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제2의 삼일운동이 필요합니다!
또다시 삼일절입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가 한창이던 시절,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거행된 삼일운동은 여러 측면에서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닙니다. 철저하게도 비폭력 평화 시위로 진행되었습니다. 동시에 조선 독립의 초석을 마련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삼일운동은 단기간에 끝났지만, 그 여파는 상당했습니다. 이 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습니다. 국제 사회 앞에 우리 백성들의 자주독립을 향한 적극적인 의지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보다 조직적인 항일 운동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종교계가 주도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천도교 15명, 개신교 16명, 불교 2명이 참여했지만, 안타깝게도 천주교는 단 한 명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민족대표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고 해서, 3·1운동에 천주교 신자들이 전혀 동참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들의 참여는 미미했고 소극적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 교회 지도층 인사들의 그릇된 식별력과 판단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제를 합법적인 정부로, 조선을 일본의 한 부분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독립운동을 반정부 운동으로 단정한 것입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신자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습니다. 나중에는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동참할 것과 신사참배까지 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 같은 경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병자 성사와 미사 요청에 대해 공식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조선교구장은 그를 테러리스트로 간주한 것입니다. 지시를 어기고 성사를 집전한 빌렘 신부에게는 2개월간 성무 집행을 정지시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세월이 흐른 지금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의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그는 이제 독립운동가로서뿐만 아니라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신앙이자 애국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가톨릭 교회가 또다시 시대의 징표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한국천주교회 구성원 전체가 다 같이 노력해야겠습니다. 더 이상 교회 담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포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늘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주요 요직에 친일파들이 득실대고 있습니다. 잠잠하다가도 어느새 독사들의 무리처럼 머리를 쳐들고 활개를 칩니다.
그릇된 지난 시대에 대한 깔끔한 청산에 실패의 결과물이 참담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싹 다 정리했어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능수능란한 친일파들은 어우선하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어느새 자신들의 신분을 세탁하고 또 세탁해서, 새로 수립된 정부의 주류이자 기득권 세력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고 그 명맥을 오늘날까지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청춘과 목숨까지 바쳐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해방의 기쁜 소식을 듣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귀환하셨던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받으셨던 느낌, 그 참담한 심정과 수모가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자국민뿐만 아니라 일본인들, 전 세계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에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를 볼 수 없습니다. 과거를 반성하는 것은 화해를 위한 전제조건 중에 하나입니다. 나치 만행은 독일의 항구적 책임입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엄청난 과오에 대해, 진심이 담긴 사과를 끝까지 하지 않고 있는 일본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거저 이룩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익명의 독립운동가들, 항일 투쟁가들을 비롯한 수많은 물방울들이 모이고 모여 큰 물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대한독립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항일 운동, 제2의 삼일운동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혼란 속에 있는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들을 굽어보시고 지켜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서 빨리 이 야만과 비인간의 시대, 미성숙과 부끄러움의 시대가 지나가고 청산되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르코 10,13-16
어린이의 하느님 나라는 부모다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어쩌면 이 말씀이 마르코 복음의 핵심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해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곧 하느님 나라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주제가 핵심입니다.
먼저 마르코가 설명하려는 하느님 나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지금 마르코는 예수님의 두 번째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유에 대해 풀어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사람을 악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면 사람은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아니면 사람은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창조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웃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까요?
역사적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나라들은 생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이킹’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8세기 당시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살던 북게르만족은 인구가 큰 폭으로 상승하자 그 척박한 땅에서는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육로로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박기술이 발달하자 바이킹은 잉글랜드 서쪽 지역을 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럽인들은 커다란 덩치에 무식한 도끼를 들고 싸우는 바이킹을 당해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이킹은 오딘이란 신을 섬겼는데 싸우다 목숨을 잃으면 오딘의 나라인 발할라로 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투 민족답게 방패 처녀라고 불리는 여성 전사가 전쟁에 다수 참여했고 고위직에 올라간 여전사가 존재했을 정도로 여성의 인권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여전사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약탈하기 위해 오랫동안 집을 떠난 남성들을 대신해 자신의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먹을 걱정이 없다면 목숨을 건 약탈은 왜 하겠습니까?
모든 약탈이 일어나는 이유는 생존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약탈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린이들이 부모의 돈을 훔친다거나 다른 아이들의 것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아이들이 생존에 대해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EBS 부모 – 저, 혼나러 나왔어요’에서는 4학년 남자아이를 호랑이보다 무섭게 체벌하는 어머니가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도 2021년부터 법적으로 아이에게 체벌하는 것은 불법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맞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자신은 매 맞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물론 어머니에게도 이유가 있습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지갑에 손을 대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친구를 사귀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아이가 왜 약탈자가 되어가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먼저 아이에게 충분히 좋은 환경이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환경입니다.
바이킹이 살던 땅처럼 척박한 부모는 바이킹처럼 약탈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환경에서 자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체벌은 약탈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약탈자로 만듭니다.
아이에게 부모는 환경입니다.
부모가 생계 걱정을 하고 있다면 자녀는 어떨까요?
당연히 약탈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좋은 환경이 되어주기 위해 제가 항상 추천하는 것이 ‘십일조’를 온전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에덴동산의 환경 안에 있다면 자녀도 에덴동산의 환경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 아이가 약탈자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디팩 초프라의 훈육법을 배우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가 먹고사는 건 다 책임질 테니까, 너희는 너희가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찾고 이웃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만 생각하며 살아라.”
아들 둘은 에덴동산에서 산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것입니다.
아들 둘이 있었는데, 형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잘 도와주었고 동생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쳐 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형은 인도에서 커다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동생은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디팩 초프라는 자신이 언제까지 좋은 환경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을 찾고 그 신이 창조한 이유를 찾으라고 합니다.
모든 창조된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사업가로 혹은 교수로 하느님이 부르셨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삶이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가 되어 부모가 더는 아이의 환경이 되어주지 못해도 아이들은 신의 섭리 안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삶은 ‘경쟁’을 시키는 것입니다. 경쟁이란 환경은 지옥입니다.
지옥에서는 약탈자들이 생겨납니다.
약탈자들이 사는 세상은 또 지옥이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녀를 낳을 부모는 없습니다. 약탈자를 낳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아는 자신이 자기 주인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만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뱀은 진정한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땅에 살고 싶으면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스스로 채워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자아를 환경으로 사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약탈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떤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자아가 만들어낸 척박한 이집트와 같은 환경에서 종살이하고 있나요, 아니면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나요?
어린이처럼 부모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이는 자신에게 양식을 주는 이를 부모로 믿습니다.
이는 증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양식을 주는 부모를 찾지 않으면 지옥의 삶을 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며 자아가 강해지면 자아는 그런 환경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며 창조자가 있다면 증거를 찾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기가 부모를 찾는 것은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믿는 것은 선택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창조자로 믿으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그분이 창조자이심을 믿기 위해 십일조도 내야 하지만 내가 에덴동산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자녀들도 또 다른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천국의 백성이 됩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어린이처럼 그리스도를 하느님 나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두 선택밖에 없습니다.
뱀의 나라를 선택하든,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0,13-16: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15절). 어린이들이 부모를 바라보듯이 제자들도 하느님을 그렇게 바라보고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받아들이고 행하도록 하여야 한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아이들이 축복을 받도록 예수님께 데려왔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나무랐다. 어린아이들 때문에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언짢아하시면서 어린이들을 맞아주시고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이들의 것이라고 하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14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온 아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어린이는 벌어먹지 않고 부모가 주는 대로 받는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어린이와 같은 순진함과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자세이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것은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이 있었던 것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 역시 세상의 지혜와 명예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에 있음을 알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주님이 가신 길이 어떠한 길이었는지 묵상하며 순간순간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저는 노트와 만년필을 이용해서 글을 씁니다. 그러다 보니 꽤 많은 노트를 사용하게 되는데, 노트를 쓰면서 가장 기쁠 때와 기분 좋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글이 잘 써질 때도 그렇기는 하지만, 가장 기쁠 때는 두꺼운 노트의 마지막 장을 채울 때이고 기분 좋을 때는 새 노트에 첫 글씨를 적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새 노트에 글을 쓰면서, 이번에는 더 잘 쓰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과거와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과 똑같다면 희망도 없을 것입니다.
강의 나갔을 때, 종종 청중에게 “최근에 뭔가 새롭게 시작한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몇 분이 대답하십니다.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한다, 새로운 언어를 공부한다, 운동을 시작했다,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등등의 답변이 들려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생기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런 분들의 모습은 어린아이와 비슷합니다.
아이들은 새로운 일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합니다. 새로운 일에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큰 관심을 갖습니다. 월요일 새벽 미사 끝나면 미사 나온 아이들 라면을 끓여주는데, 맛있는 라면보다 더 좋아하는 라면은 새로운 라면입니다. 그만큼 새로움은 어린아이와 가깝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희망을 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움을 지향하는 아이에게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됩니다. 예수님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4)
제자들의 꾸짖음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 선포로 너무나 바쁘신데, 어린이들까지 성가시게 나서서 예수님께 축복을 받는 것이 방해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희망’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희망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고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가 믿고 신뢰하는 것이 나를 이끌게 합니다. 그래서 희망하지 않는 것은 죽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능성과 실현성에 대한 감각을 갖춘, 희망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3월의 첫날입니다. 바로 내가 희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모두 인생의 격차를 줄여주기 위해 서 있는 그 누군가가 있기에 힘든 시간을 이겨내곤 합니다(오프라 윈프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저에게는 너무나 크신 당신 그늘 아래 앉아서
맛있는 열매를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저는 행복합니다.
한마음을 찾는 피정객들에게
내 말이 아닌 당신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매일매일 묵상을 실천하는
바보가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어린아이가 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매일매일 죽음과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서 기쁩니다.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알기에
하느님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고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임에 분명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3.01.토."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 15)
어린이의
마음이
하느님 나라의
가장 맑은
마음입니다.
삶에 재미와
기쁨이 있는
어린이가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주체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삶도
언제나
자연스럽게
만나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연스러움이
편안한
관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편한 곳이
좋은 곳입니다.
편한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편한 곳에
편한 감동도
있습니다.
어린이의
정직한 고백과
기도 안에
유쾌한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어린이는 열고
어른은 닫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뛰노는
행복한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사는 재미가
노는 재미입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어린이들과 같이
즐겁게 놀고
즐겁게 감동하는
3월의 첫 시작이며
성 요셉 성월의
기쁜
첫날입니다.
먼저 잘
놀아야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주님께서는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17,1-15
1 주님께서 사람을 흙에서 창조하시고 그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2 그분께서는 정해진 날수와 시간을 그들에게 주시고
땅 위에 있는 것들을 다스릴 권한을 그들에게 주셨다.
3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처럼 그들에게 힘을 입히시고
당신 모습으로 그들을 만드셨다.
4 그분께서는 모든 생물 안에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놓으시고
그들을 들짐승과 날짐승의 주인이 되게 하셨다.
5 그들은 주님의 다섯 가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덧붙여 그분께서는 여섯 번째로 그들에게 지성을 나누어 주시고
일곱 번째로 그분의 능력들을 해석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다.
6 그분께서는 분별력과 혀와 눈을 주시고 귀와 마음을 주시어 깨닫게 하셨다.
7 그분께서는 지식과 이해력으로 그들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선과 악을 보여 주셨다.
8 그분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 주시어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보게 하시고
그들이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영원히 찬양하게 하셨다.
9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선포하기 위하여
10 그들은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리라.
11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지식을 주시고
생명의 율법을 그들에게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주시어
지금 살아 있는 존재들이 죽을 몸임을 깨우쳐 주셨다.
12 그분께서는 그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고
당신의 판결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13 그들의 눈은 그분의 위대하신 영광을 보고
그들의 귀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14 그분께서는 “온갖 불의를 조심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그들 각자에게 제 이웃에 대한 계명을 주셨다.
15 그들의 길은 언제나 그분 앞에 드러나고
그분의 눈앞에서 감추어지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3-16
그때에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