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그대에게 잘해줄 의무가 없다.
‘9월 베스트 신간’ 자리에 올려있는 책이라 골랐다. 필자는 ‘페마 초드론’으로 영적 지도자다. 1936년 뉴욕 출신으로 UC버클리 석사로 초등학교 교사로, 두 아이의 엄마로 살다가 이혼한 후 티베트 불교에서 비구니계를 받은 최소의 미국 여인이다. 절대적인 보리심이 발현된 상태가 우리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우리는 이런 한없이 열린 상태에 놓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상태는 너무 취약해서 내 마음이 상처를 받기 쉬운 상황이라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장벽을 세웁니다. 마음에 이런 장벽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려면 결연하게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벽을 허물기 위해선 조심스럽고 세심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벽은 “큰 망치로 때려서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롭고 인간적인 본연의 선량함 속에 머무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평생 배우고 단련해야 합니다.
상대적 보리심 수행의 핵심은 고통 앞에서 마음을 닫지 않고 계속해서 열어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서히 사랑, 연민, 기쁨, 평정이라는 무한한 마음의 특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처럼 큰마음을 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기와 친절이 꼭 필요하지요. 마음의 문을 열고자 할 때 수행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수행법은 마음을 단련하는 로종 수행으로 11세기 불교 스승으로부터 내려오는 방법입니다. 롱렌이라 불리는 주고받기 수행으로, 고통을 받아들이고 기쁨을 내어주는 연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간결한 격언을 통해 습관을 전환하는 경구 수행입니다. 이러한 방법들은 분노, 원망, 두려움, 질투 등 우리가 장애물로 여기는 감정을 깨달음의 자양분으로 삼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보살은 깨어있는 마음으로 행동하려는 포부를 지닌 사람입니다. 스님은 좌선 명상, 통렌 수행, 경구 수행 사무량심 발원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마음인 보리심으로 향하는 문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바라밀(‘저 언덕 너머로 건너간’ 이란 뜻으로 번뇌의 언덕을 넘어 깨달음을 이룬 경지) 이라는 수행 활동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바라밀은 우리가 본래 지닌 기쁨을 가로막는 익숙한 한계를 넘어서는 데 도움을 줍니다. 육바라밀은 연민의 삶을 살아가는 여섯 가지 방식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보시, 지게, 인욕, 정진, 선정, 반야(완전한 지혜 육바라밀 중 가장 고차원적인 앎 임) 입니다.
마음을 닦을 때 중요한 질문은 불확실하고 두려운 상황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가 아니라, 불편함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을 것인가? 입니다. 행복을 부르는 생각과 행동이 무엇이며 고통을 부르는 생각과 행동은 무엇인지를 점차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자애심을 베푸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남들에게 자애심을 베푸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일이 됩니다. 더 나아지려고 애쓰지 말라. 때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영적 수련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명상해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으면 더 나은 사람이 될 텐데’라고 여기는 것은 마치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주변 환경에서 흠잡을 구실을 찾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위한 자애심은 뭔가를 바꾸거나 없애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애심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건 예전과 다름없이 터무니없는 짓을 하고, 불쑥 화를 내고, 지레 겁을 먹고, 질투하고, 하찮은 존재가 된 기분이어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명상 수련은 자신을 버리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친구처럼 다정히 돌보는 연습입니다.
명상하려면, 올바른 자세부터 잡기 시작해야 합니다. 방석이든 의자이든 판판한 곳이어야 합니다. 바닥이면 책상다리 하고, 가부좌를 틉니다. 의자이면 무릎 사이에,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로 벌리고, 양발을 바닥에 완전히 붙인 자세로 앉습니다. 상체는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상반신을 꼿꼿하게 세우고 가슴을 활짝 폅니다. 의자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지 않아야 합니다. 명상 중에 자세가 구부정해지면, 등을 다시 곧게 펴면 됩니다. 손은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게 하고 양쪽 허벅지 위에 올려둡니다. 눈은 깨어있는 모든 일을 수용한다는 태도로 편안하게 뜬 상태를 유지합니다. 시선은 약간 아래쪽을 향한 채 두세 걸음 앞을 봅니다. 입은 턱이 경직되지 않는 편안한 상태로 두고, 입을 살짝 벌려서 입과 코를 통해 숨이 드나들 수 있게 합니다. 혀끝은 입천장에 붙여두면 좋습니다. 좌선 명상은 이 여섯 가지 기준을 따라 자세를 짚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주의가 흐트러질 때마다, 이 기준을 확인하며 의식을 가져와 보세요.
명상하면서, 생각이 떠오르면 그저 생각이라고 이름 붙이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가세요,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전사-보살은 모든 것이 꿈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삶도 꿈이고, 죽음도 꿈이고, 깨어나는 것도 꿈이고, 잠드는 것도 꿈입니다. 삶이라는 꿈은 순간의 경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꿈을 붙잡으려 한다면, 우리 안에 내재한 본연의 지혜가 가로막혀, 그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됩니다. 숨을 내뺐으며 호흡을 의식하세요, 숨이 공간으로 퍼져나가 흩어지는 것을 느껴보세요, 명상 중에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이를 인식하고 이름 붙이는 연습은 편견 없이 열린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데 아주 효과적입니다. 떠오르는 생각은 비눗방울이고 ‘생각이 떠오른다’라고 말하는 건, 깃털로 비눗방울을 아주 조심스럽게 건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명상 수행을 통해 닦은 자애는 네 가지의 특성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흔들림 없이 굳건히 유지하는 힘이 강해집니다. 명확히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려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명상은 조금씩 자신에게 솔직해집니다. 명상은 견디기 힘든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더 커지도록 부채질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둡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을 피하지 않고 경험하는 법을 배웁니다. 명상 중에는 매 순간 ‘지금’에 온전히 머물기로 선택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몸과 마음에 의식을 집중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과 이 세상 전체를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 네 가지 특성은 단순히 명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보리심을 키우는 모든 수행법의 기본이 됩니다.
사성제는 네 가지 진리입니다. 고정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로 불리지요. 고성제는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세상에 본질이 한쪽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 불, 흙, 물 등 우리 주변에 모든 것이 마법처럼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집니다. 날씨처럼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집성제는 우리가 에고라는 부르는 근본적인 작용 방식이 ‘저항’이며, 삶에 대한 저항이 곧 고통을 초래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의 원인은 시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라는 존재에 중독된 데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계속 변화하는 존재이며 다른 모든 생물과 같은 에너지로 이루어졌다는 존재이며, 다른 모든 생물과 같은 에너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저항하며 완강히 버팁니다. 멸성제는 거대한 나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그만둘 때 비로소 고통이 멈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상에서 수행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훈련입니다. 도성제는 우리가 만물을 창조하는 에너지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면, 이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산처럼 흔들림 없이 앉아 있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 일이 우리 뜻대로 풀려야 한다고 고집하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너무 주관적으로 받아들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르마’(우주의 법칙, 부처님의 가르침이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는 어떤 것이 옳은지 그른지 절대 알려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고 이야기할 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서로 소통하려면 말과 글을 사용해야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도 언어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이를테면 ”일상에서의 수행은 그저 모든 상황, 감정,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표현되지요. ‘다르마’를 이런 식으로 전하면, 마치 이 말대로 따르는 것이 옳고, 이를 따르지! 않는 건 잘못된 행동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다르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은 결국 스스로 알아내야 합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라는 의문을 품고 살아가면, 매일의 삶이 매우 흥미로워질 겁니다. 명상을 꾸준히 수행하고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가면서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둠을 헤매던 중에 전등이 한꺼번에 켜지면서,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아름다운 궁전이었음을 알게 되듯, 통찰은 순간적으로 찾아옵니다. 아무도 몰랐던 진리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지만, 실은 늘 그 궁전 안에 있었던 것을 보게 된 것일 뿐입니다. 진리는 이처럼 언제나 단순하고 명백하지요.
2026.10.01.
삶은 그대에게 잘해줄 의무가 없다.
페마 초그론 지음
신동숙 옮김
티마 간행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잠깐 머물다 갑니다.
올려주신 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시간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