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할 때 일어나는 일
□ 본문 : 야고보서 5장 17-18절
내일부터 추수감사주일과 부흥회를 위한 21일 특새와 릴레이금식기도가 시작됩니다. 우리 교회는 일 년에 두 번, 추수감사주일과 부흥회를 위해 21일 특새와 릴레이금식기도를 합니다. 이 외에도 고난주간 특새와 성령강림절을 준비하는 특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10월 27일 추수감사주일이 끝나고 11월 2일부터 부흥회가 시작합니다. 그래서 일 년에 두 번 있던 21일 특새와 금식기도가 한 번으로 줄었습니다. 그렇다고 두 배의 기도, 두 배의 금식은 할 수 없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함께 금식하며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은혜의 잔치가 두 번 이어서 열리는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라 믿습니다. 분명 이번 추수감사주일과 부흥회를 통해 갑절의 은혜와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특새와 금식기도를 준비하며 오늘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 한국에서 목회하시는 어느 목사님이 지방회 연합성회에 참석하고 동행일기에 이렇게 나누었습니다. ‘생각보다 참석인원이 적어서 놀랍기도 하지만, 점점 시대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은 아닌가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많이 모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놀랄 정도로 참석인원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시대적인 분위기, 요즘 성도들의 분위기라는 것입니다. 모이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모든 교회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일 수 있는데 모이지를 않습니다. 집에서 온라인으로 얼마든지 예배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가고오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집에서 편하게 예배드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온라인으로 하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게 예배드렸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만큼 온라인으로 참석하는 예배에 익숙해졌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런 분이 없겠지만, 이제는 주일에 놀러가는 차 안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면 주일성수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의 일정을 예배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자신의 일정에 맞춥니다. 글쎄요.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정말 그것이 하나님 중심의 예배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신앙생활의 모습이 결국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신앙생활로 변질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됩니다.
정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분들이 온라인으로라도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예배자의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자기 편리를 위해 편안함을 위해 온라인예배를 드리면서 ‘그래도 나는 주일성수했어. 하나님, 저 오늘 예배드렸어요.’ 라고 한다면 온라인 예배가 그분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좋은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이 있는 것처럼 온라인 예배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드리시는 분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들의 상황과 마음을 아십니다. 교회에 나올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그분들의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자기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가고오는 시간을 생각하고, 거기에 들어가는 돈을 생각하면, 그리고 수고를 생각하면 교회에 나오는 것이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입니다. 낭비입니다. 맞습니다. 낭비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거룩한 낭비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거룩한 낭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낭비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일부터 시작되는 특새에 하나님을 위해 거룩한 낭비한번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모이고 싶어도 모일 수 없을 때가 옵니다. 중국교회가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가정교회는 불법집회라고 해서 모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 목사님이 20분 찬양, 20분 기도, 20분 설교의 한 시간 정도의 예배를 미리 녹화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보냅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주일에 같은 시간에 예배를 드립니다. 함께 모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반드시 두 명이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공안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공원 벤치에 앉아서, 길을 걸으면서 그렇게 예배를 드립니다. 왜 두 명인지 아시지요? 예수님께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18:20)
중국의 가정교회 성도들은 이런 사모함과 정성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성도님들이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예배드리십시오.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성도님들뿐이겠습니까? 오늘 교회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계시다는 분명한 믿음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이 믿음으로 예배드린다면 우리의 몸가짐도 마음가짐도 전혀 다를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예배드리면 반드시 주님을 만납니다.
시대적인 분위기 또 한 가지는 은혜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 대한 사모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대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으면 좋지만 그렇게 시간 내서 수고하면서까지 은혜 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은혜 없이도 살아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좋지요. 기도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성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피곤하게 새벽부터 일어나서 기도할 마음은 없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도 집에서 하면 되고, 새벽에 못하면 하루 중 아무 때나 시간 날 때 기도하면 되고, 시간이 없어서 그것도 못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전히 은혜를 사모하고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기도에 대한 간절함이 점점 약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은혜를 말하고 기도를 강조하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즐기며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없어도 돈이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고, 기도하지 않아도 돈이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으로 보면 이것이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세상 성공이 신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돈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세상 성공이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인데 정작 자신은 그것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은혜가 필요 없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은혜에 대한 갈급함 없이 살아갑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 일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마음 한 구석에는 기도에 대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기도 없이 살아갑니다. 우리가 말하는 믿음과 우리가 말하는 신앙의 지식과 우리의 삶이 일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고, 기도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없을 것 같은 지금의 세상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도록 더욱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17절, 18절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1.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엘리야하면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과 갈멜산에서 대결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왕상18:19) 엘리야가 기도할 때 하늘에서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웠고,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하늘의 문이 열리고 비가 내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열왕기상 18장의 내용입니다.
엘리야는 정말 놀라운 능력을 행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와 우리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다는 말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현대인의성경)이라는 뜻입니다.
엘리야도 좌절했고, 엘리야도 두려워했고, 심지어는 죽고 싶었습니다. 엘리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증거했던 것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와 우리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기도의 차이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기도가 순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다는 말을 새번역성경은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기도하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기도로 850:1의 영적싸움을 하고 싶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850명의 우상숭배자들 앞에서 홀로 기도의 무릎을 꿇습니다. 기도는 순종입니다.
※ 지난주일 오후부터 월요일까지 1박 2일 동안 일본인선교회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금요성령집회 때 요네미츠 집사님이 간증하면서 일본인선교회 수련회를 위한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수련회에 참가하는 사람 가운데 저만 한국인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혹시 저를 은근히 이지메 하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밀려 왔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선교회분들이 얼마나 저를 사랑해주시는지, 두려움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련회의 부담이 하나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회를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항아리기도를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저의 본성이 이것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몸도 피곤하고, 두통이 있어서 약도 먹었습니다. 또 리프레시센터는 왜 이렇게 춥습니까? 저는 추운데 어떤 분은 덥다고 에어컨을 켜자고 하시고 … 그래서 아니다, 리프레시센터는 시원하다, 창문 열어놓고 선풍기 틀면 금방 시원해진다 하면서 에어컨은 틀지 않았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더욱 춥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본성은 간증만 나누고 기도회는 간단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결론을 말하면 그래도 함께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다보니 두통도 사라지고 힘이 났습니다.
저만 피곤하고 힘들었겠습니까? 수련회를 준비하신 분들은 더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팔십이 넘으신 이마이 집사님과 후까가와 성도님은 또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본성은 쉬고 싶습니다. 그런데도 모두가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어떤 분은 ‘내가 이 날을 사모함으로 기다렸습니다, 이번에는 꼭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21일 특새를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내일부터 특새야?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데 새벽부터 나와서 기도해야 해?’ 이런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도 함께 모여 기도합시다. 기도는 본성을 거스르는 순종입니다. 특새에 나올 상황이 아니어도, 아니 특새에 나오고 싶은 마음이 없어도 함께 모여 기도합시다. 기도는 순종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기도의 무릎을 꿇기까지가 힘들어서 그렇지 순종함으로 기도의 무릎을 꿇으면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그래도 특새가 부담이라고 하시는 분들은 괜찮습니다. 걱정되는 분들은 특새 이야기를 듣고 릴레이금식기도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 부담이 없는 분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특새도 금식기도도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이번 특새도 그렇고, 주님 오실 때까지 특새는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혀 부담이 없습니다. 이런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그어놓은 그 선, ‘특새는 나와 상관없어’라고 그어놓은 그 선을 주님께 맡겨보지 않겠습니까? 피곤하고, 너무 바쁘고, 거리가 멀고, 시간이 없고 … 맞습니다.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그 이유까지도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 한번 맡겨보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본성에 끌려가지 말고, 정말 미친척하고 새벽에 달려와서 함께 기도해보지 않겠습니까? 이번 21일 동안 거룩한 낭비 한 번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죽어도 못한다면 토요일만이라도 와서 함께 기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기도는 순종입니다. 그리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2. 간절히 기도한즉
엘리야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의 모습은 열왕기상 18장 42절입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엘리야는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합니다. 한 성경학자는 엘리야의 이런 기도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열망하며 취하는 겸손한 기도 자세의 극치이며, 기도에 완전히 몰두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이 해석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학자의 이런 설명이 없어도 엘리야가 자신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은 것을 보면서 엘리야가 얼마나 겸손하게 기도했는지, 기도하는 엘리야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의 모습은 부르짖는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간절함은 반드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데 꼭 저렇게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하나? 그것도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말이야. 하나님이 귀가 멀었나? 꼭 저렇게 소리치며 기도해야 하나?’ 무릎 꿇는다고 부르짖는다고 다 간절한 기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든지 외식으로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조용히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제사장 엘리가 있는데 소리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입술만 동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치 물이 섭씨 100도가 되면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한나의 마음도 주님을 향해 그렇게 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무지 입술을 다물 수가 없어서 술 취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기도했습니다.
21일 특새와 함께 금식하며 기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간절함입니다. 비록 하루에 한 끼지만 식욕이라는 육신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조차 주님께 내려놓고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금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겸손하게 기도합시다. 엘리야처럼 간절하게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주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주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런 마음이 있어야 간절하게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영의 눈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①영의 눈이 열리면, 그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를 보면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②영의 눈이 열리면, 그래서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것을 보면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③영의 눈이 열리면,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면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④영의 눈이 열리면, 우리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고, 우리가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했어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허무한 인생임을 알면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의 모습은 또 한 가지는 열왕기상 18장 43절입니다.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엘리야는 하나님의 응답의 구름이 떠오르기까지 일곱 번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끝까지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는 때와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때가 다를 수 있습니다. ①채워야 할 기도의 분량이 있기 때문입니다. ②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③다니엘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 21일 동안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적전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아서 포기한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기도하면 할수록 상황이 더욱 힘들어져서 낙심하고 포기한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이번 특새에 그 기도제목을 붙잡고 다시 기도합시다. 이번에는 포기하지 맙시다. 끝까지 기도합시다. 일곱 번까지 기도합시다.
육신의 피곤함과 연약함으로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의 소원조차 사라져서 이런 말씀을 들어도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교회적으로 기간을 정해놓고 드리는 기도에는 특별한 은혜와 응답이 있습니다. 이 특새를 예비하시고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부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 기도할 때 일어나는 일
엘리야가 기도할 때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합과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기도할 때 닫혀야 할 문이 닫힙니다. 이것이 기도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기도로 닫아야 할 문은 무엇입니까? 마귀의 역사입니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과 전쟁 중에 있던 아람 군대가 진을 치려고 하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곳에 군대를 보내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아람 왕은 자신들 중에 첩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합니다. “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왕하6:12)
기도하는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은 아람 군대가 진을 치지 못하도록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아람 군대처럼 마귀는 우리 인생에 진을 치려고 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5:8)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마귀가 진을 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 인생과 가정과 일터에, 교회에 진을 치려고 하는 마귀의 역사를 물리쳐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도둑이 마음대로 들어와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도록 대문을 열어놓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127편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기도 없이 사는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아무리 열심히 집을 세우려고 해도 헛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깨어 있어도 헛됩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시고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로 마귀의 역사를 닫아야 합니다. 기도로 마귀가 진을 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기도할 때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기도할 때 은혜의 문이 열립니다. 기도할 때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비를 내려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은혜도 축복도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비가 내릴 수 있도록 기도로 하늘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은혜의 비가 내리지 않아 거칠고 황폐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평안이 없고, 참된 기쁨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을 기웃거리고, 이 사람 저 사람 기웃거리며 방황합니다.
하늘의 문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문이 닫혀있으면 아무리 애쓰고 수고해도 헛됩니다. 세상을 기웃거리고 사람을 기웃거릴수록 더욱 허무할 뿐입니다. 하늘의 문이 열려야 삽니다. 하늘의 문이 열려 은혜의 단비가 내려야 삽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이것이 기도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엘리야 한 사람의 기도로 하늘의 문이 열리자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구원받았습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을 살렸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엘리야가 있었던 것이 이스라엘의 복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이렇게 놀랍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이렇게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자의 낙심이 있습니다. ‘나 혼자 기도한다고 되나?’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엘리야를 통해 나 혼자라도 간절히 기도하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 한 사람의 기도가 하늘의 문을 열었다면 그래서 하늘이 비를 주었다면, 우리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능히 역사하십니다. 한 사람의 기도로 하늘의 문이 열려 비가 내리면 우리 가정이 삽니다. 가정이 열매를 맺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로 하늘의 문이 열려 비가 내리면 우리 교회가 삽니다. 한 사람의 기도로 하늘의 문이 열려 비가 내리면 치바가 살고 일본이 살고 열방이 삽니다. 놀라운 구원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기도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이와 같이 능력이 있다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초대교회처럼 땅이 진동할 것입니다.(행4:31)
내일부터 21일 특새와 금식기도가 시작됩니다. 기도는 순종입니다. 기도할 형편이 아니고, 기도할 마음도 없고, 기도의 자리에 나오는 것이 싫어도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순종으로 기도의 무릎을 꿇으면 기도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기도하면 마귀의 역사가 닫힙니다. 기도하면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비가 내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이번 특새를 통해 일어날 것입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