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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0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Amen, I say to you, it will be hard for one who is rich
베르나르도 성인은 1190년 프랑스 디종의 근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시토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뒤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아빠스(대수도원장)가 되었다.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자신의 생활에서 모범을 보이며 수도자들을 덕행의 길로 이끌었다. 또한 그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열을 막고자 유럽 각지를 다니며 설교하였고, 신학과 영성 생활에 관한 저서도 많이 남겼다. 1153년에 선종한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1174년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830년 비오 8세 교황은 성인을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말씀의 초대
기드온은 미디안족의 눈을 피해 곡식을 감추고 있었다. 그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판관으로 불림 받지만 계속 망설인다. 주님의 천사는 그를 격려하며 용기를 심어 준다. 기드온은 증표를 요구하다가 마침내 주님의 말씀을 따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신다. 그만큼 어렵다는 말씀이다. 재물이 많다고 모두 부자는 아니다. 재물의 ‘노예가 된 사람’이 복음에서 말하는 부자다. 재물의 위력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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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재물이 많다고 모두 부자는 아닙니다. 진정한 부자는 만족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재물에 감사할 줄 모르면 부자 대열에 들 수 없습니다. 재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삶의 ‘첫자리’에 재물을 두고 늘 따라다닙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부자입니다. 낙타의 ‘바늘구멍 통과’에 비유되었던 부자입니다.
미국에 윌리엄 허스트라는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목표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골동품을 수집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진귀한 골동품이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든지 달려가서 많은 돈을 주고 구입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구입한 골동품은 온 집에 가득 쌓였지요.
우연히 인터넷에서 유럽 왕실에서 사용하던 도자기가 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기사를 보는 순간 ‘저것을 꼭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곧바로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러 나라를 다니며 그 골동품인 도자기를 찾았지요. 그러나 몇 달 동안을 헤매었어도 그 도자기의 행방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도자기가 어떤 미국인에게 팔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도자기를 구입한 미국인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구입했는지 알아보겠다고 그 미국인의 이름을 물어보았고, 그 미국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미국인의 이름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골동품을 가지고 있다 보니 자기가 갖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골동품을 사서 쌓아 놓기만 했지 그 하나하나의 가치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 은총으로 인해 우리들은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기 보다는 남들보다 가지고 있지 못함에 한탄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에 갇혀 있습니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어느 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집이 없어서 어머니와 삼남매가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 정말로 안타까웠습니다. 저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너무 힘들지만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 준 힘은 삼남매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고 이 삼남매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남들이 보기에 형편없어 보여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시지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채우려는 마음 때문에 만족하며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끊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 순간 주님의 작은 사랑에도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희망은 늘 여기 있으며 항상 살아 있지만, 열정적으로 돌봐야만 불을 지펴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수전 쿠퍼).
남이 없는 것 -윤원진 신부-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만인의 연인 -전삼용신부-
한 번은 한 중견 수녀님이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대부분은 함께 사는 동료 수녀님들과의 갈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녀님은 이런 힘듦은 예전에 비교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수녀님께서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고통이 무엇이었나 궁금해 졌습니다. 그 수녀님은 바로 ‘사랑’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신부님이 당신에게 빠져서, 그 신부님을 떼어내느라 매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남자를 한 번도 사랑해 보지 않았던 그 수녀님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신부님을 계속 밀쳐냈고 결국 지금은 당신의 노력으로 그 신부님과 연락도 안 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수녀님 입장에서는 매우 바람직하게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마음이 약간 씁쓸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욕심 많은 새를 잡는 방법입니다. 맛이 짠 먹이와 충분한 물을 함께 놓아두면 됩니다. 그 새들은 먹이를 먹고 물을 먹고를 반복하다가 자신들도 모르게 배가 불러 날지를 못하게 됩니다. 사냥꾼이 오면 짧은 다리로 퍼덕이며 도망을 가지만 몸이 무거워 손쉽게 잡힙니다. 이렇게 무엇에 집착하는 사람 역시 몸이 무거워져 하느님께로 날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오르기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가진 모든 것을 먼저 버려야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무소유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도, “버린 것은 무엇이나 100배로 받게 된다.”는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약속’이란 영화에서 보면 박신양이 술이 취하여 노숙자의 가방을 빼앗으려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노숙자는 자신의 전 재산인 가방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지만 결국 빼앗기고 맙니다. 가방을 털어보니 신문지와 옷 몇 개만 들어있습니다. 주인공은 웃으며 가방과 나머지 것들을 그 앞에서 버리고 대신 행려자에게 수표를 한 장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더 많이 주시기 위하여 우리가 집착하는 작은 것들을 빼앗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잡고 움켜쥔 손이 아니라 자유롭게 펼쳐진 손이 먼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버리는 것은 무엇이나 100배로 채워주신다면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버렸는지 안 버렸는지를 내가 받게 되는 것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버려본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저는 부모님을 버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맺어주신 수많은 부모님들이 생겼고 집을 버렸기 때문에 가톨릭 시설 어디에서나 잘 수 있게 되었으며 형제들을 버렸기에 수많은 믿음의 형제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에겐 애인도 100명이 있어야 당연할 것입니다. 만약 수녀님이 한 남자도 사랑하고 있지 못하다면 아직은 애인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수녀님의 참 애인은 그리스도이시고 그 분을 위해서 애인을 버렸다면 누구를 사랑하게 되더라도 그리스도와 비교되는 애인의 자리엔 올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누구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과 성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지 사랑은 죄가 아닙니다. 정말 애인을 버리고 성소를 택한 사람이라면 사랑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애인을 버린 사람에겐 그 사람이 애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여자와 혼인한 사람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될 때 혼인이 위태롭게 된다면 그 남자는 처음부터 부인을 위해 모든 여자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서 다른 사람이 좋아질 때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흔들린다면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성의 사랑을 포기한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사제나 수도자들은 애인을 버렸다면 두려움 없이 만인의 연인이 되어야합니다. 누가 봐도 순결하고 영적인 만인의 연인이 되어야 그리스도를 위하여 애인까지도 버린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영적인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의 일치를 위해서 한 개인과 혼인하지 않고 교회의 신랑이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위해 한 사람과의 혼인을 버리고 교회와 혼인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낙타도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 안소근 수녀-
어제 복음 묵상 마지막 구절이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한테도 그것은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예수님은 반전을 가져오십니다. 곧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밥 두 그릇 수사(修士)> -양승국신부-
한 수도원에 밥만 많이 먹던(아무리 아파도,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두 그릇씩, 그것도 고봉으로) 수사가 한 명 있었습니다. 많이 먹다보니 몸도 나게 되었고, 몸이 둔해지다보니 작업시간에 별로 도움도 안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기도시간에 졸기는 또 얼마나 조는지... 이를 늘 눈여겨보던 다른 한 수사는 매끼니 꼬박꼬박 밥 두 그릇씩을 게눈 감추듯 하는 그 수사가 무척 못마땅했습니다. 자신은 한번도 밥을 한 그릇 이상 먹어본 적이 없었을 뿐더러, 언제나 철저한 극기와 절제의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밥만 축내는 형제가 어찌나 미워 보였던지...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둘 다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고행에 열심이었던 "밥 한 그릇 수사"는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천국에 들어가게 된 "밥 한 그릇 수사"는 여유 있게 천국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었습니다. 매일 밥만 축내던 그 수사, "지옥 아니면 적어도 연옥쯤 있으려니"했던 그 수사가 자기와 똑같이 천국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밥 한 그릇 수사"는 즉시 베드로 사도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따졌지요. "이거 해도 너무한 것 아닙니까? 하느님은 정의의 하느님, 공평하신 하느님이라고 늘 강조하셨는데, 완전히 뻥이었네요." 묵묵히 듣고만 있던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자네, 혹시 단 한번이라도 저 친구 마음 깊숙이 들어가 본적이 있는가? 사실 저 친구, 적당량은 밥 두 그릇이 아니라 세 그릇이었다네. 원래 세 그릇을 먹어야 했었는데, 저 친구 그걸 참느라고 한평생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네는 모를걸세. 그렇다면 결과는 당연히 천국이지." 우스개 소리 같지만 하느님의 시각과 인간의 관점, 하느님의 사고방식과 인간의 사고방식이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잘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상상이나 인간적인 사고구조를 완전히 초월하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뵙게 되는 날,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펼쳐질 상황은 너무도 뜻밖의 것이어서 기절초풍할 정도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적인 계산방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 인간의 사고구조를 훨씬 능가하는 특별한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꼴찌였다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말 가슴 철렁한 말씀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사는 사람들, 교회 가까이 사는 사람들, 저희 같은 수도자들 성직자들, 봉헌생활자들, 봉사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섬뜩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제나 수도자들이라고 해서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겉이 그럴 듯 해 보이는 사람들, 말 잘하는 사람들, 교회 가까이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주어지는 선물 역시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겉은 비참해 보이지만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 평생 가난과 병고, 갖은 장애로 시달리던 사람들, 철저한 소외와 좌절 속에서 끝없는 고통의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 그들은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십자가의 길을 충분히 소화해낸 사람들이며, 끝까지 견딘 사람들이니 하느님 나라 예약은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그러니 지금 말못할 만큼 큰 슬픔이나 뼛속까지 사무치는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기뻐하십시오.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실 그 영원한 안식과 다정한 위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요즘 자주 빼먹어서 죄송합니다. 한 몇 일 더 빼먹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수도회 국제회의 참석 차 호주엘 좀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여름의 끝자락, 건강히 잘 보내시고 주님 안에 늘 행복하십시오. 9월초에나 다시 뵙겠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임문철 신부- 그 엄마는 아이가 잘 안 먹는다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은근히 부아가 났습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었는데….’ 그런데 더 못 봐줄 광경은 그 아이의 눈동자였습니다. 자기는 먹기 싫은데, 엄마가 하도 먹으라고 사정하니까 엄마를 위해서 먹어준다는 투였습니다. “엄마, 나 이거 다 먹으면 뭐 사줄래요?”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위해서”라는 말을 달고 다닙니다. 주일미사도, 봉사도, 기도도, 성경공부도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일미사 한다고 하느님이 무슨 덕을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굶기라도 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을 위해’ 신부가 된 저는 사실 하느님을 만나면, “제가 아무리 잘못 살았어도 그래도 이것만은 갚아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한 묶음의 청구서를 내밀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청구서는 분명 완불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불러주신 그 은총은 제가 어떻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이름 -한명수 - 사범대학을 다니던 20대에 나는 가톨릭 학교에서 근무하길 바랐다. 왜냐하면 가톨릭 학교는 내가 기대하는 ‘좋은 학교’일 거라고 생각했고,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교회에서 배운 바를 잘 실천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성이 잘된 선배들한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분홍빛 그리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가톨릭 학교에 발령을 받고 나서 내 생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공한 기업인이 마더 데레사보다 더 많은 사람을 -임영숙- 성공한 기업인이 마더 데레사보다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부자들은 자선행위에도 앞장섭니다. 미국의 최고 갑부 빌 게이츠는 자선금 기부에서도 해마다 1등을 기록합니다. 한국에서도 최고의 재벌이 사회 공헌에서도 최고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하늘나라를 살 수는 없겠지요. 극히 한정된 경험이지만 부자들을 만날 때 불편했던 것은 그들이 남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돈을 보고 접근한 탓이겠지요. 그러나 돈을 지키려다가 결국 재물을 섬기게 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재물이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니까요. 재물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집착이 문제입니다.
-최종수 신부-
신앙은 가난과 정비례하고 부와는 반비례하는 게 아닐까요?
- 조명연 신부-
오늘은 제가 여러분에게 생활의 지혜 몇 가지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물론 제가 스스로 체득한 것은 아니고요, 어떤 책을 통해서 배우게 된 것이랍니다. - 이재희신부- 나는 재산이 얼마이고, 돈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양승국신부-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부자(富者)라고 하는지는 사람들마다 잣대가 다르겠습니다만, 오늘 복음을 읽는 어떤 사람들은 속이 좀 상하기도 하고, 그럼 어떻게 처신해야하나 고민되기도 할 것입니다. 특히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분들, 사는 게 그런대로 괜찮은 분들, 나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분들...‘뭐 이런 복음이 다 있나?’ 하고 의구심을 가질 만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겠다는 말씀을 한두 번도 아니고 거듭 되풀이해서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들어가기 어려운 정도도 ‘어느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복음을 읽는 어떤 분들은 속이 많이 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재산이 어떤 재산인데? 내 피와 땀이 어린 재산이 아닌가? 남들이 빈둥거리는 시간에, 남들이 세상모르고 잠자는 시간에도 두 눈 부릅뜨고, 코피 터지도록 일해서 겨우 겨우 모은 돈인데, 그래서 이제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었는데, 그렇게 노력해서 넣게 된 재산인데, 그 재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고? 말도 않되!” 맞는 말씀입니다. 남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들고, 부정한 방법으로 축척한 재산을 소유한 부자들과 성실하고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해서 재산을 모은 부자들은 당연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강조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사람들은 재산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보면 있다가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재산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재산에 목숨 거는 사람들입니다. 돈이 최고라고 여기는 사람, 그래서 없이 사는 분들 경멸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교만해져서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기에 쉽게 남을 업신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를 생각하기에 전지전능한 구세주라도 된 것인 양,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속에 별로 든 것도 없으면서 만물박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보고 있노라면 눈꼴사나워 참을 수가 없습니다. 능력도 안 되고 자질이 없는 사람이 ‘한 자리’에 앉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갑자기 다가온 횡재 앞에 잠시 제 정신을 잃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부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합니다. 재산이란 때로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재산이 많다 하더라고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린 부자들도 있습니다.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린 사람들이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재산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명령과 섭리가 요구하는 대로 자신이 지닌 재산을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는 부자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제대로 되먹지 못한 사람, 악인(惡人)이 재산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악인의 재산은 죽음으로 직행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제대로 된 사람, 선인(善人)이 재산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다시 또 없습니다. 선인이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본인에게는 선행과 공덕을 쌓는 도구가 되며, 하느님께서는 기쁨이 됩니다. 이웃들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진정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자발적 청빈’은 완덕으로 가는 가장 훌륭한 길입니다. 자발적 청빈은 복음의 길이며,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입니다. 재산과는 담을 쌓고 살아가는 저희 수도자들, 그리고 ‘재산의 축척’, ‘부자’ 이런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오늘 복음은 약간 다르게 해석할 필요도 있겠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지나치게 집착하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게 됩니다. 어느 정도라야 하는데,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 결과가 ‘마마보이’입니다. 그 결과가 부모 고생한 것은 조금도 안중에 없는 ‘싸가지 없는’ 자식입니다. 그 부모들은 이 세상에서 지옥을 체험합니다. 자리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연연해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 결과는 ‘대안이 없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착각하는 장기집권자, 독재자입니다. 건강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결과는 ‘건강염려증’입니다. ‘병원순례증’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지나침은 덜함만 못합니다. 우리가 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적당하게, 무리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집착에서 떠날 때, 우리는 ‘작은 천국의 체험’을 맛볼 수 있습니다. - 김웅태 신부- 구원받기에 필요한 예수님의 그러한 답변을 들었을 때, 그 청년은 구원의 말씀보다는 자신이 가진 재산에 더 집착했기 때문에, 슬픈 표정으로 예수님을 등지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씀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겪은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경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낙타" 라고 하는 것은, 유다인들이 알고 있는 동물 중에서 가장 큰 동물이었으며, "바늘귀" 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그들의 생활개념 속에는, 도시에는 성곽이 있고 성문이 있는데, 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길이란, 이 작고 낮은 문뿐이었습니다. 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인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사람도 겨우 지나 다닐 수 있는 이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자에게는 어떠한 험이 있길래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1) 재산의 부요함은 잘못된 자만심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재산을 부요하게 가진 자는, 세상의 무엇이나 다 값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나 원하는 것을 넉넉히 할 수 있고, 또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돈이 그것을 해결해 준다고 여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고, 돈만 주면 슬픈 일도 물리칠 수 있음으로, 하느님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고, 인생의 모든 문제도 재산이 모두 해결해 준다고까지 생각하고 믿는데에 잘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2) 마태 6, 21에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신 말씀과 같이, 재산의 부요함은 그 사람을 이 세상 것에 집착시키고, 하느님을 외면하는 잘못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3) 사람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더 가지고 싶어하게 되고, 재물의 부요함은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드는데 그 잘못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은 한번 재산으로 안락과 사치를 누리게 되면,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두려워하게 되고, 그것을 지키기에 긴장과 근심을 하게 됩니다. 즉, 재산을 생활의 평안과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다하여, 이것을 더욱더 끌어 모으려는 생활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다른 곳에서 보면,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전연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루가 19, 9 .. 자케오는 에리코에게 제일가는 부자였는데도, 예수께서는 그를 천국으로 부르셨고, 마태 25, 57 ... 아리마태오 요셉도 부자였기에, 예수님의 시체를 묻을 무덤을 준비할 수 있었으며, 요한 19, 39 ... 니꼬데모도 부자였기 때문에 예수의 시신을 바를 향액을 가져다 바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이 미덕도 아니며, 부요함이 그 자체로 죄악도 아닙니다. 또한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크게나 적게나 자신이 가진 재산에 대해서 그것을 지키기에 어떠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재물도, 그 이전에는 다른 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또한 언젠가는 다른이의 손으로 넘어갈 날 이 있을 것이며, "주인이 바뀌지 않는 어떠한 보화도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 우리가 부자입니다. -강종석 신부-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말씀이 오늘 복음입니다. 자칫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재물이 많은 부자는 숨도 못 쉬게 만드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을 거부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다 부자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자의 상징적 의미를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부자의 마음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를 쉽게 뿌리치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돈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니고 건강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입니다. 그러나 그 건강, 명예, 지식, 돈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즉 선을 가지고서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이 그것을 하느님보다 더 가치있고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갈 때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물질적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남들보다 풍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외제차를 타는 사람, 아파트 평수가 아주 넓은 사람, 남부럽지 않은 직장과 지식과 건강이 좋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연히 남들보다 많은 노력을 해서 이룩한 사람들도 많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부자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께 나아가는 데에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은 독이 되고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기에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우리의 능력이란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주님께 믿음으로 매달려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세상 것에 코를 박고 매일 수밖에 없는 존재, 철저하게 지상적인 인간,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과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기쁘고 이 세상의 어떤 행복보다도 값진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남이 알아주지도 않고 또 부족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닌 불쌍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초대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됩니다. 잘 나가던 사람들이 어느 날 벽에 부딪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깨달음을 얻고 주님의 초대에 응합니다. 어찌 보면 넉넉해서 주님의 필요성을 깨닫는 것보다는 모자라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힘든 상황 때문에 주님을 찾게되고 주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을 따르는 데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방해가 되지 않고 순조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많이 가지든 적게 가지든 하느님보다 세상 것에 빠지게 되면 이미 부자 반열에 들기 시작한다는 표지입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조건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인, 즉 자기를 자유로이 통제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오히려 자신의 조건에 끌려가는 사람은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노예의 비참함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드는 것을 거부하게 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이처럼 자칫 영적으로 위기에 빠지고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부자가 될 것을 욕심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어려워 주님께 의지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못 견딜 정도가 되는 것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행복한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 주님께 교만할 정도가 되기보다는 가진 것이 없어 주님께 겸손한 것이 백 번 낫습니다. 죄가 없어 주님 앞에 당당한 것보다는 죄 때문에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능력이 많아 주님 없이 홀로 서있는 것보다 무능력해 주님께 철저히 의존하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주님께로 들어가는 문은 마치 바늘구멍처럼 가늘어서 교만과 자기 자신감으로 크게 부풀려져버린 정신의 소유자는 들어가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납작 엎드린 겸손한 자들이 너무나 쉽게 가느다란 그 관문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아멘! - 홍성만 신부-
나의 힘을 다하는, 바로 거기에서 구원이 시작됩니다
부자와 하늘나라 -강영구신부- 마산교구
-최종수 신부 - 또한 신앙이 약해지면 교회가 웅장해지고 화려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 성당 앞에서 뒤에 있는 사람을 보면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작게 보인다고 합니다. 면죄부를 판매해서 건축한 베드로 대성전은 부패했던 중세에 건립되었습니다. 물이 가득한 컵에는 더 이상 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컵 스스로가 다른 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빈 컵은 스스로 다른 물을 받아들입니다. 주는 대로 다 받아들입니다. 하느님도 신앙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부자는 더 이상 받아들일 공간이 없는, 물이 가득 차버린 컵이 아닐까요? 한번 더 물어보고 되새겨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부자에게는 하느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부자의 마음은 돈과 재물, 권세와 명예로 가득 차서 그런 건 아닐까요? 그로 인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예수님의 정의와 평화가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건 아닐까요? 피리도 속이 텅 비어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비운 자리만큼 그 자리에 하느님이 들어오실 줄 믿습니다.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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