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에게 잘해줄 의무가 없다-3rd
미국인 비구니 ‘페마 초드론’의 이어지는 글이다.
게으름, 분노, 자기 연민처럼 우리를 애먹이는 습관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바로 공격하기, 빠져들기, 무시하기입니다. 공격하기는 좋지 않은 습관을 발견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편한 것만 찾고 자기 연민에 빠져 있으며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며 게으름을 피우는 자신을 책망하고 부끄러워합니다. 빠져들기는 자신의 습관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격려도 합니다. 이게 내 본 모습인데 굳이 불편을 감수할 필요는 없잔은듯하며 자신 마음을 달래고 자기 행동을 눈감아 줍니다. 무시하기 전략은 문제 상황과 거리를 두고 그 상황에 무감각해지는 것으로, 순간적으로 효과는 있으나 마치 자동조정 장치를 켜 놓은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받아 반응합니다. 자기 행동을 너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지요. 그것이 실제 습관으로 굳어지기 전에 본연의 다정함과 열린 마음으로 습관을 바꿔보세요. 자신에 관한 집착을 버리고 지혜와 자비심을 키우겠다는 다짐을 가지고 시도해 보세요.
깨친 마음으로 가는 데 사람의 힘이 중요하듯,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느끼려는 의지가 필요하므로, 자애보다 감정적으로 훨씬 더 큰 노력을 요구합니다. “연민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려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동물이나 처형을 앞둔 사람의 처절한 상황을 상상해 보라“고 한, 요가 수행자가 말했습니다. 그 고통 상황에 자신을 직접 놓아보면, 감정이 더욱 생생하게 일어납니다. 대부분 사람은 이런 장면을 상상만 해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렇듯 연민을 기르는 수행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먼저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법을 배우고, 그런 다음에 두려움의 대상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고통이 회피나 거부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고통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처음에는 고통받는 존재의 입장이 되기는커녕, 그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선 염원의 말을 통해 용기를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과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까지 모든 존재가 고통과 그 근원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하며 기도하세요.
우리는 방금 지금껏 믿었던 기반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그동안 의지해온, 믿음을 더 고수할 수 없고,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느낌도 이제는 사라졌습니다. 편안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상황은, 우리에게 일종의 ‘죽음’과도 같습니다.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죽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싸웁니다. 자신의 한계에 다다라드는 것을 벌처럼 여기지는 마세요. 사실 이는 생명력이 살아 있다는 건장한 신호입니다. 죽음을 앞뒀을 때 두려움과 떨림을 느낄 때처럼요.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경험을 ‘이제는 발버둥 치기를 멈추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가 됐다.’라는 신호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초조함이나 불안 같은 감정은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지평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원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 바라던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병에 걸렸을 때, 늙어감을 느낄 때,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자신의 반응을 관찰하며, 더욱 섬세하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뿌리는 모든 것이 덧없다는 깊은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고통 없이 기쁨을 누리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에는 고통 없이도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펴져 있지만, 고통과 기쁨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듯, 한 쌍입니다. 둘 다 삶의 평범한 일부이며, 모두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탄생은 고통이자 기쁨이며, 죽음 또한 고통이자 기쁨입니다. 끝이 있는 모든 것은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의 시작입니다. 고통 형벌이 아니며, 기쁨은 보상이 아니랍니다.
통렌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공감 능력이 자라나고 다른 사람들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겪는 고통은 결국 마음을 더 크게 만드는 발판이 됩니다. 이 수행은 고통이라는 구체적인 경험에 마음을 열어 공감할 여지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고통이 우리가 모두 겪는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도 분노하고, 질투하고,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도 고통 속에서도 어리석은 행동을 합니다. 외로운 마음에 차가운 말을 하고, 사랑받고 싶어서 상처를 주는 말로 상대방을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통렌은 ‘나’와 ‘타인’의 자리를 바꾸는 수행입니다.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지금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인간으로서 같은 것을 경험하고 나누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도록,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불현듯 이런 마음 수련 경고가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흔들리는 중에도 수행할 수 있다면, 이미 훌륭하게 익힌 것이다.“ 질투심이 생기고, 분노와 원망이 치밀고,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도 수행할 수 있다면, 이미 훌륭하게 익힌 것입니다. 우리의 습관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었습니다. 습관대로 행동하기란 너무나 익숙하며, 때로는 위안이 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습관적인 패턴이 그저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꼭 있어야 하지요. 머릿속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지켜보고, 그것이 과연 맞는 말인지 생각해 보고 있나요? 우리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수행의 자양분이 됩니다. “끔찍하게 괴롭고 우울하네. 좋아, 그렇다면 이 감정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느껴보자. 내가, 이 감정을 충분히 느껴서, 다른 누구도 이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러면 누군가는 이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이런 마음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가슴이 조금씩 열립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오염된 감정을 뜻하는 ‘클레샤‘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독, 오염, 고통을 뜻합니다. 독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으로 독을 강조합니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갈망, 혐오, 무관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갈망은 우리가 겪는 모든 욕심의 원인이 되는 감정으로, 끊임없이 원하고, 또 원하고,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해소되어야만 한다고 느끼는 욕구입니다. 혐오는 폭력, 분노, 증오를 비롯한 온갖 부정적 감정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짜증도 포함됩니다. 무관심은 현실을 외면한 태도로, 오늘날에는 부정이나 거부라는 표현으로 흔히 씁니다. 이 세 가지 독은 항상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옭아매고 가두어 우리의 세계를 아주 좁고 답답하게 만듭니다. 이 독을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없애려면 오염된 감정 상태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소중한 재산도 함께 잃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가장 없애고 싶어 하고 피하고자 하는 것들이 바로 보리심을 깨우는 데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는 전사-보살들이 바로 이 자리에서 지혜와 연민을 얻을 수 있지요.
부처님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空, 절대적 보리심, 반야 바라밀로 알려진 것들입니다. 모인 제자들은 이 세상은 덧없으며,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개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한 무엇도 한결같지 않으며 예측할 수도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고, 탐욕과 집착에서 비롯한 고통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었지요. 그들은 이러한 진리를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배웠고, 명상을 통해 그 심오함을 경험했습니다. 공에 대해 말한다. ‘확실한 기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진실을 일깨우기 위해 앉은 방석을 확 잡아당겨 버린 것이지요. 제자들에게 모든 믿음을 놓아버릴 것과 현실에 대한 설명에 집착하는 그것은, 결국 또 다른 함정이란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모든 것이 지혜를 가로막으며,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론도 반듯이 놓아버려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이 가르침은 아무것도 붙잡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두려움 없는 상태, 즉 공에 대한 통찰에서 나오는 길은 자유로움과 해탈의 상태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불확실성과 모호함에 맞서 싸우는 것을 확실히 멈출수록 두려움이 더욱 사라집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가 완전한 깨달음, 즉 세상과 온 마음을 다해 열린 자세를 교감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 이를 때까지 인내심 있게 수련하며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공의 개념이 완전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점차 두려움을 모르는 마음과 연결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2026.10.07.
삶은 그대에게 잘해줄 의무가 없다-3rd
페마 초드론 지음
신동숙 옮김
wtima간행
첫댓글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한 하루가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