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78
2월25일[사순 제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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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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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BLteyHOyAvA
[청주교구 김성우 이사악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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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그러나 시선은 언제나 발밑을 향해!>
오늘 우리는 타볼산 정상에서 다시 한번, 인간적인, 아니 너무나 인간적인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찰라같은 순간이었지만, 살짝 천국의 한 장면을 맛본 베드로 사도는 무아지경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외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비록 잠깐이지만 맛보고, 느끼고, 만끽한 천국 체험을 붙들고 싶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인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지 않고, 여기 지금, 타볼산 위에서, 광채로 빛나는 인물들 사이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은 동료들과 함께 초막 셋을 짓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잠깐이지만 맛본 천상 체험을 뒤로 하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잠깐동안의 천상을 체험한 사도들이었지만, 하산(下山)해 보니, 무정하게도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어제와 똑같은 피곤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고, 어제와 같은 인간 실존의 비참함은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아직 영광과 완성의 때가 도래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스승님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도래할 그 순간을 맞이하려면, 먼저 그분처럼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타볼 산에서의 변모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신원과 정체를 핵심 제자들에게 뚜렷히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외아들이시며, 머지 않아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시겠지만,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으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실 것이며,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실 것이며 세세대대로 세상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형제들과 공동체 식사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원장 신부님께서는 식사 후 기도를 하려고, 계속 분위기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식탁에서는 한 형제의 주도로 나라와 민족, 인류와 지구 온난화 등을 주제로 한 범국가적, 범세계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원장 신부님은 이런 말로 대화를 종료시켰습니다. “자, 그럼 나라는 나중에 구하고, 우선 마침 기도부터 바칩시다.”
그렇습니다.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의 발밑을 향해야겠습니다. 매일의 귀찮고 짜증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부족하고 죄투성이인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산 위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귀찮겠지만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내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맛본 감미로운 천상 체험을 이웃들에게 나눠야겠습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박해받으며, 멸시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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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493zM8BBt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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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신에 대한 감정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변모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모하실 때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어떤 인물일까요? 모세는 진리와 엘리야는 은총과 관련이 깊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엘리야는 불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은총과 진리는 마치 어머니의 젖과 가르침처럼 자녀를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은총과 진리를 통해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었고 그 새로운 존재의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만, 또 제자들도 새로 태어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기도는 진정 새로 태어남의 시간이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는 기적의 시간입니다. 사순절에 교회에서 권고하는 세 가지 재계, 곧 기도-자선-단식에서 오늘은 기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기도하건 하지 않건 사람은 조금씩 변해갑니다. 더 높은 본성으로 변하든지 더 악해지든지 할 뿐입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어떤 것 때문입니다. 안 좋은 것을 받아들일 때는 안 좋게 되고 좋은 것을 받아들일 때는 좋게 변화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악마와 같이 변화되었다면 그런 것들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SNS에 N번방을 만들어 수십 명의 여성을 노예처럼 착취하며 돈을 번 일당이 잡혔습니다. 그중 상당수가 미성년자였습니다. 천재적인 수법으로 사람의 인권을 철저히 짓밟으며 그것을 돈벌이로 이용한 젊은 청년 중 주도자 두 명이 자신들의 아이디 ‘갓갓’(GodGod) ‘붓다’라고 한 것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신이 되려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신으로 불러줬기 때문입니다. 신이 되는 방법은 돈을 소유함으로, 쾌락을 추구함으로, 힘을 과시함으로써입니다. 곧 스스로 주님, 창조자, 심판자가 되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신이 되려 했는데 알고 보니 악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경찰에 잡혀 자신들의 악마와 같은 삶을 끝내줘서 감사하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들은 왜 스스로 신이 되려 했을까요? 세상에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언가 만들어주는 도구입니다. 아기가 짐승에게 사랑받고 길러지면 짐승이 되고 사람에게 길러지면 사람이 되며 하느님께 길러지면 하느님이 됩니다.
그들은 사랑받지 못했기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이때 스스로 높아지는 방법은 돈과 여자, 힘이었던 것이고 그것이 사람을 악마로 만듭니다.
영화 ‘한공주’(2014)는 집단 성폭행을 당한 아이가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 했지만, 부모로부터 외면당하고 학교, 그리고 친구에게마저 외면당함으로써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나옵니다. 목숨을 끊는다는 말도 내가 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안타깝지만, 자기 힘으로는 절대 높은 수준의 본성으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사람을 한층 더 높은 수준의 본성으로 상승시킵니다. 주윤발 배우와 같은 이들은 세상에 가진 전 재산을 아낌없이 주고 가겠다고 말하며 자신들은 매우 검소하게 삽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은 세상이 자기들을 그만큼 사랑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만큼 본성이 상승하여 다른 이들도 들어 높일 줄 압니다.
그의 오랜 친구 오맹달이 술과 쾌락에 빠져 그에게 돈을 빌리려고 왔을 때 주윤발은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그리고 그가 분노로 재기할 수 있도록 감독들에게 전화해서 그를 써 달라고 청합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안 오맹달은 그때 자신에게 주윤발이 돈을 빌려주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주윤발이 준 교훈은 진리이고 그가 오맹달이 재기할 수 있도록 감독에게 한 전화는 은총입니다.
기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아 본성이 새롭게 변모하는 시간입니다. 베드로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변모하여갑니다. 그가 타볼산에서 본 변모는 은총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은 진리를 받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십자가에 거꾸로 순교하면서 또 누군가에게 은총과 진리를 베푸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갓갓이나 붓다는 가지는 것과 즐기는 것, 강해지는 것으로 무언가 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대로 부모로부터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기도라는 시간이 있고 기도하면 은총과 진리로 누구나 작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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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에 살 때입니다. 봉사자들께서 2층의 숙소를 정리 해 주었습니다. 책상과 침대의 위치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위치를 바꾸니 방이 산뜻해 졌습니다. 잠자리도 아늑해졌습니다. 저는 보아도 보지 못했는데, 안목이 있는 분들은 방의 구조에 맞게 가구 배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다.” 예전에 읽었던 글도 생각납니다. 남편이 퇴근길에 모처럼 장미 한 다발을 사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화병을 찾아보니 없어서 시장에 가서 예쁜 꽃병을 사왔습니다. 식탁에 올려놓으려고 보니 식탁보가 너무 낡았습니다. 시장에 가서 식탁보를 사왔습니다. 의자를 보니 의자도 너무 낡았습니다. 시장에 가서 의자를 사왔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화병을 보는데 커튼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시장에 가서 커튼을 사왔습니다. 화병, 식탁보, 의자, 커튼을 바꾸었는데 방이 지저분해 보였습니다. 모처럼 청소기를 돌려서 방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남편이 퇴근해서 돌아오니 집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장미 한 다발의 마음이 아내의 마음을 움직였고, 낡고 지저분했던 집이 깨끗하고 화사한 집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변하니, 삶 또한 변하는 것입니다. 저 또한 사랑하는 마음으로 댈러스에서 지내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정든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편안함과 익숙함을 포기하고 낮선 곳을 향해 떠났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지내면서 기르는 양들이 늘었습니다. 함께 하기에는 너무 좁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서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롯은 기름지고, 풍족한 땅을 먼저 선택하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좋은 땅을 조카에게 양보한 것이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조카를 먼저 생각하는 아브라함의 따뜻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런 마음을 보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으로 찾아온 나그네를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착한 마음을 보시고, 이미 늙은 나이인 사라가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100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억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이사악 대신에 다른 제물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이웃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10계명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거짓 예언자들을 물리쳤습니다. 엘리야는 예언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을 때 예수님의 얼굴이 거룩하게 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옷도 아름답게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천막 3개를 만들어서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복음을 전하는 것도, 병자를 고쳐주는 것도, 마귀를 쫓아내는 것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외모가 거룩하게 변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옷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과 예언의 정신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그런 마음을 삶으로 드러낸다면 우리 모두 거룩하게 변할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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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1-9: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했다.
오늘 전례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고통과 죽음은 예수께 파스카로 가는 길임을 보여준다. 만일, 그리스도께 성금요일이 없었다면 환호하는 부활의 기쁨도 없었을 것이다. 사순절의 여정이 비록 광야를 거쳐 피곤하고 어려운 길로 우리 자신을 끊고 극복해야 하는 험난한 과정이지만 결정적으로는 부활의 쇄신과 변모의 기쁨과 빛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새기도록 한 것이다. 창세기에서 이사악의 희생의 의미는 다름 아닌 생명의 포기와 희생은 사랑에서 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에 대한 증명이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천사의 말씀이었다.(창세 22,12) 하느님께서는 이어서 아브라함에게 무수한 자손을 약속하신다.(창세 22,16-17) 이렇게 생명의 포기와 희생에 의미를 주는 것은 사랑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의 여정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예시해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진다. 우리도 이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고 지향해 가면서, 삶의 어두운 나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생략할 수는 없다. 베드로가 엉겁결에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5절) 하고 소리치는 것처럼, 그 시기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초막의 의미는 결정적으로 하느님 안에 쉬는 종말론적 안식의 환희와 기쁨을 예시한다. 예수께서는 지상에서의 싸움을 시작하실 때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수난과 죽음의 시련을 거쳐 우리보다 먼저 천상 영광에 오르셨다.
예수님의 변모 때의 찬란히 빛나는 옷은 신적 세계의 표지이며 기쁨과 승리를 상징한다. 부활 때 천사는 순백의 옷으로 나타난다.(마르 16,5) 구름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현존의 상징이다. 세 사도에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예외적이고도 형언할 수 없는 체험을 하게 해 주셨다. 이 찬란한 변모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우선은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4절)와 구름 가운데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는 소리다.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단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구약성경의 이 두 인물은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 때가 도래하는 그 순간에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계시해주는 말씀이다. 사도들에게 그 신비를 이해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갈바리아 산 위에서 예수께 일어날 사건은 바로 그분이 하느님한테서 나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만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 십자가 밑의 백인대장이 고백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라는 말은 오늘 아버지의 말씀의 반향일 것이다.
로마서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1-32) 이사악의 사건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었다. 그리스도께는 대신 희생될 수양이 없었다. 이렇게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서까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랑은 죽음을 넘어서도 영구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로마 8,34) 이렇게 보면 항상 주제는 같다. 모든 행위의 궁극적 목표는, 비록 사랑의 고통스러운 시련은 겪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기쁨과 아름다움과 생명을 달성하는 것이다.
주님의 변모는 그분의 고통과 기쁨, 능욕과 영광의 신비이며, 우리 인생의 신비를 더 잘 이해시켜주는 ‘빛의 순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로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들을 때,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 자신의 존재도 변모될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일에 있어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 체험을 하면서, 즉, 구원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모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순절의 근본 의미이다. 우리 자신의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은총의 때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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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여러 관계 안에서 서로 많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상처를 주지 않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상대방은 나에게 무시당하였다고 느끼고, 수치감과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한 번도 주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을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압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가시 돋친 말을 던졌을 때, 그것이 내가 먼저 준 상처의 대답은 아닌지, 또한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같은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돌아봅시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그 사람처럼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면, 그리 쉽게 남을 판단하거나 단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또한 상대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인식은 그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합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나의 능력으로는 결코 기워 갚을 수 없는 많은 잘못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한다면,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고 언제나 기다려 주시고 용서하여 주시는 하느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너무나 쉽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끝까지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무거움을 잘 아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행복한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며, 체험한 그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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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희망>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9,2-6)
이 이야기는,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영광을 직접 목격했고,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했다는 증언이고,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수난 예고 말씀 때문에 기가 꺾여 있는 제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당신의 본 모습과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 주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고,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영광’으로 눈부시게 빛났다는 뜻인데, 그것을 정확하게 묘사하기가 어려워서 하얀 색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구약시대 예언의 대표자와 율법의 대표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언입니다.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이대로 영원히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뜻이고, 하느님 나라가 너무나도 행복한 곳이라는 증언입니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라는 말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라는 말은,
그들이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무엇이 그렇게 행복하고 황홀한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사도들도 그것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습니다. 이것도 인간의 언어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냥 “너무나도 행복했고, 황홀했다.”라는 증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보통,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 모든 희망이 이루어져서 ‘더 바랄 것이 없는 곳’으로 표현됩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서 하는 생활입니다. 그곳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전에 미리 당신의 본 모습을 보여 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제자들에게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지를 미리 보여 주신 일이고,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시련과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 일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여기서 ‘보이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신앙인의 희망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는 확실한 희망입니다. 희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9,7-10)
여기서 ‘그의 말’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는 예수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알고, 어디인지 알고 있다고 해도, 지상에서의 인생을 생략하고 그곳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의 ‘인생’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기 때문에 생략할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신앙 여정’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앙 여정은 끝까지 충실하게 수행해야 할 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수난, 죽음, 부활을 모두 체험하고, 믿고, 증언하게 될 때까지는 예수님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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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예수의 거룩한 변모>
신학교에 입학해서 생활다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예수님은 고통스러운 인간을 내버려두며 당신 스스로도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는가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신학교 저학년이었던 시절, 제 온 몸과 마음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가슴이 아픈데 하느님은 왜 이러한 이웃을 도와주시지 않는지 궁금했습니다.
가난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천재지변, 불행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고통 중의 사람들, 반면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풍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정말로 정의로운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걸까 의문이 가득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십자가에서 신음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해보였습니다. 수난의 순간, 십자가에서 내려와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다!” 라고 외치며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다면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찬양하며 따랐을 텐데, 나아가 자신의 죄를 반성하며 뉘우쳤을텐데 왜 꼭 저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셨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고통의 삶 중에 유일하게 빛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 순간이 바로 오늘 복음말씀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 장면은 고통의 그늘에 머물러 계시는 십자가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기에 이질적인 느낌마저 듭니다. 그런데 이 변모의 전과 후를 살펴보면 이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한 예수님의 메시지가 정확히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전 장면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앞으로 고통 중에 죽었다가 부활하시리라고 예언 하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합니다.
병행구절을 찾아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겪으실 고통에 반박하는 이유는 그 모습이 우리가 기대하는 영광스럽고 찬란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갖 기적을 베풀며 하늘나라를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가 고통 중에 죽을 것이라니! 그것은 당장의 평화를 바라는 베드로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죽음을 예언하신 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안에서 우리는 수난 후에 있을 하늘나라의 행복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인간의 삶은 결코 행복하기만 하거나 매일매일 풍요로운 날만 있지 않습니다. 저마다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가 있으며 때로는 가시밭길처럼 끝없는 길을 걷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의 고통은 비록 죽음의 위협까지 주지는 않을지라도 지난하고 외로운 길이라는 측면에서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과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희망을 갖고 오늘 복음 장면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삶은 때로 힘들지라도 예수님의 길을 성실히 따르다 보면 우리는 오늘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본 그 지복직관의 영광의 순간에 있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변모를 본 야고보 사도는 제자들 중 첫 순교자가 되었으며,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또한 요한은 일생 동안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세상의 심판 때를 예언하는 요한 묵시룩까지 저술한 뒤 살아있는 증거자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 모든 삶의 원천은 오늘 그들이 체험한 지복직관의 장면이 있기에 더 적극적으로 실천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국에 맞이하게 될 주님과의 평화와 사랑의 시간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발을 옭아매고 있는 고통들 혹은 이미 체험한 괴로움의 상처는 지금의 나를 힘들게 만들지만 영원한 하느님의 영광에 비교해볼 때 일시적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중에 신음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구세주께서는 몸소 우리들의 세계 안으로 뛰어 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형벌의 종류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힘들게 하는 것 중에 하나인데, 이러한 일은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녀가 끊임없이 말을 듣지 않을 때도 있고 사회적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때도 있으며 타인과의 관계가 좋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밖에도 각자에게 있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쳇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다 보면 마치 이 상황이 끝없이 반복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어려움은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이며 이를 직접 체험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만큼 고통을 받은 자가 이 세상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에게 ‘나도 너와 같은 고통을 이겨냈으니 너 역시 극복할 수 있단다’, ‘내가 지금도 너와 함께 한단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더불어 우리들의 세상은 현재의 시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세상에 있음을, 그러므로 고통을 극복하는 힘과 용기와 소망을 주시는 분이 우리의 스승 그리스도이십니다. 별 수없는 사역으로 땅을 파고 있는 죄수의 곡괭이 질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행동에는 어떠한 희망도 기쁨도 없습니다.
그러나 금광에서 채광하는 광부의 곡괭이질에는 기대와 설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곡괭이 질은 어떠한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별 수 없이 세상에 태어났으므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거기에 그치면 우리의 삶은 어쩔 수 없는 죄수의 삶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금광을 파는 광부의 기대처럼 또 다른 목표, 또 다른 기대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 지복 직관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다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삶의 무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그 이후에 있을 새로운 삶을 향한 승리자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이 십자가를 주님과 함께 나누어질 때 우리에게 새로운 힘이 생겨납니다. 오늘 2독서의 바오로의 선포가 이러한 기대를 온전히 드러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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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황태종 요셉 신부님]
“주님 안에서 거룩하게 변모된 모습으로 사랑의 길로 나아갑시다.”
은혜로운 회개의 때인 사순시기에 우리는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바로 세우기 위해 거룩한 재개의 생활로 수련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이 뒤늦게 얻은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의 명에 따라 봉헌하려는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을 재물로 바치라 명하셨지만, 이사악을 재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실제로 아들을 바치지 않도록 하시며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던 하느님께서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을 갈릴래아 타볼산의 거룩한 변모로부터 치욕스런 죽음의 십자가 제단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의 골로고타 언덕을 향한 여정에로 이끄십니다.
하느님께 서는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시어 (로마 8,22) 아들의 희생제사로 세상과 화해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를 향한 여정을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시작하시며 아들의 모습을 거룩하게 변모시키시어 제자들이 십자가상의 죽음이 가져올 충격을 이기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 과 일치를 이루고 있는 신성의 탁월성을 드러냄으로써 십자가의 길을 목격할 제자들의 신앙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또한 거룩한 변모의 체험으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는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로마 8,18 참조)
아버지와 하나인 외아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성령 안에서 수난과 죽음의 길로 나아가셨듯이, 성령의 사랑 안에서 유혹을 이겨내고 타인과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향한 사랑으로 고통을 감내하는 이들의 얼굴에서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빛이 감돌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거룩하게 변모하셨던 주님의 뒤를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고 순명으로 받아 안으며 사랑의 길로 나아가는 이들의 삶에서 주님의 영광이 배어나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당신의 사랑하시는 외아들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의 무한한 자비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봉헌하신 주님 영원한 사랑을 믿으며 사순시기 수련의 여정을 의 하느님과 함께 천상의 행복을 미리 맛보며 나아갑시다.
유혹을 이겨내는 수난과 극기를 통해서만 영광스럽게 부활함을 깨닫고 힘들고 지치더라도 힘차게 행진합시다.
사순시기에 우리가 이 세상 속에 서 살아가면서도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성체를 갈망하고 영하며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아간다면 더 이상 어둠 속에서 해매이지 않고 빛에서 빛을 받아 빛을 내는 삶으로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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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강유빈 도미니코 신부님]
<많이 올라왔어 -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
저는 '등산'을 선호하지 않지만, 신학생 시절에 동기들, 신학교 신부님들과 함께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던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당시 저희는 '오색약수터'에서 출발하여 '대청봉'에 올라간 다음 '비선대 방향으로 하산했는데, 오색약수터에서 대청봉까지의 길은 '러닝머신'을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이 비슷한 풍경과 산행 길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인지 막연한 궁금증을 안고 오르다 출발한 지 1시간 정도 지나 쉬는 시간에 그날 산행을 이끈 신부님께 여쭤봤습니다.
“신부님, 얼마만큼 올라가야 하나요?"
"많이 올라왔어.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
신부님의 대답은, 등산이 익숙하지 않던 저에게 왠지 모를 '성취감을 주었고, 다시 기운을 차린 저는 한 시간을 더 부지런히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제 눈엔 여전히 똑같은 풍경이었고, 다음 쉬는 시간에 같은 질문을 하니 신부님 역시, "많이 올라왔어.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라고 똑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전 '반신반의하며 한 시간을 더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다음엔 대청봉에서 하산하는 등산객들에게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마치 신부님과 약속한 듯, 그분들의 대답도 한결같았습니다. "많이 올라왔어요.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이때부턴 속았다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고, '끝까지 가보자'라는 오기도 조금 생겼습니다. 그렇게 한두 번을 더 똑같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은 후에야 비로소 설악산 대청봉에 도착했습니다.
정상에 올라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비선대 방향으로 하산하면서부터, 쉬는 시간마다 떠오른 저의 반복된 질문은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사라졌습니다. 생전 처음 본 비선대의 절경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떠한지 가르쳐 주었고, 저는 언제 힘들었냐는 듯 하산하는 내내 그 절경에 감탄했습니다.
그 날 들었던, '많이 왔고, 조금만 더 가면 돼'라는 대답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믿고 따르길 잘 했다.'라는 생각을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간직하고 떠올려보곤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거룩하게 변모하십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위해 고통을 받으셨음을 기억하는 사순 시기에, 우리는 왜 이 대목을 읽을까요? 아마도 그건,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또 사순 시기를 지내며 자신의 나약함에 좌절 할 때, 잠시 눈을 들어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곳이 '분명히 있음'을 떠올리기 위함일 겁니다.
한 가지 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가 끝난 후에,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라고 전합니다. 거룩한 변모 후에도 예수님이 제자들 곁에 계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지상 여정을 마칠 때까지 예수님은 늘 우리 옆에 계시며, '많이 올라왔어,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라고 말씀하기 위함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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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박재홍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 지어 드릴 선물>
사순 제2주일, 교회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을 복음으로 전한다.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처음으로 예고(마르 8,31-33)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타볼산으로 오르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모습으로 변하신다.
복음사가의 말에 의하면,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3)고 전할 정도이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목격한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 여기에서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예수님께 제안한다.(마르 9,5 참조)
‘얼마나 좋았으면, 가족들과 동지들이 있는 저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지 말고 그냥 이곳에 눌러앉자고 했을까?’ 그리고 초막집을 지어 드리겠다고 제안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예수님께 지어 드릴 선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주님처럼 나도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변화)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예수님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어두운 상황이다. 머지않아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둠의 시간에 주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변화하셨다. 반전이다. 어둠이 순식간에 빛으로 바뀐 것이다.
마치 혼돈과 어둠에 잠겨 있는 세상에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창세 1,3) 하시자 빛이 생겼다는 창세기의 기록처럼, 타볼산에서 새로운 창조가 벌어진 것이다. 지금 주님은 당신의 변화하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변화할 수 있음을 깨우쳐 주고 계신다.
신앙생활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죄인이 선인으로 바뀌고, 높아지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물론 세월이 가면 사람은 누구나 다 바뀐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 또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변화의 방향이다. 세월이 갈수록 깊어지고 맑아지고 넓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두워지고 낮아지고 좁아지는 사람도 있다.
깊고 넓고 맑은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 애쓰는 사순 시기를 보냈으면 좋겠다. 주님처럼 빛나는 모습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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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3 졸업을 하고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고민이 생겼습니다.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신부님이 될 수 있을까? 신부가 되기 위해 모인 천사 같은 신학생들 사이에서 악마 같은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뭐, 이런 고민이었습니다.
입학 후 친구들과 산책하다가 너무 놀라서 나무 뒤에 숨은 적이 있었습니다. 수단 입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4학년부터 수단을 입습니다. 당시 신학생 수가 많았기 때문에 수단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의 눈에는 모두 신부님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숨이 있는데, 깜짝 놀랄 말을 들었습니다. ‘욕’이었습니다. 쌍 ‘ㅅ’ 들어가는 말을 서슴지 않고 수단 입은 신부님들(당시에는 수단 입고 있으면 다 신부님으로 생각했음)이 막 하는 것이 아닙니까? 천사만 사는 곳, 좋은 말만 하고 사랑이 넘쳐나는 곳이 이곳 신학교라고 생각했는데, 첫날에 환상이 완전히 깨졌습니다. 후에 깨달았습니다. 이곳은 천사가 사는 곳이 아니라, 천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사는 곳임을 말이지요. 이런 깨달음 이후에 신학교가 좋아졌습니다. ‘나’ 같이 악한 사람도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성당 다닌다는 사람 왜 이래?’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봅니다. 아마 이분들 역시 성당 안의 사람이 모두 천사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천사만 있는 곳에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천사만 있는 곳은 하느님 나라, 곧 이 세상 삶을 마쳐야만 갈 수 있으니까요.
우리 교회 안에는 천사가 아닌, 천사가 되려는 사람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차별 없이 이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것이며, 부족함을 나누면서 완벽함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교회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천사만 모여 있는 곳이 아니기에 나 같은 사람도 교회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모습을 제자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엘리야와 모세가 있는 곳, 그래서 이곳이 하느님 나라라고 생각했고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서 지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뜻은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이 천사만 사는 곳이 될 수는 없지만, 천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이 늘어나면서 가장 좋아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의 뜻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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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당신만을>
마르코 9,2-10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오직 당신만을>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마르 9,8)
당신의 무엇을
믿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그러할 때에
비로소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의 무엇을
바라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그러할 때에
비로소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의 무엇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그러할 때에
비로소
당신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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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안주하지 않는 삶>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한 제물, 향기로운 예물이 되시도록 하셨습니다.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음성을 들려주시며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같은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부활의 영광으로 나갈 수 있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높은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십계판을 받았고,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신 장소도 산이었고, 그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곳입니다. 이러한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고, 그분의 옷은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에 놀란 베드로는 얼떨결에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 9,5)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께, 하나는 모세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예언서를 대표하는 인물로 죽은 지 수백 년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과 얘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바로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의 활동은 예수님을 준비하기 위한 단계였음을 시사해 줍니다. 구약은 신약의 예표요, 신약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게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을 참된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엘리야, 하느님의 명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모세가 하느님의 백성을 올바른 길로, 참된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초를 당했듯이 예수님께서도 만백성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고통을 당할 운명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하얗게 빛난 옷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오게 될 부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마치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이 환히 빛났으며(탈출 4,29참조),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던 천사 옷도 하얗습니다.(마르 16,5)
예수님의 변모는 영광의 모습을 기억하며 지금의 시련과 역경을 이겨나가라는 위로이며 희망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는 말씀에 이어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여주신 것은, 십자가의 여정이 무의미한 가시밭길이나 파멸로 치닫는 저주의 길이 아니라는 보증이며 담보인 것입니다.
이제 새하얀 옷은 곧 우리의 옷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허물과 후회 없이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하여, 하느님을 경외하며 온전히 거룩”(2코린 7,1)하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새하얗게 빛나야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우리의 얼굴이 언제나 환하게 빛나길 바랍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지어 머물고 싶어한 것을 보면 좋긴 좋았는가 봅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늘의 소리와 함께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것은 안주하지 않는 삶에로의 초대입니다. ‘초막 셋을 짓겠다’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온 것은 영광에 머무르지 않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꿋꿋하게 주님의 삶을 살아야 할 소명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산에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세상의 복잡하고 어려운 일, 감당하기 어려운 곳으로 내려오셔서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때 광야에서 앞길을 인도한 것이, 구름 기둥, 불기둥이었듯이 오늘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는 것은 구름 속에서 들려온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듣는다는 것은 들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주 하느님의 명대로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렸어도 그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민수21,9)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명을 듣지 않고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세 19,26) 주님의 말씀대로 하면 생명이 주어지고, 하지 않으면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영광스러운 부활을 준비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얼굴은 마음의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말씀으로,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성체로 한 충만하게 채워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순절에 회개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회개는 우리가 큰 죄를 지어서 회개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했던 마음에 소홀함이 있다면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며 온 삶이 그분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보시고 ‘참 좋다’ 하시길 희망합니다. 한 주간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향하고, 말씀을 새기고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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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변모의 여정>
-날마다 거룩한 주님을 닮아가는-
2005년 봄, 그러니까 19년전 써놨던 시 두 편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세월 흘러도 오랜만에 읽어보니 새롭습니다. 하나는 ‘한강을 건널 때 마다’입니다. 이 때는 수도원 매각 문제로 참 어지러웠던 때이고, 힘들 때 좋은 시들은 구원의 빛처럼 저를 밝혔고 위로했고 자유롭게 했습니다.
“물 흐르듯 살 수는 없나?
한강을 건널 때마다 생각한다
‘가슴에 강(江) 하나 지녔으면 좋겠다.’
시작도 끝도 없이
하나로 흐르는 세월의 강(江)인데
부질없이 나눈
세월의 방(房)안에서
나는 참 많이도 삭막하게 살았다
아!
서두르지 않고
유유히
흐르는 강처럼 살 수는 없나?
한강을 건널 때마다
가슴 안에 흐르는 영원의 강(江)을
강같은 당신을
생각한다.”-2005.3
밖으로는 임 기다리는 산처럼, 안으로는 임향해 흐르는 강처럼, “산처럼, 강처럼”, 그대로 산같은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베네딕도 수도자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어제는 꼬박 일년 기다렸다 찾아온, 맨 먼저 피어난 영춘화(迎春化), 파스카의 봄꽃이 너무 반갑고 고마워 여러 지인들에게 전송했습니다. 또 하나는 “봄이 되었다”라는 시입니다.
“마음 들뜨게 하는 봄꽃들이라
막 꽃피기 전 햇빛 부드러운 초봄이 제일 좋다
어느 새 찾아 온 이름 모를 새들
맑은 소리로 봄소식을 알린다
부드러운 봄비
따사로운 봄빛
맑은 봄소리
향기로운 봄공기, 봄거름, 봄흙
봄에는 향기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봄의 맑음과 부드러움, 향기에 빠지다보니
나는 사라져 봄이 되었다”-2005.3.
사순시기 전례시기와 너무 잘 들어맞는 요즘의 계절 봄입니다. 강같은, 봄같은 파스카의 주님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전번 사순 제1주일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신 주님에 이어, 오늘 사순 제2주일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입니다. 그래서 강론 제목은 “변모의 여정-날마다 거룩한 주님을 닮아가는-”이라 정했습니다. 그대로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성화의 여정과도 통합니다. 저는 여기서 잠시 다산과 맹자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삶의 여정에 귀한 깨우침을 줍니다.
“살아온 세월을 맹신하면 축적한 내공이 편견이 된다. 일가견을 이룬 사람은 아이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다산
“어른이란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아이가 상징하는 바, ‘겸손하고 지혜로운, 그리고 순수한 열린 마음’입니다.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에 앞선 복음 내용이 중요합니다. 바로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로,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라는 내용으로 제자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많이 위축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시 반발하던 베드로는 주님께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호된 질책을 받았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선물이 주님의 변모사건이요 제자들의 주님의 변모 체험입니다.
저는 어제 성가연습을 하면서도 흡사 오늘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처럼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이요, 날마다 주님을 닮아 거룩히 변모되어 가는 우리들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서 세가지 주님의 가르침을 배웁니다.
첫째, “사랑하라!”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제자들이 결정적 순간, 때가 되었을 때 주님을 만나는 신비체험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아브라함이 그렇고,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그렇습니다. 주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보면 두분간의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다음 문답에서 선명히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두 번째,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사악을 죽이려 했을 때 주님은 다급한 마음에 아브라함을 두 번씩이나 부르시고 그를 만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세제자들 역시 참으로 주님께 신뢰와 사랑을 바쳤던 분들임이 분명합니다. 복음 서두의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이건 차별이나 편애가 아니라 자연스런 것으로 다른 제자들도 받아들였을 것이니, 세 제자들의 주님 사랑이 참으로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확신에 넘친 고백도 그의 주님 사랑을 입증합니다.
둘째, “체험하라!”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체험, 신비체험입니다. 이런 체험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을 만났던, 체험했던 복음의 세 제자는 물론이고 창세기의 아브라함, 로마서의 사도 바오로 진짜 신비가입니다. 진정 내적 힘도 이런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체험에서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새하얗게 빛나는 옷에, 엘리야와 모세와 이야기를 나누는 신비로운 장면을 목격한 제자들의 충격은 너무나 컸을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예수님은 두 승천한 인물과 영적 교류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이런 신비체험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의 순수한 마음은 이해가 되나 큰 착각입니다. 결코 독점하거나 집착할 수 없는 선물같은 신비체험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어쨌든 주님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한 이런 내적신비체험은 세 제자들의 십자가의 여정에 샘솟는 힘의 원천이 됐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감사송이 제자들의 주님 변모 신비 체험의 진실을 환히 밝혀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고, 그 거룩한 산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럽게 부활한다는 것을 밝혀 주셨나이다.”
제1독서 창세기 후반부에서 보다시피 아브라함의 주님과의 은밀한 내적체험은, 그의 평생 여정에 큰 힘이 됐을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들으니 출산율 저하로 장차 나라의 명운까지 위협받는 우리의 박복(薄福)한 현실이 안타깝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바오로의 주님과 만남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도의 확신에 넘치는 살아 있는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도 너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백절불굴의 파스카의 믿음의 비밀이 환히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누가 우리를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셋째, “들어라!”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들음의 경청입니다. 경청하는 이가 겸손한 이요 경청하는 이가 순종하는 이요, 경청하는 이가 추종하는 이입니다. 제자직의 필수 조건이 경청입니다. “아브라함아!” 부르심에 즉시 “예 여기 있습니다.” 대답하는 아브라함은 깨어 있는 사람이자 잘 듣는 경청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청은 그대로 순종에 직결됨을 봅니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순종은 우리 당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도, 후손에도 축복의 통로가 됨을 봅니다. 신비체험에 집착하는 제자들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 대한 주님의 당부 말씀도 들어라, 경청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제 산상에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체험은 끝났지만 제자들은 물론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십자가의 여정은, 주님을 닮아가는 변모의 여정은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의 거룩한 변모체험 은총은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변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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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믿음의 맑은 눈으로>
오늘 사순 제2주일의 두 독서는 두 아버지의 아들 봉헌을 얘기합니다. 두 아버지가 외아들을 아끼지 않고 봉헌하였다고 얘기합니다.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제1독서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봉헌한 얘기이고, 제2독서 로마서는 성부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봉헌하셨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순 제2주일은 당신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하느님께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바치라는 것이 진정 사순 제2주일의 주제일까요?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복음의 다음 말씀에 들어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분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언제 흔들입니까? 박해나 극심한 시련의 때가 아닙니까? 믿음이 언제 필요합니까? 박해나 극심한 시련의 때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시련의 때에 믿음이 제일 많이 흔들리고 크게 흔들리지만 이때가 믿음이 더 필요한 때라는 얘기입니다.
모든 것이 평안할 땐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굳은 믿음도 굳이 필요치 않습니다. 씨뿌리는 이의 비유에서도 믿음이 약한 사람을 돌밭에 뿌려진 씨에 비유하시며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될지도 모를 때, 제자들처럼 믿고 의지하던 사람을 잃게 될지도 모를 때,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없을 때. 그때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의 믿음이 지금 비록 시련 당하지만, 이때 믿음이 더 필요하고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단련되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수난 예고 때는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하며 수난과 죽음은 빼놓고 듣고, 막상 수난이 닥치고 주님께서 확 돌아가시고 나면 절망감 때문에 부활에 관한 말씀은 빼놓고 들을 수 있는데 바로 그 절망의 때에 부활의 말씀을 상기하고 영광을 내다보라는 거지요.
오늘 본기도는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따르라고 명하셨으니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희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영혼의 눈을 맑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여기서 중요한 말이 ‘영혼의 눈을 맑게 하시어’입니다.
육신의 눈은 지금 죽음을 목도하지만 영혼의 눈은 불신과 의심과 절망으로 흐려지지 않고, 맑은 눈으로 부활을 내다보며 ‘부활 관상’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진정 믿음의 눈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맑은 눈으로 부활 관상함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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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9,7)
<믿음!>
오늘 복음(마르9,2-10)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의 의미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오늘 '미사 감사송'은, 그 의미와 메시지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고, 그 거룩한 산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럽게 부활한다는 것을 밝혀 주셨나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표지입니다.
거룩한 변모에 관한 말씀 전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예고'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십자가 수난 그 너머에 부활이 있다는 '깨달음과 희망을 전하는 표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 수난'은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믿음'이라고 묵상했습니다. 하느님보다 세상 가치를 더 좋아하면서 따라가고 있는 '우리의 약한 믿음'이라고 묵상했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루카11,29)
예수님의 이 말씀이, 하느님보다는 세상 가치와 정치 이념을 따라가는 믿음이 약한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으로도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매일 믿음을 키워가야만 하는 '힘든 믿음의 삶'이 '십자가 수난'으로 다가왔습니다.
부활을 준비하는 거룩한 사순시기에, 나의 믿음을 깊이 성찰해 보고 '나의 믿음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른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한 믿음, 겸손한 믿음, 충실한 믿음 그 너머에 부활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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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S5T--5zA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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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 7)
얼었던 물들이
흘러 내립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따뜻한 봄날이
우리에게 펼쳐져
내릴 것입니다.
봄날은 그냥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 겨울 매서운
추위를 통해 새삼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죄인들 가운데에서
변모의 길이
이제 시작됩니다.
변모의 길을
걸어가야 할
우리모두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를 통해
우리는 세상과 사람을
새로이 보게됩니다.
일으켜 세워
주어야 할 아픈
사람들입니다.
칼날같은
정의와 보복이라는
상반된 이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것또한
겸손된 사랑입니다.
사랑해야 할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 딸들이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서로를 죽이는
삶이 아니라
서로를 아름답게 하는
거룩한 변모 말입니다.
거룩한 변모는
거룩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라지지 않을
사랑의 참된 관계를
보게됩니다.
하느님 사랑 속에
우리가 있고
우리들 안에
거룩한 변모가
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고
빛나게 하시는
하느님 말씀이
울려퍼집니다.
보복과 어리석음의
말씀 아니라
서로를 하늘이
되게하시는 말씀이
우리들 가운데
울려 퍼지는 살아 있는
관계의 사순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변모의 시작은
우리가 부족한
사람이기에
세례의 첫마음에서
시작되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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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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