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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그대에게 잘해줄 의무가 없다.-2nd
지은이 ‘페마 초드론’의 이어지는 글이다. 덧없다는 삶의 진실. 삶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세 가지는 無常, 無我, 苦이며 구체적으로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라 불리지요. 이러한 특성이 진실임을 직접 확인하고 깨닫게 되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삶이 항상 우리 뜻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며,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임을 말로는 인정하면서도, 그런 현실을 외면하려 하지요. 우리는 근본적인 모호함에 맞서기 위해 일상의 활동을 조정하려 합니다. 무상함과 죽음을 피하려고 에너지를 소비하지요, 특히 나이가 들면서 체형이 바뀌는 것에 겁을 내고, 주름이 생기고 피부가 처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덧없음을 바라보는 이러한 좁은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솔직하고 따뜻하게 바라볼 용기와 관심이 부족합니다. 그렇게 무지한 상태로 삶을 살아가며,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지요. 이런 해를 막으려면 마음 챙김이 중요합니다. 있는 그대로 연민과 존중의 마음으로 명확히 의식하는 것입니다. 명상에 활용되는 마음 챙김은 실제로 그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 이는 단순한 명상 기법 이상의 개념입니다. 제멋대로 판단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자지 자신을 깊이 존중하려면 평생에 걸쳐 노력하고 정진해야 합니다. 온 마음을 쏟아 진지하게 노력하기 시작하면, 그동안 스스로 해를 끼치고 있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깨닫고 충격을 받을지 모릅니다.
불확실함에 그대로 머물기. 습관과 계획에 얽매여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경험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불안, 불만,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아무리 확실한 상황을 만들어도 그 평안은 잠깐 우리를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사람이나 연민을 느낄 때 마음이 열리는 경험이든, 원한이나 이별처럼 마음이 닫히는 경험이든,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세요. 그럴 때 우리는 엄청난 해방감을 얻게 됩니다. 이 세상에 고정된 실체라는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오는 자유이지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無常에 대한 인식은 우리를 점차 치유의 길로 이끕니다. 동시에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만의 환상이나 습관적인 패턴에 매달러 삶을 견고하게 하고 확실하게 만들려고 애쓰기보다는, 순간을 의식하며 깨어 있는 상태로 살아가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이지요. 또 경험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직접 마주하면 회피하며 저항할 때보다 기분이 나아진다는 사실로 깨닫게 되지요. 고통스럽더라고 피하지 말고 그 자리에 머물러 보세요. 이 순간을 깊이 느끼고, 그대로 머무는 연습을 거듭하다 보면, 고정된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의 존재 상태를 점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존재의 두 번째 특징은 ’나 없음‘이라고도 불리는 無我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거나 개성이 사라진다는 것으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답니다. 무아는 ’영원불변한 나‘는 없다는 뜻으로, 우리가 남과 분리된 고정된 실체라는 고정관념은 지극히 제한적인 생각임을 강조합니다. 문제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 온 신경을 쏟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겁입니다. 자기에 집착은 마음에 감옥을 만들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세계에 우리를 가두어 놓습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과 세상이 따분하게 느껴집니다. 결국 마음에 불만이 가득 차게 되지요. 호기심이 있는 열린 마음으로 자신과 세상 사이에 세워진 장벽을 허무는 연습을 꾸준히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을 가장 유익하게 사용하는 방법이라고요. 깨달음을 향해 수행하는 전사에게 무아는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의 원인입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두려움에 저항한다는 뜻이 아니라 두려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연민 어린 마음으로 살펴보지 않고서는 두려움 없는 마음을 키울 수 없지요. 명상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일은 내면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피하거나 그것에 집착하려는 습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반응을 더욱 선명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특히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갈망하는지, 어떤 생각과 신념이 내면의 보호막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는지를 보게 되지요. 특히 마음 챙김을 실천하면, 그 순간의 경험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처음에는 현재의 경험을 또렷이 바라보는 데 그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고, 무엇을 억누르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되면 이전에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던 반응들이 점차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존재의 세 번째 특징은 고통과 불만입니다. 인간은 무상함과 죽음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고귀한 진실에 저항할 때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받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악하거나 벌을 받아 마땅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다음 세 가지 안타까운 오해 때문입니다. 첫째,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의 과정을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영원하지 않는 것을, 영원하리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 착각이 깨어질 때마다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실제로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우리는 마치 우리가 남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우리의 본질은 유연하고 열린 상태인데도, 자기 자신을 견고한 존재라고 여길 때 마음은 점점 더 경직되고 고통이 깊어집니다. 셋째, 우리는 행복을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를 두고 “고통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습관”이라고 하셨습니다. 순간의 불안감을 덜어내려고 다른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습관이 되면 찰나의 불안이나 불편함도 점점 견디기 힘들어집니다. 처음에는 약간의 변화로 시작되지만, 그런 반응은 점차 하나의 패턴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삶을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만들려다 보니 이러한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고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치 행복으로 가는 일인 양 착각하고, 그로 인해 불만만 쌓이는 반복적인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네 가지 생각. 1). 이 몸으로 태어났다는 소중함- 온갖 느낌, 감정, 생각은 순간순간 몰려왔다가 몰려가지만, 그런 상황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르침을 익히고, 실천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열린 마음을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2). 무상함의 진리- 삶은 본질적으로 덧없습니다. 인생의 끝은 언제든 닥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삶이 끝날 수도 있지요. 모든 것은 덧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마음을 밝게 먹고 생기 있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에 겁이 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런 두려움을 인식하면 이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해, 그리고 마음을 닦을 기회를 가지게 된 데에 감사함이 더 커질지 모릅니다. 3). 카르마의 법칙- 모든 행동은 결과를 낳습니다. 자기 생각을 알아차리라고 현재 순간의 의식을 되돌릴 때마다, 우리는 앞으로도 깨어 있기 위한 씨앗을 뿌리게 됩니다. 우리는 습관적인 행동 방식을 관두고, 새롭게 행동하기로 결심함으로써 깨달음을 향한 본연의 마음을 닦습니다. 인생은 소중하고, 그만큼 짧습니다. 이 삶을 제대로 누리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4). 윤회의 무익함- 윤회는 삶보다 죽음을 앞세웁니다. 윤회는 늘 안전지대를 만들려고 하는 우리의 습성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정체성에 집착하여, 안정 막을 얻으려 합니다. 괴로움을 느끼더라고 안전지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안전지대가 도움이 될 그것이라는 생각은 부질없는 기대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옥과 천국은 어디에 있을까. 건장한 사무라이가 선승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어떻게 다른지 말해 주십시오” 선승이 말했다. “당신처럼 꾀죄죄하고 역겹고, 보잘것없는 작가에게 내가 그걸 왜 가르쳐 주겠소?” “버러지 같은 이라고, 내가 말해줄 것 같아?” 화가 치면 사무라이가 당장이라도 목을 벨 것처럼, 칼을 뽑아서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그러자 선승이 말했습니다. “그게 바로 지옥이오” 즉시 사무라이는 방금 자신이 지옥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증오와 자기 보호, 분노와 원한으로 가득 찬, 시커멓고 뜨거운 감옥이었지요. 사무라이는 누구를 죽일 정도로 깊이 지옥에 빠져있음을 깨닫고, 자신에게 일깨움을 준 선승에게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두 손을 모아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이때 선승이 말했다. “그게 바로 천국이지요” 지옥은 나쁘고 천국은 좋다거나, 지옥은 피하고 그저 천국만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천국과 지옥, 그 밖의 모든 것을, 열린 마음으로 대하려고 노력하지요. 이러한 치우침이 없는 마음을 기르면, 어떤 일이 생기든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신성한 공간임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에 들어온 모든 것을,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온 것임을 이해하게 되지요.
(개천절 삼일의 연휴가 계속된다. 모처럼 바람을 쐬고 드라이브와 점심을 먹기로 마나님과 합의한 뒤 어디가 좋을까? 궁리하다 한양이 속했던 땅이 양주 고을인데, 도대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남양주와 의정부 포천에 가 봤지만 양주는 어디인지 모르겠다. 네비로 보니 동부간선도로 중랑천을 타고 올라가 서계 박세당 (반람 박씨) 선생 고택을 지나, 의정부에서 직진한다. 일산, 고양, 의정부, 동두천, 양주, 퇴계원, 구리가 거의 같이 붙어 있었다. 한양도성은 원래 양주 땅에 속했다. 한강 남쪽은 광주, 시흥, 陽川이 받치고 있고, 위에는 서쪽으로 高陽이 위쪽에 陽州가 동쪽에 陽坪이 있다. 모두 陽자 돌림이다. 고양 내에 일산이 들어섰고 양주는 위에, 양주 군 이담 면이 동두천시로, 남쪽 의정부 읍이 의정부시로, 양주 군 구리 면이, 남양주 군으로 분리됐다가 구리시로, 양주 군 별내면 퇴계원리가, 남양주시 퇴계원 읍이 된 것이다. 북한산은 인수봉부터 북에서 내려오니, 산을 피해 한양부터 서쪽에서 동쪽으로, 말굽형으로 도시가 형성되면서 고양, 양주 두 거대한 모태에서 서울특별시, 일산, 고양, 의정부, 동두천, 양주, 남양주, 구리시로 분리된 것이다. 양주군 회암사 박물관에 차를 대고 영상으로 사찰을 본다. 몇 년 전의 제작된 화면인지 안내 AI들이 지금의 인공지능에 비하면 거의 로봇처럼 느리고 어둔한 동작 수준이다. 무슨 고증인지 스님은 수염을 기르고 있다. 빨리 다시 만들어야지, AI 강국 대한민국 최면이 아니다. 사찰의 터는 거대했다. 배 산인 뒷산은 약했고, 산의 국이 나지막하니 물이 없으니 건천이다. 사찰 터의 국은 거대한 궁궐터처럼 보였다. 檜巖寺라! 檜는 전나무 회였다. 궁궐이나 관청 중에도 군대가 주둔할 터인데, 거대 종교 원찰의 사찰을 지었으니, 폐사가 된 모양이다. 남북통일이 되면 이곳을 불교 종찰로 재건해 봄도 생각해 볼 일이나. 현재 조계종 스님들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다?. 돈이 모여야 스님들도 오실 테니 말이다. 점심은 십 리 떨어진 양주 시청 방향의 ’백년고등어‘ 집에서 고갈비 백반으로 했다, 된장국과 솥 밥과 고등어는 맛이 좋았다)
2026.10. 04.
삶은 그대에게 잘해줄 의무가 없다-2nd
페마 초드론 지음
신동욱 옮김

첫댓글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주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