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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택(29) - 새 언약 5
98,10,19 이근호 (구득영 정리)
◈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선택에 대하여
(눅 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 시므온이 아기 예수에 대해서, 사람이 흥하고, 패하는 기준으로 보는데, 이는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다.
◈ 시므온은 이스라엘을 전체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선택의 기준이 활동하는 영역으로 보는 것이다.
◈ 칼빈의 선택론의 문제점 - 칼빈이 주장처럼, 구원을 위한 선택으로 보면, 구원의 기준이 인간의 개인적인 의지력으로 인한 자기 선택과 관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이다. “주님이 선택하셨다” 라는 것은, 말은 되지만 현상학적으로는 나타나지를 않는다.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구원받은 우리만 눈이 보이는데, 그래서 선택을 이야기하면서, 그 기준이 눈에 안 보이기에 배제해 버리고 말하는 것이다.
◈ 현상과 성경에서, 과연 현상에서 성경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있는가?
* 그래서 칼빈의 선택론은 선택을 말하면서도 ‘누가 구원을 받았는가’ 로 출발하는 것이다. 신앙을 현상적으로 보는 것이다. 오직 말씀만을 강조하면서도 칼빈이 실제로 다루는 것은, ‘누가 구원받았지요?’ 로 시작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오면 하나님이 선택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다.
* 사도행전을 보자. 사도행전이 말씀만 인가, 아니면 현상적인가? 만약에 현상적이라고 한다면, 책이 열 권이 되어도 모자라는 것이다. 일기 쓰듯이 일일이 다 써야 하는 것이다.
* 칼빈의 선택론은 현상학적으로 출발을 하는데, 성경에서 선택한 자가 있다고 했으니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출발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무교회, 유교회로 나누게 되고, 교회가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즉, 교회를 통해서 성경의 말씀을 증명할 수가 있고, 성경으로 있는 말씀들이 실제적으로 확인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적 사실에서 성경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리가 없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 그런데 현대 철학에 와서 주장하기를, 논리적으로 보니까 현상에서 텍스트로 가는 다리가 끊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고백인데, 이것은 성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단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장자교단’, ‘성(?)노회’ 라는 말이 얼마나 큰 착각인가?
◈ 성경과 교회에 대해서
* 성경의 거룩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오직 주님의 몸만이 거룩한데, 누가 그렇게 나타난 현상을 가지고 거룩하다고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 집단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웃기고 있네’ 라고 생각을 했지만 따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선택을 말하면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 사도행전이 현상적인가, 말씀인가? 말씀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현상적이라면 비디오로 찍어야 하는 것이다. ‘수가 더하니라’ 라고 되어 있다고, 우리 교회가 교인 수가 늘어난다고 사도행전과 같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현상을 정당화해서 말씀으로 넘어올 수 있는 복음적인 다리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따지지 않고 총신 교수들은 무엇을 하는가? 모르면 말고.
◈ 선택에 있어서 바르트와 칼빈 - 칼 바르트는 이 다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다. 칼빈의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는 예수님이지만, 바르트의 예수님은 선택한 자를 건지는 예수님인 것이다. 바르트는 개인적인 현상을 고백하는 예수님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 바르트가 칼빈보다 이렇게 뛰어난 것은, 사실은 뛰어난 것이 아니고, 그 시대의 상황이 이미 칼빈의 모든 이론은 다 실험이 되어졌고, 그래서 같은 칼빈주의라고 해도 각양각색이고, 다 자기의 국가와 교단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더라는 것이다.
*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개신교가 히틀러와 야합을 한 것이다. 롬 13장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그때 바르트는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롬 13장을 따로 떼어내어서 그렇게 해석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 당시 독일의 교회는 1/100 로 십일조를 거두었던 것이다. 자기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잘못인 것이다.
◈ 칼 빈 :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 바르트 : 예수님은 택한 자를 건지는 분이시다
*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이 칼빈의 고백을 했고, 다른 한 사람은 바르트의 고백을 했다. 그렇다면 전자는 예수님보다 자기의 구원에 관심이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 누가 더 성경적인가? 바르트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것은, 그가 칼빈보다 더욱 똑똑한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 이후의 200년 이상의 역사를 보니까, 허점이 바로 그 곳에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 칼빈은 현상적인 교회와 말씀인 성경을 다 함께 섬길 수 있는 것으로 여겼는데, 과연 두 주인이 가능한가? 바르트는 성경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칼빈은 성경으로 교회로 기울어지고 말이다. 교회보다 성경이 작아지는 것이다. 큰 것이 작은 것을 삼켜 버리는 것이다.
* 성경이 교회보다 크다고 한다면, 교회라고 하는 것은 현상이 문제가 아니라 오직 성경에서 말하는 그러한 교회만이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니까 교회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 칼빈의 경우에 성경이라는 것은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해서 성경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경우에는 성경이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 칼빈 : [ 성경 → 교회 ] , 바르트 : [ 성경 → 예수님 ]
*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성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따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기존의 교회를 교회라고 인정하지 않을 때, 성경은 ‘교회인가, 아닌가’ 를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기준으로 내어놓는 것이다.
* 처음으로 돌아가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로 인해 기뻐하는데, 시므온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라가 개판임으로 아무리 보아도 다 선택받은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마치 칼 바르트와 같은 인식이다. 시므온도 율법은 자기 나라에만 있고 자기 조상이 아브라함인 것을 알지만,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보니까, 지금까지는 선택의 기준이 국가였는데, 이제는 아기 예수로 새로 출발을 하는 것이다.
(눅 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 그러나 아기 예수가 표적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비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이 자기 마음을 찌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환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콕 콕 찌른다는 것이다.
◈ 누가복음 해석에 대해서
* 이러한 초점에 맞추어서 하면 누가복음이 풀리는 것이다. 희년, 해방의 날을 언급할 때도, 출애굽을 생각하면서 그곳에서 택한 자를 건져내는 것으로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눅 2: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 목자가 광야에서 천사를 보았을 때, 말할 수 없는 찬양 가운데 있었는데, 그 목자들이 항상 그 영광만 바라보고 살았는가? 천사가 물러나가고 남는 것은 아기 예수이다. 그 찬양이 지나가고 그 자리에 아기 예수가 남은 것이다. 아기 예수가 진정한 찬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천사의 웅장한 찬양 소리가 지나가도 그 자리에 아기 예수만 있다고 한다면, 목자는 하늘나라가 왔음을 아는 것이다. 침묵 속에 외침이 있는 것이다. 그 찬양이 지금 나의 마음을 칼로서 찌르는 듯 하고, 마침내 아기 예수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비록 그 찬양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해도 말이다.
* 아기 예수가 달린 십자가가 있으면 그 장소가 바로 천사의 찬양이 울러 퍼지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보여주는 ‘어둠 속에 빛’ 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심판이며,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누가복음을 계속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 다시 질문을, 과연 현상에서 성경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있는가?
* 누가 이 길을 막았는가? 우리가 교회라는 현상에서 나가면 우리의 선택과 의지력이 개입이 되고, 우리의 판단력이 발동이 되는데, 이것을 예수님께서 가로막는 것이다. 우리들의 의지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직접 선택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 예수님이 선택하시겠다는 것이 걸림돌이고, 본질이다. 걸림돌이라고 하는 것은 깨닫지 못해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자기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넘어진다는 것이다. ‘주님, 잘해보려고 하는데, 왜 넘어뜨리려고 하십니까?’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현상이 계속해서 일어나는가 하니, 종말론적 현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종말론적 현상 - 구약에서 예언한 심판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 !
*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종말임을 보여주시는데, 구약에 예언된 대로 그분이 오셔서 하나도 빠짐이 없이 우리를 심판하시는데, 우리의 판단이나 노력은 전혀 여기에 개입될 수가 없는 것이다. 종말에서는 우리의 것이 전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 눅 14장의 혼인잔치 비유에 보면, 소를 사고 밭을 사는데 바빠서 잔치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지옥에 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판단력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현상을 모르는 것이다. 자기의 판단력이 완전히 무시되고, 오직 주님의 판단력으로 양과 염소가 나누어진다는 것을,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 히 11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죽은 자에게서 도로 받을 것을 믿은 것인데, 이 개뼉다구 같은 말을 누가 믿겠는가? 지금이 중요하지 않는가? 이것을 못 믿으니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심했나?
* 종말론적 현상에서 심판이 그냥 수월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칼이 자기 마음을 찌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도 종말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법칙이 뒤로 바뀌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과거처럼 무엇을 해서 복 받는 그러한 노선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간증집회 등이 인기가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76 페이지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이것은 제자도(弟子道)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하라는 것도 아니다. 오직 내가 선택을 할 것이고, 너는 하는 것이 마귀의 종과 같으니 다 버리라는 것이다. 종말론적 현상이다.
◉ 인간 세계에는 참으로 계획도 많고 희망도 많고 꿈도 많다. 그런데 이러한 계획들이 모두 하나님의 일과 대치되는 사단의 일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계획을 거부하라는 말이다. (책)
* 목회자가 새벽부터 밤까지 계속해서 꾸는 것은 꿈이다. 잘 때 꾸는 것이 꿈이 아니고 말이다. 인간은 한시도 자기의 욕망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이러한 자기 자신을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사탄의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 도가의 사상은 무위사상(無爲思想)인데, 이것은 유의(有爲)를 반대하는 것이다. 뭔가 인위적으로 꾸미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라는 것은 원래 중국의 철학가들이 이러한 무위사상의 뜻으로 말한 것인데, 인간은 자연의 일부임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그러한 인간을 보고, 자신이 마귀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렇게 반드시 죄로 출발을 해야 하는 것이다. - [ 복음의 회복 ]
* ‘죄로 시작하는 바른 복음을 전하면 목회가 안 되겠느냐’ 라고 하는 욕심이 또 삐져서 나오는 것이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몸이기에, 주님이 알아서 만드는 것이기에 그런 꿈은 아예 접어두어야 하는 것이다. 목회는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주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을 증거해야 하니까 말이다. 증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알고 있는 것을 토해내는 것이다. - 알아야 토해내지 !
* 설교를 하면서, 어떤 때에는 너무 설교 준비가 안 되어서 고민이 되는 적이 없었는가? 성경대로 하면 된다. 의외로 정답은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러면 적어도 주님에게 책망을 받지는 않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한 설교가 너무 지나치지나 않았나 하고 걱정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걱정일랑은 하고 나서 바로 잊어버려야 한다. 목회자는 우리가 아니니까 말이다.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마귀의 짓을 하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NO !”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것이다.
* 질문 - 불교에도 회개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
* 답변 - 불교는 아무 것도 없다. 회개라고 하는 것도, 지기 부인, 그 자체이고, 그냥 뭔가를 찾아가는 것이다. 보물을 찾았기에 자기의 소유를 다 파는 것이 아니고, 진주를 찾기 위해 그냥 버린 상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진주는 자기를 버려도 찾기에는 오리무중인 것이다.
* 질문 - 김창호 씨의 글을 보면 자기 부인에 대해서 많은 강조를 하는데 ?
* 답변 - 김창호 씨의 자기 부인은 아직 불교의 수준이고, 글도 아직 많이 멀었고, 이호식 씨의 글은 그래도 조금 참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우리가 안다는 진주란 다른 것이 아니고, ‘세상은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하는 평안함,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여유로움을 즐겨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천국이다. 에덴동산이란 주님만 믿고 우리는 돌아다니면서 놀면 되는 것이다. 주신 것만 먹고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안 먹으면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러한 것을 누리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인위적인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제일 똑똑한 인텔리 계층이다. 그리고 그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하게 살던 자들이다. 서산대사, 안중근, 백범도 마찬가지이다.
*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모든 인간의 행위를 사탄의 일로 간주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 기준인 자기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행위만이 하나님의 일인데, 자꾸만 인간들이 다리가 잘랐다고 한 다리를 끼려고 하니까, 그러면 주님은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 질문 - 이 모임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제일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바로 ‘자기 부인’ 이었는데, 비록 종교의 수준을 뛰어넘지를 못했지만 말이다. 인간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 답변 - 그 내용이 앞으로 나올 것이다. 욥기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77 페이지
(욥 38:25)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욥 38:26)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욥 38:27)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욥 38:28)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 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욥 38:29)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욥 38:30) 물이 돌 같이 굳어지고 해면이 어느니라
(욥 38:31)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욥 38:32)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욥 38:33)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욥 38:34) 네 소리를 구름에 올려 큰 물로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욥 38:35)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그것으로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 이다 하게 하겠느냐
(욥 38:36)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욥 38:37) 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 하겠느냐 누가 하늘의 병을 쏟아
(욥 38:38)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
(욥 38:39)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량을 채우겠느냐
(욥 38:40)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삼림에 누워서 기다리는 때에니라
(욥 38:41)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 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 하나님이 말하기를,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라고 욥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 지금까지 욥은 지금까지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을 하고, 친구들이 말을 듣지도 아니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욥의 이러한 점을 시비를 거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친구들 말이 맞다 라고 인정하시는 것은 더욱이 아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욥의 개인 문제가 아니라, 욥을 쏙 빼버리고 문제를 다루고 계시는 것이다.
*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 각자에게 ‘내가 아니라 누가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가’ 라는 점을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우는 것이 아니다. 나를 빼고 한 번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 수를 센다는 의미를 아는 것이다.
* 우리가 하는 성경공부의 특징이 하나 있는데, 처음에는 불퉁해 하다가 끝이 나면 분위기가 상당히 자유롭다는 것이다. 너무 자유로운데, 이것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얼마가지 않아서 또 선악체계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내가 기도를 해서 효과가 있고, 하지 않아서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흙구덩이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것이다. 자기를 자꾸 집어넣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욥이 ‘사람이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유’를 몰랐던 것은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했기 때문이다. 욥은 비로소 세상을 알고 회개한다. (책)
* 자기 중심으로 아무리 회개를 해고,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기가 고난을 받는 것도 사실은 광야에 비가 내리는 차원인 것이다. 욥에게는 고난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마땅한 것이다. ‘남의 아이는 안 아픈데 왜 내 아이는 백혈병입니까?’ 라고 하나님께 따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 얼마 전에 박사교회 집사님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그 분이 교회의 모든 궂은 일을 다 하시던 분인데, 돌아가셨다고 원망할 문제인가? 히브리서 강해를 듣고 죽는 것이 낫다고 했다는데, 설교를 잘못했는가? 그 분이 젊은 나이(46세)에 돌아가셨다고 원망할 문제가,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다음이 이근호 목사 순서가 아닌지 섬뜩하지 아니한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심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물세례가 무엇인가? 너는 물에 빠져죽었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다. 나무 뿌리에 놓인 도끼가 바로 물세례라는 것이다. 성령과 불로 오시는 것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의 해당사항이라는 것이다.
* 시므온이 왜 기뻐했는가? 연금을 타서 인가? 그가 기뻐한 것은 성령으로 오직 주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메시야를 만났으니 끝났다는 것이다.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 100세가 된 늙은 여 선지자 안나가 기뻐한 이유는 무엇인가? 오래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한 평생을 기다려온 아기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 이것이 성경이다. 아기 예수가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 종말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메시야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의 완성이다.
◉ 지금까지 자기가 고난을 받는 것도 자기 위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님을 발견한다. (책)
* 이것이 말은 간단하지만 이것을 온 몸으로 깨닫기까지는 한 평생이 걸리는 것이다. 그래도 깨달으면 다행이고 말이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이런 생각을 하겠는가?
☞ 하나님의 선택, 178 페이지
◉ 이것이 선택된 자의 특성이다. 모든 권세는 주님에게 있기에 세상 돌아가는 것이 인간 위주가 될 수가 없고 주님이 내리신 언약 위주이다. (책)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 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때가 있으며 안을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때가 있으며
(전 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전 3: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전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 할 때가 있느니라
* 모든 것이 주님의 계획대로 진행되며, 우리는 거기서 쏙 쏙 빠져야 하는 것이다. 찬송가 가사와 같이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이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될 대로 되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나이가 50세가 되어서 아직도 교회에 나오는 바보들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젊었을 때야 멋모르고 나와도, 나이가 들어서 나와 보았자 별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왜 늙어서 교회에 나오는가? 정말 주님에게 관심이 있는가? 대부분은 장로가 되기 위해서 나온다고 볼 수가 있다.
*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영생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데, 영생이란 주님의 살과 피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냥 주는 것인데, 자기가 노력해서 따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복수심으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
◉ 믿음이란, 자기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전부를 바치는 것을 말한다(롬 4:20).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한다(롬 14:23).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는 무엇이든지 약속에 중심 자리를 내어 주고 자기는 그 중심에서 비켜선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바라보면서 명령을 기다린다. 이런 면을 보여야 교회이다. (책)
◈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해서
*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종이 주인을 선택한다. 저 사람이 나의 주인이 될만하다고 찍으면, 그 사람은 나에게 주인이 되고 나는 그의 종이 되는 것이다.
* 언약 - 그러나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불러서 찍어버리는 것이다. 주인이 종을 선택하는 순간에 종은 자기의 의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이 주인이 결정되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이다. 따라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라는 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에 젖어있는 현대인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 ‘독생자만 최고인가’, ‘다른 곳에는 신이 없는가’, ‘우리도 얼마든지 알아서 신을 섬길 수가 있다’ 라는 등으로 반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50점, 부처 100점으로 차별을 하면 섬기겠다는 것이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이미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되었고,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선택할 수 있는 그 어떤 권한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찜’이 된 것이다. 주인이 원해서 말이다.
◈ 그런데 중요한 점은, 우리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현상적인 고백은,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집사님의 말을 듣고 내가 선택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 바로 칼빈의 구원론적 예정론의 위험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 다시 질문을, 과연 현상에서 성경(텍스트)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있는가? NO !
* 현상에서 성경으로 나아가지를 못하는데, 이것이 사탄의 일이라는 것이다.
◈ 칼 바르트의 선택론에 대해서
* 주인과 종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면,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찜’이 된 것이다. 주인이 원해서 말이다.
* 그래서 칼 바르트는 예수님도 선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말이다. 예수님도 선택되었다고 보는 이유가, 찍혔다는 현상 자체가 우리가 만든 현상(고백)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있는 것이기에, 이 현상만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벧전 2:4)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 그런데 바르트의 약점은, 이러한 선택에 대한 현상을 예수님에게서 멈추어야 하는데 하나님에게까지 연장시켜 올라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논의하도록 합시다.
☞ 하나님의 선택, 178 페이지
◉ 예수님은 12제자를 사도로 선택을 하셨다(눅 6:13, 요 6:70). (책)
* 이것은 종말론적 현상으로, 12제자는 새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것이다. 종말론적 현상으로(구약의 예언된 바에) 보면,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새로 짓는데, 이 때 12지파가 주님에 의해서 새로 뽑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렇게 주님이 뽑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뽑는 것이다.
◈ 12제자의 의미 - 예수님이 12제자를 뽑는 이유는, 12제자가 다 구원을 받았느냐를 묻기 위해서 뽑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뽑는 분이 이스라엘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즉 예수님이 이스라엘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12제자를 뽑았다는 것이다. 12제자는 증인이라는 것이다.
* 예를 들어, 파출소에서 일손이 모자라서 ‘버스전용차선 지킴이’를 뽑았는데, 그들은 경찰관 역활을 하지만, 경찰은 아닌 것이다. 경찰이 여기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즉, 12제자들이 자신들은 이스라엘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12제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의 관계 - 이것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나중에 이 12제자들이 교회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우리의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신학자들이 이 부분을 놓쳐버리고서 아무리 연구를 해도, 케제만도 헤매고 있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12제자와 예수님의 관계를 해명하지 아니하고 문제를 풀려고 하니까,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 도무지 풀리지 않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몸이 몇 가지 경우인가? 세 가지이다.
① 하늘에 계시는 영광스러운 몸, 영체(靈體)라는 것이다.
② 교회라고 이름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고 실제인 것이다.
③ 성만찬 때의 떡인 것이다.
* 이 세 가지 종류에 대해서 혼돈이 생겨서 마구 헤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일단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잡고, 교회라는 현상(컨텍스트)에서 성경이라는 텍스트로 가려고 하니까, 이런 조잡스러운(?) 논리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몸 -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12제자처럼 증거하는 것이 첫째 임무이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머리이고, 우리를 지체라고 하는 것은 비유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을 비유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실제 상황이다.
* 질문 - 12제자를 구약의 12지파의 개념(실패했다는 의미에서?)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 답변 - 계속해서 그 문제의 해답이 나올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79 페이지
(마 10: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 10: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 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시는가?
* 종말론적인 현상이기에 구약의 예언들이 다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고 되어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명도 회개를 하지 아니할지라도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메시야임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이스라엘이 성립이 되는 것이다.
* 예수님에게 있어서 관심은, 이방인들에게 가서 숫자를 채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약 말씀의 성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약속의 완성이다.
*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것이 신약에서 다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구원론적 입장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왕이 있었다면, 신약에서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왕을 만드는 작업이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약속 범주 안에서 꼭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영역으로서 택한 민족이라는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다.
◈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인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환경도 제대로 조성이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왕도 그렇게 되어야 하고, 구원받는 자들도 생겨나는 것이다.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약속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제자들이 말을 안 듣는 유대인들은 때려치우고 이방인들에게로 가자고 해도, 예수님은 그 배경도 그대로 이루어야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모든 배경도 다 약속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이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욕심대로 우리나라 땅이 아니고 가나인 땅으로 먼저 가야만 하시는 것이다. 사실 이방인은 약속의 대상이 아니다.
* 성령이 [ 예루살렘 → 유대 →사마리아 → 땅 끝 ] 이런 순서로 진행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예루살렘의 개념은 희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약속이기 때문이다.
* 구원론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을 왜 구원하느냐고 반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을 밉다고 지나쳐버리면,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꾸만 생각을 하는 것이 구원 쪽으로, 즉, 약속에 어긋나게 나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 그래서 설교를 해도, 약속대로만 전하면 되는 것이다. 설교 자체도, 교인들의 반응도 두려워하지 말고 말이다. 그냥 알고있는 범위 내에서 성경을 그대로 전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항상 무대에서는 배우처럼 초조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때는 자기를 성경 속에 숨겨버려야 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왜 12제자를 선택하셨는가? 구약에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세우기 위함이다.
*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그냥 구약의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는 갈 필요도 없고, 가지도 아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약속에서 제외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 소문을 내어도 자기 백성에게 내어야 하는 것이다. 천당에 자리가 비어서 그것을 채우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잃어버린 자를 찾는, 아버지의 뜻대로 약속을 이루는 것이다.
* 조금 전에 질문한 대로, 야곱의 언약대로 하는 것이다. 12 아들을, 즉, 이스라엘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찾아가라는 것이다.
◉ 12사도는 ‘잃어버린 양’의 모집단이다. 이 집단에서는 오직 잃어버렸다가 되찾게 된 그 ‘되찾음’의 사실만이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책)
* 잃어버린 자를 되찾는 이것이 바로 출애굽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사야서를 보도록 하자.
(사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하셨도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66:13)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이러한 사랑이 예수님에게 그대로 전달되어서,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쫓아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시는 것이다.
◉ 세례요한과 예수님과 12사도의 공통된 구호가 ‘회개하라!’이다(막 1:4, 마4:17, 막 6:12). (책)
* 다음 누가복음을 한 번 생각해 보자.
(눅 3: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눅 3:10)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눅 3: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눅 3: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눅 3: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눅 3: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상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정직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 세례요한이 말하는 것과 같이 살려고 하면, 그렇게는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의 제사와 예배와 찬양,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지금 세례요한이 광야에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라는 것이다.
* 예배 갱신, 찬양 집회 등은 세례요한에게는 귀때기를 맞을 일인 것이다. 옷도 벗어주고, 먹는 것도 나누어주고,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는 것이다.
* 회개하라 ! - 회개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종교적인 법칙, 제사제도, 예배 등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윤리, 도덕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옷이 두벌이 있는데, 한 벌을 벗어준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회개를 외쳐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돌아서는 기회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책)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 영화를 보는데, 마지막에 아주 아슬아슬하게 주인공이 절벽에서 매달리어 있다가 구제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상이 지금 마지막이라면,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끝났다. 그러니 회개하자” 라는 것이다. “주님이 오시니 익사하자. 주께서 오셔서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가라지는 불태워버린다” 라는 것이다.
* 매우 간단한 문제이다. 하도 사람들이 종교적인 것을 가지고 꾸미려고 하니까, 문제가 발생을 하는데, 그러나 실상은 간단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주체는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안 보여도 예수님이 해 내시는 것이다.
◈ 부활 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몇 번 나타나셨는가?
(요 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항상 함께 있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실 수도 있지 아니한가?
* 베드로가 도르가라고 하는 여인을 살렸지만 늘 그렇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행 9: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행 9: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 성경은 비디오가 아니다. 일어났던 모든 일을 다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만 전해야지, 자기에게 있는 체험을 끄집어 내어버리면 체험이 계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주님이 항상 나와 같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모르는 것이다.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79, 180 페이지
◉ 선지자 엘리야와 같은 기능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야 최후의 심판 날이 오게 된다. 그렇다면 엘리야의 기능을 하는 자가 누구인가? (책)
* 말라기의 약속대로 하면 엘리야가 와야 되는데, 성경에는 엘리야가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엘리사도 엘리야이다. 엘리야만 불수레를 타고 올라가면 되는 것이다. 목자가 천사를 보았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나는 안 보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증거하면 되는 것이다.
* 나는 왜 베드로처럼 죽은 도르가를 못 살리는가? 교회가 완전히 부흥을 할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 일은 베드로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일의 증인이라는 것이다.
* 엘리야라고 했을 때, 유대인들은 문자 그대로 엘리야가 오는 줄을 알았지, 엘리사가 엘리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엘리사가 한 것은 엘리야가 한 것의 연장선이라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엘리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지막에 오는 엘리야가 담고있는 역할과 사명이 중요한 것이다. 엘리야와 같은 일을 해야 되는 분이 오신다는 것이다. 스가랴가, 이사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일을 담당할 예수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사야 53장이 바로 이러한 예수님을 예언하는 것이다.
(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 그러면 세례요한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보여주는 소리인 것이다.
◈ 성경해석의 기준은?
* 예수님이 오심을 기준으로 해서 세례요한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이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사야의 경우도, 이사야가 미리 그렇게 예언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일 가운데서 이사야가 미리 온 소리로서 그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나, 현 총신교수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 칼 바르트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니까, 김지찬 교수에게서 배운 김대웅이 하는 말이, ‘바르트의 해석은 실제론적이다’ 라고 한 것이다. 연역적이라는 것이다. 즉, 성경을 해석하면서 있는 그대로를 해석을 해야지 미리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면서 분명한 것은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자기 생각만 튀어나오지 무엇이 나오는가? 아무리 구약을 뒤적거려보아도, 예수 그리스도는 안 나오는 것이다.
* 유대인들도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예수가 메시야가 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어디 베들레헴에 아이가 한 둘이 태어났는가? 구약에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태어난다는 것은 나오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분이 예수라는 구절은 없다는 것이다. 임마누엘이면 몰라도.
* 김지찬 교수가 아무리 성경을 강조해도, 현미경을 가지고 찾아보아도 구약에서 예수는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수 천년동안 찾아도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다. 구약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 무조건이다.
* 질문 - 현대 해석학에서도 구약에서는 예수를 찾을 수가 없는가?
* 답변 - 없는 것이다. 현대 해석학이라고 하는 것은, 컨텍스트와 텍스트사이에는 역사라는 다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역사란 무엇인가?’ 하고 연구를 해보니. 역사 자체는 온데간데없고 역사관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관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실존에서 나오는 것인데, 예를 들어, 5.18을 어떻게 보는가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현대 철학에서 현상(컨텍스트)에서 성경(텍스트)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기에, 이들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지금까지 목사님이 주장한 그런 견해를 현대 해석학 학자들 가운데서 주장하는 분은 없는가?
* 답변 - 없다(?). 그들은 이러한 예수님 중심의 해석을 ‘복음적’ 이라고는 하지만, 더 나아가 ‘근본주의 자’ 라고는 하지만, 해석학의 한 견해로는 보지를 않는 것이다. 해석에는 역사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 질문 - 십자가라는 전제가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 답변 - 물론이다. 모든 철학은 다 무(無)전제 라는 것이다. 데릴라가 이것을 밝혀 내었다. 기표와 기의라고 해서, 이들을 아무리 합치려고 해도 서로 미끌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보는 것이 진리인 것이다. - [ 믿음으로냐, 행위로냐 ] 에서 네 번째 논문,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 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 성경에서는 “그” 를 이야기 하지만, 현대 해석학에서는 “나” 밖에 나오지를 않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임해야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유대인들의 해석은 어떠한가? 유대인의 해석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해석학을 공격하시려고, “후손이 어떻게 다윗의 주가 되겠는가?” 라고 질문을 하시는 것이다. 바로 내가 다윗의 주(主)인데, 너희들은 그렇게 성경을 보면서도 나를 몰라보느냐는 것이다.
(마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 그래서 눅 2장에서 시므온의 예언처럼, 마음을 찌르고, 폐함과 흥함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던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기존의 사고방식을 때려부수는 것이다.
* 우리는 지금까지 엘리야의 기능을 세례요한이 제대로 감당하지를 못해서 예수님이 완성하신다고 보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세례요한의 일조차도 예수님 소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책임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이 보내신 것이다.
*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을 보고 누구냐고 질문을 하자, 나는 선지자도 아니고, 다만 소리이고, 그 분이 오시면 내 존재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앞서있다는 것이다.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 그 분이 나를 자기 소개하라고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는 흥해야 되고 나는 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세례요한은 일종의 “M.C” 라는 것이다. Manager of Ceremony 라는 것이다. -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주인공을 소개합니다.”
* 질문 - 그렇다면, 구약을 통해서, 구약을 제대로 알아야 신약을 알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을 알아야 구약을 알 수 있고, 신약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 답변 - YES !
* 시므온과 같은 고백이 없으면 성경공부를 못하는 것이다. 종을 편안하게 놓아주는 그 은혜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행동 하나 하나에는 공포가 스며들어있는데, ‘어떻게 하면 복을 받고, 저주를 받지 않을까’ 하고, 사람들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의식해서 날마다 두려워서 떠는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시므온의 고백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내 행동여하에 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키우기도 하고 부수기도 한다고 생각하니, 불안해서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이다. 거지 나사로를 생각해 보라.
*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불안해하지 않는가? 정말 시므온과 같은 성령을 받았는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시는 것이다. 영덕대게나 죽 죽 빨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 질문 - 죄가 곧 인간이고, 인간이 곧 죄라고 하는데, 죄가 인격화되는 것은 아니니 않습니까?
* 답변 -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죄를 인격화 시켜서 생각을 하셨는데, 다음 시간에 다루도록 합시다. 다음 시간이 죄(罪)에 대한 특집 시간인데, 기대를 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의 선택, 180 페이지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 엘리야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는 점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이야기하는 가운데 들어 난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었다(책)
(눅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눅 9:32) 베드로와 및 함께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선 두사람을 보더니
(눅 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책)
* 우리가 유대인들이 아니기에 이러한 말들이 실감이 안 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진짜 엘리야가 와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진짜 엘리야를 보고 예수님을 보았다.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은 사실은 구약 성경의 일인 것이다.
* 별세(別世) - 그러니 산 위에서 일어난 일이, 이제는 산 아래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가 세례요한 역할을 하면, 예수님의 역할은 누가 하는가? 엘리야와 예수님의 이야기가 바로 별세인데, 그래서 엘리야 역할인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관계가 바로 죽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무슨 말을 하는가? 세례요한을 엘리야로 보지를 않는 것이다. 실제로 세례요한이 아니라 엘리야를 기다린 것이다. 그래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죽는 것은 생각을 하지 아니하면서 초막을 셋이나 짓자고 하는 것이다.
* 그 엘리야의 역할을 누가 하는가? 예수님이다. 모세, 엘리야가 보여 준 것을 예수님이 다 이루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을 임의로 대해서 죽여버렸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이루시는 하시는 것이다.
* 질문 - 예수님은 예수님의 역할을 하고, 엘리야나 모세의 역할은 제자들이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답변 - 그것은 성령을 받고 뒤의 일이다. 지금 제자들은 바보병신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인정했는가? 임의로 대한 것이다. 엘리야가 복음을 전했을 때,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는가?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의로 그들을 대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난 뒤, 부활 때에 모든 것이 완성이 되는 것이다. 모세, 엘리야, 세례요한도 다 실패를 했는데,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셔서, 그것을 근거로 그들을 의인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 그래서 시므온이 편안해한 것이다. 아기 예수를 않고 기뻐한 것은, 자기가 예수를 만남으로 구원을 받았기에 기뻐한 것이 아니고, 나는 당신을 만났으니 평안하다는 것이다. 그 분이 종말에 새로 택한 자를, 이스라엘을 만드신다는 것이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죄 문제와 부족한 것이 있지만, 그것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고, 우리의 죄와 부족을 능가하시는 주님의 완성하심에 감사하게 하시고, 그 분의 영생을, 십자기의 피와 살을 베풀어주신 의로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