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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노인네의 삶이 내겐 꽤 흥미롭다. 예전보다 삶의 속도가 더뎌지고 삶이 가져다주는 귀중한 선물도 적어졌지만, 황혼빛으로 훤히 빛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막 여든둘이 된 한 남자의 이야기. 주인공 기욤은 얼마 전까지 중견 출판사의 대표로 문화계를 주름잡았던 인물이지만, 은퇴한 삶은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하다. 길고양이 한 마리와 연금생활자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뒷방으로 물러앉으니 여기저기 몸도 아프고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마음은 불안하기만 한데...
서로를 돌보고 약해진 마음을 우정으로 달래기 위해 기욤은 친구들과 ‘80대 파리청년회’ 모임을 이어간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소개팅 앱에서 만난 여자와 일흔의 나이에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나선 외눈박이 코코, 이야기가 늘어지고 재미없어지면 언제나 화장실로 도망쳤다가 지병인 전립선을 화두로 던져 대화의 주도권을 잡는 법무사 출신의 옥토, 부부가 서로 말꼬리 잡느라 혈안이 되어 으르렁대는 게르미용 부부, 댄디한 신사이자 유능한 번역자 남편과 은퇴한 파리시 공무원 아내 블라지크 부부, 아흔다섯의 나이가 무색하게 아직도 딸들과 쇼핑을 즐기는 ‘칼주름’ 노나까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 여덟 명의 멤버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식사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노인네들 사는 이야기가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지만 무슨 소리. 늙어도 사는 건 다 똑같다. 여자에게 주책없이 들이대다가 퇴짜를 맞기도 하고, 내기에 져 문신을 새기기도 한다. 부부끼리 별거 아닌 일에 죽기 살기로 싸우고 치사하게 나이를 앞세우는 일도 허다하다. 간혹 넘어지거나 뾰루지라도 날라 치면 서로를 놀려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뿐인가? 질병과 외로움, 불안 때문인지 혼자 있을 때면 ‘또 다른 나’가 나타나 끝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프랑스에서 ‘문단의 교황’이라고 불렸던 남자, 2014년부터 2019년까지 공코드 문학상 심사위원장이었던 이 장편소설의 저자 베르나르 피보는 자신의 실제 이야기와 지어낸 이야기를 적절히 뒤섞어 노년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호기심과 유머, 다정함까지 두루 갖춘 저자의 지혜와 통찰이 귀부 와인처럼 달콤하고 쌉쌀한 여운을 남긴다. 덤으로 행복한 노년을 누리기 위한 몇 가지 레시피와 작은 교훈도 함께 얻을 수 있다.
늙어도 사는 건
롤러코스터
노인들에게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를 하면, 시시콜콜 아픈 곳들을 나열한다. 그리고 잔인한 나이 탓을 해댄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안부 인사는 짧게 끝나는 법이 없다. 80년 정도 살면 어디 한 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알약과 물약, 좌약까지 먹어야 할 약도 한 사발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을 것이기에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도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러니 예민하고 신경질적일 수밖에.
나이 드는 건 정말 짜증 나는 일이다. 암이나 알츠하이머 같은 ‘죽을병’ 때문이 아니다. 마음은 예전 그대로인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게 문제다. 바지에 다리를 집어넣거나 단추를 채우거나, 신발 끈을 묶는 것처럼 평생 일상적으로 해온 동작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느릿느릿 움직여야만 한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일도 할 수가 없다. 그러면 바로 실수를 연발한다. 양손에 서너 가지 물건을 한꺼번에 쥐고 있으면 십중팔구 그중 하나를 떨어뜨린다. 떨어진 물건이 신문이면 그나마 낫다. 하지만 신문을 줍겠다고 몸을 숙이는 순간 우유나 달걀을 놓쳐버려 일이 더 커진다. 바로 얼마 전까지 현직에서 힘과 권력을 가지고 휘두르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 모습은 정말 처량해서 봐줄 수가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인 것을. 그렇다고 과거에 빠져 살면서 다른 사람을 괴롭힐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나이 들고 고약한 성미를 드러내던 윗세대 노인들을 보면서 나는 그러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역시 닥쳐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언젠가 큰일이 닥치면 용기가 부족할까 걱정된다. 몸이 심각하게 무너져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어지면, 과연 누군가에게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까? 오랜 병치레로 생활이 무너지고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도 과연 웃을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성격이 점점 더 예민해져 가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걱정은 많아지고 몸은 말을 안 듣고 성격은 갈수록 예민해진다. 하지만 늙어서 좋은 것도 있다. 이젠 다른 사람 시선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하기 싫은 일 하면서 살기엔 내게 남은 시간이 진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시간을 보낼 자유가 생겼다. 이제까지 사회인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짐을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꿈꾸는 게 가능해졌다.
어르신들의 오늘,
삶은 여전히 아름답다
회고 절정, 노인이 자신들의 가장 아름다웠던 (10대에서 20대까지의) 시절을 미화해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현상이다. 예쁘고 잘생겼던 시절, 꿈과 포부도 컸고 무엇보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젊음이 있었다. 어쩌면 그 시절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나 때는’이 입에 붙었는지도 모른다. 분명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시간 보정으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다.
문제는 노인네들이 그렇게 미화된 당시와 현재를 끝없이 비교하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느라 쓸데없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현재가 탐탁지 않으니 젊은 사람들과도 가까워질 수가 없다. 젊은 사람들도 골치 아프긴 마찬가지다. 뭔지 모를 과거와 끊임없이 비교되는 게 달가울 리 없지 않은가.
내 또래 사람들이 요즘 세상을 한탄하며 50~60년대를 그리워하고, 심지어 1940년대에 대한 예찬론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나도 기가 막힌다. 당시는 전쟁 중 아니었나? 단언컨대 지금보다 당시 상황이 나았을 리 만무하다. 이는 결국 자신을 좀 먹는 불평만 늘어놓으며 쓸데없이 생애 끝자락을 허비하는 꼴이다. 걱정이 많을수록 시대에 대한 비판도 많아진다. 심지어 해가 뜨는 것조차 불편할 수 있다. 이들은 현재가 아닌 과거에서 살아간다. 과거의 시간이 더욱 생생하고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덕분에 이들은 과거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저자 베르나르 피보는 이렇듯 노인이 빠지기 쉬운 ‘과거’보다는 ‘오늘’에 방점을 찍고 있다. 삶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모두 현재를 살아간다. 여든둘이라고 다르지 않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오히려 더 소중하게 느낀다. 오늘이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니까.
여든의 삶과 마흔의 삶, 아니 스무 살의 삶도 본질은 같다. 어느 연령대에 있든, 아무도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살아간다. 하지만 젊어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앞을 향해 달려 나갈 뿐. 하지만 삶의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삶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을 깨닫는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데 집중하게 된다. 끝이 보이지만, 하루하루 소중함을 깨닫고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삶. 생의 끝자락에서 만날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이다.
저자는 죽을 때까지 꿈꾸기를 멈추지 말라고 조언한다. 숨 쉬고 있는 한 오늘은, 삶은 계속된다. 짧게 계획하고 기쁘게 사랑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라 격려한다.
소설을 써보겠다는 젊은 시절의 꿈.
그리고 여든다섯이 되던 해 그의 첫 소설을 세상에 내놓는다. 은퇴한 노년의 삶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아도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하고 싶은 일에 모두 쏟아부을 수도, 낭비할 수도 있다. 이것은 기쁨인 동시에 고통이다. 그는 노년에 주어진 자유와 시간을 젊어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는 데 썼다. 대부분의 처녀작이 그러하듯 자신의 자전소설이다. 하지만 과거에 빠져 있지 않고 자신의 오늘을 돌아보고 다짐하는 이야기다. 고령의 몸으로 살아가는 주인공 자신과 친구들의 일상을 통해 노년의 삶과 그 속에 숨은 묘미, 아직 젊은 사람은 모르는 어르신들의 고민까지 엿볼 수 있다. 노년의 지혜로 포장한 훈계를 늘어놓기보다 솔직한 투정과 반성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도 이채롭고 재미있다.
늙었다고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으면, 결국 시체처럼 누워만 있게 된다. 박차고 일어나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이야기하며 누려라. 오늘을 충실히 살아낸다면 노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저자가 스스로 증명하듯 말이다.
나이를 얼마나 먹었든, 그래도 오늘은 계속된다.
80대 사이에서 ‘잘 지내냐’는 말은 그냥 예의로 건네는 인사가 아니다. 실제 건강 상태에 관한 질문이다. 따라서 대답 역시 대충 건성으로 “나야 잘 지내지. 그러는 자네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생각 없이 안부를 물은 상대에게 기어이 내 몸 어디가 문제인지를 시시콜콜 이야기하며 잔인한 나이 탓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인다. “그것 빼고는 다 괜찮다네. 자네는 어떤가?” (8쪽)
삶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친구들 대부분은 죽는 것보다 꼼짝 않고 지내며 재미난 일 하나 없이 위축된 삶을 사는 게 더 무섭다고 한다. 낮이나 밤이나 별 차이가 없어져 낮도 밤처럼 어둠이 가득한 세상이 될까 두려운 것이다. (42쪽)
우리 앞에 남은 생이 길 때 우리는 시간 부족을 우려하며 열심히 달려간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그 시간 또한 하루하루 점점 줄어가며 조금만 손을 내밀어도 인생의 끝자락에 닿을 듯한 상황이 되면, 우리는 느리게 사는 삶의 매력을 만끽한다. (75쪽)
가끔은 예전에 누리던 힘과 지위가 그립다. 마치 더 이상 무대 위에 오르지 않는 배우가 무대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비슷하다. (77쪽)
나라면 이렇게 이야기할 것 같다. 인생의 어떤 우여곡절이 있어도 관계를 멈추어선 안 된다고. 우리가 먹고 마시고 말하고 읽고 걷고 운전하고 하는 일을 나이 들었다고 그만두던가? 아니다. 그런데 왜 섹스하는 것만큼은 그만두어야 하는 걸까? 물론 상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자제해야 할 수는 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내가 그랬으니까. 병에 걸리거나 우울증이 왔을 때, 연인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먹고사는 문제가 힘들 정도로 궁핍할 때, 배우자와 헤어졌을 때 등 주기적인 관계를 갖기 어려운 장애물은 얼마든지 많다. 하지만 운동하는 습관을 빨리 되찾는 건 몸과 정신 건강에 좋은 일이다. 그로 인해 일과가 아무리 꼬이더라도 연인과 관계를 하는 건 더없이 바람직한 습관이다. (180쪽)
자주는 아니고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언젠가 큰일이 닥치면 용기가 부족할까 걱정된다. 내 몸에 큰 문제가 생기면 과연 누군가에게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까? 오랜 기간 병치레로 생활이 무너지고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진 상황에서 나는 과연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229~230쪽)
내 인생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다.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내 앞에 남은 삶이 어느 정도일지에 연연하기보다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당장 내일을 준비하는 게 더 낫다. 인생의 마침표가 찍힐 날이 최대한 뒤로 미뤄지길 바라면서 잔소리 심한 내 쌍둥이 자아가 조언하는 대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것이다. (295쪽)
변방에서 꿈꾸기. 나이 들기 전에는 사실 꿈이라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어릴 때의 꿈이란 현실의 도피처에 불과했고, 커서는 꿈을 꾼다는 게 결국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의 내게는 젊었을 때의 포부도, 책임감도 없다. 내가 하는 행동, 내가 하는 사고로부터 자유로우며, 앉아서든 누워서든 자유롭게 꿈을 꿀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짜릿한가? 혹자는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깊이 있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성찰과 사색의 필요성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변방에서 계속 꿈꾸는 사람이고 싶다. (298쪽)
외눈박이 코코
외눈박이 라고 별명이 붙은 건 진짜 눈이 한쪽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눈이 가거나 몸이 반응하는 여자만 있으면 항상 한눈을 파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상대는 여성 변호사였다.
ㅡ 바에서 이 여자가 대뜸 나에게 지금 자기한테 작업 거는 거냐고.
제가 여성분께 지금 작업을 걸고 있는 거냐구요? 만약 그렇다고 하면 그건 너무 사기꾼 심보일 거고,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아름답고 매력적인 숙녀분에 대한 모욕 아닐까요?
어때, 이 정도면 썩 괜찮은 답이지?
우리 집에 가서 마지막으로 한 잔 더 하자고 했지.
나같은 나이 많은 사람은 여자들한테 궁금함의 대상이지. 상황이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지켜보자 이렇게.
우리 집까지 곱게 모시고 갔지.
그리고 집까지 다 가서 뭔일이 생긴 거구먼.
그걸 어찌 아셨수?
대문 앞에 도착했는데, 글쎄! 빌어먹을 열쇠를 집에 두고 그냥 나온 거야, 내가!! 뭐 종종 있는 일이기는 한데, 하필이면 이럴때 또 깜빡할 건 뭐람?
그 다음이야 뭐 안 봐도 비디오지. 여자는 내 빰에 작별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가버렸다고.
이 사람, 참 운도 없구먼.
여자는 자신의 최후 변론으로도 남편을 붙잡을 수 없었고, 같은 변호사였던 남편은 젊고 잘생긴 도둑놈과 떠나버렸다. 남편은 이 범죄자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대가로 성의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모양이다. 성의 세계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코코는 그 여자와 만났던 날의 이야기를 풀었다.
코코는 집 밖에 나갈 때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인물 사진의 타이밍을 잘 잡는 아마추어 사진가다.
그런데 여자들을 공략할 때 카메라는 상대의 우려를 살만한 물건이다. 음흉한 관음증 할배로 찍히면 절대 여자의 환심을 살 수 없다. 그래서 코코는 여자를 만나러 갈 때만큼은 카메라를 집에 두고 나간다. 대신 우리와 만날 때는 항상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사진 찍히는 걸 꺼리는 마틸드만 빼면 나머지는 모두 코코가 사진 찍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가 우리를 추하고 못 생기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찍는 게 아니라 주름마저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카메라에 담아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