배에 1,500명에 달하는 승무원이 경쟁적으로 승선했다.
그러나 히스파니올라 섬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의 희망과 기대는 실망과 불만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금광채굴에 징발되었던 원주민의 반란도 만성화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황금과 향료 대신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들을 노예로 본국에 송환했으나(1495) 이사벨 여왕의 분노만 사고 말았다.
이같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3번째 항해(1498. 5. 30 출발)에 나서
향료가 나는 섬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도로에 그치고 말았다.
또한 섬에서는 콜럼버스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프란시스코 데 로르단 일파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1500년 8월 콜럼버스는 콜럼버스의 통치능력을 심사하기 위해 섬을 방문한 사찰관 보바딜리야에 의해
족쇄가 채워진 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렇게 해서 콜럼버스의 시대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마지막 항해와 말년
1502년 니콜라스 데 오반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된 뒤 마지막인 4번째 항해(1502. 5. 9 출발)를 출발하여
파나마 지협 일대를 배회했지만 태평양을 발견하지 못하고 아무런 수확도 없이 귀국했다(1504. 11. 7).
이 항해로 인해 급속히 건강이 나빠졌고
1506년 5월 21일 자신이 발견한 섬들이 아시아의 일부라는 신념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바야돌리드에서 죽었다.
콜럼버스의 시신은 스페인 세비야에 묻혔으며, 1542년 히스파니올라의 산토도밍고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당시의 기록에는 콜럼버스가 죽은 날짜가 1506년의 예수승천 대축일로 되어 있어
사망일이 5월 21일임에 틀림없으나 후에 잘못되어 5월 20일로 알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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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16~17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말의 과학자.
갈릴레이의 과학적 업적은 크게 천문학과 물리학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중력과 운동에 관한 연구에 실험과 수리해석을 함께 사용하여 일반적으로 근대물리학과 실험물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케플러와 동시대 인물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했고 교황청을 비롯한 종교계와도 대립했다.
저서에는 <2개의 주된 우주체계―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에 관한 대화>, <천계통보>, <두 새 과학에 관한 논의와 수학적 논증> 등이 있다.
갈릴레오(Galileo Galilei)
갈릴레오(Galileo Galilei)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16~17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말의 천문학자·물리학자. 근대과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어려서는 피렌체 근방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1581년 피사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했는데,
그해에 피사 대성당에서 등잔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유명한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때는 수학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고, 그뒤 토스카나 궁정의 수학자 오스틸리오 리치에게서 수학과 과학을 배웠다.
1585년 경제적인 이유로 피렌체로 돌아와서 피렌체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했다.
청년기
1586년에는 정수(靜水)저울에 관한 논문으로 널리 알려졌고,
1589년에 고체의 무게중심에 관한 논문으로 피사대학의 수학강사로 임명되었다.
1592년 파도바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운동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고
1604년 낙하물체는 등가속도운동 법칙에 따른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증명했다.
또한 포물선낙하운동 법칙도 발견했는데,
옛날부터 전해 내려왔던 피사 사탑의 실험은 실제로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장년기 및 지동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일찍부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체계를 믿고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렸다.
1609년 봄 베네치아에서 망원경 발명의 소식을 접하고 파도바로 돌아와서 3배율 망원경을 만들었으며,
그뒤 곧 32배율로 개량했다.
이 망원경은 새로 고안한 렌즈의 곡률점검법을 사용하여 천체관측에 처음으로 이용될 수 있었고, 곧 전유럽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1609년 후반에서 1610년 초반까지 이 망원경으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천문학에 있어 많은 발견을 했다.
달 표면은 평평하지 않으며, 은하수는 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고,
목성에 위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태양의 흑점, 금성의 위상, 토성의 띠 등도 관측했다.
이런 관측은 <천계통보 The Starry Messenger>(1610)로 출판되었으며,
이로 인해 파도바대학의 종신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보다 많은 연구를 위해 토스카나 대공의 과학자문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1611년 로마를 방문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많은 찬사를 듣고 유럽 최고의 과학자임을 인정받았다.
이에 자신을 얻은 갈릴레이는 1613년 태양의 흑점이동을 바탕으로
코페르니쿠스가 옳고 프톨레마이오스가 틀렸음을 밝히는 3통의 편지를 출판했는데
뛰어난 설명과 단어 선택으로 그의 생각이 널리 알려져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종교재판
지동설에 대한 지지에 위협을 느낀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은 성경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도미니쿠스 수도회 신부들과 연합하여 그를 비난했으며
급기야 비밀리에 그는 불경죄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에 놀란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교회가 과학적 사실의 진부에 대해서 관대한 입장을 견지해 줄 것을 탄원했고
많은 종교 지도자들도 그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교리 책임자였던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태도는 완강했다.
추기경의 주된 관심은 오로지 신교와 싸우기 위한 가톨릭 진영의 단결에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이탈도 용납될 수 없었다.
1616년 3월 5일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오류임이 공포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금서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그
전에 추기경은 이 사실을 통보하면서 앞으로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지지하거나 변론해서도 안된다고 경고했다(→ 가톨릭 교회).
1624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금지법령을 철회시키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으나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만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새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Ⅷ, Maffeo Barberini)는
두 우주체계를 공정하게 다룬다는 조건으로 허가해주었다.
교황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우주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식의 결론을 원했고
어떠한 다른 논의를 해서도 안된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한 다짐은 교회 검열관에 의해 서면으로 확인되었다.
교황청과의 갈등
피렌체로 돌아와서 대작 <2개의 주된 우주체계―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에 관한 대화
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tolemaico e copernicaon>를 저술했다.
1632년 모든 검열을 거친 이 책은 문학과 철학 분야의 걸작으로 전 유럽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교황은 이 책이 제목과는 달리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명백히 옹호하고 있고 지동설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교회와의 약속을 어긴 사실을 깨달았으며, 예수회에서는 이 책이 루터와 칼뱅의 설교를 합친 것보다 더 나쁘다고까지 주장했다.
화가 난 교황은 기소를 명령했으며, 이와 동시에 갈릴레이가 1616년에 서약했던 문서가 발견되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위조문서였다고 하지만, 갈릴레이는 이것 때문에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단행위로 기소된 갈릴레이는 1633년 2월 노령과 질병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소환되었으나 특별대우로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다.
4월 12일의 심문에서 갈릴레이는 1616년 문서를 부인했지만,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부정할 것을 선고받고는 순순히 과거의 잘못을 "맹세코 포기하며, 저주하고 혐오한다"고 선언했다.
그 뒤 투옥이 선고되었지만, 교황의 배려로 감형되어 죽을 때까지 피렌체의 집에 자택연금을 당했으며
그의 모든 저서는 금서 목록에 올랐다.
사망 후 묘소를 마련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갈릴레이는 연금기간 동안에도 연구를 계속하여,
1634년에는 그동안 연구한 역학원리와 초기 실험결과를 <두 새 과학에 관한 논의와 수학적 논증>에 담아 출판했다.
1637년 완전히 눈이 멀 때까지 천체관측을 계속했다.
1638년에 완전히 실명했으며, 고통스러운 탈장과 불면증으로 고통받았다.
과학자들과의 서신교환도 그치지 않았고, 1642년 사망할 때까지 제자 비비아니와 토리첼리를 지도했다.
업적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과학적 업적은 크게 천문학과 역학으로 나눌 수 있다.
천문학에서의 공헌은 망원경 관측에 의해 많은 새로운 발견을 한 데 있다.
또 별의 연주시차를 발견했고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케플러 법칙을 무시하고 원운동을 고수한 점이나 중력을 마술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한 점 등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한계였다(→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
역학을 과학의 한 분야로 성립시킨 것도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업적이다.
특히 '힘'과 후에 뉴턴에 의해 공식화된 역학을 수학적으로 해석하여
힘과 운동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했던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고전역학).
과학적 연구 방법으로써 보편적 수학적 법칙과 경험적 사실의 수량적 분석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사후 로마 교황청 및 평가
갈릴레이가 죽은 지 350년이 지난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 재판의 오류를 인정하고 갈릴레이에게 사죄했다.
또한 2019년 1월 교황청은 '가톨릭 교회는 갈릴레이 문제에 매듭을 짓는 한편
그의 위대한 유산뿐 아니라 과학과 종교간 관계에 대한 최종적 이해에 도달하고자 한다.' 는 취지로
갈릴레이의 조각상이 갈릴레이가 재판 받을 당시 감금됐던 장소 부근인 바티칸궁전 정원에 세워진다고 발표했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이용하여 천체를 관측한 400주년을 기념하여
국제연합은 2009년을 세계 천문의 해로 지정했다.
갈릴레이는 근대 관측천문학·근대 물리학·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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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문학자 이순지>
참 훌륭한 인재를 가진 나라입니다
.서양보다 150년 앞서서 지동설을 증명한 세종이 총애한 천문학자 이순지.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李純之)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다.
동양에서는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 다,
주희.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당신이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경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이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고 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았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하였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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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정산내편' 우리말로, 세종때 천문학책
신동립2017. 1. 9. 16:07
【서울=뉴시스】신동립 기자 =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이 완역됐다.
‘세종장헌대왕실록’ 제156∼158권에 실린 우리나라 최초의 자국 역법서(曆法書)를 한국고전번역원이 번역 출간했다.
일월오성(日月五星),
즉 해와 달 그리고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천체의 운행을 추산하는 법을 쓴천문학 책이다.
1442년(세종 24) 세종의 명에 의해 이순지와 김담이 편찬했다.
원나라 ‘수시력’과 명나라 ‘대통력법통궤’를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중국 역서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책력(冊曆)을 제작하고,
한양의 일출입 시각에 맞춰 천문현상을 계산하게 됐다는 데 의의가 있다.
7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 ‘역일(曆日)’은 연중 24기와 매달 삭망의 일시분처, 오행의 용사일 등 역서의 필수항목인 추보법을 다뤘다.
해와 달의 중심차인 영축차(盈縮差)와 지질차(遲疾差) 등 추보에 필요한 값을 산정하는 법도 알 수 있다.
2장 ‘태양(太陽)’에서는 28수(宿)의 적도수도와 황도수도, 적도도와 항도도 사이의 변환, 매일 행도 등을 거쳐
태양의 위치와 12차 입차시각을 산정하는 법을 설명했다.
3장 ‘태음(太陰)’에서는 달의 운행궤도인 백도의 황도정교와 적도정교,
적도적도의 백도정적으로의 변환,
달의 매일 행정도 등을 거쳐 달의 경위도와 교궁(校宮) 시각을 구하는 법을 실었다.
4장 ‘중성(中星)’에서는 혼명과 야각에 남중하는 별자리,
곧 중성의 수도(宿度)를 구하는 법, 5장 ‘교식(交食)’에서는
일식과 월식의 식심(食甚), 휴복 시각과 식분, 교식의 방향 등을 예측하는 데 필요한 모든 과정을 소개했다.
6장 ‘오성(五星)’에서는 목성, 토성, 화성, 금성, 수성의 운행 위치와 교궁시각 산정을 위한 제반 과정,
7장 ‘사여성(四餘星)’에서는 가상의 천체인 자기(紫氣), 월패(月孛),
나후(羅睺), 계도(計都)의 운행 위치와 교궁시각을 구하는 법을 다뤘다.
1, 2권, 강민정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연구원·한영호 건국대 교수·이은희 연세대 천문대 선임연구원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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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지
요약 조선전기 승정원좌부승지, 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 천문학자.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성보(誠甫). 동궁행수(東宮行首)로 있다가 1427년(세종 9)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교리·봉상시판관·서운관판사(書雲觀判事)·승정원좌부승지 등을 거쳐 1465년(세조 11) 판중추원사에 올랐다.
생애 및 활동사항
그는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한 뒤 정인지(鄭麟趾)·정초(鄭招)·정흠지(鄭欽之)·김담(金淡) 등과 같이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저술하였다.
이 『칠정산내외편』의 완성으로 조선의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그 뒤 역법의 계산은 주로 이순지와 김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또, 이천(李蕆)·장영실(蔣英實)과 함께 천문의상(天文儀象)들을 교정, 제작하였으며,
1445년에는 그때까지 조사, 정리된 모든 천문관계 문헌과 이론을 체계화하여 『제가역상집』 4권 3책을 펴내었다.
또, 1457년에는 세종대에 정리되었던 일월식(日月蝕)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고
김석제(金石悌)와 함께 그 법칙을 외우기 쉽게 산법가시(算法歌詩)를 짓고 사용법 등을 덧붙여,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2권 1책을 완성하였다.
이 『교식추보법』은 뒤에 천문분야 관리채용의 1차 시험인 음양과(陰陽科)
초시의 시험교재로 쓰일 만큼 일반화되었다.
산학(算學)·천문·음양·풍수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시호는 정평(靜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