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그린 뱅크. 미 정부가 지정한 ‘국가 무선통신 제한구역(NRQZ)’의 한복판에 위치한 이곳에선 휴대폰은 물론 와이파이 라우터, 방송 안테나 등 모든 무선기기의 설치와 작동이 금지돼 있다. 때문에 이 마을에서 살아가려면 불편하고 원시적인 아날로그적 삶으로 회귀해야 한다. 그럼에도 무선기술로부터 도망쳐 온 새로운 입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다이앤 쇼는 그린 뱅크의 EHS 환자 커뮤니티 회장이다. 정말 드물기는 하지만 집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기도 한다.
2003년 어느 날 아이오와주에서 남편과 함께 목장을 운영하던 다이앤 쇼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몸에 발진도 일어났고, 두통이 끊이지 않았다. 병원을 찾아가봐도 의사들은 치료는커녕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다이앤은 나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목장 인근에 휴대폰 기지국이 들어서면서부터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났던 것이다. 기지국 근처로 다가갈수록 두통도 심해졌다.
결국 그녀는 남편 버트와 함께 캠핑카에 몸을 싣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목적지도, 기간도 정하지 않았다. 그저 휴대폰 기지국과 문명세계에서 멀리 떨어져야 몸이 편해진다는 생각뿐이었다.
수개월이 흘러 부부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공원에 도착했다. 그때 우연히 만난 산림감시원으로부터 웨스트버지니아주의 그린뱅크 마을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국가 무선통신 제한구역(NRQZ)의 한복판에 있어 무선 전파의 영향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곳이라는 설명이었다.
두 사람은 그린 뱅크를 찾아가 며칠간 머물렀다. 그리고 또 다른 곳을 향해 떠났다. 전자기 시대의 집시처럼 현대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기술과 단절된 장소를 찾아 미 전역을 떠돌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다이앤은 자신의 병명을 알게 됐다. 이른바 ‘전자파 과민증(EHS)’이었다. 자신 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EHS 때문에 고통 받고 있었지만 대다수 의사들은 EHS라는 질환의 존재 자체를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알았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EHS는 의학적 진단명이 아니다. 단지 명확한 생리적 근거가 없는 애매모호한 증상들의 집합체 정도로 본다. 그러나 세상에는 EHS 환자들이 생각 외로 많다.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신경과학자인 올레 요한손 박세에 의하면 각국마다 자신이 EHS 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독일의 경우 전체 인구의 8%인 약 650만명, 미국은 인구의 3.5%인 약 1,100만명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만큼 광범위하게 퍼진 전염병은 많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하루 24시간 전자파에 노출돼 있어요.”
다이앤에게 있어 EHS에 대한 논란은 학자들의 문제다. 주류 학계의 판단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분명 몸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카라과의 섬과 라플란드의 오두막에서 생활하다가도 꼭 그린 뱅크로 돌아왔다.
그러던 2007년 다이앤과 버트는 아이오와주의 목장 절반을 팔아서 그린 뱅크에 주택을 구입했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덕분에 지난 몇 년간 다이앤은 발진도, 두통도 없는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빠졌던 머리카락도 다시 자라났다.
“외부 방문객들이 들고 있는 휴대폰을 보면 아직도 머리가 아프지만 이따금씩 컴퓨터를 사용할 만큼 회복됐어요. 이제 아이오와로 돌아갈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린 뱅크가 제 고향이니까요.”
그녀에 따르면 지금껏 수십 명의 사람들이 첨단기술을 피해 그린 뱅크에서 안식을 찾았다. 또한 매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하지만 전파로부터 벗어나길 원하는 것과 그린 뱅크에 정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그린 뱅크는 인구 143명의 작은 마을이다. 도서관, 우체국, 학교가 하나씩 있지만 주민 대부분은 앨러게니 산맥의 울창한 수목으로 둘러싸인 농장과 주택에서 살고 있다.
3년 전 다이앤은 EHS 인터넷 포럼에서 항공기 조종사였던 멜리사 찰머스와 제인을 만났다. 두 사람 모두 휴대폰과 와이파이가 없는 곳을 찾고 있었기에 다이앤은 그린 뱅크를 소개했다.
작년 11월 필자는 그린 뱅크의 잡화점 옆 ‘그린 뱅크 캐빈스’에서 그녀들을 만났다. 세 채의 오두막집으로 이뤄진 그린 뱅크 캐빈스는 1810년 세워졌는데, 일상을 탈출하려는 관광객들을 위한 펜션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필자는 바로 옆 오두막집을 빌려서 그녀들을 지켜보며 몸의 반응을 살펴보려 했다.
그런데 첫날밤부터 제인에게 문제가 발생했다. 오두막집의 두꺼비집을 내리고 양초를 켜놓은 뒤에도 몸이 가렵다며 안절부절 못했던 것이다. 20분마다 휴대형 혈압계로 혈압을 재보니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 멜리사 역시 불편한 모습이었다. 가끔씩 전자파가 피부에 와 닿는다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전자기파는 피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에요. 마치 빛처럼 몸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온 몸이 영향을 받게 되죠.”
급기야 멜리사는 가방에서 디지털 가우스 측정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벽에 붙어 있는 전깃줄에 들이대고 전자기파의 출처를 찾았다. 측정기가 반응하지 않자 무선주파수(RF) 측정기를 꺼내 허공에 휘둘렀다. 그 과정에서 필자의 오두막집 RF 수치가 그녀들의 오두막집보다 낮다는 게 밝혀졌다. 그렇게 필자는 두 사람과 숙소를 바꿔야 했다.
그린 뱅크가 '국가 무선통신 제한구역'으로 지정된 것은 그 곳에 터를 잡은 그린뱅크 전파망원경의 신호 간섭을 막기 위해서다. 이 전파망원경은 수 km 떨어진 전기철조망의 방전에 의해 데이터 판독에 장애를 받을 정도로 민감하다.
다음날 아침 필자는 이 마을의 랜드마크인 그린 뱅크 전파망원경(GBT)을 보기 위해 차를 타고 3㎞를 달려갔다. GBT는 조향이 가능한 현존 최대 전파망원경이다. 접시안테나의 직경이 무려 100m에 달해 계곡 어디에서도 눈에 띌 정도였다. 이는 그린 뱅크에서 EHS 환자들보다 전자기장에 민감한 유일한 물건이기도 했다.
미 연방정부가 1958년 그린 뱅크를 포함한 3만3,670㎢ 면적을 NRQZ로 지정한 것도 GBT 및 GBT 신호수집소를 전자기 간섭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NRQZ 내에서는 휴대폰, TV, 무전기 등 전자기파를 이용하는 모든 기기의 사용이 철저한 통제 아래 이뤄진다. 또 GBT를 중심으로 반경 16㎞ 내에서는 사용이 전면 금지된다. 즉 EHS 환자들에게 NRQZ는 집 주변에 이동통신 기지국이 생기거나 집안에 스마트 미터기가 설치될 염려가 없는 지구상에 몇 안 되는 장소다.
그렇다고 그린 뱅크 주민들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다. 유선망으로 TV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그린 뱅크에도 전자기파가 전혀 없지는 않다. 사실 햇빛도 전자기파의 일종이며, 지구 전체를 전자기장이 감싸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요한손 박사는 자연 전자기파와 인공 전자기파는 강도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자연 전자기파와 비교할 경우 현대인들이 노출돼 있는 인공 전자기파의 강도는 가히 천문학적 수준입니다. 예를 들어 달 표면에 휴대폰을 놓아둔다면 그 휴대폰은 우주에서 지구로 유입되는 가장 강력한 전자기파의 원천이 됩니다.”
EHS 환자들은 GBT가 우주 전파를 수신하듯 자신들도 통증이라는 형태로 전자기장을 감지한다고 설명한다. 제인만 해도 항공기에 탑승할 때마다 산 채로 구워지는 느낌을 받는다면서 전자기파가 그 원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주류 학계는 그녀의 판단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전자기파는 사람의 건강을 해칠 정도로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EHS 증상이 전자기파 및 무선주파수와 관련 있다는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와 관련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생체공학부 케네스 포스터 교수는 보건당국이 인과관계 규명을 위해 무수한 논문을 뒤졌지만 전자기파가 생명체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전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다면 실험용 쥐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을 때뿐이었죠.”
그렇다. 전자기파가 생명체에 미치는 위해 중 지금껏 확인된 유일한 조건은 조직이 가열되는 것이다. 이에 맞춰 미 연방통신위원회(FCC)도 1996년 ‘열역학적 가열’을 기준으로 무선주파수 방출기기의 안전기준을 마련한 것 외에는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고 있다. 무선기기 제조사들이 법적 안전기준을 충족시켰음에도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거나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자지 말라고 권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15 9 29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조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