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그림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 행정조직을 재편하는 일에 자신을 돕도록 8명의 추기경을 임명했다. 이들 가운데 호주 시드니 대교구의 조지 펠 추기경이 있다. 그가 선택된 이유는 그가 오세아니아 지역에서 하나뿐인 추기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며, 교황은 8명을 임명하면서 대륙별 균형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펠 추기경은 이탈리아 일간지 <라 스탐파>와 한 인터뷰에서 교황청에 필요한 개혁 두세 가지를 꼽아달라고 하자 교황청 안에 타자수의 수가 늘고 있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의 인터뷰가 있던 그 주의 주말에, 세계 언론들은 바티칸은행의 한 고위성직자가 이탈리아 당국에 돈세탁 혐의로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로마에는 유능한 타자수가 모자란다는 것보다 더 큰 문제들이 있음직하다.
만약 교황이 교황청의 세세한 내부 문제들을 수술하는 것에만 만족할 것이라면 교황은 현재 가톨릭교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중요 문제들을 다룰 기회를 잃고 말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현재의 가톨릭교회는 보편적(catholic)이 아니다. 종교학자인 휴스턴 스미스가 지적했듯, “유대적 영혼에, 그리스적 사고방식, 그리고 로마적 신체로 구성된 교회는 너무 문화적 한계가 강해서 보편적이 될 수 없다.”
옛날 옛적에, 가톨릭교회는 이처럼 한계가 있지 않았다. 교회가 생기고 사오백 년 동안은 교회가 퍼져 있는 여러 다양한 문화권 안에서 그리스도인 됨의 다양한 방식이 존재했다. 이러한 다양한 방식들은 (로마 전례를 포함해) 가톨릭교회의 여러 전례들 속에 지금도 남아 있고, 정교회도 있으며, 또 “동방” 교회들도 있다. 또한 종교개혁으로 태어난 그리스도교 부분 (개신교)에도 다른 “전례들”이 생겨났다는 생각도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1970년대 이후 서부 아프리카에서의 자이레 용례(Zairean Usage)라는 변형된 로마 전례 미사를 제외하면, 고대 말기와 중세 초기 시대 이후로 가톨릭인의 신앙생활과 예배에 관한 의미 있는 새로운 표현은 전혀 없었다.
1500년 전 또는 그 이전에, 예배하는 방법을 진짜로 알던 민족이 오직 하나만 있었는가? 그렇다면,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닐지라도 우리는 사실상 성령님의 역사는 오래 전에 이미 완성되었으며 하느님의 활기찬 인도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서 취소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옛날의 여러 요소들, 예를 들어 정교회나 동방교회들에서 교회의 중요 방침을 결정하기 위해 시노드(대의원회의)를 여는 것 등은 로마 전례의 제국적 모델보다도 더 현대의 여러 문화권에는 더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러한 정교회나 동방교회들조차 대다수 인류의 마음에 들어맞지 못하고 있다.
간단히 표현해서, 로마 전례든 콘스탄티노플이든 키에프든, 안티오크든, 알렉산드리아든, 아니 그 어디 식 전례든 간에 그 전례를 좋아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전 세계인의 심장에 꽂히기를 바라겠지만, 이제는 6세기가 아니다. 이번에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구세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 출신의 사람이 교황이 된 것을 보면 그것이 명확하다.
가톨릭신자의 수가 가장 많은 10개 나라 가운데 3개만 유럽에 있다.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이다. 나머지는 아프리카의 콩고민주공화국, 아메리카의 브라질, 멕시코, 미국,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그리고 아시아의 필리핀이다. 가톨릭 신자수가 제일 많은 나라는 브라질인데, 위 유럽 세 나라를 합친 것보다 더 많다. 전 세계 가톨릭 신자의 24퍼센트만 유럽에 살고 있음에도 21세기인 지금에도 모든 가톨릭 신자는 6세기 유럽인들처럼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믿고 만나고 있다. 가톨릭 강세 지역에서 (개신교) 복음주의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지난 몇 년 간 로마 전례를 라틴어 원문에 집착해서 번역하고 강요한 것은 일종의 상상력 부족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가톨릭교회가 진실로 보편적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신앙의 실패 문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잠깐 옆길로 새서, 그 문제가 된 “영어” 번역은 펠 추기경이 위원장으로 있던 위원회가 한 짓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시작되었던 진실로 토착적인 전례, 그리고 교회의 단체적 편성의 기회들은 잠깐 열렸다가 거의 닫혀버렸지만, 이제 다시 되살아나야 한다. 사실, 문자적 의미 그대로 뿌리를 다루는 의미에서 우리는 더욱 근본적이 되어야 한다.
현재 가톨릭교회 안에는 로마가톨릭의 라틴 전례를 비롯해 20개가 넘는 다양한 전례가 있지만 막상 신자들에게 물어보면 대개는 2개뿐이라고 답할 것이다. 오르간 전례와 기타 전례. 물론, 둘 다 실제 “전례” 자체는 아니다.
서구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인데, 왜 서구에는 민주적으로 실행된 법에 의한 지배라는 서구적 이상을 실체화한 교회 조직이 없는가? 아시아의 신학이 왜 힌두교나 불교식 사유방식이 아니라 이교적인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가? 세계 각지의 모든 성체 성사가 왜 고대 유럽의 궁정 예법에서 비롯된 전례들로 진행되어야 하는가?
달리 말해서, 우리는 왜 세계 각지에 흩어진 10억이 넘는 가톨릭 신자들이 (각기 자기 문화권에 맞게)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임마누엘,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고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선포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4-50가지의 전례를 가지고 있지 못한가?
그러한 변화가 올 것이라고 희망을 가질 이유가 있다. 펠 추기경이 속기사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이탈리아 당국이 한 사제를 체포하던 지난주의 주말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시노드성을 위해 전진합시다. 그리고 교황의 수위권과 조화하며 성장합시다.”
세계 각지의 지역교회들이 세계교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제대로 된 발언권을 얻게 된다면, 이러한 지역교회들을 위한 새로운 삶의 형태들에 관한 문제를 제쳐놓을 수 있을까?
(윌리엄 그림 신부는 현재 <가톨릭뉴스> 발행인이며, 도쿄에서 일하고 있다.)
기사 원문: Jewish soul, Greek mind, Roman bo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