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 아닌 현실에서.. 경기도 농촌기본소득 실험 성공할까
한겨레 2020.12.07.
농촌지역 한 곳에 '지역화폐\' 지급
내년 하반기 정책실험 앞두고
목적·방향 적절성 놓고 갑론을박
실험·비교집단 분석이 핵심이지만
두 집단 간 동질성 확보 쉽지 않아
핵심목표·평가지표 무엇으로 할지
대상 집단 선정·지급액 규모도 과제
경기도 "고령화·인구소멸 농촌에
얼마나 효과 있는지 정책 검증 목적"
'지급\' 영향만 검증하는 것은 한계
"동질성·엄밀성·보편성 높여야"
지난 9월15일 경기 수원시 권선구 농촌진흥청의 시험재배논에서 관계자들이 벼를 베고 있다. 연합뉴스
경기도는 내년 하반기에 농촌지역 한 곳에서 ‘지역화폐'를 모든 주민에게 지급하는 ‘농촌기본소득 사회실험'을 계획하고 있다. 전세계 기본소득 지지자들의 연대기구인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에 따르면, 기본소득이란 ‘모든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개별적·정기적으로 지급되는 현금'이다. 정책실험은 자연과학의 실험 기법을 사회과학에 적용해 정책(원인)과 효과(결과) 간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연구방법론이다. 자연이 아닌 사회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사회실험’으로 불리기도 한다.
■ 공통점 공유한 기본소득과 정책실험
기본소득과 정책실험은 모두 최근에 부상했으나, 오래전부터 논의된 개념이란 공통점이 있다. 기본소득은 19세기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기 시작했으나, 아이디어의 연원은 1516년에 발간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나 1797년에 출간된 토머스 페인의 <토지 정의>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책실험(policy experimentation)이란 아이디어도 교육학자로 유명한 존 듀이의 1927년 저작인 <현대 민주주의와 정치 주체의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존 듀이는 그 책에서 “정책은 그 영향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인 관찰을 통한 ‘실험'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고, 본격적으로 정책실험에 대한 논의와 사례가 축적되기 시작한 시기는 20세기 후반이었다. 1960년대 미국 미시간주에선 저소득 가구 3~4살 영유아들의 보육환경을 개선하는 정책실험을 했고, 이 아이들이 27살이 될 때까지 추적 조사한 바 있다. 또한 1980년대 미국 테네시주에선 저학년 학생들을 무작위로 두 집단으로 나눠 한 집단은 13~17명의 소규모 학급에 배정하고, 다른 한 집단은 22~25명의 일반 학급에 배정해 학급당 학생수가 학생의 성적에 끼치는 영향을 살펴보는 정책실험을 했다. 영국 정부는 2010년에 설립한 총리실 산하의 행동통찰팀(BIT·Behavioural Insights Team)을 통해 세금 납부, 고용 지원, 건강검진 등의 분야에서 정책실험을 진행했다.
정책실험은 소규모로 정책을 시행한다는 점에서 ‘시범사업'과 유사하지만, 자연과학의 실험 설계 방식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정책실험의 핵심은 정책이 집행되는 집단(실험군)과 정책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집단(통제군)을 나눠 비교분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범사업도 실험 설계의 방법론을 적용하면 정책실험이 될 수 있다.
시범사업 이외에 정책의 사전검증 체계로는 500억원 이상의 신규 사업에 적용되는 ‘예비타당성조사'와 보건·복지 분야에서 100억원 이상 규모의 사업이 거쳐야 하는 ‘신규 보조사업 적격성 심사'가 있다. 하지만 사업비가 기준에 미달돼 심사 대상이 되지 않거나, 국가균형발전이나 국책사업 등의 명분으로 특별법이 제정돼 이 조사가 면제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국내에서도 정책의 사전검증 체계로 정책실험이 적용될 가능성이 있는 이유다.
■ 실험실과는 다른 현실의 세계
정책실험은 꾸준히 논의와 사례가 축적된 분야이고, 최근에는 기본소득과 연계돼 관심을 받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핀란드 정부가 2017년부터 2년간 시행한 기본소득 정책실험이었다. 기본소득 자체가 불평등과 기술실업에 대비하는 새로운 분배체계로 관심을 받고 있지만, 워낙 많은 예산이 들어 단번에 시행하기는 어렵다. 이런 특징도 정책실험과 만나는 계기였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은 과학적인 실험 설계 방식인 ‘무작위 통제 실험’(RCT·Randomized Controlled Trial)이 적용됐다는 점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무작위 통제 실험이란 정책의 영향을 받는 실험집단과 정책의 영향을 받지 않는 비교집단(통제집단)을 무작위에 가깝게 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작위로 배정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마다 정책의 효과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학급당 인원수를 줄인 조처가 학업 성취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나, 다른 누군가에겐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따라서 정책의 효과를 따져보려면 실험집단과 비교집단이 동질적이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고 사회는 실험실이 아니기 때문에 두 집단이 완전히 동질적일 순 없다. 하지만 두 집단의 구성을 충분히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무작위로 배정한다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확률로 동질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은 기초실업보장급여를 받던 17만5222명 가운데 무작위로 2천명을 선정했고, 비교집단(통제집단)은 나머지 17만3222명 가운데 무작위로 선정한 5천명이었다.
하지만 핀란드 실험도 한계가 있었다. 실험 2년차인 2018년부터 정부가 적극적인 구직 노력을 하지 않는 실업자에게 실업급여의 4.65%를 삭감하는 내용이 담긴 정책을 실시하면서 사전에 확보한 두 집단 간의 동질성이 훼손됐다. 현실 사회는 실험실이 아니기 때문에 영향을 받는 다른 요인들을 완벽히 통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경기도 농촌기본소득 정책실험 홍보 포스터.
■ 정책실험 방안 두고 갑론을박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은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경기도 농촌기본소득 정책실험을 직접 설계한 여러 주체와 이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정책실험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실험 설계 방안'을 주제로 간담회를 했다. 이 실험의 설계를 맡은 농업정책연구소 ‘녀름'의 진주 연구원은 “도농 간의 격차 해소, 농촌지역의 고령화와 인구 소멸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본소득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를 검증하는 것”이 정책실험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 목적이 정책실험의 요건인 ‘무작위 배정'과 상충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실험집단과 비교집단의 동질성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완전 무작위 추출을 할 것인지, 혹은 실험 목적을 위해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실험 대상을 선별할 것인지는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밝혔다. 한 지역의 전체 주민이 실험집단이 되면, 실험집단과 기본소득을 받지 않는 다른 지역의 주민은 애초에 동질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는 향후 정책실험 대상 지역 선정위원회를 구성해 인구소멸지수, 고령화, 농어업과 제조업 비중 등의 기준을 적용해 대상 지역을 선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원재 랩2050 대표는 기존에 농촌 한 지역 전체 주민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 정책실험에 ‘무작위 배정'의 요건을 적용한 수정안을 제안했다. 이 대표의 수정 제안을 보면 정책실험의 대상으로 선정된 ‘면’ 지역의 농촌에서 ‘리' 단위로 무작위로 절반을 나눠, 절반의 리 지역 주민들에겐 1년차부터 2년간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나머지 절반의 리 지역 주민들에겐 2년차부터 2년간 기본소득을 지급한다.
하지만 이 방안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한 마을인 리 단위로 실험집단과 비교집단이 선정되면, 그 선정 방식이 무작위라 할지라도 두 집단 간의 동질성은 확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두 집단의 동질성은 충분히 많은 수의 모집단에서 구성원들이 무작위로 배정되어야 확보되는데, 한 개 면에 속해 있는 리는 그 수가 충분치 않다. 농업 종사자가 많은 마을과 어업 종사자가 많은 마을은 당연히 동질적이지 않고, 정책의 효과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어떤 지표를 정책의 효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실험 1년차에 기본소득을 받지 못하는 지역의 주민들도 이듬해부터 2년간 기본소득을 받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고, 미리 행동을 바꾸거나 주관적 상태가 변화할 수 있다. 따라서 정책실험의 결과가 정책에 대한 엄밀한 증거로 인정받으려면 여러 논의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최영준 연세대 교수(행정학)는 “의미있는 정책실험을 하려면 무작위 추출이란 원칙을 어떻게 살리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소득 재분배에 끼치는 영향’ 검증엔 한계
기본소득을 정책실험으로 검증하는 아이디어 자체의 한계도 지적됐다.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는 “기본소득은 기존 사회의 구조와 관계를 그대로 두고서 도입되지 않는다. 조세체계 전반을 흔들며 재원을 마련해야 도입될 수 있고, 정책실험으로는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하면서 미치는 효과 등을 볼 수 없다. 결국 기본소득에 적용되는 정책실험은 기본소득의 반쪽 면모만을 보는 실험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은 그저 현금을 주는 제도가 아니라, 어디선가 재원을 마련해서 현금을 지급하는 양면이 있는 제도인데, 정책실험으로는 ‘지급'의 영향만을 검증할 뿐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불평등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기본소득의 소득 재분배 효과는 주로 지급될 때보다 재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모든 계층에게 똑같은 금액이 지급될 때는 재분배 효과가 거의 없지만, 기본소득의 주요 재원 방안으로 거론되는 누진적 소득세, 토지세, 환경세 등은 공통적으로 소득이나 자산이 많은 이들에게 더 걷기 때문에 강력한 재분배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들 세금제도를 정책실험으로 도입하긴 어렵고, 따라서 정책실험은 기본소득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소득 재분배에 끼치는 영향'을 검증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농촌지역의 문제 해결이 아닌, 기본소득이 우리 사회에 적절한 대안인지를 검증하려면 정책실험의 목적과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해일 고려대 교수(행정학)는 “결국 기본소득이 우리 사회에 맞는 대안인지를 검증하는 게 목적이 아니냐”며 “그런 목적이라면 특수집단이 아닌 평균에 맞는 보편적인 집단에 대한 실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장한일 국민대 교수(정치외교학)도 “정책실험의 결과가 나쁘다면 당연히 정책의 폐기도 가능하다. 불필요하게 세금이 낭비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효과가 나쁜 정책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막아야 하고, 정책실험이 그런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경기도의회 농정해양위원회는 지난달 26일 경기도 농정국이 편성한 2021년도 농촌기본소득 사업 예산 26억원을 원안대로 의결했다. 아직 도의회 본회의 통과가 남았지만, 1차 관문은 통과한 셈이다. 농촌기본소득이 내년 하반기부터 시행되려면 여전히 남은 과제들이 꽤 있다. 실험의 핵심 목표와 주요 평가지표를 무엇으로 할지, 대상 집단 선정과 지급액 규모 결정도 남은 숙제다. 민경록 경기도 농정해양정책개발팀장은 “기본소득으로 확인하려는 효과는 주관적인 삶의 만족도(웰빙지수)를 넘어 일자리 감소 대응 등 다른 차원의 지표가 있어야 한다. 그런 분석을 하려면 지역을 어떻게 선정하고, 분석 범위를 어떻게 정하는지도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형중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정책위원 philyoon2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