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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말씀대로,
주님의 사제로, 함께 사는 세상
행복하게 가꾸어 가시기를~
다시 한번 축하 축하드립니다.
서품식때 모습도 ~~~
제단에 부복(엎드려), 사제로서의 첫 기도
"순교하게 해 주소서" 기도하셨다는~~
그리고,
민들레 같은 사제가 되어가고 싶다고 하심.
네 분 신부님들 합동으로 미사하시고,
축하 케이크도 자르시고,
훈훈하고 흐믓한 시간이었어요.
신부님
기타 치며 노래 선물
청바지와 티셔츠도 잘 어울리실 듯요
Video Player
두 번째 노래는 영상으로~
☆아직도 하실 일이 많으신 신부님 위해,
계속해서 기도 많이 해주세요.
즐거운 주일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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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7일 오후 9:24
2024. 07. 07.
의정부교구 주보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경축 이동,
사제 서품 25주년 은경축 미사
찬미 예수님.
오늘은 우리교구의 주보이신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경축 이동일입니다.
순교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를 떠올립니다. 사제는 순교자입니다. 사제는 순교자이어야 합니다. 사제는 나날이 주님을 위해 자신을 죽이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의 뜻을 거슬러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는 사제입니다. 서품을 받았든 그렇지 않든 순교자는 참으로 사제입니다. 주님을 위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써 주님께 가장 거룩한 제사를 바치기 때문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념하는 오늘 7월 7일은 주님께서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저를 당신의 사제로 만드신 날입니다. 제가 1999년 7월 7일에 사제품을 받았으니, 오늘은 사제가 된지 만 25년이 되는 날이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제품 은경축일입니다. 많은 벗님들로부터 과분한 축하를 차고 넘치도록 받았고, 지금 이 시간 이렇게 감격스러운 미사를 여러분과 함께 봉헌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꿈만 같습니다.
저는 오늘 이 미사를 여느 때와 다름없는 본당 공동체를 위한 교중 미사로 봉헌하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본당 가족 여러분의 성화 아닌 성화에 밀려서 교중 미사와 더불어 서품25주년 은경축 감사미사로 봉헌하고 있습니다. 한없는 축하를 받으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쁘지만, 과연 이러한 축하에 어울리는 사제로서의 삶을 살았는지 부끄러운 마음으로 돌아보면서, 사제로서 제 삶의 지향을 담은 기도를 다시금 바쳐봅니다.
<사제답고 싶은 부족한 사제의 기도>
믿는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담은
‘신부님’이라는 호칭을 즐기기보다
이 한 몸 던져
하느님과 세상을 잇는 사제로서
세상의 온갖 소음에 굴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로서
벗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죽는 봉사자로서 살게 하소서.
하느님과 함께 하기 위한
기도를 가르치기보다
기도함으로써 하느님과 하나임을
증거하게 하소서.
하느님의 사랑을
아름다운 언어로 설명하기보다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알리게 하소서.
성체를 축성하고 모시면서도
나눔보다 소유에 집착함으로써
성체를 모독하지 않게 하시고
벗들의 소박하고 맛깔스런 밥이 되는
성찬의 삶을 살게 하소서.
교회와 세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직무를
인간적인 권위의 발판으로 삼지 않으며
낮은 곳에서 한결 같은 헌신으로
성무를 수행함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자신의 위선과 불의를 감추려
세상의 위선과 불의에 침묵하지 않으며
선과 정의의 굳건한 실천으로
당당히 세상의 어둠에 맞서
하느님의 빛을 비추게 하소서.
오직 사제로서
사제답게 삶으로써
당신의 사제임을
겸손하게 드러내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실천하며 나름 기쁘게 열정적으로 사제로 살아온 25년이지만, 어쩌면 부끄러움과 허물 가득한 삶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마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사제의 삶은 좀 더 아름답게 보듬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제로 뽑아주시고 늘 함께 걷고 계시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저를 낳으시고 기르셨으며, 사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기도로 함께하셨던 지금은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시는 아버지와 여전히 아들 신부를 위하여 쉼 없이 기도하시는 늙으신 어머니께 드리는 감사와, 주님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모든 벗님들께 드리는 감사가, 부족하나마 제 삶을 통해서 온전히 우러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사제가 되어야 하리라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이런 사제가 되게 하소서>
당신 나라의 밑거름 삼으려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저를
애타게 부르시는 하느님
사랑 생명 정의 평화 넘치는
당신 나라를 향한
당신의 길을
당신과 함께 걸으며
바라봄만으로도 압도당하는
하늘로 치솟은 아름드리나무가 되기보다,
지나던 가난한 길손들
피로에 지친 다리 쉬어갈 수 있는
그루터기 같은 사제가 되게 하소서.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가시 돋친 핏빛 장미가 되기보다,
힘겨운 산길
지친 마음 달래는
연한 빛깔 이름 모를
들꽃 같은 사제가 되게 하소서.
꺾이지 않으려
온 몸 바람에 맡겨
제 생명 살리려는 갈대가 되기보다,
짓밟히면 짓밟힐수록
생명 품은 씨앗 널리 날리는
민들레 같은 사제가 되게 하소서
다시금 순교로서 사제의 삶을 완성하신 김대건 신부님을 떠올리면서, 사제로서 제 삶의 완성인 순교를 떨리는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25년 전 오늘 서품식 때의 기억이 늘 새롭습니다. 서품식 때에 서품 대상자들이 부복하고 나면 장엄하게 성인호칭기도가 울려 퍼집니다. 이때에 사제로서 살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청하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신부님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서품식장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무엇을 청할지 정하지 못한 저는 서품식순에 따라 부복하였습니다. 무엇을 청할까. 무엇을 청할까. 그러던 차에 저도 모르게 “순교하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마음에서 우러났습니다. 이 순간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까요? 아니요, 저의 찰나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아니야, 이거는 아니지. 다른 것을 청해야 해.” 너무나 두려웠던 저는, 하지만 어느새 다시 “순교하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저도 모르게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야, 이거는 아니야.” 그러고 다시 한 번 더.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마태 10,19) 오늘 복음에서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이 이런 뜻이었을까요. 그렇게 “순교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끝맺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품식 때에 청원을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신다고 하셨으니, 이제 저에게 남은 것은 하나입니다. 사제의 삶의 완성인 순교 말이지요.
아, 두렵고 떨립니다. 그러나 순교가 어찌 삶의 최종적인 순간만을 의미하겠습니까? 사제로서 산다는 것, 그 이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나날이 순교의 길을 걷는 것일 테니까요. 의심이 아닌 믿음의 길, 허무가 아닌 희망의 길, 증오가 아닌 사랑의 길, 가짐이 아닌 베풂의 길, 억누름이 아닌 섬김의 길, 배척이 아닌 관용의 길, 단죄가 아닌 용서의 길, 경쟁이 아닌 더불어 함께의 길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순교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25년 전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날이 사제가 되어갑니다. 사제로서 제 자신에게 새삼 다시 묻습니다. “사제는 누구인가?”
<사제>
사제는
하늘빛을 땅에 드리우도록
땅기운을 하늘에 들어 높이도록
그리하여 하늘과 땅을 곱게 잇도록
부르심 받음 사람입니다
사제는
여린 마음과 작은 몸으로
하느님께서 정성껏 빚으신
온 누리 보듬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한 몸 추스르기 버거워도
하느님 사랑 가득 담은
함께 사는 세상 가꾸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저 홀로 머물 울타리 허물어
하느님의 아픔과 슬픔 가득한
여리고 찢긴 거친 세상 담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홀로 거룩함의 꿈에서 깨어나
더러운 것 깨끗하게 하고자
온 삶 아낌없이 던지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하느님 손길 닿은 세상 모시되
세상에 짓눌리고 세상이 버린
하느님의 작은 이 품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살기 위해 벗을 희생시키지 않으며
벗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죽으라고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기에
약하고 추하고 부족한 사람이기에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부끄럼 없이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나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몸과 마음에
핏빛 사랑의 상처 가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순간부터 끝 모를 마지막까지
앞서 가시고 함께 하시기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용기 내어 또 한 걸음 내딛는 이
바로 주님의 사제입니다
저는 사제입니다. 서품을 통해 직무사제직을 받은 사제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하신 믿음의 벗님들 모두 사제이십니다. 세례를 통해 보편사제직을 받은 사제들이십니다. 우리 사제들이 사제다울 때에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활짝 꽃필 것입니다.
사제 서품 25주년이 되는 오늘을 하느님과 믿음의 벗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습니다. 저에게 사제로서 살아온 25년은 사제가 되어왔던 25년입니다. 앞으로 사제로 살아갈 나날은 또한 사제가 되어가는 나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그날, 제 사제의 삶은 완성될 것이고, 그리하여 바로 그날에 참으로 사제가 될 것입니다. 그날을 향하여 오늘, 기쁨과 희망을 품은 가슴 벅찬 한걸음을 내딛으며, 보편사제직을 수행하고 계시는 이 자리에 계시는 사랑하는 벗님들과 함께 직무사제직을 받은 부족한 사제로서 나날이 참으로 사제가 되어가고자 새롭게 다짐합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주님을 닮아
주님께서 바라시는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억눌린 벗들이 기댈 수 있는
아버지처럼 든든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슬퍼하는 벗들이 안길 수 있는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지친 벗들이 쉬어갈 수 있는
그루터기처럼 넉넉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외로운 벗들이 머물 수 있는
고향집처럼 포근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살맛 잃은 벗들이 맛들일 수 있는
찰진 밥처럼 맛깔스러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젖은 벗들이 말릴 수 있는
햇살처럼 따사로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땀 흘리는 벗들이 식힐 수 있는
바람처럼 살가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메마른 벗들이 적실 수 있는
개울물처럼 시원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헤매는 벗들이 찾아갈 수 있는
오솔길처럼 정겨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갈라진 벗들이 함께할 수 있는
울타리처럼 넉넉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주님을 닮아
주님께서 바라시는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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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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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7. 연중 제14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그곳은 예수님의 고향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면서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인데
그의 가족을 보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나나 그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그에게만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대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를 대하는 데 매번 백지 상태로 대하는 것은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즉 어느 한 사람과 관계를 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지식이나 그와의 경험이
쌓인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경험은
내가 직접 상대방에게서 얻은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받은 것도 있습니다.
암튼 우리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에 대해
그는 이런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깊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관계 유지를 위해 필요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관계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받은 기억은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만듭니다.
물론 이것은 다시 상처 받기 싫은 마음에서
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서 옵니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더 큰 어려움은
상대방의 모습은 원래 그렇지 않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것으로 예수가
더 나아가 그 가족들이
자랑할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나 자신을 무시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싫은 나머지
예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물론 이 경험은
예수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자랑하던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 경험을 예수에게 적용합니다.
무시 받은 상처를
더는 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거부가 시작되었지만
나를 무시하지 않는
아니 무시하려는 마음이 없는
예수를 거부하면서
예수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것도 받지 못합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 때문에
예수를 거부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차츰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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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7. 연중 제14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이방인들의 목자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정과 신앙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참으로 감동적이고도 눈물겹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 많은 일을 해냈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저도 나름 일인다역을 하고 있고, 몸 사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뛰어다닌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어제 오늘만 해도 제 삶을 돌아보니, 제가 생각해도 웃겼습니다.
주방에서 열심히 감자를 깎다가, 부랴부랴 올라가서 강의하고, 초스피드로 내려와서 매운탕 펄펄 끓이고, 또 올라와서 미사 준비하고, 촛불켜고, 입장하고...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와 비교하니 저는 포크레인 앞의 삽 한자리일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살아생전 따라다니던 애칭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백개의 팔을 지닌 사나이’였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전도 여행을 계속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랴, 틈틈이 여러 교회 지도자들과 교우들에게 편지를 쓰랴, 여기 저기 공동체 건설하랴, 지도자 양성하랴...
바오로 사도는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인해 개인적인 삶, 안락한 삶, 편안한 삶과는 영영 작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펄펄 끓는 열정과 넘치는 에너지로 활활 타오르던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업무 추진 능력은 탁월했습니다.
그만큼 바오로 사도는 건강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불림 받지 않았더라면 잘 나가던 검투사를 했어도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말못할 평생 지병이 하나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던 많은 학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고질병을 지칭하는 ‘가시’가 과연 무엇인가, 오랜 세월 두고두고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그 병명을 밝히지 않은 이상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추측만 할 수 밖에요.
어떤 학자들은 그 가시를 안질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바오로 사도는 이미 눈에 큰 충격을 입어 사흘간이나 실명 상태에 놓여있었기에 그 후유증이 상당하리라는 추측입니다.
다양한 가설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봤을 때 질병이라기보다 성격적 결함이 아니었을까, 추측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불같은 성격, 순식간이 끓어오르는 분노, 그래서 이웃들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인내하지 못하고 폭발시키는 그런 실수를 말하는 것을 아닐까요?
그도 아니라면 나와 맞지 않는, 끊임없이 나를 곤경으로 몰고 가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의 약점이랄까 취약점, 감추고 싶은 상처를 용감하게 공개적으로 밝히는 바오로 사도의 용기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밝히는 것을 넘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약점을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초대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의 참된 사도요 스승이었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납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어떡하면 자신의 약점이나 취부,부끄러운 과거를 한사코 감추려고 기를 씁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쟁력, 수상경력, 업적만을 과대 포장해서 자랑스럽게 내놓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솔직하게 밝힙니다.
자신이 저질렀던 지난 과오들, 자신의 약점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부끄러운 과거들조차 아낌없이 다 밝힙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자랑할 약점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힘이 내 우리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할 가시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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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7. 연중 제14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역사를 통하여 인간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는커녕 어기기만 하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만을 고집하여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계속 사랑하셨다.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에제 2,5). 예언자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이다. 그 예언자가 그리스도로 나타나게 되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최고의 값진 선물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들의 완고함과 거부감이 최고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매우 역설적이지 않은가?
오늘 복음에서 역시 예수께서 당신 고향에서 복음 선포에 실패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불투명하고 무장되어있지 않을 때는 예수와의 진정한 만남이 어렵다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2절). 예수께서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지혜와 그 기적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분을 거부하는 반응은 왜 나타났을까? 그것은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데서 오는 시기가 아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여러 가지 표징은 믿음이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데,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3절). 이는 믿음의 단절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예수의 출생상태나 성장배경 가족 상황을 모두 아는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예수로부터 그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이해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의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일상의 평범한 사건이나 인물을 통해서 드러내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유다의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품위를 보존한답시고 예수님을 단죄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십자가 위에 그분을 오르게 하는 것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예언자의 길이며 예수께서 가셔야 할 길이다. 이렇게 볼 때, 기적은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의 표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적이 있으려면 적어도 어떤 신앙의 발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일을 통해서, 권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약성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나자렛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기적은 단순한 목수에 지나지 않은 비천한 마리아의 아들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특별한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보다는 그분의 권능에 더 집착하려는 신앙에 맞서는 것이다. 특별한 징표를 추구하다가 자칫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실망하고, 더구나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주님을 거부하는 잘못도 범할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2,9). 일상적인 평범한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고통과 가난의 “징표”를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외적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여, 성성의 커다란 표지가 되지 못한다고 꺼리는 교회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더 성실히 우리의 일상을 살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을 거부했던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끌어내는 교훈일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을 가지고 하느님께 우리의 신앙을 강요하면서 진정 참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의 모든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하자. 모든 일은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가 있으며, 그 하나하나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며, 일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 모든 삶의 순간을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그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눈을 지닐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겸손되이 청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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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7. 연중 제14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함부로 누군가를 안다고 단언하면 안 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인정받지 못하십니다.
그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30년 동안 안 변한 사람이 몇 달 만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알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어떤 판사는 여자 친구를 총으로 쏘려다가 미수에 그친 남자를 가벼운 벌로 풀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다음 날 바로 여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이 세상엔 수없이 많은 무죄한 사람들이 죄인으로 심판받아 죽고 수많은 죄인이 뻔뻔하게도 의인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떤 실험에서 판사들은 같은 판례를 가지고도 아침과 오후가 판단이 달랐다고 합니다.
판결이 과학적인 것 같지만, 사실 판사들의 기분에 좌지우지되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려 목숨까지 바친 이가 있습니다.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이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무조건 계속 물었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를 살인죄로 신고하려는 이에게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일이 ‘경건’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당신이 쓰는 단어인 경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신들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만약 내가 사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건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에요!’ 라고 대답하는 게 옳으냐?”라고 되묻습니다.
그건 사과의 본질에 대해 말한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경건함이라는 뜻이 신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이 쓰는 단어 하나도 의미를 알고 쓰지 못했음을 알게 되고 겸손해집니다.
이런 일로 겸손해지면 좋겠지만, 화를 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를 주름잡던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당하는 것이 굴욕스러웠고 자신들은 엄청난 액수의 수업료를 받는데 소크라테스는 무료로 교육하는 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 무리 중 프로타고라스는 진리는 상대적이다, 고르기아스는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이 진리의 주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신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니체가 받아들여 신은 죽었다고 말하고 인간은 자기 힘으로 신처럼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하였듯이, 소크라테스도 죽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초인이 될 수 있는 인간이 신이 아니면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소크라테스를 신을 모독한 자요, 젊은이를 올바르지 못한 길로 빠뜨리는 사람으로 모함하여 사형에 이르게 합니다.
사실 그들이 믿는 신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진화론이 그렇습니다.
진화론자들은 타인을 심판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 새로운 창조자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자신들이 아는 판단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그러한 판단을 받으신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실제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창조자는 자기 자신들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말하면 내가 그것을 창조하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만들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어야 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비행기를 아느냐고 물으면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모른다고 합니다. 만들어보라거나 고쳐보라거나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안다고 말하면 무지한 것이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은 부모를 만나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성령을 받으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받으실 때 성령으로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로 인정받으십니다.
미국의 락 토마스라는 사람도 처음엔 루저였다가,
“나는 핸섬하고 터프한 사람이다.”란 말을 하루에 500번씩 하고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가 가능한 존재가 인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변하려고 하는 이들만이 성령과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안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런 것으로 인간이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반면 겸손한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창조자의 진리를 찾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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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7. 연중 제14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는 것이 곧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1-6).”
1)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을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반응’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란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사람들을 압도하는 권위를, 즉 ‘하느님의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이 놀란 것은, 목수 일을 하면서 살았던 사람이 예언자처럼, 또는 랍비처럼 사람들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지혜의 말씀’이라는 것은 알아들었는데,
그 말씀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가르치셨던 것과는 다르게 가르치셨기 때문이 아니라, 나자렛 사람들이 ‘말씀’에는 집중하지 않고, 예수님의 출신과 직업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적에 대해서도 두 고을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본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라는 반응을 보였는데(마르 1,27),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3절).
그것은,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예언자 행세를 하는가?” 라는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2) 5절의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라는 말은, 그래도 몇몇 병자는 예수님을 믿어서 치유의 은총을 얻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 병자들 외에는 예수님께 병의 치유를 간청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예수님께서 ‘치유의 은총’을 주실 기회 자체가 없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놀라셨다.’는 ‘안타까워 하셨다.’입니다.
<청하는 사람만이 받게 됩니다(마태 7,7).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즉 청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청하지 않아서 못 받게 됩니다.>
3) 예루살렘 주민들의 반응도 나자렛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이 말은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가 메시아일 수는 없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이 말씀은, “너희는 나를 나자렛의 목수로만 알고 있지만, 그것은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내가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온 메시아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4) ‘믿는 것’이 곧 ‘아는 것’입니다.
먼저 믿으면, 그 믿음을 통해서 깨닫게 되고, 알게 됩니다.
만일에 먼저 알아야만(이해해야만) 믿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앎’을 얻지도 못하고, 점점 더 무지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고, 믿기를 거부하는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무슨 수행이나 수련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종교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깨달음의 은총을 얻는 종교입니다(요한 8,31-32).>
5) 신앙생활은, 먼저 믿고, 그 ‘믿음’에서 시작하여
‘참된 앎’을 향해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성경 공부와 교리 공부는 왜 하는가?
믿음이 먼저라면 공부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성경 공부와 교리 공부는 ‘지식’을 쌓기 위한 일이 아니라, 믿는 사람과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더 깊은 믿음을 갖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믿음 없이, 또는 믿기를 거부하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교리를 공부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성경은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로만 보일 것이고, 교리는 ‘뜬구름 잡는 것 같은’ 허황한 이론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에서
‘참된 앎’이 시작됩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교리들은, 인간적인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알고 싶으면 먼저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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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7. 연중 제14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혼자 힘만으로는 어려우니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부족하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은 나 혼자 사는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서로 돕고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건 비단 인간의 일만 그런 게 아니지요.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 우리가 흔히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일으키고자 하시는 기적은 단순히 당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일으키고자 하시는 기적은 당신의 사랑에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하여 함께 우리 삶과 세상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방향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일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게 아닙니다.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이 ‘사랑’에서 비롯되기에, 당신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우리와 ‘함께’ 일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향 마을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께서 먼저 손을 내미시는 모습을 보고도 그분께 믿음으로 손을 맞대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들이 그런 이유인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 고을 회당에서 하느님 말씀에 대해 가르치시는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놀라움은 인간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경이로운 모습을 마주했을 때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순수한 감정적 반응으로, 그 자체로는 좋다 나쁘다를 가릴 수 없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이 놀라움이 감사와 찬미로 이어져 하느님의 현존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면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만, 시기와 질투로 이어져 상대방보다 높아지려는 교만의 마음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면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부정적 변화를 일으키지요. 오늘 복음 속 나자렛 마을 주민들이 바로 이 후자를 선택합니다. ‘인간’ 예수님의 가정환경과 유년기 모습을 기억하는 그들로서는 잘 나가는 대단한 집안 출신도 아니고, 율법에 대한 배움도 깊지 않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는 지혜를 술술 풀어내시니, 그 모습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저 사람이 저 모든 것을 어디서 얻었을까?’라고 묻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런 마음가짐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그런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를 알아내어 자기도 그것을 얻기만 하면, 고작 ‘목수의 아들’일 뿐인 저 예수보다 내가 더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교만의 마음이 엿보이는 것이지요.
물론 주님의 능력과 지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지만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나자렛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진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 직접 물어볼 용기도, 그분께서 시키는대로 따를 의지도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마음은 자연스레 예수님께 대한 미움으로 흘러갑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지혜와 능력을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노력하여 얻을 생각을 하기보다는, 예수님을 폄훼하고 깎아내려 자기들보다 못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겁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모습입니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라는 말을 그리스어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무엇에 걸려 넘어진 것일까요? 자기들이 예수님에 대해 ‘잘 안다’는 착각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놀라운 능력과 지혜를 지녔어도 자신들과 같은 수준일 뿐이라는 ‘오해’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그 오해와 착각이 그들의 눈에 고정관념과 편견이라는 색안경을 씌우고, 그들의 마음에 완고함과 불신이라는 벽을 만들어, 예수님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것이지요. 즉 예수님보다 그분에 대한 자기 생각을 더 믿는 일종의 ‘우상숭배’에 빠진 셈입니다.
그런 모습은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고정관념과 편견, 욕심과 고집으로 빚어만든 하느님의 ‘우상’을 하느님이라고 믿게 되면, 그 잘못된 믿음 때문에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내 안에 갇히는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속 우상을 깨부수고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분을 내 사고의 틀 안에 가두거나 내 기호에 억지로 맞추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억지로 밀어넣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내가 아는 하느님’이라는 벽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그분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나자렛 마을 사람들의 불신과 편견이 빚어낸 결과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기적을 못일으키신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랑과 호의로 먼저 내미신 손에 믿음으로 자기들 손을 맞대지 않았기에 기적의 박수 소리가 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주님께서 언제 어느 방향으로 손바닥을 내밀고자 하시는지 그분 뜻을 헤아리지 않은 채, 자기 욕심과 고집이라는 좁은 시야 안에 갇히면 그렇게 됩니다. 그저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제 멋대로 손을 휘저으면서 ‘왜 주님은 내 손뼉을 마주쳐 주시지 않느냐’고 그분을 원망하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참된 기적은 내가 원하는대로 일이 진행되는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내가 제대로 알아보고 그 흐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삶이 구원이라는, 참된 행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마을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 사람들의 불신에 실망하거나 분노하신게 아니지요. 그저 놀라셨을 뿐입니다. 나자렛 마을 사람들의 놀라움이 고정관념과 편견이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들 앞에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은 자제하십니다. 그들이 당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은 당신을 향한 우리 믿음의 뿌리를 깊고 단단하게 하여 그 믿음을 통해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인데, 그들이 믿지 않으니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게 당연합니다. 믿음 없는 기적은 서커스나 마술쇼에 불과할 뿐,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기에, 그저 당장 우리 눈에 화려하고 좋아보이는 헛된 것들을 쫓게 만들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참된 믿음만 있다면 삶의 모든 순간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축복들로 가득한 ‘놀라움의 연속’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 놀라움을 감사와 찬미로 이어갈 수만 있다면 우리 삶에는 기쁘고 행복할 일들이 가득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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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7. 연중 제14주일.
진리의 말씀 안에서 생명의 얻는 삶
<2024.7.7> 아침을 여는 묵상 (렘 29:15~32절)
❝진리의 말씀 안에서 생명을 얻는 삶❞
❚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날마다 받아 누림으로 거짓에 미혹되지 않고 생명을 얻는 삶이어야 합니다.
✔ 생명을 얻기 위한 삶은 무엇입니까?
➲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15~19절).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유다 백성들은 신속한 회복을 예언했던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이 포로 된 그들에게는 일종의 희망 있었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왕과 백성들의 불안한 장래에 대한 여호와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그들의 생각이 허무 맹랑한 것임을 보여 바벨론 포로 생활에 적응하여 안정된 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포로 기간을 회개와 연단의 기회로 삼도록 하였습니다(15~16절). 이스라엘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보내어 먹을 수 없는 몹쓸 무화과 같게 할 것이며, 그 나라에서 내 쫓김을 당해 온 땅에서 비웃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7~18절). 즉,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혹독한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처럼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선지자들을 통한 여호와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19절)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신들이 주인 되어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수많은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하게 당신이 택한 백성들을 위해 일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기회를 업신여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순종하는 자는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 아래에서 참다운 평강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를 용서받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거짓된 진리를 붙잡지 말고 지혜롭게 벗어나야 합니다(20~23절).
하나님은 거짓 예언으로 포로민들을 미혹시킨 바벨론 거주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 거짓으로 예언한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민들이 곧 유다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임의대로 유언비어를 유포했던 대표적인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또한 이웃의 아내와 행음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 예언을 전파한 죄를 범했습니다.
불순종과 거짓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며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인 우리는 연약하기에 완전한 삶을 살지 못하며, 언제나 하나님을 근심케 하는 죄악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를 소유한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스스로를 돌아보며 죄악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은 평상시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생활을 누릴지라도, 결국 그들의 결말은 비참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짓의 사람들을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화려한 삶을 보이는 거짓의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이 당할 멸망을 두려워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거짓된 진리에 붙잡히지 말고 지혜롭게 벗어나는 삶을 통해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진리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견고하게 세워가야 합니다(24~32절).
하나님은 바벨론에 거주하는 거짓 선지자 스마야에 대한 심판의 경고를 말씀하십니다. 스마야는 예레미야를 비방하고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와 제사장들에게 글을 보내어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지 못하게 하고 그를 결박하도록 부추겼습니다(24~27절).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가 이 곳에 오랫동안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곳에 집을 지어 머물러 살고 과수원을 지어 거기에서 자라는 열매를 먹으라고 한다(28절)는 것입니다. 이에 제사장 스바냐는 그 편지를 예레미야가 듣는 데서 읽어 주었습니다(29절). 스바냐는 예레미야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으며 그를 궁지에 모는 일에 합세할 의사가 없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은 스마야의 비방을 들으시고 그에게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스마야뿐 아니라 그의 자손까지도 벌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30~32절).
참 신앙과 거짓된 신앙은 그들의 열매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탁월한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진리를 전하지 않으면 거짓의 앞잡이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할지라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쓸모가 없거나 버려질 뿐입니다. 하나님과 진리의 편에 서 있을 때 우리의 인생이 진정 가치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거짓된 말에 넘어가지 말고, 듣기에 부담이 되더라도 진리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진노 중에서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징계 중에서도 인내하며 진리의 편에 서서 고난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진정한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거짓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거짓에 속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날마다 받아 누림으로 생명을 얻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참된 진리를 소유한 믿음의 사람답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를 미혹하는 사탄의 거짓에 넘어지지 않도록 진리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므로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29:15~3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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