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선
조선사화의 누선도
남선기의 대황선도
-누선-
◎고려와 중국의 누선에 관한 기록
<고려사>(高麗使)에 태조 왕건이 보유한 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태조는 100여 척의 배를 다스렸는데, 그 중 10여 척의 대선은 각각 길이가 거의 16보(步, 1보는 6척(尺)으로 지금의 180cm에 해당됨)로 갑판 위에 누노(樓櫓)가 있고 가히 말을 달릴 수 있다.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군량을 싣고 나주를 원정했다.”
이 내용은 실제로 배 위에서 말을 달리게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말을 실어 나를 수 있을 정도의 큰 배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중국의 누선(樓船)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왕건은 수군 전함 함대를 직접 이끌고 왕이 되기 전에 다섯 차례, 왕이 된 후에 한 차례, 도합 여섯 차례(903년~935년)에 걸쳐서 견훤의 나주 수군 기지(전 신라의 서남해방수(西南海防守))를 공략하여 936년에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중국 사서에서 누선은 이미 한무제(漢武帝) 때부터 등장하는데 <무경총요>(武經總要, 1044년) 누선조(樓船條)를 보면 “누선은 선상에 3중으로 누(樓)를 세웠는데, 그 중 큰 것에서는 차(車)를 몰고 말을 달릴 수 있었다.”고 표현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 표현 또한 실제로 차를 몰고 달렸다기보다는 배가 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고려 누선의 특징
하지만 태조의 누선이 중국의 누선을 똑같이 모방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굳이 두 배를 비교하자면 중국의 누선은 3층 누각을 두고 한쪽 현에 노를 7개씩 달았으며 범장(帆裝 ; 돛대)은 없다. 태조의 누선은 주로 개경에서 호남 지역을 내왕하는 데 쓰였으므로 노역장치보다는 오히려 범장(돛대)이 더 중요시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고려 태조가 당시에 갑판 위에 상장을 꾸미고 길이가 무려 96척이나 되는 장대한 누선을 운영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누선은 신라 말에 장보고가 사용한 대형 무역선 건조 경험 등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며 조선기술이 그만큼 발달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사용된 일반 군선은 왕건과 견훤이 전쟁 때마다 동원한 군선과 군사의 수가 각각 70~100척, 2,000~3,000명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한 척당 탑승인원이 30명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정원이 30명 정도인 군선의 예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나타나는 중대선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되어 있는 소맹선(小猛船)의 정원도 모두 30명이고, 조선 후기 병선의 승원도 17~36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한국의 역사,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30명 정도가 탑승할 수 있는 군선이 가장 전투하기에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마선-
조운(漕運)이란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곡물로 거두어 선박을 이용하여 임금이 살고 있는 수도로 운반하는 것을 말하는데, 한국에서 조운제도가 처음으로 확립된 것은 고려 초기이다. 고려는 949년경에 남도에 12조창(漕倉)을 설치하고, 세곡을 서해안 해로와 남한강 및 북한강의 수로를 통하여 예성강으로 들여와 개경으로 운반했다. 이때 조운선의 용도로 쓰인 것이 바로 초마선(哨馬船)이다.
고려를 멸한 이성계는 고려의 정치 경제 문물 제도를 그대로 승계하였다. 조운제도나 조운선도 그대로 인수하여 재정비하였다. 조선의 조운선은 고려의 조운선을 승계한 것으로 보아 조선의 조운선을 인용하였다. <각선도본>은 1800년경에 도화서에서 그린 선박에 대한 옛날의 설계도로서 조선을 45도 투시도법으로 배의 만듦새와 모양새를 채색하여 그렸고 치수를 자세히 설명하여 놓았다.
배밑의 길이 : 57자(17.8m)
배밑의 너비 : 13자(4.06m)
배의 깊이 : 11자(3.43m)
<을묘원행정리의궤>에는 조선(조운선)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의궤 속의 조운선은 1795년(정조 19년)에 정조가 수원으로 원행할 때 가설한 주교(배다리)의 다리 받침 배로서 징발되었다. 동호에서 노량지에 걸처서 가설되는 이 주교에는 총 86척의 조운선이 동원 된다.
-중국신안무역선-
1975년 신안 앞바다에서 원대 교역선으로 추정되는 중국의 배가 발굴 인양되었다. 발굴 장소의 이름을 붙여 신안무역선(新安貿易船 , 이하 신안선)이라 했는데, 이 배와 배 안의 유물은 중세 동북 아시아의 정치,경제, 사회, 조선술, 교역, 공예, 미술 등에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당시 이 배는 중국 영파(寧波)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안 발굴 인양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