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월요일>(2023. 7. 10. 월)(마태 9,18-26)
복음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8-26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24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마태 9,18-19.23-25).”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생명의 주님’이라는 말은, 인간의 목숨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만
하시고, 죽이는 일은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데도
받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생명을 빼앗기게 됩니다.
즉 멸망을(영원한 죽음과 소멸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쪽에서 생명을 받기를 거부해서 잃게 됩니다.
<얻으려고 하면 얻을 수 있는데도,
노력하지 않아서 얻지 못하는 것은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이제 곧 소녀를 살리겠다고 예고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긴 잠’일 뿐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 때문에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라자로의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요한 11,11-15)”
라자로의 경우에는, 그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틀을 더 머무르신 다음에(요한 11,6),
즉 라자로가 죽은 다음에 그에게 가셨습니다.
회당장의 경우에는,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을 보면, 딸이 죽은
다음에 예수님에게 온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왔고,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마르 5,22-23; 루카 8,41-42).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 때문에 멈추게 되었고,
그 사이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습니다(마르 5,35; 루카 8,49).
표현만 보면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닌데,
전후 상황을 보면 의도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원래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마태 8,5-13),
굳이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지 않아도 됩니다.
즉 말씀만으로 회당장의 딸을 바로 고쳐 주실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은 ‘의도적인’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라자로의 경우에는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에게 라자로의 병을 고쳐 주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믿음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해석됩니다.
회당장의 경우에는, 당신이 ‘생명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계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마태 9,20-22).”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병자의 병을
고쳐 주신 이야기인데, 사실 이 이야기도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사실상 죽은 것과 같은, 또는 죽는 것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하였지만,
아무도 그를 고쳐 주지 못하였다(루카 8,43).”
그 여자의 병은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
‘하느님의 힘’으로만 고칠 수 있는 병이었습니다.
여자는 완전히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그래도 희미하게라도 하나의 희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마르코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마르 3,10).
분명히 여자도 그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직접 간청하지 않고 몰래 옷을 만진 것은, 그 병의 특성 때문에,
즉 수치심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 직접 간청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예수님은 믿지 않고
예수님의 옷만 믿는 미신이 되어버립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믿음이 기적의 원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더욱
굳은 믿음으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 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에 응답하는 방법입니다.
인간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키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바로 그 주님을 믿는 일입니다.>
[출처]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