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문턱이다.
기온이 뚝 떨어지고 투명하던 하늘색이 곧잘 흐려지곤 한다.
떨어진 낙엽과 빈 들을 바라보면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쓸쓸해지고 한 번쯤 진지하게 인생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 된다. 창백한 사색의 계절인 셈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이율배반적인 존재인것 같다.
마음과는 달리 정신적인 번뇌의 깊이에 어울리지 않게 신체적인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왕성한 식욕이 미각을 탐하게 되는 계절인 탓이다.
이맘때면 햇곡식과 과실이 거두어지고 속이 꽉 들어찬 김장 배추와 무가 시장에 나온다. 일년 중 배추와 무가 가장 맛있을 때이다.
서리가 내리면 배추를 날것으로 먹어도 채독이 없다 해서 생채로, 노란 속고갱이는 쌈장과 함께 아삭아삭 씹히는 미각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다.
나이가 들면 입맛도 바뀌는 것일까. 뜨거운 조개국이나 콩나물국을 먹으면서 시원하다는 말의 뜻을 이해하듯이 가을무의 깊은 맛도 알게 되었다.
두터운 냄비에 무를 듬뿍 깔고 갈치나 고등어를 졸이면 생선보다 무에 젓가락이 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또 옛적에는 입에 대지도 않던 배추전이 자꾸만 먹고 싶어진다.
일요일 오후 배가 출출해질 무렵이면 경상도 내 고향에서 먹던 배추전을 부친다.
통배추의 겉을 벗겨 내고 배추 잎을 한 장씩 뜯어낸다.
깨끗이 씻은 배추의 줄기 쪽을 두드려 편편하게 한 다음 살짝 소금을 뿌린다.
그리고 밀가루를 걸쭉하게 개어서 배추 잎을 두세 장씩 적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부쳐 내는 것이다.
오늘도 배추전을 큼지막하게 두쪽을 만들었다. 큰 접시에 담은 뜨거운 전을 남편은 손으로 찢어 가면 먹는다. 마주 앉은 나 역시 허기진 사람처럼 바쁘게 먹는다.
담백한 배추 줄기와 야들야들한 잎 부분이 밀가루와 기름에 어우러져 감칠맛이 난다. 이순간만은 고급스런 일품요리들도 전혀 부럽지 않다.
맛이란 이렇게 주관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배추전은 번듯하게 손님상에 낼만큼 모양새나 맛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귀한 재료를 쓰는 것도 아니고 손이 많이 가는 음식도 아니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몸에 좋은 보양 식이 되거나 영양가가 높지도 않다.
그래도 이 쓸쓸한 계절, 눈발이라도 흩뿌릴 듯 흐린 날에 뜨끈한 배추전을 먹으면 기운이 나는 것만 같다. 혀에 감기는 감칠 맛, 기분 좋은 포만감에 우울한 마음이 밝아지는 것이다.
남편은 배추전을 먹을 때마다 아이들을 불러서 권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거절하고 만다. 먹어 보고 맛을 판단하라는 제 아빠의 말에 굳이 먹어 보지 않아도 맛을 알 것 같다며 사양하는 것이다. 남편과 달리 나는 절대로 권하지 않는다. 내 어린시절의 미각과 아이들의 그것이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손으로 찢어 가며 배추전을 먹는 우리 내외의 모습을 어떤 시각으로 볼지 뻔히 짐작되어서이다.
입맛은 참 고집스러운 것이다. 고집스럽게 대를 물려 가며 어릴 때 싫어했던 몫만큼 더 보태어 좋아하도록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아무리 부인하여도 입맛도 (환경적) 유전이 된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면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어렸을 때 제사나 명절이 다가오면 친척 아주머니들과 어머니는 큰 대소쿠리에 여러 가지 전을 가득 부쳐 내었다. 부추전과 무전, 고구마, 미나리, 우엉, 연근으로 만든 전을 배추전과 함께 수도 없이 만들어 냈다. 길이 잘 들어 까맣고 반들반들한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무에 기름을 찍어 바른다. 그리곤 능숙하게 갖은 재료로 전을 만들었던 것이다. 떡시루에는 김이 오르고 어머니는 커다란 안반 위에다 절편과 인절미를 빚느라 분주했다. 그 어수선하고 바쁜 와중에 마루나 안방에는 친척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 보따리를 끝없이 늘어놓았다.
그 때 아주머니는 쟁반에 금방 익힌 배추전을 가득 썰어 할머니들이 앉아 노시는 데로 가져왔다. 할머니들은 주름진 얼굴로 함박 웃으며 반색을 하고 치아가 부실한 분도 우물거리며 잘 잡수셨다. 배추전을 드시며
"간도 마침맞고(알맞고) 질부, 애 먹었구마."
하고 치하하는 할며니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분들의 입맛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할머니들의 미각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심하게는 하찮은 배추전에 품평까지 하는 행동을 경멸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른들이 나를 보고 음전하다고 했지만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보였다면 모두들 놀라고 말았을 것이다.
바쁜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잡고 맛있는 것 없냐고 투정을 부리면 어머니는 온 천지에 먹을 것인데 왜 먹지 않고 난리냐며 야단을 치셨다. 삐친 나는 커서 제사를 모시게 되면 저렇게 맛없는 음식은 만들지 않으리라. 배추전만은 절대로 부치지 않으리라, 맛있는 과일만 듬뿍듬뿍 마련하고 쇠고기 산적만 잔뜩 만드리라고 벌렀다.
그러나 설이 되면 나는 배추전을 부친다.
차례상에 올릴 것을 따로 갈무리한 다음 따뜻한 전을 먼저 시어머니께 드린다.
어머님은 배추전을 마다하신 적이 없으시다.
맛있게 흐믓한 표정으로 "너거들도 먹어라"하며 잡수신다.
우리 삼동서도 이마를 맞대고 나누어 먹는다.
배추전을 결혼하고 처음 먹어 보았다는 두 동서들,
"맛나네요, 잉."
"식어도 맛있더라구요"
하며 전을 먹고 있는 두동서들을 바라보며 허물없이 편안한 우의(友誼)를 느낀다.
녹두와 야채와 고기 맛이 어우러진 빈대떡이나 해물을 얹은 파전,
쇠고기와 파를 꿰어 만든 화양적, 불린 표고버섯에 다진 고기를 넣은 표고전,
그리고 깔끔한 새우전을 두고 볼품없이 군데군데 밀가루 옷이 벗겨진 배추전을 더 맛있게 먹는 동서들이다.
동서들처럼 배추전은 나이든 사람이면 금방 입맛을 들이는 음식인 것 같다.
에너지 소비가 줄어드는 나이라서 담백한 음식이 끌려서일까.
십 대나 이십 대의 기호와는 거리가 멀고 나이가 들어 인생의 맛을 본 사람이라야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사람으로 말한다면 마음이 놓이는 상대, 오래 함께 살아온 지아비요, 지어미와 같은 존재랄까. 숨길 것도 새삼스럽게 감출 것도 없는, 그렇다고 깨가 쏟아지게 고소하지도 않고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지도 않은, 매운 맛도 쓴맛도 다 빠져 버린, 들큰하고 물컹한 그래도 씹을 만한 무취, 무맛이 배추전의 특징이다.
볼품은 없으나 입안에서 편안하다. 그냥 부담 없는 음식이다.
배추 한 포기와 밀가루와 소금만 있으면 소쿠리 하나 가득 부쳐 낼수 있어 나눠 먹기도 좋다. 재료값이 비싸지 않고 만들기도 어렵지 않으면서 배는 부르고 살은 찌지 않는 덕이 많은 음식인 것이다.
나이가 드는 만큼 미각의 세계에서도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해지는 것일까.
그 수많은 식욕의 대상과 어설프게 분위기만을 탐하였던 허욕의 대상이 내 입맛의 순위에서 밀려나고 볼품없는 배추전과 같은것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산해진미가 풍성한 뷔페식당의 음식, 고급 레스토랑의 일류 요리와 그 많고 많은 별미 여행 속의 갖가지 요리에서 벗어나 음식을 보는 눈과 맛을 느끼는 혀의 미각도 허세와 허장을 버리고 순수한 맛으로 눈 높이를 낮추는 것이리라.
배추전을 먹으면서 옛 기억과 추억을 음미한다.
돌아갈수 없는 세계, 과거의 사람들과 내가 누린 기억의 조각들을 떠올린다.
어머니, 할머니 , 그 정겨운 친척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 속에서 단발머리를 나풀대며 웃고 떠드는 나의 모습이 비디오 화면의 재생 버튼을 누른 듯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이다.
첫댓글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저는 선배님들의 맛깔난 글을 눈팅만 하고 가는 대구의 44회 후배 이귀옥입니다.우리 2년 후배,한때 같이 교직에 있었던 후배가 수필가로 등단하여 제게 책을 두 권 보내주었는 데 모두 주옥같은 글이지만 그 중에 위의 글 "배추전"은 이 맘때만 되면 다시 읽고 싶어 같이 공유하고자 올렸습니다.사공 후배는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너무 공감가는 글입니다. 저희집 제사때도 꼭 배추전 올립니다.먹을때는 꼭 초고추장에 찍어서 먹구요.그러데 주변 사람들은 그걸 무슨 맛으로 먹냐고 합니다.흉을 보기도 하구요.먹을것이 얼마나 없으면 그런걸 먹냐고...하지만 전 배추전 강추입니다. 지금 이글을 쓰니 배추전이 생각이 나네요..이번 주말은 식구 끼리 배추전 구워서 먹어야 되겠어요~~
배추전을 읽으면서 옛날 그때 모습이 빠짐없이 떠오른다. 나도 어릴 때는 제일 맛없는전이 배추전이라서 어느날 친구들이 모여 집에서 배추전을 부치는데 부치는 사람은 열심히 배추전 얘기 할랴면 끝도 없다 배추전에 떠오르는 할머니 어머니
어른들이 죽 죽 찢어가며 잘 먹기에 어쩌다가 한 입 넣어 씹다가는 몰래 뱉어낸것이 배추전이였어.....
그런데 세월이 흘러 흘러 그 배추전이 맛이 좋아 다른 사람이 빨리 먹을까봐 이제는 먹는 속도가
꿀떡 꿀떡 막 넘어간다 ..
부치는데 앉아 있는 친구가 납죽 넙죽 쟁반을 비우면서 <아이구 맛있다> 하면서 굽는데로 먹어치우는데
너무 얄미워 죽을뻔 했다
아지매들 생각나네
나이가 든 후에 맛있게 느껴지는 배추전.
글에 공감을 느끼며 음미하고 갑니다.
글이 정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맛깔스럽다고 생각했더니 역시 등단한 작가님의 글이었군요. 저도 배추전은 시집와서 처음 먹어봤는데 지금은 전접시에서 제일 먼저 손이 가는 음식이랍니다. 글 읽는 동안 배추전 부쳐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네요. 좋은 글 옮겨 준 후배님 고마워요^^
눈팅을 자주 해서 글로서는 매우 재밌게 읽고 이미 잘 아는 것 같이 느껴지는 여러 선배님들과 후배님의 댓글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실은 대구의 총동창회 까페가 회원가입이 너무 어려워 가입포기를 하고, 재경카페에 총동창회 사진을 올린 적이 있어 자주 들어오게 됬는 데 선후배님들의 글들이 너무 재밌고 댓글 또한 선후배의 정이 담뿍 담겨 있어서 자주 들어와 보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댓글 감사드립니다....^^
배추전을 읽어니 어릴 때 설날이 생생하네요. 손꼽아 맻밤 남았다고,,설빔 입어보고 신어보고,
경상도 특유의 배추전은 추운 때 데우지 않아도 맛있는 전이지요. 다행이 우리 영감 강원도지만 배추전 좋아하고
우리 손녀도 어릴적부터 좋아해요.초고추장의 맛도 알고요. 단백한 맛을 아는 입맛인가 봐요.
28회 선배님이면 연세도 많이 높으신데 컴도 잘 하시고, 글도 잘 쓰시고~~ 존경합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