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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인생
□ 본문 : 창세기 49장 29절 - 50장 14절 (봉독 49장 29-33절)
누구나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무엇을 소망하며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없는 인생은 두려움으로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하나님, 천국, 지옥 등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에 ‘나는 이제 지옥으로 간다’ 소리치며 죽었습니다.
평소에 자신이 죽음조차 초월한 것처럼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효진 장로님은 교도관으로 있으면서 많은 사형수들의 마지막을 지켜보았습니다.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던 흉악범도 사형장으로 향할 때에는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합니다.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사형수 중에 도인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죽음을 초월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는데 막상 사형장으로 향할 때에는 다리를 덜덜 떨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쇼를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의 죽음과 장례에 대한 기록입니다. 49장 29절부터 33절까지의 야곱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 없는 평안입니다. 이제 곧 죽는데 마치 먼 길 떠나는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당부하는 것 같은 평안한 분위기입니다. 또 하나는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자연스럽게 영원한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29절 말씀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1. 야곱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야곱은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라고 말합니다. 원어를 직역하면 ‘나는 나의 동족에게로 모아지기 시작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천국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표현이 매끄럽지 못하지만 생명이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더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고, 주신 생명을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슬픔이 있습니다. 야곱처럼 편안하게 죽지 않고 병상에서 고통 가운데 마지막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고통은 다른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실제로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장자의 축복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에서의 약점을 이용해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삽니다.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방법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축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신다면 누가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의 사명을 야곱에게 맡기신다면 누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장자로 태어난 에서가 막을 수 있습니까?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하는 이삭이 막을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거나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야곱이 고난을 통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깨달아갑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자신의 생명과 같았던,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했던 베냐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43:14) 하며 형들과 함께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냅니다.
베냐민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베냐민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베냐민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한 것입니다. 베냐민의 생명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베냐민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재물도 자녀도 자신의 생명까지도. 그래서 야곱은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가난으로 두렵고, 질병으로 두렵고, 직장생활의 어려움으로 두렵고, 사업이 안 될까 두렵고, 자녀들의 문제로 두렵고, 인간관계의 문제로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그 뿌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내가 주인노릇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은 두려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부분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한 베냐민, 내가 주인노릇하고 있는 베냐민을 맡길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 생명을 맡길 때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 지난 수요일에 야스시 상과 유미 상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결혼은 늘 귀하고 복되지만 두 사람의 결혼식은 저에게 더욱 의미가 있었습니다. 오오타 집사님께 늘 유미 상의 결혼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어쩌면 저희 아이들 결혼보다 유미 상의 결혼을 위해 더 기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유미 상이 좋은 사람을 소개받아서 선을 보러간다고 했습니다. 꽤 먼 곳이었습니다. 소개받은 사람과 결혼하면 우리교회에 나올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믿음의 배우자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우리가 기도한 것과 달랐습니다. 물론 결혼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만남이 아니라는 마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유미 상에게 선을 보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쉽지 않은 권면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달린 문제입니다. ‘목사님, 그 때 목사님이 선보지 말라고 해서 순종했는데 이게 뭡니까? 만약 그 때 그 사람과 결혼했으면 좋았을 텐데 목사님 말씀에 순종해서 사십이 넘도록 결혼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유미 상이 순종했습니다. 결혼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과 같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야스시 상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야스시 상과 일대일 양육을 했는데, 마음 밭이 참 좋은 청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미 상을 위해 예비하신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결혼이 더욱 감사했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결혼식 설교 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20분 안에 식을 마쳐야 해서 못했습니다. 이런 부분이 조금 아쉬웠는데 결혼식 때 못해서 오늘 합니다.
야곱은 죽음 앞에서 평안합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야곱의 마지막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두려움 없는 인생을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물질의 문제입니까? 건강의 문제입니까? 직장의 문제입니까?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입니까? 죽음의 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의 주인 되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오늘 예배시간에 두려움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어서 평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인간관계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관계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왜 이런 사람을 만나게 하셨습니까?’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마십시오. 야곱은 첫째로 태어난 에서와 싸워서 이기려고 했습니다. 그럴수록 에서가 두려웠습니다. 에서가 사백 명을 이끌고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십니다.(32:25) 여전히 주인 노릇하고 있는 야곱의 자아를 치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주인이심을, 하나님이 모든 관계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게 하십니다. 자아가 꺾어지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나니 에서가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복수를 위해 사백 명을 이끌고 오는 에서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도 가장 앞에 서서 말입니다.
저는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얍복 강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내가 관계의 주인이 되어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 때문에 시험에 드는 신앙생활이 오늘 이 시간으로 끝나기 원합니다.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가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시험거리가 되는 그 사람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느냐 인정하니 않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모든 관계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래서 사백 명을 이끌고 오는 에서를 향해 평안함으로 나아갔던 야곱에게 임한 은혜가, 여러분에게도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자신을 보며 낙심하고 절망하고 두려워하십니까? 우리는 약합니다.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 주인노릇하면 깨어지는 일밖에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여기저기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십시오. 그래서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2. 야곱은 천국소망으로 살았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돌아갈 곳을 알았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있는 곳, 아브라함이 있는 곳, 이삭이 있는 곳을 알았습니다. 천국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천국에 돌아갈 것을 알았습니다. 야곱은 천국소망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평안을 누렸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돌아갈 곳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천국 소망으로 살고 있습니까? 천국 소망으로 인하여 더 이상 세상이 부럽지 않습니까?
창세기 50장은 야곱의 장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총리의 아버지가 죽은 것입니다. 애굽을 구한 요셉입니다. 애굽을 살린 요셉입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그에 준하는 장례식을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을 다스리는 총리로서 애굽의 관례를 따라 야곱의 장례식을 거행합니다.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야곱의 명령대로 야곱의 시체를 가나안 막벨라 밭의 굴에 장사하려면, 40일 동안 향료를 넣어서 시체가 썩지 않도록 미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나안에 가는 도중에 시체가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애굽 왕이 죽었을 때 큰 소리를 내며 우는 공식 애도기간이 칠십이일 이었는데, 야곱의 죽음에 애굽 사람들이 칠십 일 동안 곡하였습니다.(50:3) 그러니까 야곱의 장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에서 이처럼 상세하고 존경스럽게 기록된 장례는 다시없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인생을 원합니다. 살아 있을 때도 이런 권세를 누리고 죽어서도 이런 영광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돌아갈 곳이 천국이 아니라면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자신의 장례식이 이렇게 치러질지 알았을까요? 만약 자신의 장례가 애굽 왕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치러질 것을 알았다면 가나안 막벨라 굴이 아니라 애굽에서 장사되기를 원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은 이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애굽에서 장사되는 것과 막벨라 굴에 장사되는 것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왕과 같은 장례식이 거행되고 돌아갈 곳이 지옥이라면 그 죽음은 저주의 죽음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초라한 장례식이라도, 심지어는 아무도 슬퍼해주는 이 없는 죽음이라도 돌아갈 곳이 천국이라면 그 죽음은 축복의 죽음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순교자들의 죽음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가 순교한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순교했으니 당연히 장례식도 없습니다. 오히려 죽인 자들의 비웃음소리만 들립니다. 이들의 장례식은 천국에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장례식이 아니라 천국 환영식이요 승리의 축제입니다.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마지막은 없습니다. 야곱은 화려한 애굽에서 천국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천국소망으로 날마다 평안을 누리다가, 죽음의 순간에도 평안하게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죽음 앞에서 이렇게 평안할 수 있을까요? 죽는 순간이 와 봐야 알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평안을 누리는 사람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걱정과 낙심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두려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을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천국의 평안이 여러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다면 천국 평안은 없습니다. 천국을 지식으로 아는 것과 천국을 소망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14:2,3)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예수님과 다시 만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천국을 믿는다면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영원한 것을 발견했는데 어떻게 잠시 있다 사라져버릴 세상에 소망을 두겠습니까? 진짜를 발견했는데 어떻게 그림자와 같은 세상에 소망을 두겠습니까?
천국을 믿는 사람은 천국을 소망합니다. 그래서 천국 평안을 누립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소망하는 사람에게는 천국 평안이 없습니다. 세상도 평안을 줍니다. 그러나 세상 평안은 작은 일에도 무너져버리는 거짓 평안입니다. 천국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작은 문제 앞에서도 사라져버리는 세상 평안으로 사는 것은 천국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나는 정말 천국을 믿습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왜 천국 평안이 없습니까? 왜 이렇게 작은 일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합니까?’ 이런 분이 있다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이 믿어집니다. 천국소망을 품게 됩니다. 천국 평안이 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거짓 소망으로 가득 찬 세상이 부럽지 않습니다. 애굽의 화려함이 부럽지 않습니다. 천국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이 은혜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33절 말씀입니다.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33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이렇게 이르고 나서, 침상에 똑바로 누워 숨을 거두고, 조상에게로 돌아갔다.”
3. 야곱은 사랑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야곱이 평안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마지막으로 아들들에게 명한 것은 자신을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직전에는 아들들을 향해,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이 조상이 될 이스라엘 12지파를 향해 예언했습니다. 예언을 마친 야곱은 자신의 장사에 대해서 말하고 침상에 똑바로 누워 숨을 거둡니다.
아들들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침상에 똑바로 누운 야곱의 모습이, 마치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모두 감당했습니다. 이제는 마음 편히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침상에 똑바로 누워 숨을 거둘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야곱이 감당한 사명은 무엇입니까?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는 통로가 되는 믿음의 자손을 세우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의 사명을 다음 세대에 이어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삭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야곱도 그렇게 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의 사명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 가운데 유다가 이어받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지파를 통해 이 땅에 오십니다.
그런데 야곱까지와 야곱의 다음 세대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야곱까지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해서 여자의 후손의 사명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부터는 한 사람이 아니라 한 민족을 택하십니다. 그것이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조상이 되는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중요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는데, 이스라엘 열두지파는 구약의 구원받은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열두 사도가 신약의 구원받은 백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는 이십사 장로는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를 합한 것으로, 구원받은 모든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이와 같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는 야곱의 아들들은 어떤 아들들입니까? 장남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침상을 더럽혔습니다.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는 잔인한 살인자들이었습니다. 넷째 아들 유다는 신앙공동체를 떠나기도 했고 며느리 다말과 동침합니다. 시기와 질투로 열 명의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팝니다. 이것이 야곱의 열두 아들들입니다. 어떻게 이런 아들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아들들이 구약의 구원받은 백성들을 대표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야곱의 사명은 이 열두 아들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고, 이 열두 아들들이 구약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대표가 될 수 있도록, 이 말도 되지 않는 열두 아들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품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사명이었고, 야곱은 이 사명을 끝까지 감당했습니다. 이 사명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사랑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침상을 더럽힌 르우벤도, 무서운 살인을 저지른 시므온과 레위도, 공동체를 떠나 방황하다가 며느리와 동침한 유다도, 끝까지 품고 갑니다. 끝까지 사랑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예수님을 전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의 사명은 사랑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야곱의 인생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인생임을 깨달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야곱은 애굽 땅에서 가나안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소망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열두 아들들을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사랑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야곱은 진정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누렸습니다.
야곱은 장차 오실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이와 같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계신 천국을 소망하고,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사는 인생은 죽음도 두렵지 않는 평안이 있습니다. 천만인이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두렵지 않은(시3:6) 평안,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두렵지 않은(시46:2,3) 평안이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사는 평안의 사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