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참으로 다양하게 읽을거리가 풍부하다. 성경속에 감추인 교훈을 알아내는 재미는 참으로 쏠쏠하다. 요새 흥미진진(?)한 우리나라의 최고 권력자의 삶의 흔적과 그 주변의 드라마는 어쩌면 세례요한의 최후를 가져온 스토리와 약간 오버렙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사회참여란 어떤것이어야 할까? 영적(spiritual)이고 육적인 함수들을 성경적으로 사회 방정식에 대입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나님나라를 부르짖던 세례요한은 갑자기 그것과 전혀 관련이 없으면서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다.
마가복음 6장은 세례요한의 강직한 성격을 보여준다. 세례요한을 죽음에 이르게한 살로메는 헤롯왕의 조카이자 의붓딸(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인데 2번 결혼 했다. 첫번째 결혼은 헤롯대왕의 아들과 다른 한번은 헤롯 대왕의 증손자와 결혼했다. 자식은 셋이 있었다 한다. 여기서 헤롯이 여러명 나오는 이유는 로마 왕국의 분봉왕으로 유대를 3분하여 헤롯 가문이 다스렸다. 아무튼 동생(역시 분봉왕)의 처를 간통한 결과로 왕비로 삼았으니 매우 막장 드라마였다고나 할까. 또한 살로메의 모친은 유망한 대제사장 가문의 딸이었다. 그야말로 정략결혼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고 매우 혼탁한 정가의 막장 드라마다.
세례요한은 역시 존경받는 제사장 가문이므로 살로메의 모친쪽과 관련하여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는 헤롯왕의 부정한 결혼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만 세례요한이 죽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일면을 본다.
세례요한이 옥중에서 예수님께 전갈을 보낸다.
"오실 그이(메시아; 왕)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누구를 기다려야 합니까?" 이것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요한의 구명 요청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본 것을 그에게 알려라. 문둥병자가 낫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있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요한과 제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실망스러운 답변이다. 유대인을 구원할 왕이 예수 바로 당신이라면 나를 좀 구해달라는 요한의 요청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세례요한이 구명 요청한 전갈을 보낸 사람이 돌아가자 예수님은 비로소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세례 요한은 나의 길을 예비하는 자다. 하나님나라는 요한을 통하여 예비되었고 지금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가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으나 앞으로 시작되는 하나님나라에서는 어떤 사람도 이에 못지 않은 일을 해 낼 것이다"
그 때 그 분위기를 성경이 자세히 기록해 놓지 않았으나 뒤이어 말씀하신 내용들은 하나님나라의 일로써 매우 비장함이 엿보인다. 세례요한의 죽음을 예감하며(어쩌면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예비하는 그의 죽음)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하나님나라의 왕으로서의 행보는 참으로 애절하다. 이렇게 그의 메시아왕국은 세례요한의 피로써 예비된 거룩한 것이다.
세례요한이 기다리던 메시아 왕국에 대한 대답은 "....문둥병자가 낫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려면 왕궁으로 가라"는 말과 대비시킨다. 세례요한이 죽음을 당할때에 이것을 깨달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는 어떤것이어야 할까? 그 명확한 답이 바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마지막 고별사건에서 말하고 있지 않을까?
예수님의 사회 참여는 "함께 하는 것"이었다. 가난한 이웃, 아픈 이웃, 나그네, 고아, 과부,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그는 친히 찾아가셨다. 그 아픔들을 외면하지 않는 왕으로서의 본분, 세상왕은 착취하고 군림하지만 진정한 왕은 백성들을 보호하고 보살핀다. 하나님나라에서는 이것이 당연시 된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헤롯왕의 부도덕을 경고한 것은 결코 어리석다든지 하지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적인 힘의 균형에서 어떤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도록 지켜봐야 하는 일인 것 같다. 하나님나라의 시각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양심과 규범, 통속적인 가치가 있고 그것에 따라 흘러간다. 그들이 심판하고 그들이 선택한다. 지금 우매한 지도자들을 선택한 것은 바로 우리들 아닌가? 부족한 지도자를 비판하기 전에 먼저 우리들 자신을 심판해야 하고 그 후 우리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항하기에는 사실 우리들은 미약하기만 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통치 방식을 통해 우리는 다음 세상의 희망을 본다. 산상수훈에 따른 이웃관계 방식은 인간이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이상향이다.
역사는 많은 교훈을 남겨준다. 불의한 독재자, 우매한 왕, 부도덕을 일삼는 지도자, 제멋대로 행하는 정치가의 생명이 보기에 역겹고 견디기 어려운 시절 같아도 그 심판의 나락은 분명하게 예정되어 있다. 세상 왕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심판은 훨씬 혹독하리라고 본인은 믿는다.
현 시국을 당하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너무 개탄스럽고 실망스럽고 자격지심이 든다. 당장 만나야 하는 중국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할 것을 생각하면 진짜 쪽팔리고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어려운 시절일수록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소망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 처럼 혼란한 시절에는 더욱 고통받고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누군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혹자는 구제 행위가 우리의 할일의 전부냐고 항의하더라. 그렇지만 예수님이 묵묵히 본을 보이셨던 그것을 우리가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그것을 힘이 닿는 만큼 하면 그 뿐이다. 다섯달란트 받은이는 그만큼 많이, 두달란트 받은이는 그 분량만큼, 1년에 한번이라도 좋으니 일요일 51번 예배당에 갔으면 한 번은 소외된 이웃집에 가서 떡을 나누고 식혜를 나누고 양말을 신겨 드릴 수 있지 않을까?
by 하나님나라 빌더 -iDeaRush-
첫댓글 하나님 나라 백성에 유익한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감사합니다.
더불어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구제 행위는 가르쳐서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저절로 되는 거죠.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로마서 12:15]
말씀하신 것 처럼 성령의 사람이라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지는 듯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속에는
이웃이 즐거워 할때 화를 내고 이웃이 울때 비웃는 자들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