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11월 일본 미야자키의 한 식당. 당시 일본프로골프투어 피닉스토너먼트 취재차 미야자키를 찾았던 기자는 김종덕, 양용은 등 당시 일본에서 활약 중이던 한국 프로골퍼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식당에 마주앉은 양용은은 "고추장 먹어본 지 5주가 넘었다"고 했다. 양용은은 쉴 새 없이 입으로 고기를 가져가고 있었다. "그러다 체하겠다"고 눙치자, "없어서 못 먹었지, 먹다가 체한 적은 없다"고 했다. 1999년 한국프로골프투어 신인왕 출신이 '없어서 못 먹었다'니 무슨 소린지 궁금했다.
"제가 2002년에 보증금 250만원에 월세 15만원짜리 단칸방에 아내와 아이 둘(지금은 셋으로 늘었다)을 남겨놓고 대한해협을 건넜습니다. 한국상금랭킹 10위 안에 드는 게 목표였는데 1999년에 9위를 했습니다. 1800만원을 받았는데, 세금 떼고 나니 1000만원이 채 안되더군요. 가족을 제대로 책임지는,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일본으로 건너왔습니다. 일본에 놀러 온 게 아니라, 싸우러 온 겁니다."
당시 양용은은 한국에서 신인왕에 올랐을 때보다 40배가 많은 상금을 벌어들인 상태였다. 그는 "물설고 낯선 타국에서 쉽게 적응한 것은 김종덕 프로님 덕분"이라고 했다. 김종덕 프로는 1997년 기린오픈 우승을 시작으로 일본무대에서 활약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일본투어 관계자나 선수들과도 잘 어울린 그는 한국 선수들의 창구 역할을 도맡았다. 선수로서 자기 관리도 철저했다. 7번 아이언 헤드 바닥의 숫자 표시가 1년이면 닳아서 없어질 정도로 악착같은 '연습벌레'였다. 필드에 서면 젊고 패기 넘치는 후배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그는 후배들에게 늘 베풀었다. 양용은은 "함께 연습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고, 또 신세만 졌다"고 했다. 김종덕은 "난 조금 있으면 시니어투어 준비해야 할 '노털 신세'"라며 "후배들이 더 '큰 물'에서 더 멋진 우승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거기에 내가 조금 보탬이 된다면 내 인생도 행복한 편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김종덕이 해외 진출의 어려움을 자상하게 해결해준 '어머니'라면 최경주는 좌절의 아픔에 상심한 양용은을 일으켜 세운 '아버지'나 '형님' 같은 존재다. 양용은과 최경주는 여러모로 닮은 꼴이다. 섬(제주도와 완도) 출신에, 엘리트 교육과는 거리가 먼 늦깎이 골퍼다. 양용은의 표현을 빌리면 '골프 검정고시생'들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봤고, 도대체 포기를 모르는 '불도저' 스타일이다.
최경주는 양용은에게 "일본에 머물지 말고 실력을 더 쌓아서 미 PGA투어에 도전하라"고 충고했다. 3수(修) 끝에 2007년 PGA투어 퀄리파잉스쿨를 통과할 때까지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격려했다. 지난 2000년 최경주가 그랬던 것처럼 양용은 역시 투어카드를 잃고 다시 퀄리파잉스쿨을 거치며 골프 역사를 새로 썼다.
양용은은 최경주에게 '돈 잘 쓰는 법'도 배웠다. 그는 지난 3월 혼다클래식에서 PGA투어 첫 우승을 차지한 뒤 우승상금 100만8000달러 가운데 10만달러를 자선단체인 '사단법인 최경주 재단'에 쾌척했다. 양용은은 이전에도 모교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선행을 베풀어왔다.
언젠가 양용은이 미국무대 진출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꿈을 향해 도전한다면 반드시 기회는 찾아옵니다. 최경주 프로도 그런 마음가짐 때문에 성공했다고 봅니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 실패해도 또 다른 연장전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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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님 거제도는 가을로 연기 되었음니다...갑자기 너무 더워 저서 딸래미 고생 할까바...^^;
그래 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