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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9월18일 주일 [(녹) 연중 제25주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수도회] 애착을 버리고 슬기롭고 치열하게 사는 신앙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지혜 3,1-9
○ 제2독서 로마 8,31ㄴ-39
† 복음 루카 9,23-26
오늘은 모든 교우가 함께 모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리며 순교 정신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목숨까지 바친
우리 신앙 선조들을 번제물처럼 받아들이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성인들을 본받아 우리도 제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바쳐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기를 청합시다.
◈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느님과 재물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입으로 하느님을
선택한다고 말하겠지만, 마음속에서는 많은 유혹과 핑계가 생겨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경축하는 103위 순교 성인들은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징표로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신 분들입니다. 그중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만 25세의 나이로 사목 생활의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자신의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셨습니다. 성인은
죽기 전에 이렇게 설파하셨습니다. “내가 외국 사람들과 통한
것은 오직 천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금 그 천주님을 위해
죽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인 성 정하상 바오로는 한국
천주교회의 재건을 위해 투신한 평신도입니다. 성인은 북경
왕래를 아홉 차례, 의주 변문까지는 열한 차례를 왕복하며
유방제 신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였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은 임금보다 더 큰 임금을 선택하여 충성을
바치고, 부모보다 더 큰 부모를 섬겨 효도를 다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여 영원한 생명의 표지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죽음도 그들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이 보여 준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지닙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하느님 안에서만 참 행복
2016년 다해 9월18일 주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3,1-9
제2독서
<죽음도, 삶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1ㄴ-39
복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집에서 정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 역시 사제관에
들어오면 곧바로 환복을 하고, 가장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습니다.
이렇게 편한 복장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일까요?
다른 곳에서 잠을 자는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다 있는 신부들 모임이 늦게 끝나도 힘들더라도 집에 들어와서
잠을 잡니다.
왜 집이 편할까요? 나만의 공간으로 편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생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장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양말을 신지
않고 반바지와 반팔 티셔츠 하나 걸치고 있을 뿐인데, 시원하고
자유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집이 편한 이유는 이렇게 정장이 아닌 가볍고 편한 옷을 입고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나를 덮고 있는 많은
것들이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내 마음을
덮고 있는 것들 역시 걷어낸다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어쩌면 이러한 것들을 거둬 낼 때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어느 대학에서 자기수용, 친밀한 인간관계와 소속감,
신체적 건강 등의 내적가치를 추구하는 사람과 금전적 성공,
사회적 인정, 매력적 외모 등의 외적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의
자아실현 정도를 평가했습니다. 내적 열망이 강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아실현 정도가 높았고, 이들은 평소 생활이 활기찼고
우울감이나 두통, 근육통 등 피곤이나 스트레스가 있을 때
발생하는 신체적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외적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모두 채웠어도 자아실현 정도가 높아지지 않고, 오히려
스트레스로 생기는 나쁜 신체적 증상도 많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목표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목표의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얼마만큼 열심히’
노력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에
대한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집사의 행동을 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쉽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주인을 속이고 주인의 재산을
함부로 쓰고 있는 집사의 행동이 칭찬받을 행동이었을까요?
더군다나 집사는 자기 자리를 잃은 뒤 안락을 얻기 위해 주인의
재산에 손실을 입히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주인은 재산의 사용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재물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려 주신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을 향한 집사의 행동이 정당화되고
칭찬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라는 내적가치와 재물이라는 외적가치 중에서 무엇을
섬기고 있었을까요? 하느님 안에서만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느끼면서 참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랑이란 돌보는 것이다.
상대를 돌보고 관계를 돌보며 또한 자신을 돌보는 것(미셸 퓌에슈).
불의한 집사.
비교하는 버릇을 버려라(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중에서)
“명예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폴레옹을 부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카이사르를 부러워했고,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를 부러워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틀림없이
실재하지 않는 인물인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어떤 일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는 질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역사나 전설
속에는 늘 당신보다 더 성공한 사람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자신에게 찾아오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대부분 착각이겠지만 자신보다 훨씬 행복할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는 버릇을 버려라. 이렇게 한다면
당신은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비교하는 버릇을 왜 이렇게 버릴 수가 없을까요? 실제로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남과
비교하며 질투하는 대신에 자신의 삶에 집중하며 의무와 책임을
다할 때 깊은 충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 추석 때 달을 보셨나요? 저는 못봐서 그 아쉬움을 인터넷의
달 이미지로 달래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애착을 버리고 슬기롭고 치열하게 사는 신앙인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9월18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경축 이동
연중 제25주일, 루카 16,1-13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The parable of the dishonest steward
애착을 버리고 슬기롭고 치열하게 사는 신앙인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구체적인 선택과 결단의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어
망설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어떻게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하며 참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어떤 부자의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여 주인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16,2). 그는 일자리를 잃게 될 경우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할 것”이라 생각하여 주인에게 빚진
이들을 불러 탕감해줍니다(16,3-7). 사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여 관리를 잘못하였음에도 살아남으려고 자의로 불의하게
빚까지 탕감해준 것입니다.
집사의 불의한 처사를 알게 된 주인은 놀랍게도 오히려 현세에만
관심을 가지며 자신만을 위하는 세상의 자녀들처럼 영리한 그
집사를 칭찬합니다(16,8).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빛을 받는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에
슬기롭게 대처하듯이 슬기롭고 민첩하며 능동적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믿는 이들의 삶을 보면 치열함과 헌신적인 자세, 끊임없이
노력하는 태도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특히
교계지도자들을 포함한 성직자, 수도자들의 삶에서 그런 모습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의식주가 다 갖춰지고 실직할
걱정이 없는 삶의 여건은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더 자유롭게
투신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치열한
사랑의 삶을 살라고 주어진 것임을 망각해서는 안되는 데도
말입니다.
사랑을 위한 치열한 삶은 믿는 모든 이들에게도 똑같이 요청됩니다.
다른 이들을 하느님께 인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말씀의
진리를 연구하며, 사랑의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을 섬기려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세상살이를 하는
그 누구보다도 더 민감한 영적 감수성과 열정을 지니고 시대징표를
읽으며, 치열하고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다.
다음으로 현세 재물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은 유일하신 하느님뿐이십니다. 재물을 또 다른
주인으로 섬길 수는 없는 것이지요. 참으로 행복하려면 오직
하느님만을 내 삶의 중심이요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갈라진 마음은 얼마나 자주 눈에 보이는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고 애착하여 그것을 첫 자리에 놓습니까!
재물은 이 세상을 자기의 노예로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가공할 힘을 지니며 하느님의
가치를 상대화하고 신앙을 약화시키는 가장 폭력적인 도구로
악용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바란다면
이 우상을 경계해야만 할 것입니다.
사실 재물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애착을 품고
하느님을 멀리하고, 탐욕으로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경고합니다. "주님께서는 빈곤한
이를 짓밟고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이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시리라."(8,4.7)
재물은 하느님으로부터 왔기에 나의 소유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재물을
그분의 사랑의 뜻대로 나누며 ‘성실히’ 관리하고, 그분께 되돌릴
때에만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재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현세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자유로운 사람이 될 때 비로소 복음적 자유를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하느님의 도구로 불린 우리 모두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치열하게’
기도하며, 열정적으로 말씀을 경청하고 묵상하며, 헌신적으로
자신을 내놓고 다른 이들을 섬기는 ‘슬기롭고 치열한 사랑의
존재’가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9월18일 주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1티모 2,1)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권고합니다.
사목자는 모든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이나 부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고.
사실 사목자도 인간인지라 권력으로 백성을 짓누르고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을 등쳐먹는
부자들을 위해 간청하고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런 인간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부자들을 망하게 해 달라고 저주를 내리고 싶지요.
사목자는 물론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와 공정을 설파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권력자들의 비리와 불의를 고발하면서도
그들을 심판하기보다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을 단죄하기보다 그들이 양심에 따라 살아가며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달아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정치권력자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기보다
쉽게 심판하고 단죄만 함으로써
그들을 회개의 길로 이끌지 못했음을 사목자들은 고백해야 합니다.
사목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목자가 되어야 하지 일부 사람들을
위한 목자로 불림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기에 편견과 편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 선택은 당연지사이지만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의 소명은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선인이든 악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그 누구도 예외없이 하느님의 자녀들이기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내리는 비처럼...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 23)한상우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9월18일 주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우리모두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불리움 받은 이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 바로 순교입니다.
순교를 통해 우리의 생명은 다름아닌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순교는 가장 아름다운 겸손임을 깨닫게됩니다.
우리 땅의 소중한 순교자님들또한 겸손함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신앙은 제 십자가를 지는 겸손함에 있습니다.
겸손하기에 기다릴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교의 영성은 하느님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는 존귀함의 영성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빚어진 우리 영혼은 자유로워야합니다.
그 어떤 힘도 자유로워야 할 우리 영혼을 옭아맬 수는 없습니다.
순교는 그 어떤 인간적인 것도 하느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음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하느님 사랑이 우리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겸손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참된 신앙인은 하느님 사랑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이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향해야 할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 연결되어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순교자 대축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결코 예외가 없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얼마나 많은 은총과 축복이...
2016년 다해 9월18일 주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 9,23-26
얼마나 많은 은총과 축복이...
추석 전 한 공동체 사목 방문을 다녀왔습니다. 아이들과 형제들이
알콩달콩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눈이 확 띄어 제 마음이 다
흐뭇해졌습니다. 한 주간을 모두 마친 주일 저녁, 아이들과
수도자들이 소 성당 성체 앞에 모두 모였습니다. 돈 보스코가
그랬던 것처럼 살레시오 집 전통에 따라 성체강복을 거행했었는데,
참으로 그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성체 강복 중에 ‘신자들의 기도’ 시간이 있었는데, 저를 위한 막내
친구의 기도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 관구장
신부님이 내일 모래 돌아가시는데, 돌아가시는 날까지 저희와
재미있게 지내다가 잘 돌아가시도록 도와주소서.”^^ 함께 했던
식구들은 습관적으로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라고 응답을 했지만 서로 바라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성스럽지만 소박하고 정겨운 성체강복 시간 동안 제 머릿속에
한 가지 깨달음이 다가왔습니다. ‘그래! 행복이란 것, 별것 아닌
것 같아. 이렇게 주일 저녁 식구들이 모두 함께 주님 앞에 모이는
것,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이 행복이지. 우리네 인생에서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있겠어? 부족하더라도 서로 참아주면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 큰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는 것, 그것이 행복이겠지.’
예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에서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던지십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루카복음 16장 10절)
우리가 하찮게 여기고 우습게 보는 일상의 작은 것들에 대해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겠습니다. 매일 내가 이행해야 할 작은
과제와 의무들을 중요시 여겨야겠습니다. 때로 귀찮게 여겨지는
작은 소임들, 담당구역 청소들, 매일 내 책상 위에 올라오는 서류들,
직무상 당연히 수행해야 할 업무들을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과제라
여겨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은총꺼리들과 감사꺼리들을 더 많이 발견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자주 느끼는 바이지만 건강한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 스스로 두
발로 이 땅위에 서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장애로 10cm 높이의 문턱을
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쓰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환우들이 편안한 호흡 한번을 그리도
간절히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평소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얼마나 수많은
은총과 축복, 행복과 감사꺼리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든든히 우리를 떠받쳐주고 계십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고통과 십자가를 같이 분담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평생토록 기다려왔던
구원의 날, 우리에게 가장 크고 좋은 선물!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주시기 위해 준비 중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결론은 상처와 고통, 절망과 십자가 속에서도
언제나 감사와 기쁨, 찬미와 환희여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2016년 다해 9월18일 주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 9,23-26
영화 ‘밀정’을 보았습니다. 슬프고,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고 저항하는 사람, 빼앗은 나라의 편에서 살아가는
사람, 양쪽의 틈바구니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들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정의, 양심, 윤리,
부끄러움, 원망, 보복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식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자비를 베풀고, 부끄러움을 알며, 겸손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은 오기 마련입니다. 겨울이 가면 봄은 오기
마련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는 새벽을 뜬 눈으로
기다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추운 겨울을 온 몸으로 견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잡혀서 ‘고문’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문은 몸을 상하게 하지만, 마음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빼앗긴 나라에 대한 사랑, 함께한 동료에 대한 의리
때문에 고문을 견디려 하지만,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은 고문 앞에
무릎 끓게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모진 고문을 견디어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신앙의 풍요로움은 그분들이 흘린 피와 땀 위에서 피어난
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우리 신앙의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모진 박해와 시련을 겪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습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죽음이 있었기에 우리는 신앙생활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 순교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미련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춧돌이 없다면, 나무의 뿌리가
없다면 훌륭한 건축물을 세울 수 없고, 가을에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순교자 성월을 지내면서 많은 분들이 ‘성지순례’를 다니고
있습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무덤, 순교자들이 죽임을 당한 곳,
순교자들이 살았던 곳을 성지로 조성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피와 땀은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은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분들은 신앙의 별이 되어서 우리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을 위해서 ‘성지’를 조성하는 것은 후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것 같지만 그분들의 순교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지를 통해서 우리들의
믿음을 더 굳게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지를 조성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순교의 삶,
나눔의 삶, 희생의 삶,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사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때문에 신앙을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시련과 고통,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결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떼어놓는 것들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나의 욕심이, 나의 게으름이, 나의 자존심이, 나의
이기심이, 나의 교만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나 자신을 떼어놓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순교자들이 보시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들이 우리들의 모습에서 너무 쉽게 보이곤 합니다.
우리들이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쳐야 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재산과 가족, 부와 명예를 포기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이 지켜온 신앙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봉사와 나눔, 우리의 사랑과 희생으로
순교자들의 신앙을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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