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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절대적인 신앙 (욥13:14-19절)
시인 윤동주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시 중에 가장 대표적인 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서시를 한 번 암송해 보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인은 의롭고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간절한 인간의 희망을 한 마디 시로 요약하였습니다.
고대에 살았던 욥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저 푸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을 능가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라고 한 것을 보아도 욥은 정직하고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담의 모든 후예들은 죄악 속에서 태어나서 죄악 가운데서 살아갔지만 욥은 그런 와중에도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했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 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얻은 영원한 생명을 담대하게 고백하는 것 같이 욥은 자신의 절대적인 믿음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욥은 자기가 의로운 자임을 밝히기에 앞서 3절에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고 자신 있게 표명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과 변론하고 싶다는 이 말에는 자신의 비참하고 억울한 처지를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고 싶다는 뜻이 들어 있지만 또 한 가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담대했던가를 보여 줍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 앞에 의롭고 담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 많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면하면 하나님의 영화로운 위엄과 거룩함 때문에 즉시 죽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이 말하는 의로움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의롭다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도 신실했지만 동시에 사람들 앞에서도 담대하였습니다. 욥은 그의 세 친구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욥13:13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이 말을 쉽게 번역하면 ‘너희들은 입을 다물라. 나는 무슨 일을 당할 만한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의젓하고 패기가 넘치는 태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면서도 사람은 무척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담대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신약 시대의 선구자였던 세례 요한은 당시 권력을 한 손에 쥐고 휘두르던 헤롯 왕의 불륜을 당당하게 고발했습니다. 물론 이 일로 자신이 잡혀 가서 죽을 것을 잘 알면서도 그를 백성들 앞에 규탄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욥은 자기 자신에게도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욥13:16 경건하지 않는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그는 자기 자신에게 자책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자기 양심에 대해서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자기의 구원이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사람들 앞에 담대할 수 있지만 자기 양심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자기 자신으로부터 무너진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들 앞에 정죄 받고 죄인 취급을 받을 지라도 자기 양심이 떳떳하면 태산 같은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이 만약 남이 모르는 죄악을 짓고도 자신의 의를 주장했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해하는 행위가 되었을 것이나 자신은 이 일에 대하여 결백을 주장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극심한 현세의 재앙에도 하나님께 대한 최종적 구원을 포기하지 않는 욥의 자세는 정말 훌륭합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난과 재앙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다고 원망하지 말고 그 구원에 대한 최후의 소망을 붙들고 있어야 할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군이 아니시므로 비굴한 복종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비굴한 복종과 자기 비하가 결코 신앙의 미덕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평소에 담대한 것은 보통 사람입니다. 그러나 역경 중에 담대한 것은 의인들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한 것은 오로지 신앙인뿐입니다. 진정한 담대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체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영혼의 목소리 같은 것입니다. 오늘은 욥의 절대적인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욥의 믿음은 절대 신앙고백의 믿음입니다.
*욥13;14-15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이 말씀은 영어 성경을 보면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 성경의 번역대로 해석하면 ‘사람이 어찌 죽기 위하여 자기 살을 자기 이빨로 물고, 자기 생명을 자기 손에 두어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서 자기를 죽이실 것이기 때문에 자기는 육신으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지만 자기가 죽은 후에라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기의 신실을 변백할 것’ 이라는 말입니다. ‘RSV, Behold, he will slay me, I have no hope’ ‘그가 나를 죽이실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소망이 없다.’ 욥은 절망 가운데 탄식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특정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저변에 깔고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흘러간 바닷가의 파도에 씻기고 또 씻기어 이제는 자기 모습을 잃어버린 둥근 조약돌과 같이 된 마음, 우리는 욥의 이 고백에서 그런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모진 시련 속에서 이전의 욥은 죽어 없어지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다시 빚어낸 욥이 생명의 피안에서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겠다는 그 생명의 엄숙성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욥은 이제 귀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생명에 대한 소망이 사라졌어도 욥은 하나님을 만날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신앙이란 어떤 종교의 교리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심원한 실체이며 어떤 이론으로도 규명할 수 없는 신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논리적 증명 위에 세워진 수학의 공리와 같은 것이 아니며, 이성에 의존하는 지적인 활동은 더욱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시련을 통하여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며, 인간 존재의 한계성을 인식하는 것이며,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고 완전히 귀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해석은 ‘자신은 아무 허물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살을 자기 이빨로 물지 않을 것이며, 자기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나서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둘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 ‘KJV, Though he slay me yet will I trust in him' 혹은 I hope in him’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을 희망한다. 그 이유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억울함을 아뢸 것이기 때문이라.’ 는 것입니다. 이는 욥의 절대적 신앙 고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즉 하나님 자신의 절대 존재, 절대 창조, 절대 통치, 절대 구원, 절대 사랑, 절대 심판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욥을 창조하셨고, 이 땅에 존재하게 하셨고, 자신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살리시기도 하시고 죽이시기도 할 수 있는 절대 주권, 무상 주권을 가지신 전능자라는 신앙입니다. 후일에 한나의 기도 속에 나타나는 신앙 고백과 동일합니다.
*삼상2:6-8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욥기에는 하나님을 ‘전능자’로 나타낸 표현이 무려 31회나 나옵니다. 이것은 구약의 다른 모든 곳에서 17회만 쓰인 것과 좋은 비교가 됩니다. 욥은 이미 그가 당한 결정적인 죽음의 환난 중에서 하나님 자신의 절대 주권을 바르게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욥1:20-21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렇게 욥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 신앙을 고백한 사람입니다. 절대하신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사화복의 주권자라는 고백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대적처럼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욥19:7-11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참으로 하나님께서 욥에게 가하신 환난의 물결은 연거푸 일곱 번에 걸쳐 원수처럼 나타났습니다.
첫째로, 스바 사람들의 침략을 받게 하여 소와 나귀와 종들을 빼앗겼습니다. 이들은 오늘 날 이디오피아로 알려진 스바로부터 이주한 아라비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이들은 아랍 지역에 주류를 이루고 살면서 값비싼 물품을 교역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역을 주업으로 하는 부유한 상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강도처럼 욥의 소 일천 마리와 나귀 오백 마리를 모두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의 재물은 그대로 두고 오로지 욥의 재물 중에 소와 나귀와 종들만 해친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불이란 일반적으로 번갯불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내리신 유황과 불을 동반한 소나기 같은 것입니다. 이 불비는 7,000마리나 되는 양들을 일거에 소진시켰기 때문에 일정한 곳에 내리치는 번개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이러한 이적의 불을 하늘로부터 내려서 욥에게 파괴적 재앙을 퍼부었습니다.
셋째로, 갈대아 사람들의 침략을 받게 하여 약대와 종들이 절단 나 버렸습니다. 갈대아인들이란 주로 유브라데 강과 힛데겔 강 주변에 흩어져 사는 무리들입니다. 후일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들을 바벨론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군사를 세 부류로 나누어 공격했는데 낙타가 3,000마리나 되었기 때문에 이 많은 무리를 불시에 공격하기 위하여 많은 군대가 왔을 것이며 세 무리로 나누었다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넷째로, 욥의 자녀들이 맏형의 집에서 잔치를 하는데 대풍이 불어와서 집이 무너져 순식간에 열 명의 자녀들이 모두 몰사했습니다. 여기 ‘대풍’은 단순한 태풍이 아니라 갑작스럽고 격렬한 회오리바람 즉 돌풍을 가리킵니다. 미국의 토네이도 같은 거대한 돌풍이 불어 집을 하늘로 날려버렸습니다. 욥은 동방의 거부였기 때문에 이 당시에 이미 바벨탑을 지었던 그런 벽돌로 견고하고 멋진 벽돌집을 지었을 것입니다. 만약 천막에 거했다면 집이 무너진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았을 것인데 그 거대한 벽돌집이 자녀들을 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다섯째로, 욥의 몸에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 앉게 되었습니다. 이 악창은 문둥병 혹은 상피병으로 알려져 있으나 욥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문둥병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욥은 마을 바깥에 있는 쓰레기 더미 위에 앉아 있을 정도로 격리되었으며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지고 가려운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여섯째,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원망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불공평하고 불의한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결과로 받은 것이 고작 이런 저주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하나님을 배반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것은 신성 모독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을 상실하는 단계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사탄의 책략에 결정적 동조자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욥에 대하여 단순한 비방자의 차원을 넘어 사탄의 보조자, 사탄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일곱째, 욥의 친구들과 온 세상이 욥을 저주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모두 욥보다 연장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욥을 조문하기 이전부터 잘 알고 친교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상당한 수준의 학식과 재물을 겸비한 자들로서 정확한 논리 전개와 풍부한 지식을 동원하여 욥과 변론을 펼쳤습니다. 나아가 이들은 하나님의 공의, 성품 등에 대해서도 상당한 신앙 지식을 소유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계속되는 책망과 변론이 욥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습니다.
욥이 당한 재난은 두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1단계는 처음 4가지 재앙입니다. 이는 욥 자신과는 결정적 관련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소와 약대를 잃었고, 나귀와 양을 포함한 가축의 손실과 종들의 죽음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일곱 명과 딸 셋이 급작스러운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네 가지 사건은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간에 다 일어났습니다. 이 네 가지 시련은 단계적 심화 과정을 거처 욥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많은 가축과 종들이 죽고 자녀들이 다 죽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으로 재앙이 발전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욥의 정신적 고뇌와 압박도 점점 가중되었을 것입니다. 제 2단계 시험에서는 먼저 자신의 육체적 질고가 다가왔고, 사랑하는 아내의 저주가 내려졌으며 마지막으로 멀리서 친구들이 찾아와서 면박을 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욥의 시련은 외형적 시련에서 육체적 시련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정신적, 영적 시련으로 심화되어 갔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욥은 ‘나는 하나님을 믿으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 하나님에게만 인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욥은 순경 중에서도 하나님을 잘 믿었지만 역경의 회오리바람이 불어왔을 때에도 하나님에게만 인정을 받으려는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스럽고 복스러운 대우를 받을 때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의 풀무불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이 더 귀하고 사랑스럽고 복스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위로하고 칭찬하였습니다.
*벧전1:6-9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는 이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벧전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정원이나 공원에 피어 있는 백합화나 장미도 그 향기가 그윽하고 자태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산곡에 피어 있는 백합화, 가시나무 가운데 피어 있는 장미가 더욱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순경 중에도 하나님께 절대 인정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려고 원수처럼 달려드는 역경의 때에도 더욱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물론 이 칭찬은 욥이 순경에 있을 때 받은 인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모진 연단을 다 받은 후에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돌아보시고 더욱 넘치는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브엘세바 땅에 에셀 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그늘 아래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평화롭게 살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가 그에게 있어서 참으로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에게 한 가지 시험을 하셨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산 거기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을 양처럼 잡아서 죽여 불에 태워 올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 최대의 역경의 바람이 불어 닥쳤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제단을 쌓고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는 거기서 ‘여호와 이레’를 체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속죄 양으로 예비하신 사건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제로 드렸던 바로 그 어린 양이 이삭의 죽음을 대신했고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다시 아들을 받았습니다. 그가 받은 이삭은 바로 부활의 아들, 영광의 아들, 축복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큰 시험으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믿고 그에게 희망을 가지고 그의 손에서, 그의 눈에서, 그의 마음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겠다는 신앙이 복된 신앙입니다.
2. 욥의 신앙은 경건하고 정의로운 신앙이었습니다.
*욥13:16-18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너희들은 내 말을 분명히 들으라. 내가 너희 귀에 알려 줄 것이 있느니라.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개역성경에는 ‘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곡한 자에 해당하는 말 ‘하네프’는 ‘더러운 자’ ‘불경건한 자’를 의미합니다. 곧 정직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으나 의로운 자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존하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욥의 의는 그의 정직성입니다. 18절에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고 한 것은 욥의 오만이 아니라 정직에서 온 말입니다. 욥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사람들 앞에 정직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욥은 하나님 앞에서도 정직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정직성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15절에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조건은 정직 하나 뿐입니다. 죄가 있고 없고는 차후의 문제입니다. 죄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정직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회개와 사유, 그리고 구원은 인간의 정직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정직을 흔히 더러움이 묻지 않은 순수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지만 하나님은 정직의 아버지이십니다. 욥은 하나님께 변백하는 행위가 그의 무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를 정죄하고 책망하는 세 친구들의 말을 막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피력한 것을 들으라고 합니다. 욥은 자신의 경건성과 정직함으로 인해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세 친구들의 정죄와 책망 속에서도 자신의 무죄성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욥의 믿음은 절대 부활의 내세 신앙입니다.
*욥13: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하나님의 사람 욥은 이 세상에서 죽어도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하나님의 손에서 죽겠다고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만 의존하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나 아무런 피조물을 의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순결을 나타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욥의 신앙은 그가 죽은 후에도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겠다는 내세 신앙의 고백입니다. 욥은 절대하신 하나님만이 그의 이 세상의 시간도, 저 세상의 시간도 주장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보이는 세상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저 세상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양떼, 소떼, 나귀와 낙타에 얽매여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종들이나 자식이나 명예나 부귀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에 얽매여 사는 존재임을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죽음 저 다음의 세상에서는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영화로운 적신의 상태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사후에 저 세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소망하는 것은 영원한 데에 있습니다. 여원하지 아니한 것은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욥의 신앙 속에는 내세와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이 세상에서 자기를 죽일지라도 저 세상에서 자기를 부활시키시는 그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한 야구 선수가 젊은 나이에 갑작스러운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동료 선수들이 하직 인사를 하려고 그를 찾아 문병을 왔습니다. 죽음이 임박했던 그는 동료들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친구들아 이 세상에서는 내가 할 경기를 다 치루었네. 하지만 나는 이제 저 하늘에 있는 올스타 팀에 소속되어 간다네. 이 팀이야말로 영원한 승리의 팀일세. 자네들도 부디 하늘나라 올 스타 팀으로 이적하여 나와 함께 영광을 누리세.’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죽음이 슬픈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기쁘고 즐거운 축복이었습니다. 영원하신 영광의 나라로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이 세상에서 나그네 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중에도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문제가 의문점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의인이 고난을 당한다면 하나님은 과연 계시는가. 과연 하나님은 의인을 높이시고 악인을 심판하시는가. 과연 하나님은 공의로운 존재이신가. 그렇다면 이 세상 역사가 어찌 의인의 편에 서지 않고 악인들의 무대처럼 보여지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형통하지 못하는 고난의 파도를 계속해서 보내시는가. 이러한 질문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가 욥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통하여 그 대답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믿으리라.’고 한 말입니다. 욥의 이러한 절대 신앙은 하나님은 절대하신 존재로 항상 계신다는 그의 고백인 것입니다. 성도는 어떠한 죽음의 연단 중에라도 그 절대하신 주권의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불같은 연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를 시험하는 시험의 무대입니다. 이 시험을 통과한 자만이 내세의 부활을 내다보는 소망의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을 통하여 아브라함도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험을 통하여 바울 역시 부활 소망의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욥의 신앙을 통하여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시험을 이겨내고 부활 신앙을 가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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